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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7/03/13 02:41:18
Name OrBef
Subject [일반] 이제야 아버지가 좀 더 이해가 됩니다.
일단 전 미국에 삽니다. 주제와는 상관이 없지만, 글의 흐름을 이해하시는 데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전 티비를 거의 안보는 사람이기도 하고 아들놈한테는 티비를 더더욱 안보여 줍니다만(도라같은 언어 교육 프로그램이나 클리포드같은 프로그램은 보여주지만요), 정말 간만에 5살박이 아들놈과 같이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아빠 저 군인들은 저기서 뭐해?'

이라크에 파병가있는 미군들을 보고 아들놈이 묻더군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까지 약 2초, 질문에 대답하고 나서 10초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수십년간 아버지와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물론 미국이 나쁜 짓을 많이 하지. 하지만 그래도 미국만한 나라가 없다 OrBef 야.. 넌 자꾸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안돼'
'아 글쎄 제가 미국 ㅅㅐㄻ 이라고 말하는게 아니라니까요? 아버지야말로 극단적이시네요!'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저역시 철들고나서부터 수없이 아버지와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전 저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규정하는 사람이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만, 제 아버지 눈에는 그러한 저조차도 너무나 위험천만하고 철없는 좌익으로 보였나봅니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들에 대해 어쩌다 아버지에게 의견을 구하면 아버지는 언제나 초등학교 도덕시간에나 어울릴만한 대답만 하셨죠.

'아버지, 하지만 전 이딴 일은 하기가 싫은걸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이 하기 싫은 거야 사람이 다 똑같지. 하지만 그건 세상 이치가 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란다. 그래도 그렇게 해서 돈도 벌고 지위도 쌓고 가족끼리 화목하게 살면 그게 좋은거잖니?'
'이딴 일해서 쌓는 지위가 뭐 의미가 있겠어요? 아버지야 그렇게 사는게 좋을 지 몰라도 전 싫은데요!'

이공계를 선택했던 제 자신을 한창 저주하던 대학 2학년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대체 제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시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단순한 대답만이 돌아왔었죠. 아버지는 학원 강사를 직업으로 택하셔서 15년동안 새벽 5시 반 출근 저녁 8시 퇴근의 인생을 결근없이 살아오신 분이었기에, 전 아버지를 이미 '단순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글쎄.. 그런 울적한 마음같은건 말이다, 시간이 지나가면 또 사라져. '울적함' 이란건 그냥 수많은 마음 상태중 하나에 불과한거지, 그게 무슨 영적 깨달음에 가까운 상태는 아니란 걸 니가 알아야 해. 거기에 집착하면 냉소적이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거야.'
'아버지가 그런 상태에 가보신 적이 있긴 한가요?'

대학교 1학년때 쇼펜하우어를 숭배하던 제가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입니다.

.......................................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얼핏 들었습니다.

'하하하 맞아 그땐 그랬지'
'하여간 OrBef 는 당신 닮아서 저렇수. 뭘 해도 만족을 못한다니까요.'
'하하하하 그래도 나보단 낫지.'
'하긴 그래요? 당신은 전공이 3개에 직장은.. 아 이제 기억도 안나네. 그래도 일단 10개는 넘어요?'
'하하하하하 뭐 지난 일 가지고 그래'

아버지는 젊은 시절의 당신 이야기를 거의 하시지 않으셨는데, 그날 좀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수학과로 입학하신 후 종교학과로 전공을 바꾸셨다가 대학원은 영문학으로 따셨더군요. 전 아버지의 최종 전공만 알고 있었는데, 이분이야말로 저 이상 젊은 시절의 방황을 강하게 겪은 분이었던 겁니다.

아버지의 서재 깊은 속에 아주 낡아서 종이가 부스러지기 일보 직전의 '쇼펜하우어 인생론' 이 꽂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아버지가 적어놓은 짧은 글귀들도 빽빽하게 적혀있더군요.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심한 우울증을 앓아서 정신병원까지 다니셨다는 것도 그 즈음에 알게되었습니다.

.......................................

본인은 방황해도 아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고,
본인이 수많은 과정을 겪어 도달한 지점에 아들은 바로 도달했으면 좋겠고,
아들이 겪는 좌절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있기에 그 좌절이 '별거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고,

그랬던 거죠.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

서른이 넘으면서부터 아버지와 둘이 같이 종종 맥주 한잔하러 술집에 다니곤 했습니다.

유학 가겠다고 결국 회사를 집어치운 다음날에도 마찬가지였죠.

'내가 젊은이들 다니는 술집에 가면 주인이 싫어하지 않을까?'

라며 쑥스러워하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맥주 한잔 하면서 말했었죠.

'아버지... 십년 전에는 죄송했어요. 아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다 그런거야. 니 할아버지랑 나도 마찬가지였어. 너는 그런 것들에 집착하지 않길 바랬는데, 너도 우리 핏줄이라 어쩔 수가 없는거야. 니 엄마도 첫 직장 ( 신문사였습니다 ) 면접들어가서 질문이 마음에 안든다고 재수없다면서 나왔잖니. 그래서 출판사로 직업을 바꾸게 된거야.'
'!@#$!@$%@#$^%#@^@%#'

.......................................

'저 나라에는 나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좋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거든. 그래서 미국에서 군대를 보내서 나쁜 사람들을 쫓아내 주는거야'
'아.. 그렇구나..'

10년 뒤든 15년 뒤든 제 아들도 제게 '생각이라고는 없는 단순한 돈벌레' 라고 말할 날이 오겠지만, 결국은 저렇게 이야기하게 되더군요.

5살에게 벌써 부터 진실을 알려주면 '정의로운 사람' 이 되는 것이 아니라 '냉소적인 사람'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진실을 아는 것 보다는 '정의감' 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진실을 알려주는 것은 제 몫이 아니라는 것도 자연히 깨닫게 되더군요. 제가 할 일은, 아들이 자신의 '기본적으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도록 도와주는 것 까지이고, 세세한 부분에서 자기 아버지가 '틀렸다' 라고 깨달을 때까지 지켜주는 것 뿐인가봅니다.

그리고 어느날 '아버지가 말해준 것들이 대부분 틀리던데요?' 라고 말할 날이 오겠죠. 그날이 오면 제 아버지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될 듯 합니다.

내년에 한국에 가면 아버지.. 이번에는 어머니도 모시고 맥주 한잔.. 어쩌면 소주 한잔 하러 갈 듯 합니다. 너무 먼 곳이라 자주 만나지도 못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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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there
07/03/13 03:17
수정 아이콘
잠 못 이루는 밤이었는데 좋은글 읽고 갑니다.
07/03/13 03:19
수정 아이콘
깊은 새벽.. 조용히 울리네요
항상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
07/03/13 06:59
수정 아이콘
애국심과 민족주의
비판과 냉소주의
로맨스와 불륜 (-_-;;;)을
구분 잘 하는 훌륭한 아이를 키우시길 바랄께요. ^^;;

저 같이 간섭하기 좋아하고 완벽주의적 성격을 가진사람은 아이 키우기 정말 힘들것 같습니다. ㅠㅠ
아무튼 아버지 존경합니다...
그저웃지요.
07/03/13 08:24
수정 아이콘
아 아버지랑 술 한잔을 해본 기억이 없네요."술 한잔 하러 가죠."
이런 말을 하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최종병기그분
07/03/13 09:25
수정 아이콘
그저웃지요. 님//
저희아버지는 워낙에 술을 많이드시던 편이라 이런방법이 먹히지만..;;

만일 같이 살고 있으시다면 퇴근하실때 안주와 맥주를 사들고 가면 됩니다.^^;;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주섬주섬 올려놓은다음 컵두개 꺼내고.
이정도 하면 웬만하면 다 알아주시겠지요.
토스희망봉사
07/03/13 10:01
수정 아이콘
제가 군대 간다고 말 날뛸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생각 나네요

"순진한놈"

병장이 되고 나서야 아버지가 베트남 참전 용사 출신이란 이야기를 비로소 듣게 되었습니다.
비록 보급 부대격인 십자군 부대 였지만 아버지의 생각을 저도 지금은 약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 세상이 낭만적이라는 순진한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게지요
07/03/13 10:10
수정 아이콘
지나치게 어려서부터 세상의 무서움이랄까... 그리고, '그저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하루하루를 묵묵히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건지 지나치게 일찍 깨닳아버렸달까요... OrBef님의 글이 아주 공감이 갑니다.

PGR은 방문하는 분들의 스펙트럼이 아주 넓은 편이지요. '낭만'과 '정의'가 이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분들도 있고, 지나치게 냉소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분들도 있으시죠. 왠지... 그래도, 아직까지는 '세상 다 그런거야 낄낄...' 하면서 살아가긴 좀 억울한 감도 없진 않습니다.
07/03/13 11:04
수정 아이콘
AhnGoon님/
아직까지는 '세상 다 그런거야 낄낄...' 하면서 살아가긴 좀 억울한 감도 없진 않습니다.
-> 많이 억울하죠 ^_^ 냉소의 수준을 미니멈으로 유지만 잘 한다면, 언제나 최소한의 순수함은 유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얼핏 보기엔 냉소적인 사람이 마음이 순수해서 그런거 같지만, 실상은 정 반대잖아요.
07/03/13 11:41
수정 아이콘
Orbef님// 그래요... 냉소적인 태도가 겉보기에는 쿨해보기고, 때로는 멋져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태도를 가진 분들을 보면 '얼마나 세상의 쓴 맛을 많이 봤길래 저렇게까지 됐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드는게 사실입니다.

쓴맛을 많이 보면 볼수록 점점 더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하는게 사실은 괴로운 일이거든요. 그 괴로움을 감추기 위해서 '냉소'라는 가면 뒤에 자신을 숨기는 것일지도 모르죠. 웃고 있는 가면 뒤에는 쓰디쓴 눈물이 흐르고 있달까요.... 마치,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팬텀처럼 말입니다.
마술사
07/03/14 14:38
수정 아이콘
정말 멋진 글입니다.
추게로!
에브리리틀씽
07/03/14 17:30
수정 아이콘
난 왜 이런 글을 못쓰는 걸까... 프린트라도 해서 가끔 꺼내 보고싶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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