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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4/08 15:39:30
Name 영혼
Subject [일반] 영일대 해수욕장 (수정됨)

흐릿한 기억을 헤집어 찾아 나선 길이였다. 여긴 변한 게 없구나. 도로와 가게, 낡아빠진 주차장 입구와 부서진 철창까지. 평일이라 한산할 줄 알았는데, 공영주차장은 이미 만석이다. 우둘투둘한 자갈 위로 차를 돌리다 여기다 싶은 곳을 찾았는데 경차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살짝 짜증이 난다. 한숨을 쉬고 있자니 마침 바로 옆에 빠지는 차가 보인다. 그렇지, 다행이야. 나는 바탕화면에 마우스를 휘적대며 아무 데나 건드려보는 것처럼 툭 하고 이곳에 왔다. 4년,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 5년만인가. 날씨가 꽤 풀렸다는데 바닷바람은 아직 스산하다. 먼 곳에서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바닷가 특유의 짠 내가 난다. 오기는 왔는데 글쎄, 이제 무얼 해야 할까 싶다. 바다에 왔으니 우선 바다를 봐야겠지. 고작 두 시간쯤 운전대를 잡았을 뿐인데 온몸이 찌뿌둥하다. 나는 어깨를 휘휘 돌리며 주차장 밖으로 나섰다.


몇 년 전, 분홍빛으로 흩날리던 벚꽃들이 내려앉고 새파란 싹이 돋아나던 이맘때, 친구와 둘이서 이곳을 찾았었다. 항상처럼 지겨운 일상이 그날따라 못 견디게 끔찍했고, 복잡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던 그런 이유였겠지. 그때쯤 여자 친구를 처음 만났던 것 같다. 그래서 속이 답답했던 거구나. 그러니까 여길 왔던 거고. 예나 지금이나, 나도 이곳도 달라진 게 없다. 미래, 계획, 가난, 학업, 자격지심. 돈. 돈. 그놈의 돈. 내 결심은 쌀알 한 톨의 힘도 없었는데 왜 그리 고민할 게 많았는지. 어쨌거나 그 때 친구와 나눴던 대화가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다. 수업이 끝난 사회관 로비, 시끄러운 주변, 친구의 촌스러운 티셔츠.


재밌네. 친구랑 했던 얘기는 별 의미도 없었는데, 도리어 한참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고민은 아주 희미하게만 떠오른다. 그때 난 여자 친구와 사귈 수 있을까, 없을까 걱정하는 것보다 사귀어도 될까, 그럼 안될까를 결정하는 데에 수십 배의 시간을 소비했다. 왜 그랬더라. 기억나는 거라곤 그 고민이 나를 지긋이 짓눌렀고, 그래서 괴로웠다는 것 정도.


백사장으로 가기 전에 커다란 프랜차이즈 커피집에 들렀다. 뭘 마시면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샀다. 너와 함께 왔다면 넌 아주 적절한 메뉴를 골랐겠지. 나는 감탄했을 테고, 너는 까르르 웃었을 거야. 너에게는 그런 묘한 재주가 있었으니까. 어쩜 그렇게 고르는 것마다 적절한지, 내가 신기해하면 너는 먹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야, 하고 의기양양했다. 괜히 발끝을 바닥에 문질렀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한잔 나왔습니다. 하고 점원이 히히 웃었다. 왜 웃지. 뭐, 그냥 웃었겠지. 건네받은 나도 씩 웃었다. 수고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짤랑거리는 풍경 소리를 뒤로 한 채 두리번대다가, 무작정 앞으로 걷는다. 친구도 여자친구도, 이제 내 곁에 없다.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우리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우리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받아들였다. 나는, 나는. 몇 번쯤 되뇌고 있는 내 꼴이 퍽 우습다. 관두자. 그냥 아무 데나 가보자. 헤어지고 나면 이젠 모든 게 그만인 것을. 이렇게 허망한 것인데, 나는 무엇을 그리도 고민했는지, 심지어 아파야만 했는지. 오늘의 옅은 우울 또한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어쩌면 나조차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마주 보며 웃었던 점원과 나는 오후가 지나기도 전에 봄볕이나 바람의 일부로서 권태롭게 서로를 잊어갈 테니까.


해수욕장의 끄트머리엔 고래 꼬리를 형상화한 계단이 있었다. 여기에 올라 경치를 만끽하세요, 같은 의도일까. 서른 칸이 채 되지 않는 꼬리 끝에 또래로 보이는 남녀 몇 쌍이 저들의 언어로 떠들고 있었다. 왠지 기분이 내켜 왁자지껄한 꼬리 끝에 함께 승선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관뒀다. 금방 기분이 나빠질 것만 같았다. 여기서 더 외로워질 필요는 없지. 지금도 충분해. 나는 촤아아 부서지는 파도를 따라 걷기로 했다.
시간이란 게, 조용히 흘러가 버리면 끝인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던 너의 반묶음 머리처럼 한 올씩, 한 가닥씩 합쳐져 마침내 서로에게 가득 모이는 거란 걸 그때는 몰랐다. 너는 울먹거리는 나를 보며 괜찮다고, 지금보다 더 좋아져도 괜찮다고 말했었다. 그 말이 내가 없어도, 우리가 아니어도 된다는 말이란 걸 우리는 몰랐다. 그러나 너는 지금도 괜찮다고 말할 것이며, 나는 조금 망설일 것이다. 사람들이 쓰는 괜찮다는 말이, 실은 네가 필요 없거나 이제 너와는 상관없단 뜻임을 서로에게 가르쳐주면서 우리가 헤어졌으니까.
머리칼을 잘라내며 미안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잘려나간 나의 머리카락이 지금쯤 어디에서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무 필요도 없다면, 그게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어느 순간 너에게 내가 자르고 싶은 머리카락 같은 존재가 된 것이라면, 니가 나에게 했던 미안하다는 말은 어쩌면 호의나 선행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가 내게 했던 말들, 이를테면 새 연애를 시작하려고 한다거나, 차단해야 되니까 인스타 시작하면 꼭 아이디를 알려줘야 한다거나, 기다리는 게 미련한 짓이란걸 언제쯤 알게 될까 걱정된다는, 그 말들은 상처를 줄 생각으로 건넨 게 아니게 되는 셈이다. 잘라낸 머리카락처럼 내가 너에게 따끔하게 들러붙어 있었고, 너는 몇 가지 말과 표정으로 나를 털어낸 거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렇게 걷는 게 지겨워질 때쯤, 편의점이 보여 들어간 김에 오랜만에 담배를 샀다. 깡깡 얼어붙은 메로나도 하나. 담배를 끊은 지 얼마나 됐더라. 기억을 더듬다 이내 관뒀다. 어쨌든 오늘로 끝이야. 터덜터덜 걸어서 바닷가로 돌아와 아무 데나 누웠다. 봄볕이 간지러워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참을 멍청하게 기다리면 분명 바람이 한 움큼 불어올 것이고, 참을 수 없는 미소가 자그맣게 번질 것이다. 딱 한 번, 너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잠깐 못된 생각을 해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다고, 그러니까 그만 헤어지자고. 메로나를 어디에다 뒀지. 손에도 기억에도 없다. 찾아보려다 관뒀다.
미안하다는 말은 어떤 말일까. 가해자로서 피해자인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일까, 이미 내가 너에게 저지른 일과 그로 인한 상처와,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제는 눈을 돌리고 싶다는 말일까. 남겨진 모든 것들은 이제 너 혼자의 책임이라는 고급스러운 암시인 걸까. 그러니까 결국엔 나는 너를 이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혹은 어쩌면, 어쩌면 그때만큼은 내가, 그 순간엔 정말로 니가, 니가...
가슴 속 어딘가가 꿈틀거린다. 그것은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각이었고, 너에게 그런 특유의 어떤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야 만다. 깊어지는 우울을 떨쳐내기 위해 일어나 앉았다. 천천히 부서지는 파도가 보인다. 파도를 좇다가 아득하게 먼바다의 어떤 지점을 응시해본다. 저곳에서도 파도는 촤아아 부서지고 있을 것이다. 한산한 바닷가를 뛰어가는 강아지, 한참을 좇아가다가 뒤를 보는 어린아이, 손을 잡고서 그 둘을 바라보는 부부가 내 옆을 지나간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고 나는 씩 웃었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이곳저곳 들러붙은 모래를 털어냈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너와의 이별을 극복하고 있으며, 너 또한 차근차근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안도가 되었다.
주제넘은 짓일지 모르겠지만, 내 무언가가 너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고, 세상이 아주 조금만 더 아름다운 곳이 되어서 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잡은 라이터의 감촉이 낯설다. 찰칵, 찰칵, 찰칵. 이상하게 담배에 불이 잘 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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