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살이 된 아들과 매일 즐겁고 새로운 날을 함께하고 있다. 말을 하기 시작한 후부터 즐거움이 더 해진다.
‘이런 단어도 알아?
이런 억양으로?
아니, 이런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거야?’
어린이집의 친구들과 비교해도 언어 구사능력과 이해력이 빠른 것 같다. 엄마를 닮았나보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신나게 큰 인형까지 셋이 뒹굴며 놀고 있었다. 물론 소리도 질러가며 놀고 있었는데,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죽어!! 죽어라!!!’
흠...
‘이런 단어를 알아?
이런 억양으로?
아니, 이런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거야?‘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지나갔지만, 나의 아버지에게 배운 굳은 얼굴과 단호한 말투로
‘그런 말은 안 돼!’ 라고 아이에게 말했다.
눈치가 빠른 우리 아이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4살짜리의 변명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노력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바로 굳은 얼굴을 풀고 다시 몸놀이를 시작했다.
그날 이후부터 아이가 ‘죽어, 죽어라’ 라는 단어 대신, ‘기절했다’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몸놀이 하다가 힘들면 ‘아빠, 나 기절했어.’
인형이 누워 있으면 ‘아빠, 얘 기절했나봐.’
그럴 때마다 고민이 되었다.
이거를 잘못 되었다고 말해야하나?
지적 한다면, 어떻게 알려 줘야 하지?
나 스스로 제대로 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아이를 뒷좌석 카시트에 앉히고 나는 운전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나를 불렀다.
‘그런데 아빠, 죽는 건 왜 안 돼?’
응? 이게 뭔소리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죽는다는 단어를 쓰면 왜 안 되는지를 묻는 것 같았다.
‘혹시 죽는다, 죽어라 이런 말 하면 왜 안 되는지를 물어 본거니?’
‘응! 맞아’
아하. 이거였구나.
그동안 고민했던 내용을 어떻게 짧고 쉽게 말해줄까, 살짝 흥분한 상태로 잠시 생각했다.
‘죽는 다는 것은, 영원히 못 본다는 거야. 아빠는 우리 아기를 계속 보고 싶단 말이지’
‘그런데, 어린이집 가면 못 보잖아’
‘어린이집은 아침에 갔다가 오후에 오잖아, 그런데 죽으면 영원히 볼 수 없다고.’
‘그런데, 나는 어린이집에서 엄마랑 아빠랑 보고 싶은데’
‘그래서 X시가 되면 아빠가 데리러 가잖아’
뭔가 핀트가 잘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4살짜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니 대충 넘어갈까도 했지만, 그래도 원인이 있을 것 같다.
뭐지?
어떤 설명이 어려웠을까?
흠.. 혹시?
‘우리 아기, 혹시 영원히 라는 말 알아?’
‘아니, 몰라’
아하. 이거였구나. 이거였어.
나는 답을 찾았다. 나는 멋진 아빠다. 해냈어. 아이가 모르는 것을 찾아냈어!
그리고 신이 나서 설명했다.
‘영원히는, 계속 이라는 뜻이야. 계~~~~~~속, 계~~~~~~~~속, 끝이 없다는 말이야’
‘흠...’
‘무슨 말인지 알겠니?’
‘아빠, 밖에 폴리 지나간다’
아.. 그래, 답을 찾은 게 아니고, 내가 설명을 드럽게 못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구나. 그래도 이런 긴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너무 대견하다.
저출산으로 여기저기서 왈가왈부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나는 둘째가 너무 보고 싶다. 이렇게 이쁜 아이가 하나 더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경제적 문제와 육체의 기력은 더욱 소진되겠지만, 정신적, 정서적 즐거움이 더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육아는 아이에게 주는 일방적인 것이 아닌, 내가 계속 성장하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주려면 채워야 하는데, 우리 부부가 서로 주고받은 것을 아이에게 주고, 아이가 주는 것은 우리 부부가 또 서로 나눈다. 아이가 부부 생활에 큰 활력을 주고 있다.
계산적인 삶이 아닌, 즐거운 삶을 살고 싶은데 사실 옳게 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즐겁게 살고 있으니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만 좀 싸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