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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으로 깎아지른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언제나 불가능을 극복하며 발전해 왔다. 그러한 도전은 아무런 보답이 주어지지 않을 때조차도 자주 반복되었다. 하물며 어려움을 극복한 대가가 전 세계에서 비견할 자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금은보화라면, 제아무리 난도 높은 일이라 해도 도전하는 자가 없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이 일은 이전에도 누군가가 해냈던 일이기도 했다. 물론 그 자는 온갖 마법의 도움을 받았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점은 지금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도적도 마찬가지였다.
달그락.
돌 하나가 절벽에서 굴러 내리자 도적은 어깨를 움츠렸다. 몸을 지탱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돌에다 발을 올려놓은 순간 돌이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아찔한 일이 벌써 세 번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적이 돌과 함께 추락하지 않고 여전히 벼랑이 매달려 있는 건 신고 있는 부츠 덕분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신발을 엘프의 부츠라고 불렀고, 좀 더 식견 있는 자들은 고대의 룬 문자로 적힌 이름을 혀가 꼬이는 것만 같은 발음으로 읽어내곤 했다.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중요한 건 신발에 깃들어 있는 마법적 힘이었다. 그 신발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이 발을 땅에 디딜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설령 그 땅이 직각으로 세워진 절벽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엘프의 부츠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까지 구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양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한,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해 추락하는 불상사만은 막아 주었다. 그렇기에 도적은 벌써 세 차례나 죽었다 살아난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일이 또 한 번 반복되지는 않기를 바라며 도적은 조심스럽게 왼손을 뻗쳐 잡을 곳을 찾았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후, 도적은 마침내 절벽 위에 도달했다. 온몸에서 긴장감이 빠져나가면서 극도의 피로감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하지만 도적은 그저 잠시 헐떡이는 것으로 휴식을 대신한 후 다시 일어섰다. 시간을 허투루 보낼 때가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주인이 없었지만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몰랐다. 그리고 도적은 이곳의 주인과 맞설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도적은 그저 자신의 직업에 어울리는 행동만을 원했다. 최대한 빨리 물건을 챙겨서 최대한 빨리 사라지는 것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가며 도적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입을 쩍 하니 벌렸다.
예상 밖이었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금은보화가 있는지를 추측하기 위해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했지만, 실제 현실은 그 상상력조차 까마득하게 초월해 있었다. 일설로 형용하기조차 어려운 그 방대한 재보 앞에서 도적은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건드리면 안 되는도다.”
너무나 놀랐던 나머지, 그게 사람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는 대략 숨을 세 번 내쉴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후 도적은 그야말로 번개처럼 옆으로 몸을 날렸다. 인식하기조차 힘든 짧은 시간 사이에 양손에는 이미 단검이 쥐여져 있었다.
“누구냐!”
도적이 낮게 외쳤다. 목소리의 주인이 다소 어색하게 대답했다.
“타인의 거주지에 먼저 침입한 자는 그대가 아니던가? 그러니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밝히는 것이 도리일지니.”
도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잔뜩 움츠렸다가 온힘을 다해 앞으로 뛰어올랐다. 엘프의 부츠가 다리에서 비롯된 탄력을 온전히 도적의 몸에 전달했고, 마법의 힘을 받은 도적의 몸이 마치 활에서 쏘아진 화살처럼 전방으로 날았다. 도적은 양손의 단검을 힘껏 휘둘렀다.
“괜찮아요?”
어두컴컴한 시야가 밝아왔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옇던 머리가 조금씩 맑아졌다. 도적은 뒤늦게 자신이 바닥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일어나려 했지만 단지 생각뿐이었다. 몸은 그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지가 물먹은 이불처럼 늘어져 있었다. 도적은 온몸의 힘을 그러모아 간신히 고개를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렸다.
열 살 가량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도적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이는 반복해서 물었다. 옆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야 괜찮겠지. 살아 있으니까.”
시선을 돌린 곳에 서 있는 자는 키가 크고 태도가 당당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 옆에 선 남자는 그보다 몇 살쯤 많아서 대략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는 나이쯤이었는데, 나름대로 체격은 다부졌지만 어쩐지 이유 모르게 잔뜩 주눅이 든 표정이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도적은 그가 바로 기절하기 전에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즉시 깨달았다. 그 특이하게 고풍스러운 말투의 주인이 이 세상에 두 사람이나 존재할 리는 없었다.
“내가 다소 과하게 힘을 쓴 모양이로다.”
남자는 미안하다는 듯 한손을 내저어 보였다.
“사과하겠노라. 자고로 용사란 약한 자를 괴롭히면 아니 된다고 하였건만.......”
“약한 자는, 개뿔.”
젊은 여자가 끼어들었다.
“남의 집에 물건 훔치러 온 놈이 무슨 약자야? 살려둔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지.”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라도 인명은 소중할지니.”
자칭 용사가 짐짓 젠체하며 말했다.
“인간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나니, 고로 현자들은 삶의 박탈은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였도다.”
“아, 됐다고.”
여자가 짜증을 내는 순간 자칭 용사는 목을 움츠렸다. 마치 부모에게 혼나는 아이 같다고, 그 와중에도 도적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태평스러운 말을 늘어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자가 도적을 노려보면서 팔짱을 끼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여기는 뭐 하러 온 거야?”
도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제멋대로 입이 열렸다. 도적은 당황했고, 그때서야 여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마력은 도적의 몸을 휘감고 돌면서 술자의 의도를 강제했다.
도적도 나름대로 근성이 있는 축에 들었다. 예전에는 사흘 동안이나 고문을 받으면서도 비명 반 마디조차 내뱉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도적은 자신의 의지가 흔적조차 없이 소멸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광대한 바다에 한 방울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무한에 가까운 거대한 마력 앞에서 한낱 인간의 의지 따위는 무존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적이 대답했다.
“드래곤의 둥지에서 보물을 훔치러 왔다.”
동시에 도적은 깨달았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여자야말로 이곳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비록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우월하고 강대한 존재라는 것을. 동시에 그 곁에 선 자칭 용사의 정체도 알 수 있었다. 다소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몰골 때문에 한눈에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드래곤의 둥지에 있을 수 있음이 용납된 인간이라면 그의 정체는 당연한 것이었다. 드래곤나이트. 고래로부터의 맹약에 따라 드래곤과 이어진 존재. 인간으로서 이 절벽을 가장 처음으로 올라선 자. 인류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강한 이.
드래곤이 픽 웃었다.
“그러니까 도둑이라 이거지? 그럴 줄 알았어.”
드래곤의 눈에는 뜻밖에도 흥미롭다는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드래곤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도적의 가슴 속에서 조심스럽게 피어올랐다.
“그래, 뭐 눈독이라도 들인 물건이 있었어? 한 번 들어보고 싶은데. 말하기에 따라서는 뭐 한두 개쯤은 선물로 줄 수도 있어. 그럴 마음이 든다면 말이지만.”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도적이 대답했다.
“태초 이래로 존재한 적이 없었지만 몇 해 전부터 존재하게 된 것, 이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희귀하고도 가치 높은 물건. 바로 아다만타이트로 만든 드래곤의 조각상이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공기가 차갑게 얼었다. 마치 빙한 지옥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냉기가 주위를 가득 채웠다. 허공의 수증가가 응결하더니 작은 얼음조각이 되어 우두두 떨어졌다. 무형의 살의가 깃든 냉기는 보이지 않는 바늘이 되어 도적의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뒤늦게 밀려드는 극심한 고통에 도적은 참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여자아이가 양손으로 몸을 감싸며 기침을 하자, 용사가 혀를 차면서 두르고 있던 망토를 급히 벗어 여자아이의 몸에 둘러 주었다.
“생각해보면.”
드래곤이 건조하게 말했다.
“나의 둥지를 침범한 존재를 살려서 돌려보내야 할 이유 따윈 없지.”
“강대한 드래곤이여.”
용사가 비교적 자제하면서, 그러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투로 급히 말했다.
“좀 참아주지 않겠는가?”
드래곤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남자가 그 전에 잽싸게 덧붙였다.
“공주가 추워하는 것 같도다. 공주는 평범한 아이일 뿐이니, 이 옷과 망토에 깃든 마력으로도 그대의 힘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임을 알지 아니하는가.”
드래곤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잠시 주저했다. 그러나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윽고 드래곤이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주위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넘쳐흐르던 냉기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지금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도적은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좋아. 일단 잠깐만 참겠어.”
드래곤이 말하며 강조했다.
“하지만 정말로 잠깐이야.”
(하편이 언제 나올지는 장담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