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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9/30 20:17:28
Name makka
Subject [일반] [이해] 이해봐.
작은 보틀은 하루 치 물을 담기에 부족해서 커다란 삼다수 병을 가져다 놨어. 밤이 오면 물을 마셔. 창문에는 어제 죽은 사람이 지나가고 어머니는 이를 뽑고 계셔. 방문은 굳게 닫혔어.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목구멍을 움작 거리며 물을 마셔.

어머니는 하루 치 이빨을 다 뽑으셨데, 침낭에 작은 몸을 드러누워 몸을 굽혀. 새벽 4시면 새 이빨이 날것이라고 하시며 알람을 맞춰. 어제 죽어버린 하루살이들이 방충망에 모여 서로의 털을 골라주고 있어. 밤이 아직 오지 않았나 봐. 목이 마르지 않아.

밤이면 물을 마셔. 알람 우는 소리가 발등에 찍혀. 네가 작년 생일선물로 골라주었던 작은 모세혈관들이 이름 모를 사막의 문양으로 부풀어 올라.
'그렇다고 여기에 착륙하시면 안 돼요, 저는 아직 우주 연합에 가입될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너는 나에게 가지 못했던 나라들과 수도들의 지명을 이야기해주곤 했어. 시드니, 거긴 수도가 아닌데.
너는 입술을 다물고, 이빨을 깨물고, 손목을 자르지. 부끄러웠나봐. 착각 할 수도 있지. 호주의 수도는 캔버라니까. 그런 거 가지고 죽으려 하지 마. 너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밤이면 물을 마셔. 창문에는 어제 죽은 사람이 붙어있어. 자명종이 울리고 안방엔 새 이 돋는 소리가 들려. 바오밥 나무뿌리 썩어들어가는 소리 같아. 귀를 막고 혀를 내밀어, 티셔츠로 입을 가리고 한참 숨을 멈춰, 모라더라, 딸국질을 멈추는 방법이라고 그랬었나. 사막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했나. 붉은 귀털 여우의 방문을 예의있게 기다리는 예절이라고 했었나.
물을 마셔. 삼다수 병이 거의 비어가. 아침을 늦추려면 다음에는 더 큰 패트병을 가져와야 겠어.

배가 고파. 냉장고 속에는 온통 씹지 못할 질긴 것들 뿐이야. 하나의 이빨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 뼈로 만든 음식들은 가혹한 법이야. 어머니는 새 이빨이 마음에 드셨을까. 아침에는 맥 모닝을 사러 맥도날드에 가자. 하루에는 하루 치 열량이 필요한 법이니깐. 하루 치 물을 마시고, 하루 치 열량을 섭취하고, 하루 치 잠을 자고. 나머지 시간에는 무얼 하면 될까.

고민스러워. 비적 거리는 페트병들의 새하얀 백골이 온 방에 가득 차 있어. 몸을 거룩하게 이루는 것들만 아니라면 전부다 부숴버리고 싶은데, 어머니는 책을 읽으라고 하셔. 옆집 애는 책만 읽고 서울대를 들어갔다고 해. 위대한 성인이 되었다고 해.
조악 거리는 어머니의 반짝거리는 새 이빨에는 밤새 누군가 새겨놓은 문신이 있어.

'엄마 2해봐'

'VERITAS LUALUX MA'
바보, E 가 빠졌잖아.
'VERITAS LUALUX M 이A'


머리에는 피라냐. 가슴에는 숭어. 일용한 양식이 되기위해 거슬러가는 것들을 위해 물을 마셔. 맥모닝은 짜니깐 하루치 염분도 맞춰 주겠지. 팔짝이는 달력에는 하루치 마실 물이 예언되어 있어. 내일은 조금 더 많이 마셔야지. 그리고 되는대로 죽어야지.

시간이 날지 모르겠어. 어머니는 두꺼운 책을 읽으라 하시는데. 맥모닝을 먹고 코를 파고, 잠을 자고 물을 마시면 자 다시 저녁이야.
어머니는 머리맡에 24개, 이빨을 감추시곤 연금처럼 들어올 이빨의 요정들의 꿈을 꾸셔.

너는 태어난 사람이야. 어제. 안녕
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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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도사
17/09/30 21:46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봤습니다!
미나가 최고다!
17/09/30 22:05
수정 아이콘
죽음과 삶(혹은 태어남)을 반대로 쓰면서 하루가 바뀌어도 어제는 계속 어제(혹은 과거의 어느 시간)인 것 같은 느낌.. 냉장고는 창고이면서도 죽은 것들의 공간일 수도 있지요. 물과 염분은 삶을 구성하는 것이고 맥모닝 또한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이빨에 대해선 좀더 과격한 해석을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모종의 이유로 어머니의 이빨을 다 부숴버리고 싶은 욕망이 어머니 스스로 이를 뽑는 모습으로 억제되어 나타났다고밖에 생각이 안되네요. 뽑은 이빨이 다시 난다는 게 다른 무언가를 상징한다고도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글 전반적인 분위기상 긍정적인 대상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달력을 보면 시간은 계속 가고 있습니다. 낮은 화자가 견디기 힘든 순간이지만 밤 역시도 힘들긴 마찬가지죠. 너(실재하는 대상 혹은 또다른 자아)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차는 공간이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화자는 꾸역꾸역 큰 통의 물을 마시며 버텨내고 아침을 기다리지만 역시 삶을 억지로 이어나가야 하는 시간인 것에는 변함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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