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쓰는 거니 대충 읽어주십시오. 리뷰라기보다는 그냥 썰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 재밌었던 영화 이야기나 쉽고 가볍게 한번 해볼 생각입니다.
1. 이창동이 스스로 밝혔듯이 영화속에서 불태우기란 곧 분노다. 물론 분노라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만, 무엇에 관한 분노인지도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일단은 당연히 벤에 대한 분노다.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것도 벤에게서 들은 얘기이고, 그가 태운다는 비닐하우스를 찾아나선다거나 그를 스토킹한다거나... 이와 같은 짓들은 벤에 대한 종수의 선망과 질투, 의심과 불안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심리들이 곧 종수의 분노가 된다.
그러나 벤에 대한 분노는 단지 벤에 대한 분노만으론 끝나지 않는다. 그건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진 자에 대한 분노이기 때문이고,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분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수는 벤을 죽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벤과 함께 그의 포르쉐를 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벤에 대한 분노는 사실 그것들을 가지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인 셈이다. 그런데 종수가 (꿈에서) 원래 태우던 것은 비닐하우스가 아니라 엄마의 옷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해요. 우리 아버지는요. 분노조절장애가 있어요. 가슴 속에 무슨 분노가 있어서 그게 폭탄처럼 터져요. 한 번 터지면 모든 게 다 부서져요. 엄마가 우리 남매를 두고 집을 나간 것은 그것 때문이었어요. 엄마가 집을 나간 날 내가 엄마의 옷을 태웠어요. 저 마당에 불을 지펴놓고 아버지가 시켰어요. 내 손으로 직접 태우라고. 난 지금도 그때 꿈을 꿔요."
엄마의 옷은 영화상에서 종수가 최초로 불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아빠가 아니다) 시켜서 태운 옷. 물론 이는 엄마에 대한 감정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분노라고 보는 편이 더 맞지 않나 싶다. 헌데 종수가 아버지를 미워하는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분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벤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에 대한 시셈과 두려움으로 종수의 분노가 전환된다. 엄마의 옷을 태운다던 꿈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꿈으로 바뀌듯.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수의 분노 심리는 본인이 분노조절장애자라고 표현했던 아버지를 닮아간다. 종수는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처음엔 낯설기만 했던 아버지의 빈집에 점점 익숙해져간다. 조금씩 아버지를 닮아가는 종수의 모습을 극화한 게 아니었나 싶다. 종수의 분노는 그래서 본질적으로 그 자신에 대한 분노다.
다시 말해 엄마의 옷을 태우는 것에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으로의 전환이란, 곧 아버지의 분노에 동화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종수에게 또 다시 분노를 일으키는 자양분이 된다. 가난으로 인해 문드러진 유년시절하며, 작가가 되겠답시고 대학까지 나왔지만 커서도 달라진 건 뭐 하나 없고, 택배 일이나 하고 있었더니 아버지는 또 난리를 피워서 어디 잡혀갔댄다. 그리고 소유하고 싶은 해미와 그 주변을 알짱거리며 거들먹대는 부자 벤.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분노할 수밖에 없어서 (아버지처럼) 분노하게 되는 것이 종수에게는 다시 또 분노의 원인이 된다. 앞서 말했듯 어머니를 도망치게 했던 아버지의 분노가 증오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닮아가는 것, 그것은 가난의 대물림이자 분노의 대물림이다. 마침내 벤을 찔러죽이는 것이 아버지의 칼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2. 벤은 신적인 말투로 세상에 버려져 있는 불필요한 것들을 태운다고 했다. 이는 전작인 시에서 나타났던 창작의 의미를 공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 제목이 버닝이란 게 시사하듯 불태우기란 곧 창조이기도 하다.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
그리고 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거죠... 뼈 속까지 울리는 베이스."
어쩌면 이는 감독 본인의 말이다. 어쩌면 창작이란 세상의 모든 가련한 것들을 희생시켜서 불태우는 제례 의식일지도 모른다. 불태워진 것들은 마치 번제물처럼 창작을 위한 희생양이 된다. 물론 뭐 그렇다고 감독이 그와 같은 냉혈한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창작이란 그런 행위일 수도 있다.
"눈물 흘리는 사람 보면 재밌어요. 전 한번도 울어 본 적이 없거든요. 눈물이라는 게 나오질 않으니까 이게 슬픈 건지 알 수도 없어요"
음식을 만들면서 자기 자신을 위한 번제물처럼 식재료를 묘사하던 벤의 대사를 상기해보자. 마치 신을 기쁘게 하려고 인간 번제물을 태우던 고대인들이 떠오른듯 미소짓는 벤. 그리고 또 종수가 글쓰기를 한 직후에 벤을 살해하고 포르쉐를 태워버린 것을 상기해보자. 물론 벤이 그렇듯 가련한 존재는 아니었겠나, 이는 창작욕이 곧 파괴충동임을 암시하는 대목이지 않을까? 단지 종수의 소설속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영화속 인물들은 불의 이미지를 통해 고양되고 정화되며 마침내는 승화된다. 그러나 그러한 정화, 승화는 결코 생산적이지 않다. 모든 것을 말그대로 불태우고야 마는 파멸적인 정화이며 승화이다.
3. 해미의 경우 불태우기에 해당되는 것은 노을 보기이다. 같은 붉은색의 이미지. 각각의 인물들이 하는 행동들은 결국 창조의 행위들이며 이는 의미찾기의 과정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듯 그것은 파국적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왜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가? 이 세상은 애초에 의미 따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으려고 했던 모든 의미들, 우리가 찾아낸 모든 의미들은 사실 일종의 자위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이고 영화나 소설처럼 픽션적이다. 해미가 의미를 찾아 헤매는 사람(그레이트 헝거)을 보러 가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했던 까닭도 그 때문이다.
단칸짜리 방에 드는 작은 햇빛이나 아프리카의 찬란한 노을이나 결국 덧없는 건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애초에 해미는 왜 아프리카까지 간 것인가? 단칸짜리 방의 햇빛으로는, 그런 단칸짜리 북향의 충족감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었던 마음을 채우려고 갔던 게 아니었나? 그래서 아프리카까지 가서 노을이나 봤던 게 아니었나.
해미의 성형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종수가 글을 썼던 것처럼 해미는 성형을 했다. 성형을 통해서 자신의 불만족한 세계를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미가 성형을 하고 나서도, 자기를 못생겼다고 했던 남자와 관계를 맺고 나서도 자기 외모에 대해 느꼈을 감정을 상상해보자. 아니 외모 그 자체에 대해 느꼈을 감정을 상상해보자. 채워진 적도 없는 주제에 상실감을 느끼는 불만족. 이것은 욕망의 이치와도 일맥상통하며, 그렇기 때문에 빛의 이미지는 불의 이미지와 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 개같은 세상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자위하는 것이다.
해미는 판토마임을 하면서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없다는 걸 잊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영화속 수수께끼는 기억의 혼선이 주를 이루고 망각이 주를 이루고 사라짐이 주를 이룬다.
귤이 있었다가 없어지고 우물이 있었다가 없어지고 고양이가 있었다가 없어지고 해미가 있었다가 없어진다.
4. 그래서 버닝의 미스테리란 단서를 발견하고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깊어지는 게 아니라 사라지는 과정에서 깊어진다. 어쩌면 그게 미스테리의 본질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미스테리란 존재하지 않는 우물을 찾는 것이고 판토마임이며 자위 행위다. 그것은 사라진 해미가 대딸해주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벤이 해미를 죽였다는 확신으로 그와 관련된 내용의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불태운 자리에는 흔적만 재가 되어 남을 뿐 더 이상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세상은 이미 모든 의미가 불타고 남은 자리나 다름 없다. 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자위하듯 의미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낸 모든 의미들은 결국 그냥 자위일 뿐이다. 그레이트 헝거 고놈 참 대물이겠네~
하여 인물들은 정처없이 방황하며 없다는 걸 잊기 위해 분노한다. 돈이 없다는 걸 잊기 위해, 엄마가 없다는 걸 잊기 위해, 포르쉐가 없다는 걸 잊기 위해. 없어서 분노하는 것인데, 어떻게 없다는 걸 잊기 위해 분노한단 말인가? 분노하면 할수록 부재를 더 실감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분노는 자위적이다. 이중사고다. 아니 "동시존재"다. 즉 부재와 존재를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그게 인간 심리의 "밸런스"이다. 가령 포르쉐를 불태워버림으로써 물질에 대한 증오로 물질에 대한 자기 욕망을 대신한다든지... 욕망이 아니라 증오가 원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모든 욕망의 불싸지르기, 즉 우리의 분노란 의미인 동시에 무의미고 창조인 동시에 파괴가 된다. 우리는 분노하면서 의미를 찾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갈 데를 몰라하며 일어나는 우리 분노의 목소리는 매일밤 불꺼진 거실 구석탱이로 불안정한 수신음을 계속 보내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다.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든 아니든) 우물에 빠져서 자기를 구해주길 바라며 그 동그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해미의 수신호이며,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갈구의 과정-즉 의미찾기 과정이다.
5. 영화는 의미가 수수께끼이고 미스테리라 말하는 듯하다. 일포스티노에서 네루다가 메타포를 논했듯이, 벤도 메타포를 논한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 건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걸 내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어서야. 그리고 더 좋은 건 내가 그걸 먹어버린다는 거지.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난 나 자신을 위해서 제물을 만들고, 내가 그걸 먹는 거야. 제물은 말하자면 그냥 메타포야. 메타포에 대해선 종수씨에게 물어봐."
네루다는 일포스티노에서 모든 것이 메타포라 하였으나 정작 우리는 우리가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것, 메타포의 원관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찾고 싶어하는 것들은 사라지는 법이고, 그게 버닝의 수수께끼이자 미스테리가 된다. 벤은 메타포를 좋아한다.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던 말도 물론 메타포다. 그럼 벤이 정말로 해미를 죽였다는 건가? 아니면 팔아버리기라도 했다는 건가? 아니면 그냥 해미가 어딘가로 도망쳐버린 걸까? 자살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사실 다 종수의 소설속 이야기인 걸까? 상상인 걸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답은 없다. 이처럼 원관념 따위 사실은 없는 것이다. 의미 따위 없는 것이다. 떡밥만 있을 뿐이고 거기에 낚여버린 종수 같은 놈들만 그냥 부들부들 떨면서 파닥거릴 뿐이다.
그러니까 귤이 없다는 걸 잊으면 된다. 그게 판토마임이다.
대딸받는 상상을 하며 해미가 사라졌다는 것을 잊듯이.
마찬가지로 벤이 해미를 죽였는지 어쨌는지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단 것을 잊으면 된다.
벤이 해미를 죽였을 것이라는 종수의 확신은 존재 주장이 아니라 부재의 망각이다.
뭔 소리냐고? 이중사고다. 동시존재다. 인간 심리의 그런 어떤 밸런스?
그래서 종수의 확신은 글쓰기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망상적이고 자기위안적인 욕구해소에 불과하다.
종수는 이제 진실을 말해보라던 해미의 요구에 영원히 답할 수 없다.
우리는... 아니 우리 애새끼들은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의미에 낚여서 분노하고 있고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낚여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 포르쉐, 비닐하우스, 아버지, 성별, 종교, 자본주의, 돈, 명예 등등... 그것은 우리를 착취하는 모든 것들이고 우리의 성취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자 우리 성취의 모든 대상들이다. 이 분노는 즉 우리의 욕망이 불타는 소리다.
영화를 보면서 귀를 기울여보자. 그러면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수화기 너머로 우리 정념이 불타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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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버닝 무척 인상깊고 재미있게 봤습니다. 전체적인 주제의식을 작은 단위의 메타포들을 통해서 해석하는 관점이 흥미롭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회계층의 문제의식을 녹아낸 기생충과 비슷한 측면도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이를 자신답게 풀어내면서 대중성을 잡았다면 이창동 감독은 좀 더 모호하고 신비롭게 풀어낸달까요. 제가 예전에 이와 관련하여 어떤 블로그에 댓글을 남긴적이 있는데 이를 공유합니다. "이창동 감독이 실제 인터뷰에서 젊은이들의 무력감과 분노를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을 하면서도,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하는 대상이 사실 명확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산타바바라 영화제 인터뷰 때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답변을 하는데, 한 외국 기자가 꽤나 뜬금포로 혹시나 영화 기생충이 한국에서의 사회적 혁명의 어떠한 시발점이 되느냐를 묻는 꽤 급진적인 질문을 합니다. 근데 봉준호 감독은 오히려 그러한 혁명에서 멀어져 가는 것 같다, 혁명이라는 것은 타파해야할 대상이 명확하게 파악되어야 하는데 현 시대에는 그 대상을 파악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시죠. 분명 현 시대의 사회 시스템은 사회계층의 관점에서 무언가 잘못 되었고 다들 그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두 감독의 말대로 그 잘못이 누구로부터, 어떠한 것으로부터 정확하게 기인하는지는 이제 파악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이창동 감독은 그것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하기보다 청춘들의 미묘한 감정을 먹먹하게 그려낸 것이고 (그렇기에 개성이 강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하기가 힘들었던), 봉준호 감독은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코미디와 그로테스크한 면을 섞어서 그려내어 대중들의 기호까지 사로잡도록 영리하게 표현한 것이라 봅니다. 여튼 둘다 다르지만 담아내고자 한 것은 묘하게 비슷한 그런 명작들이라 생각합니다. 버닝도 비록 흥행은 실패했지만, 후에 더욱 더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는 영화가 되었음 하네요"
(수정됨) 좋은 관점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고도화되면서 모든 게 옅어져가고 또 사라져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다양한 적들을 가지게 되어 분열하고, 공동의 적을 가진 분들의 정체성은 또 강화되고... 그러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다들 진짜 적을 찾고 싶어하지만 진짜 의미가 그렇듯이 그 또한 풀리지 않는 떡밥으로 남을 듯하네요. 그냥 다들 낚여서 부들부들 파닥거릴 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