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2/05/17 21:33:31
Name Vivims
Subject [일반] 내가 집을 짓는다면
내가 집을 짓는다면 바다보다는 강과 산을 가까이 두고 싶다. 파도와 바람이 나를 향해 들이치는 바다가 아니라 물결이 내게서 저 먼 곳으로 흐르는 강 곁에 짓고 싶다. 그렇게 강으로 무릎을 덮고 산 그늘에 등을 기댈 수 있는 자리에 따뜻하게 웅크린 모양으로 두고 싶다. 낮에는 마치 한 그루 나무인 것처럼 작은 것들이 부산하게 꼼지락대고, 밤에는 마치 별인 것처럼 따스한 빛이 어둠 아래 누운 누군가의 잠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만 반짝이도록 숨죽인 채로 가만히 존재하고 싶다.

이 집의 마당에는 친구들과 교복 차림으로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는 길, 엄마한테 엄청 혼나겠다고 말하며 웃고 떠들던 날의 요란한 입김을 두고 싶다. 그리고 운동화가 다 젖었는데도 오히려 가벼웠던 발걸음은 마당 입구에 두고, 잠자리에서 다시 바스락거릴 조약돌 같은 농담을 모아 마당을 가로지르는 길을 만들고 싶다. 마당의 한 구석은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의 책상처럼 이제는 턱없이 작아져버린 것들로 장식하고 싶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아지다 못해 시간이 완전히 가져가 버린 것의 그림자를 두고 싶다. 내가 아주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보았던 재래식 물펌프처럼, 마중물을 넣고 꾹꾹 누르면 맑은 물이 쏟아지듯, 내가 낡고 오래된 것만 보면 할머니의 냄새와 찬찬한 걸음걸이를 떠올리듯 눈을 맞추면 오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들을 두고 싶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벽면에는 추억하는 모든 것을 글로 끼적대고야 마는 내 모난 습관을 액자로 걸어두고 싶다. 액자 안에는 갈수록 선명해지는 한 문장의 기억들, 그러니까 저녁노을이 어서 가보라고 등을 떠밀어 달려온 둑길 아래 이모 품에 안겨있던 갓난 내 동생의 모습이나, 고등학교 졸업 즈음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엉엉 울었던 친구들과의 짠한 술자리나, 이십 대가 끝날 무렵 맥주 한 캔과 밤을 보내던 그네에 앉아 모래 위에 적던 글이나, 남들보다 조금 늦게 퇴근한 밤 버스 안에서 이제 겨우 사회인이 된 것 같았던 무거운 설렘 같은 것들을 담고 싶다.

거실을 지나 부엌에는 요리하는 어머니의 뒷모습과 날 부르는 목소리 그리고 밥 짓는 온기를 채우고 싶다. 크기가 약간 모자란 식탁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앉아있고, 어머니가 손사래를 치고 말려도 나는 식탁의 모서리 가장 작고 불편한 의자를 당겨 앉고 싶다. 그리고는 날씨가 추워져 집안으로 들여놓아야 하는 화분, 낡아서 덜 열리는 창문이나 현관의 깜박이는 전구 따위의 사소한 걱정거리와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번거로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조용히 아버지의 몫이었던 것들까지 해내고 싶다.

부엌을 지나 뒷마당으로 향하는 작은 문은 누구나 쉽게 열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그리고 이곳으로 내가 애써 붙잡고 있었던 과거의 기회들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도록 문 여닫는 소리를 눈감아주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문 여는 기척이 들리면 나는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회가 내게 올 수 있도록 도왔던 모든 이들을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닫힌 문을 향해 포기나 미련, 아쉬움, 과분함 따위의 예쁘지 않은 이름으로 존재했던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다.

침실에는 발아래로 창을 내고 침대 하나만 두고 싶다. 침대 위에는 가장 소중한 존재를 곁에 두고 함께 창밖으로 흐르는 시간의 비밀에 대해 털어놓고 싶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던 밤은 매번 속고야 마는 거짓말임을, 우리가 달라지는 계절을 바라보는 동안 계절 역시 우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지난 시간은 우리 뒤로 흘러가지 않고 사실 우리 옆에서 같이 걷고 있음을 말하고, 앞으로도 이 공공연한 비밀에 절대 실망하지 않겠다는 약속만큼은 시간에게 들키지 않게 이불 아래 숨겨두고 싶다.

마지막으로 거실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모든 것을 대강 두고 아주 천천히 정리하고 싶다. 집의 가장 넓은 영역을 꾸미는 일이 아주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파를 옮기고, 커튼을 갈아 끼우고, 러그를 펼치고 접는 일이 때로 고통스럽더라도 자꾸만 더 나은 생각이 떠오르면 좋겠다. 그러다 누군가 집으로 찾아오면 얼른 앉을자리를 만들어주고, 정말 즐거운 웃음을 띠며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라고 말하고 싶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콩탕망탕
22/05/18 08:43
수정 아이콘
귀한 집에 초대받아 놀러가서 찬찬히 둘러본 느낌입니다.
문체가 예사롭지 않아서 지난 글을 봤더니..
4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요?
지난 얘기도, 이번 얘기도 모두 좋습니다.
22/05/18 19:04
수정 아이콘
예전 글에도 전부 댓글 달아주셨네요. 덕분에 진심으로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등어자반
22/05/18 09:18
수정 아이콘
피천득 풍의 글이로군요. 잘 읽었습니다.
22/05/18 19:04
수정 아이콘
잘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22/05/19 00:48
수정 아이콘
집짓고 싶어요....
22/05/19 01:16
수정 아이콘
크크 저두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6729 [정치] 대통령실이 mbc 에 보낸 공문 양식의 이상한점 [62] kurt15365 22/09/29 15365 0
96726 [정치] 정부 위원회 줄여 허리띠 졸라맨다더니… 38곳 폐지해 만든 200억, 신설 2곳에 배정 [42] 대법관13575 22/09/29 13575 0
96722 [정치] '단군 이래 최대 이해충돌' 보도 한겨레 소송한 박덕흠 최종 패소 [21] 지구돌기16976 22/09/28 16976 0
96676 [정치] 대만에 아베 동상…국장서 대만 대표 '지명헌화' 검토 [32] 나디아 연대기14727 22/09/25 14727 0
96620 [정치] [단독] ‘공모 혐의’ 김건희 빠져…검찰 “허위해명 수사 사유 없어” [80] Crochen23212 22/09/20 23212 0
96588 [일반] 점점 미드속 마약밀수와 이야기들이 현실이 되어가는중 [70] League of Legend18238 22/09/17 18238 3
96578 [정치] [단독] 대통령실 영빈관 신축한다..예산 878억 원 책정 [550] Crochen33638 22/09/15 33638 0
96406 [정치] 공기업 자산·정부 땅 판다는데..누구 좋으라고? [79] StayAway18445 22/08/21 18445 0
96385 [일반] 정권의 성향과 공무원 선발 - 일제 패망 전후의 고등문관시험 시험문제 [19] comet218012 22/08/18 8012 19
96383 [정치] 어머 !! 새 정부, 알고 보니 100일간 일 꽤 하셨네~~ [272] 이순23952 22/08/18 23952 0
96349 [일반] [역사] 1936년 일제 고등문관시험 행정/사법/외교 기출문제 [14] comet2110367 22/08/15 10367 13
96347 [일반] [판타지] 행복한 대한민국 [51] Amiel11383 22/08/15 11383 3
96284 [일반] T-50/FA-50 이야기 5편 - (개발사4) 배신자 [12] 가라한7260 22/08/09 7260 30
96236 [일반] 의사의 커리어 패스와 기피과 문제 [296] 붉은벽돌17914 22/08/06 17914 25
96234 [정치] 이준석 파동과 보수진영의 세대교체 [54] 이그나티우스14542 22/08/06 14542 0
96209 [정치] 중도층의 현정부 우려점 [38] 가나다11169 22/08/04 11169 0
96182 [일반] 뇌출혈 발생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수술 의사 없어 전원갔다 사망(본문 내용 추가) [155] 자바칩프라푸치노18496 22/08/01 18496 5
96090 [일반] [역사] 일제 치하 도쿄제대 조선인 유학생 일람 [59] comet2122065 22/07/24 22065 76
95905 [일반] 슈카월드에서 본 충격적인 미국총기관련 내용들... [151] 마르키아르19101 22/06/29 19101 9
95896 [일반] 누리호 성공 이후... 항우연 연구직의 푸념 [152] 유정16275 22/06/28 16275 118
95887 [일반] 공교육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맞벌이 가정의 교육적 기능이 무너진 것 [111] nada8212795 22/06/28 12795 43
95836 [일반] [장르론] 우리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10] meson4794 22/06/19 4794 2
95729 [일반] 결혼정보사 상담 후기 [41] 마제스티15881 22/05/31 15881 2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