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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1/22 00:05:33
Name RedSkai
Subject [일반] 2018년의 '연희'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영화 <1987> 후기)
(영화 후기지만, 정작 영화얘기는 별로 없을 것 같네요...)

구청장 연두순시와 종합감사를 한 주에 치뤄야 하는 극악의 스케줄을 앞둔 수요일 아침, 사무실에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저의 은사님이신데, 제가 어머님처럼 모시는 분이세요.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니까 20년 넘는 인연을 이어온 분인데, 제가 승진을 했다고 하니 '너희 동장님께 인사 좀 해야겠다'면서 오신겁니다. 저는 '아니 뭐, 안하던 짓을 왜 하신데?'라고 생각하면서 투덜투덜 대기만 했습니다. 이번 달에 새로 오신 동장님과 이 분은, 동갑에다 같은 여성이고, 문화예술 관련 단체장과 주민자치위원까지 했던 은사님의 이력까지 더해져서 그런지 많은 말씀들을 나누셨습니다. (제가 대화 자리에 동석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초면인데도 1시간 가까이 말씀을 나누신 걸 보면 뭔가 통하는 게 있긴 있었나봅니다.) 그렇게 인사가 끝나고 보내드린 뒤, 내가 뭐라도 보답을 하긴 해야겠다 싶었고 그렇다고 많은 시간이 나지는 않고, 그러다 꼭 '같이' 보고 싶었던 영화 한 편이 생각났습니다. <1987>. 1968년생이니까 87학번이실거고, 본인이 살았던 시대를 다룬 영화이니 반갑겠거니 싶어서 골랐습니다.

영화는 초장부터 무거웠습니다. 서슬퍼런 군사독재 말기의, 시베리아 동토보다 더 얼어붙었던 그 분위기가 스크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주 줄기인 전반부는 너무도 우울했어요. '난 저렇게는 못살겠다'라는 느낌도 들면서, 그런데 희한하게도 종철의 죽음에 아무런 미동도 못느끼는 제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 도입에 등장한 '연희'. 87학번 연세대학교 신입생. 세상 일에는 별 관심없는 듯 하고, 입학을 앞둔 방학에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퍼질러 자는 여느 신입생과도 같은 이 친구가 등장하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한층 화사해졌습니다. 잘생긴 오빠 앞에서 최루탄 때문에 번져버린 화장에 민망해하고, 그 오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책으로 가슴팍을 가리고 조신한 척 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 쌤도 저랬을까?'라는, 웃긴 상상을 하며 영화에 대한 집중을 살짝 잃어버리기도 했네요.

그러다 분위기가 다시 엄숙해져가면서, 우리는 한숨만 푹푹 쉬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엄마 뱃속에도 있지 않았음에도 저도 안타까운 마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는데, 그 시대를 오롯이 겪어왔던 그 분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 격동의 시대를 관통했던 그 분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그 궁금증과 함께, 스크린 속에서 벌어지는 '사람 미치게 만드는' 짓거리들을 보면서 분노하고 한숨쉬며, 영화는 그렇게 클라이막스로 달려갔습니다.

......

그리고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그 분의 눈물을.

선생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득한 교원자격증으로 모 고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셨어요. 1년도 안돼 불미스런 일 때문에 (당신께서는 아무 잘못이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을 개업하셨습니다. 그 때 그녀의 나이 불과 이십대 중후반. 잘 알지도 못하는 촌동네에 와서 조그만 상가 한 켠에 터 잡아서 학원을 운영하신 지 어언 20년이 넘었네요. 제가 이 분을 안지 20년이 되었는데 (오해하실 수도 있는데, 학교에서 만난 인연이 아닙니다.) 그 동안 봐 온 이 분의 모습은 딱 '여장부'였어요, '여장부'. 찔러도 피 한방울 안흘릴 것 같았고,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까칠했고, 사업 수완이 좋아 학원 사업을 계속 확장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소위 '사회생활'도 좀 잘 하는, 우리가 흔히 '커리어우먼'이라고 생각하면 딱 생각날 스타일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 오면서도, 그 분이 뭔가에 슬퍼한다거나, 혹은 눈에서 눈물 흘리는 걸 단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제가 일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하소연을 해도,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할 때도, 심지어 공무원 시험을 합격했다고 감사 인사를 드렸을 때도, 그 분은 항상 냉정함을 유지하셨습니다. 오히려, 저를 다그쳤고 제가 삐딱선(?)을 타려고 할 때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몰아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영화 한 편에 훌쩍이시더군요. 처음 봤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그 분의 눈을 촉촉하게 만든 것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에도 우리는 계속 우두커니 앉아있었습니다. 문 목사가 열사들 이름을 울부짖는 장면이 나오던 순간까지, 일어날 생각을 못했습니다. 나도 먹먹한데, 이 분은 오죽할까.

'내가 딱 저 시기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지. 쓰읍...'
'영화 속 '연희'가 딱 쌤의 또래잖아요'
'그래 맞다. 딱 내 나이대지. 사실 저 때가 나한테는 너무 힘들었던 때라 일부러 이 영화는 안보려고 했는데......'
......
'2018년의 '연희'는 이 영화를 보면 어떤 심정일까 궁금해서 같이 보자고 했어요'

영화를 보고, 극장 근처 분식집에서 아점으로 만둣국을 먹으면서,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저에게 쏟아냈습니다. 대학 생활 내내 공부는 뒷전이었다는 이야기부터, 촌에서 올라온 친구에게 데모질 그만하고 정신차리자고 권유한 이야기, 사촌 오빠와 각자의 학교에서 데모대를 같이 이끌던 이야기 등. 불과 30년 전의 이야기들을 신나서 꺼내는 모습을 보니, '아, 이 양반도 사실 '사람'이었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네요. 그리고, 그 시대를 버텨주신 은혜에 고맙고. 그러면서, 연희가 말한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절망감과, 그래도 '그날'을 향해 우리는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는 희망까지. 현실 속 '연희'는 영화를 보며 무슨 심정이었는지 정확한 답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물을 수 없었어요. 영화를 보며 흘렸을 그녀의 눈물은 아마도, 고통받고 먼저 떠나간 내 주변 친구, 선후배들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그 분의 모습을 보며 (평소에도 존경하고, 믿고 따랐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더 굳건해지게 만든 1월의 토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역시나, 길게 쓴 글의 마무리는 너무 힘들어요. 이 지저분한 습관 좀 빨리 고쳐야 하는데......


+ 이번에 알게 됐는데, 실제로는 86학번이시래요. 학교를 1년 먼저 들어갔다나?


++ 서두에도 썼지만, 이번에 승진했습니다. 너무 빠른 승진이라 주변 사람들도 깜짝 놀라고, 저 스스로도 너무 민망할 정도의 고속 승진인데, 힘들 때 조언해주신 여러분들 덕분에 이렇게 됐습니다. 이미 열흘 정도 됐지만, 따로 글 쓰는 건 너무 민망해서(?) 이제서야 감사 인사드립니다. 잘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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