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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6/15 14:16:00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1942년 이탈리아 외교관이 본 독일 (수정됨)

전 유럽을 피라미드처럼 위계적으로 조직하고 그 정점에 독일을 두겠다는 야심 찬 독일의 의도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유럽의 재건에 대한 독일의 태도를 파악할 수 없다. 프랑스 혁명으로 등장했고 베르사유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국제질서가 이제 종말을 고했으며, 국민국가가 자신의 자리를 훨씬 큰 규모의 정치체에 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 (주: 당시 유럽에서 러시아나 미국 혹은 대영제국 같은 대륙사이즈 국가들에 맞서 대륙단위로 유럽을 재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로 어제까지도 독일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던 국가들에서도 그렇다. 

그러므로 유럽을 위계적으로 조직한다는 개념 그 자체를 수용하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독일인들과 만나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들이 유럽 질서를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유럽을 조직한다는 것을 곧 어떤 광물을 얼마나 생산하며,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필요한가를 결정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 같다. 어떤 경제 질서도 정치 질서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독일인들은 모르고 있다. 벨기에와 보헤미아의 노동자들을 일하게 하려면 높은 임금을 약속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공동체, 즉 그 자신 역시 속해 있으며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1942년, 3월 14일. Mario Luciolli (이탈리아 외교관)


오늘날의 독일도 사실 저때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적어도 유럽연합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말이죠. 독일은 유럽연합을 순전히 경제적 논리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다른 회원국들의 반발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또는 알고 있어도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모르는 듯합니다.  

경제질서 위에는 정치질서가 필요하다고 말한 저 이탈리아인의 통찰은 실로 중요합니다. 특히 유럽연합이라는 맥락에서는 더욱 더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독일 역사에서 국민국가를 초월하는 이념이나 정치적 프로젝트는 없었습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독일인으로 자란 마르크스가 제창한 <공산주의>겠죠. 하지만 독일에서 태동한 공산주의는 단 한번도 국가차원의 신념이 된 적이 없었고 오히려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러시아 특유의 "정교회적-제3의로마적 세계관"으로 "메시아적인 국시"로 만들었습니다. 

독일의 "기계적 경향"은 나치 때나, 오늘날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현상인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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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산바라기
20/06/15 14:19
수정 아이콘
기계적 경향이 독일 그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민족주의 등의 정치적 경향이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국가들이 있는 것처럼요.

모르는게 아니라 최선이 무엇이며 어떤 논리가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이 소위 "기계적 경향" 인 것 같네요.
aurelius
20/06/15 14:26
수정 아이콘
그냥 노골적으로 나한테만 이익이 되는 것을 골라먹는 것으로는 리더십이 생길 수 없죠. 영어에 They want to have a cake and eat it too 라는 표현이 있는데, 어떤 trade-off 없이 모든 걸 독식하려고 할 때 쓰는 말입니다. 미국의 리더십도 결국 동맹국들에게 상당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어떤 이념적 청사진을 보여주면서 생기는 것이고,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도 나폴레옹대법전을 통해 적어도 명분상 여러 유럽민족들에게 "공화주의"와 "법치", "민족해방(세습군주들로부터 해방)"이라는 비전을 제시했었죠. 어떤 안정적 질서를 위해서는 리더와 팔로워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주의적] 이념을 통한 공통분모가 생겨야 하는데, 독일이 이러한 지점에서는 소홀한 경향이 있습니다.
먼산바라기
20/06/15 14:38
수정 아이콘
(수정됨) 독일인이 리더가 되기 위해 집단구성원의 이익을 보장하고 비전을 공유하는 리더쉽이 없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노골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을 골라먹는다기 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챙겨주고 배려하는 외교적역량이 부족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다자간의 협상을 주도하고 커다란 공동체의 이익을 끌고 나가 본 경험이 없다는 거죠. 좀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해본적이 별로 없고 치고 박고 싸운게 전부인거죠. 그러다 보니 아에 잘하는 부분인 기계적인 이익 추구가 반복이 되는게 아닌가 싶어요. 나쁘게 표현하자면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거고, 못하다 보니 그냥 하던대로 하자. 이런 느낌입니다.
물론 패권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글쓴분께서 생각하신 리더쉽을 갖추어야 하겠지만, 독일은 리더쉽이 필요한 상황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뭔가 해보다 안되면 그냥 전쟁으로...
그럴듯하다
20/06/15 14:38
수정 아이콘
나치야 군사적 성과가 너무 대단했던 나머지 리더가 되기 보다는 독존하고 싶었던 것 같고,
나치 이후에는 조장 트라우마라고 해야 하나, 그저 떠밀려 앉았을 뿐 리더로서 정치 질서를 주도는 걸 무서워하는 게 아닌가 시프요...
일반상대성이론
20/06/15 15:47
수정 아이콘
국민성이란 단어가 절대 허상이 아님...
패마패마
20/06/15 16:15
수정 아이콘
현대 중국?
므라노
20/06/15 16:27
수정 아이콘
확실히 42년도면 영국 러시아를 제외하면 독일이 사실상 거의 유럽을 장악한 시기지요.
비록 같은 추축국의 일원이라지만 독일인이 아닌 타국인의 입에서 대유럽주의 같은 소리 하는거 보면..
정말 소련에 선전포고 안하고 뻐겼으면 완전히 가망없는 이야기도 아니었지 않을까 싶어요.
HA클러스터
20/06/15 20:52
수정 아이콘
22222
히틀러만 없었다면 보다 일찍 합법적으로 독일이 유럽의 맹주가 되었을 것을 나찌 독일때분에 반세기 늦추어졌다는 말이 있지요.
잉크부스
20/06/15 17:40
수정 아이콘
유럽의 성장사와 독일의 성장사를 보면..
프랑스는 외교와 영국의 협잡질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속에서 지독한 견제를 받으면서 힘들게 힘들게 성장한게 독일이죠.
대국적 지도자로서의 성장이라기 보단 강국들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성장한 국가가 독일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 "어 이거 잘하면 이기겠는데?" 가 된거죠.

지금도 독일인들은 실질적으로 EU의 가장 강력한 지배자이긴 하지만 지배자가 되고픈 열망은 없습니다.
심지어 EU에 들어간 이유도 먹고사니즘과 과거 이미지 세탁을 위해서 였지 지배자가 되고싶어서 들어간게 아니죠.
근데 유로화 꿀을 빠는 막강한 경제력으로 실질적 지배자가 된거죠.

더불어 독일인 스스로도 과거 나치의 트라우마로 그런 역할론에 거부감이 있고..
실질적으로 지배자가 되려는 마음을 갖는 순간 주변국들의 저항감은 상당할 걸로 보입니다.(영국 EU 탈퇴의 주요 원인중 하나죠)

한줄요약 : 난 잘먹고 잘살려고 하는 거지 유럽의 정치적 지배자가 되려는게 아니야. 다만 유럽의 지배자가 되야만 먹고살수 있다면 내가 너흴 정복해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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