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포먼과 더불어 복싱 역사에서 인간을 초월했다고 느낀 유이한 사람은 로이 존스 주니어입니다. 그는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오심으로 꼽히는 88년 서울 올림픽의 복싱 경기 희생자이기도 하죠(금메달은 한국의 박시헌)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동정 여론을 안고 성공적으로 데뷔한 로이 존스는 89년 미들급에서 그의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이후 22전째에 훗날 미들급의 역대 최다 타이틀 방어자이자 최고령 챔피언이 될 버나드 홉킨스를, 27전째에 당시 마이클 넌과 아이란 바클리, 마이크 맥컬럼을 잡고 기세등등하던 제임스 토니를 갖고 논 다음 비니 파시엔자, 메르퀴 소사, 마이크 맥컬럼을 모두 정리하면서 계속해서 체급을 높입니다. 40전을 넘어가면서 유일한 흠이라면 당시 무패이던 몬텔 그리핀과의 승부에서, 9라운드에 다운당한 그리핀을 때린 것으로 인해 실격패 당한 것인데 5개월 후 벌어진 2차전에서 로이 존스는 그리핀을 공이 울린 지 2분 31초 만에 끝장냅니다. 당시 충격적으로 링을 굴러다니던 그리핀의 모습은 존스를 만난 복싱 시장의 충격파를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160파운드의 미들급에서 시작하여, 제임스 토니를 슈퍼미들급에서 물리친 후 6차례의 방어전을 치룬 뒤 올라간 라이트헤비급은 존스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체급입니다. 라이트헤비급에서 존스는 위에서, 아래에서 올라오는 모든 선수들을 모조리 격파하며 쪼개져 있던 타이틀을 병합합니다. 27전 무패의 훌리오 세자르 곤잘레스를 격파했을 때 존스가 갖게 된 라이트헤비급 벨트는 모두 6개로, 당대의 모든 메이저, 마이너 단체를 갖고 있던 것입니다.
존스의 스타일은 한 단어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슈퍼복싱테크닉. 존스는 상대방이 잽을 치는 속도에 원투를 칠 수가 있었고(하이라이트 영상의 7분 4초) 슈거 레이 레너드가 심리전을 위해 종종 사용하던 붕붕 펀치를 갖고도 상대방의 머리를 헤드헌팅할 수 있었습니다. 두 손을 아래로 내리고도 모든 펀치를 피해낼 수 있었고, 때론 농구 경기를 뛰고 와 복싱 경기에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상대방과의 우월한 격차로 인해 재미가 없자 아예 스스로 링 코너로 들어가 상대에게 들어오라고 하기도 했죠.
존스는 스스로를 신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알리가 Greatest of the All Time이라고 불리웠던 것은 그의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과 캐릭터에 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실력만으로 로이 존스는 GOAT였으며 모던 에라 복싱의 신이었습니다. Elo rating 식으로 말하자면, 그와 나머지는 400점 이상의 격차가 있었죠.
존스 커리어의 정점은 2003년, 헤비급으로 올라가 존 루이츠를 패배시킴으로서 헤비급 챔피언이 된 것입니다. 1897년 밥 피치몬스 이후로 미들급에서 활동했던 선수가 헤비급 챔피언이 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백여 년이 흘러서 로이 존스가 처음으로 미들급 챔피언으로 시작하여 헤비급을 정복한 것입니다. 헤비급은 다른 체급과 달리 체중의 상한선이 없습니다. 당일 로이 존스와 루이츠는 33파운드(약 15kg) 정도의 몸무게 차이가 났고, 160파운드에서 시작했던 선수가 사실상의 무패로 193파운드의 몸으로 헤비급까지 정복한 것은 이후 매니 파퀴아오가 플라이급에서 시작해 슈퍼웰터급을 장악했던 순간 정도는 되야 비견될 위업입니다.
그리고 존스의 급격한 몰락이 시작됩니다.
안토니오 타버는 존스가 라이트헤비급에 있을 때 정리하지 못했던 선수입니다. 앞서 말했던 몬텔 그리핀 실격패가 없었다면 존스가 타버를 정리할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물음은 좋은 물음이지만, 어차피 루이츠 전 이후로 존스의 몰락은 타버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든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헤비급에 올라섰다가 다시 라이트헤비급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존스의 몸 상태는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헤비급 선수와 맞싸우기 위해 존스는 193파운드까지 몸을 찌웠고, 다시 8개월 뒤의 안토니오 타버 전에서는 175파운드로 낮춰야 했습니다. 이 날 존스는 평소답지 않은 모습으로 타버에게 많은 유효타를 허용했으며, 논란의 매저리티 디시전(부심 2명이 로이 존스 우세, 1명은 무승부 판정)을 받습니다. (저는 존스의 승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팽팽했던 승부는 바로 2차전으로 이어집니다. 타버는 이 경기의 시작 전 질문이 있냐는 형식적인 물음을 하는 레퍼리에게 역사에 기록될 유명한 발언을 남깁니다. "I got a question. You got any excuses tonight, Roy?"
그리고 타버는 존스를 2라운드 시작과 동시에 넉아웃 시켜버립니다. 존스는 선수 생활 내내 그런 펀치를 허용해 본 적이 없었고, 마치 더글라스에게 넉아웃 당했을 때의 타이슨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넉다운에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카루스의 몰락은 계속되었습니다. 존스는 복귀전인 글렌 존슨, 안토니오 타버 3차전에서 계속해서 패배를 거듭했으며 조 칼자게 같은 선수들에게도 졌습니다. 추락한 선수를 뜯어먹으려는 독수리들은 계속해서 찾아왔습니다. 50+승을 무패로 기록할 수 있었던 선수는 이미 망가진 몸을 가지고 계속해서 경기를 가졌지만 호주까지 가 2라운드만에 넉아웃 되는 모습을 보며 그를 아끼는 선수와 팬들은 더 이상의 손상 이전에 빨리 은퇴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HBO 해설자이기도 하지만(예컨대 제이크 질렌할이 주연한 사우스포에는 로이 존스의 목소리가 해설로 출연합니다) 2018년 2월에도 경기를 가졌더군요.
신체로만 경기를 하던 선수가 신체를 잃게 되자 어떤 모습이 되는지, 그리고 그 신체는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한 번 더 되새기게 됩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선수의 커리어상의 라이벌인 버나드 홉킨스에 대해서도 써 보고 싶은데 시간이 날 지는 잘 모르겠군요. 밑의 영상이 로이 존스의 비상과 몰락에 대해 잘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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