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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9/21 00:31:42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원말명초 이야기 (21) 운명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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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성벽




 장강을 넘어온 주원장 군단의 최종적인 목표는 집경(남경) 공략이었다. 태평은 어디까지나 이를 위한 교두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주원장이 집경을 점령한 것은 태평 함락 이후 9개월이나 지난 1356년 3월 무렵이었다. 



 소호의 수군을 이끌고 장강을 건너 우저 – 채석 – 태평을 점령하는 동안 걸린 기간이 불과 1개월이었으니, 처음의 쾌속 진군에 비하면 작전은 마무리 단계에서 상당히 느려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유가 있었다.



 태평을 장악하고 근거지를 확보하게 된 일은, 물론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주원장 군은 적의 확고한 표적이 되고 말았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주변의 원나라 군이 전부 태평의 주원장을 노리고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당연한 이치였다.



 이때는 태평의 동서남북 사방이 모두 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전 소호에서 주원장 군을 놓쳤던 중승 만자해아가 집요하게 그 뒤를 추격해 오고 있었고, 원나라 우승(右丞) 벼슬을 하고 있는 아로회(阿魯灰)는 그런 만자해아와 합류해 채석의 고숙구(姑孰口)를 장악했다. 덕분에 주원장 군은 퇴로가 끊기고 말았다. 장강 이남에 갇혀버리게 된 셈이었다.



 그러는 사이 현지의 지주계급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일전에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런 의병이야말로 원말명초 당시 홍군을 괴롭힌 주요 적수였다. 도망치면 그뿐인 관군에 비해 지킬 것이 많은 지역의 의병들이야말로 싸울 의지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평으로 모여든 의병 대장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사람은 진야선(陳埜先)이라는 인물이었다. 현지의 대지주 출신이었던 그는 교활한 술책을 갖춘 인물이었고, 수만을 일컫을 정도의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진야선은 육군은 물론이고 수군 병대 역시 보유하고 있었는데, 수군을 이끌던 사령관은 강무재(康茂才)라는 장군이었다. 진야선과 강무재는 수륙으로 군단을 이끌고 태평을 포위해왔다.



 진야선, 강무재, 아로회, 만자해아에 이르기까지. 4명이나 되는 적의 대장들이 번뜩이는 자신들의 이빨을 이쪽의 목덜미에 꽂아 넣기 위해 몰려들고 있고, 돌아갈 수 있는 길마저도 차단된 상태. 어떻게 생각해보면 태평 점령은 되려 주원장 군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할 수도 있겠다. 적군의 물결 한 가운데 갇혀버린 형국으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주원장이 바라는 바였다. 그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그동안 여러 전투에서 경험을 쌓은 휘하의 명장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태평 주위를 둘러싼 적들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대표적인 장수로 사서에서 언급되는 사람은 총 3명이다. (1) 그 3명에는 주원장이 가장 신임하는 장수인 서달과 장수들 중에서 최연장자 급에 속한 탕화가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이 바로 등유(鄧愈)라는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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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유(鄧愈)





 등유는 홍현(虹縣) 출신으로, 자가 백안(伯顏)이다. 그의 본명은 등우덕(鄧友德)으로, 유(愈)라는 이름은 주원장 군에 귀순하고 나서 새로 받은 이름이었다. 불과 16살의 나이에 아버지와 형을 따라 홍군에 참여했는데, 등유의 형과 아버지는 모두 싸움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가족의 원한 때문이었을까? 등유는 싸움에 임할 때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항상 부대를 거느리고 전투마다 최전방에 서 적진을 함락시키니, 부대에서는 등유의 용맹에 대해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 당시 등유는 19살의 위풍당당한 청년 장군이었다. 서른 살의 탕화와는 열 살이 넘는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경험 많은 노련한 탕화와 패기 넘치는 젊은 등유, 그리고 가장 신뢰하는 장수인 서달로 이루어진 이 인사 조치는 꽤 멋들어진 구성처럼 보인다.



 주원장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진야선의 부대와 맞서 싸웠다. 그 사이에 서달과 탕화, 등유로 이루어진 별동대는 적의 배후로 침투한 뒤 후방을 공격했다. 놀란 적군은 거세게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군을 이끌던 탕화는 왼쪽 넒적 다리에 화살이 박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 꺽다리 장군은 이를 악물고 화살을 뽑아내고는, 오히려 더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어 마침내 진야선을 사로잡는 대공을 세웠다. (2)



 병력이 수만이나 되던 적의 대장을 사로잡은 전공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진야선이 거느리고 있던 세력은 무려 3만 6천 명이 넘었다. 이 정도의 대군이 삽시간에 무력화되었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승리였다고 할 수 있었다. 과연 이 승리 이후로 수군 대장 강무재는 포위를 풀고 집경 근방으로 물러났고, 아로회는 만자해아를 남겨두고 아예 떠나버렸다. 태평을 둘러싼 거센 압력이 풀리게 된 것이다.



 큰 승리를 거두어 한껏 고무된 지휘부 앞에 패장 진야선이 끌려왔다. 대군의 사령관이었다가 이제는 포로가 된 신세의 진야선이었지만, 주원장은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



 장강 이북에서 싸울 당시 주원장은 목대형, 이선장 등 현지의 지주들과 협력하는 데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고, 오히려 그런 방식에 능숙했다. 우리가 아는 황제로서의 홍무제는 무시무시한 숙청으로 신하들을 죽이는 뺄셈의 정치가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군웅으로서 주원장은, 오히려 적과 유민들 사이에서 동료를 찾아내 아군으로 만드는 설득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본래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성공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태도였다.



 장강을 넘어 내려와 아직 현지에 기반이 허약한 주원장 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역의 지주인 진야선은 충분히 매력적인 파트너십 관계를 고려해볼 만한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주원장 군은 적 3만 대군을 몰살 시키고 그를 굴복시킨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치열한 전투 중 허를 찌른 작전으로 적의 지도부를 사로잡아 전투 능력을 무력화 시킨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승리 자체는 두말할 것 없이 큰 승리였다. 다만 이를 좀 더 활용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있지 않을까.



 진야선도 충분히 탐나지만, 3만 대군은 더더욱 탐나는 존재였다. 주원장은 진야선에게 투항을 권했다. 포로 신세인 진야선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현시점에서 진야선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위치를 말해주듯, 이 귀순 절차는 꽤나 요란하게 이루어졌는데, 흰말과 검은 소를 잡아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는, 거창하게 주원장-진야선의 결의형제 맹세까지 행해졌던 것이다. 이로써 주원장과 진야선은 서로 간의 팔자에도 없는 의형제가 되었다.



 의형제 맹세 이후 진야선은 한동안 태평에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 대신 그 세력을 임시로 이끌게 된 사람은 장천우였다.



 죽은 곽자흥의 처남인 그는 현 군단 내에서는 묘한 위치에 해당했다. 그는 주원장과는 별개로 곽자흥과 인척 관계였고, 군단에 소속되었던 기간도 주원장보다 길면 길었지 결코 짦지는 않았다. 주원장은 곽자흥의 수양딸과 결혼한 사이고, 장천우는 자신의 누나가 곽자흥의 아내였다. 오히려 거리감으로 따지자면 장천우 쪽이 곽자흥과 더 가까웠을 것이다.



 말하자면, 장천우는 주원장과는 독자적으로 곽자흥의 유산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는데, 이 시점에서 죽은 곽자흥의 세력은 아직 100% 주원장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일전에 언급했다시피 곽자흥에게는 여러 부하들이 있었고, 그들은 주원장과는 별개로 경력을 쌓았던 인물들이었다. 물론, 지금은 주원장 계(系)의 세력이 압도적이긴 했다. 하지만 여타 파벌은 아직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일전 한림아의 용봉정권은 곽자흥의 아들 곽천서를 도원수로, 주원장을 좌부원수로, 장천우를 우부원수로 임명한 적이 있었다. 곽자흥의 아들이 살아있고, 직급상으로 주원장보다 높은 만큼 미약하나마 곽자흥의 혈족을 주원장보다 우선해 따르는 사람들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또한 장천우가 주원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원수로 임명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외부에서 볼 때 군단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주원장 외에 장천우였기 때문일 것이다.



 경력이 있고, 명분이 있고, 유명세도 있다. 마냥 아래로 대하기는 껄끄러운 인물이 장천우였다. 그렇다고 독자적인 세력을 정비 중인 주원장의 입장에선 자신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을 마냥 두고만 보기도 어려웠다. 그럼 어떻게 해야만 할까?



 이런 정치적 관계를 고려한다면, 이 무렵 장천우가 맡은 부대가 하필 다른 부대도 아닌 진야선의 부대라는 점은 묘하게 느껴진다. 진야선의 부대는 너무 당연하게도 진야선이 조직한 부대였다. 부대를 조직하면서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병력을 모았을 테니, 당장 지휘권을 손에서 놓았다고 해도 일선 부하들 사이에서 아직 진야선의 명령은 여전히 먹혀들고 있던 중이었다.



 문제는 이 부대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당사자인 진야선이 정작 믿을 수 없는 인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모사 풍국용은 주원장에게 강한 어조로 경고하기도 했었다.



 “진야선은 필시 배반할 사람입니다. 그를 보내지 않음만 못합니다.” (3)



 과연 진야선은 주원장에게 투항한 몸이면서도, 부하들에게 은밀히 명령을 전해 전투에 열성적으로 나서지 말도록 밀명을 내려놓았다. 장천우는 그런 사정은 꿈에도 모른 채 명령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집경 공략에 나섰다.



 집경을 지키는 원나라 장군 복수(福壽)는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그는 군사를 독려해 몰려드는 적군과 맞서 싸웠다. 적은 사력을 다해 저항하고 있는데, 아군은 몇몇을 제외하면 싸우는 둥 마는 둥 영 시원찮았다. 당연하게도 작전은 실패했고, 장천우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것은 이다음의 일이다. 1355년 9월, 주원장은 다시 한번 집경 공략에 나설 군대를 조직했다. 이 부대의 사령관은 다시 한번 장천우가 맡았다. 다만 이번에는 그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장수로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곽천서와 진야선이었다.



 곽천서는 명목 상 군단의 최고 지도자였다. 주원장이 유방이라면, 그는 초나라 회왕이었다. 지금까지는 곽자흥 사후 주원장의 존재감이 워낙 거대했기에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고,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는 행적 자체가 이 무렵이 처음이었다.

 

 다만 주원장은 여태껏 거의 모든 일을 손수 나서서 처리했다. 전투에 나서 부장들에게 군사를 나눠 작전을 수행케 할 때도, 총지휘는 늘 자신이 맡았었다. 그런데 집경 공략이라는 큰 산을 앞에 두고 그는 뒤로 물러섰다. 거기다 군을 이끄는 것은 자신에 비하면 애송이인 곽천서였다.



 지금까지 곽천서가 따로 전투에 나선 적이 있었는지조차 부실한 기록으로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아버지인 곽자흥을 따라 몇 차례 싸움에 나선적이 있을진 모르겠다. (4) 그렇다고 해도, 복수 같은 지휘관이 지키고 있는 집경을 공격하는 부대의 지휘관을 맡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보인다. 



 한번 실패했던 장천우와 싸움을 모르는 귀공자 곽천서만으로도 기묘한 인사배치였지만, 화룡점정은 세 번째 인물인 진야선이었다. 물론 진야선 군 소속이었던 병사를 제대로 다루려면 진야선이 직접 나서는 게 원활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진야선은 적과 내통을 한 인물이었고, 그 사실을 알아차리거나 증거를 포착하지는 못했다고 쳐도 심증적으로는 충분히 경계를 받고 있던 불순분자였다.



 그런 불순분자에게 수만의 대군을 맡겨 바깥으로 내보냈다는 것은, 물고기를 바다에 풀어놓고 호랑이를 산속에 풀어 넣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원장이 정말 그런 위험성을 몰랐을까.



 주원장은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쓰는 방식에 있어선 특히 그랬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충분한 위험신호에도 불구하고 뜻 모를 용인술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재앙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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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천서, 장천우, 진야선은 집경을 포위하고 7일간 힘껏 공격을 퍼붓었다. 그러나 집경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그 사이에 진야선은 성 안의 장군 복수와 이미 말을 맞춰놓았다. 포위전이 계속 되던 어느 날, 진야선은 사기를 진작 시킨다는 명목으로 곽천서와 장천우를 자신의 군영으로 초청했다. 같이 술이나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믿고 순진한 두 사람이 군영에 찾아오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둘을 사로잡았고, 두 명은 곧바로 도마 위에 놓인 생선처럼 복수에게 재물로 바쳐졌다. 복수는 가타부타 할 것 없이 바로 둘을 죽여버렸다.



 엄청난 배신행위가 펼쳐지고, 사령관이 두 명이나 죽게 되자 부대는 삽시간에 와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원나라 군이 반격하자 홍군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섬멸 당했으며, 진야선 역시 칼을 거꾸로 들이밀고 이전의 아군을 도륙했다. 그는 율양(溧陽)까지 홍군을 추격하며 섬멸전을 펼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로 인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고위층이 장막 너머에서 말을 맞춘 밀담의 내용을 말단 병사들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순진한 민병들이 ‘진야선이 배신하고 홍군에 투항했다’ 는 정보만 가지고 있던 탓에 그를 습겨했고, 이로 인해 어처구니 없이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써 곽천서, 장천우, 진야선에 이르기까지 이 작전에 참가했던 모든 지휘관이 죽음을 맞이했다.



 생각해보자. 곽자흥은 죽었다. 그리고 이제 곽자흥의 아들이 죽었다. 곽자흥의 처남 역시 죽었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큰 덕을 보게 될까?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이야기 한 것을 생각하면 비겁한 말일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을 주원장이 설계했다’ 고 나는 단언하진 않겠다. 단언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대패에도 불구하고 주원장은 이득을 본 부분이 분명 있다는 점이다.



 “가을 9월, 곽천서와 장천우가 집경을 공격했으나 진야선이 배반하니 두 사람은 모두 전사했다. 그러자 곽자흥의 부장들이 모두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秋九月,郭天敘、張天祐攻集慶,野先叛,二人皆戰死,於是子興部將盡歸太祖矣) (5)



 집경의 참극 이후 과거 곽자흥의 부장이었던, 그리고 주원장의 파벌에 속하지 않았던 장수들은 모두 주원장에게 귀부해 왔다. 명분상으로 모시고 섬겨야 할 주군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들을 다독일 수 있는 고참인 장천우 마저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이 시점에서 드디어 주원장은 죽은 곽자흥의 세력을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장악하게 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곽자흥의 아들로 막내 곽천작이 있었지만, 천작은 아직 나이가 어려 넘어가는 대세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천작은 이후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처형 당했다고 한다. 음모를 꾸몄다는 이야기마저도 조작일 수 있지만, 실제로 앙심을 품어 일을 저지르려 했다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 곽천작의 입장에선 뭐라도 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다만 모든 세력을 장악한 주원장으로서는, 그 수작마저 조용히 관망하고 있다가 명분이 생기자마자 바로 죽여버리면 그뿐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의 경과를 살펴보노라면, ‘아이러니’ 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곽천서와 곽천작의 죽음으로 곽자흥 가문은 그대로 멸망했다. 자손의 대가 모두 끊어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곽 씨 가문의 세력은 모두 주원장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런데 우리는 주원장을 찬탈자라고 비난할 수 없다. 곽천서의 죽음은 ‘불행한 사고’ 였다. 곽천작의 몰락은 ‘어린아이의 경거망동’ 일 뿐이다. 주원장은 결코 찬탈을 하지 않았고, 배신 역시 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우연찮게’ 자신에게 굴러 들어왔을 뿐이었다.



 곽자흥의 남은 혈족은 딸이 유일했는데, 주원장은 이 딸을 새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이 딸이 혜비(惠妃)로, 혜비는 3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은 모두 촉(蜀), 곡(谷), 대(代) 왕이 되었다. 주원장은 남은 곽자흥의 유산을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으로 편입시켰다.



 살아있을 적 왕이 되려고 하다가 주원장의 제지로 왕이 되지 못했던 곽자흥은 사후 저양왕(滁陽王)에 봉해졌다. 훗날 황제가 된 주원장은 상당히 세심하게 곽자흥의 위상을 챙겼다. 그의 사적비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쓰고, 묘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러나 이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정작 곽자흥에게 제사를 지낼 후손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이를 담당해 제사를 지내게 된 사람은 곽자흥의 아들도 손자도 친척도 아닌, 그저 생판 남에 불과한 유 씨(宥氏)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이 유 씨들이 곽자흥의 이웃집이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훗날의 일이지만 이 때문에 벌어진 웃지 못할 일이 있다. 훗날 명나라 홍치제(弘治帝) 시절, 자신의 고조부가 곽자흥의 넷째 아들이었다는 사람이 나타나 명나라 조정은 그에게 제사를 받들게 했다. 여기에 항의하고 나선 사람들은 곽 씨 집안사람들도 아닌 유 씨들이었다. 유 씨들은 여러 자료를 가져와 곽자흥에게는 넷째 아들이 없다고 따졌고, 결정적으로 유 씨가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은 태조 주원장의 의지라고 항변했다. ‘선황의 유훈’ 까지 들먹여질 정도가 되자 명나라 조정은 일전에 내린 권리를 박탈하고, 다시 유 씨들에게 제사 권한을 주었다. (6)



 생각해보면, 유 씨들은 곽자흥의 제사를 도맡아 하면서 부역의 면제라든지 여타 부분에 있어 적지 않은 이권을 누려왔을 것이다. 곽자흥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내세우는 주원장으로서는 이를 관리하는 담당자들을 크게 대접하며 자신의 통을 과시해야 세간의 수군거림을 방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뒤늦게 나타난 곽자흥의 후손이 정말로 곽자흥의 후손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진짜 곽자흥의 후손이었다면, 이권을 노린 전혀 상관도 없는 무리들에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권리마저 빼았겼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저 여러 가지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1) 명사 태조본기
(2) 명사 권 126 탕화 열전
(3) 명사 권 129 풍승 열전
(4) 명사 태조본기
(5) 곽자흥의 첫번째 아들은 전쟁 중에 죽었고, 곽천서는 차남이었다. 전쟁 중에 죽었다는 언급이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이야기라면, 곽천서 역시 전투를 치룬 경험이 있을 수 있다. 
(6) 명사 권 122 곽자흥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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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ign worker
17/09/21 00:51
수정 아이콘
(수정됨) 철저한 설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경은 공략하기 어려운 대도시고 상대는 만만찮은 인물이니 전세를 가다듬어 총공격을 해야 할 형편인데, 한번 패배한 장수와 싸움을 모르는 귀공자, 그리고 신용할 수 없는 자를 보냈다는 것은 차도살인의 계책으로 보입니다.
큰 물고기를 잡으려면 어망을 크게 써야죠. 수만의 병사를 잃은 건 아쉽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를만한 결과긴 한 것 같네요.
sen vastaan
17/09/21 00:54
수정 아이콘
곽씨네는 결국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 입던 빤쓰까지 털려버렸군요.
Camellia.S
17/09/21 00:55
수정 아이콘
차도살인의 계로군요... 주원장이 직접 생각했거나, 모사 풍국용이 생각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임전즉퇴
17/09/21 05:41
수정 아이콘
잘 보고 있습니다.
전장의 일은 알 수 없으니 의외의 공을 세웠다면.. 복장군이 곽가홍군의 속사정을 알고 큰그림으로 숨을 붙여놨다면.. 더 재밌었겠네요.
의병장 진대인이 어둠의 방식으로 의형제의 의를 행하고서 차도로 팽당했다는 소설을 써봅니다.
펠릭스
17/09/21 05:46
수정 아이콘
솔직히 이건 설계죠.
17/09/21 07:46
수정 아이콘
늘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AngelGabriel
17/09/21 08:04
수정 아이콘
대놓고 설계인데요;;; 덜덜...

판 다 깔아주고 그대로 조종했습니다.
루크레티아
17/09/21 08:41
수정 아이콘
모략이 난무하는군요...
호우기
17/09/21 09:46
수정 아이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을텐데 못 하는게 없네요
밑바닥에서 황제가 될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건가...
17/09/21 09:49
수정 아이콘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자유감성
17/09/21 20:17
수정 아이콘
햐 역시 아무나 황제가 되는게 아니네요
제라그
17/11/06 18:19
수정 아이콘
완벽한 모략이라기보다는... 판을 깔아두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이런 맥락에서의 주원장은 현대적 관점에선 미신적인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황제가 된 이후의 무시무시한 행보는, 젊은 날의 이런 결과들을 겪고 난 이후 자신이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져서 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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