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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7/07 16:54:21
Name The xian
Subject [일반] [일상] 벌써 10년
* 이 글은 저의 실제 이야기와 제 의식 속의 생각을 바탕으로 구성한 글입니다.


제가 애용하던 C모사의 키보드가 그 동안 골골거렸는데 며칠 전에는 어떻게 해도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맛이 갔습니다. 왼쪽 Shift와 Ctrl 키는 기본적인 키 입력조차 제대로 안 될 정도고 WASD 키와 주변 키들, 숫자 3, 4번 키 등등. 죽은 키가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일이 많고 집에 있는 시간은 적다 보니 방치하거나 응급처치도 안 하고 빡빡 눌러대면서 무리하게 사용한 탓에 더 이상 사용 못 할 정도로 일이 커진 것이죠. 그래서 일단 급한 대로 그냥저냥 쓸 수 있는 새로운 키보드를 하나 샀습니다만, 이번엔 집에서 뭔가를 쓸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의욕이 떨어졌습니다.

(아. '그 키보드가 아니면 안 돼'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회사에서는 그냥 기본으로 주어지는 만원짜리 키보드도 잘만 쓰고 지금 집에 새로 산 키보드도 그것과 비슷한 기종이거든요.-_-;;)

결국 고치든 새로 사든 이 키보드로 그대로 죽 갈 수밖에 없겠다 싶었지만 오래 된 제품이라 박스고 AS 보증서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겨우겨우 제품번호 등으로 키보드 업체의 홈페이지를 찾은 다음 주소를 알아내고 택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업체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 님, 키보드 수리 보내셨지요? OOO 입니다."(■■■ - 제 이름, OOO - 업체명입니다)
"네. 맞습니다."
"오늘 아침에 택배가 와서 한 번 테스트를 해 봤는데... 입력 안 되는 키도 참 많으시고... 키감도 싹 죽었더라고요."
"아... 그렇군요. 수리를 하는 데에 비용이 얼마나 들 것 같으신가요?"
"키보드의 키는 전부 다 교체해야 하고요. 내부 클리닝 등 해서...... 4만원 정도 되겠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그렇게 진행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뭐야. 생각보다 적게 들었네. 싶은 생각에 안도했습니다. 늦어도 화요일쯤에는 저한테 올 것 같다는 말에 더 안심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제가 한 가지 놓친 게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매우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난 이 키보드를 몇 년이나 써 왔던 거지?'


지금이야 블로그는 개점휴업중이고 이 게시판에 그냥 시덥잖은 세상 돌아가는 뉴스 이야기나 모아 올리는 사람일 뿐이지만 예전에는 에너지가 넘쳐서 시시콜콜한 일까지 블로그 등에 올렸었으니 아마도 PGR에 기계식 키보드 이야기를 올리거나 블로그에 올리거나 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에는 구글이 짱입니다. 구글신의 힘을 빌려 몇 개의 키워드를 넣으니 제목만 봐도 이불킥할 가능성이 높거나 누가 본다면 저를 잡아죽일 지도 모르는 글의 제목이 줄줄이 뜹니다. 그러한 글들을 다 거르고 난 다음에 저는 하나의 글을 찾았습니다. 제목마저도 심상찮습니다.

'기계식 키보드로의 입문. (부제 : 재정 파탄의 시작일까 영원한 친구를 찾을 수 있는 여행일까)'

'젠장. 이 글 제목 안 본 눈 삽니다'라는 생각을 뒤로 하고 그 글이 쓰여진 일자를 보았습니다.

2007년 7월 22일.


그리고 조금 더 뒤져 보니 당시에 근무하던 회사로 키보드가 온 날은 7월 25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C모사의 키보드를 10년, 그것도 만 10년에 딱 한 달 모자란 시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두들겨댄 것이죠.

망가지지 않은 게 이상하다 싶습니다. 아니, 그 전에 어디가 깨져서 버려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입니다.



10년 전 인터넷에 제가 남긴 흔적을 겨우 찾아내서 궁금증을 풀고 나니 점심시간이 끝났습니다. 일은 해야 하는데, 식곤증과는 또 다른 피로감이 몰려 왔습니다. 우선 든 생각은 '나는 정말 정말 악하고 게으르고 나태한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뭐 하나에 꽂히면 제가 싫증나거나, 아니면 망가져서 빈사상태가 될 때까지 제가 쓰는 것을 딱히 바꾸지 않고 죽도록 부려먹는 일이 많은데 이 키보드의 경우에는 후자인 것이지요.

가만 보니 다른 키보드를 아끼시는 분들의 후기나 사용기를 들어 보면 좋은 감도를 유지하기 위해 짧으면 몇 개월 단위, 길면 연 단위로 한 번씩 수리해 주는 고충을 마다하지 않는 좋은 주인도 있던데, 저는 사람으로 따지면 거의 빈사상태에 이를 정도로 이 키보드를 혹사시켰으니 어디 가서 기계식 키보드 사용한다고 말하기도 부끄럽습니다, 뭐.... 어쨌든 돈이 좀 깨지겠습니다만 그 정도 돈을 들인 것으로 10년을 함께 한 제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싶고,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그나저나. 누가 저도 싹 갈아서 한 10년 전쯤의 의욕과 건강 상태로 되돌려 줄 수는 없을까요?-_-;; 살긴 사는데 약에 쩔어 사느라 죽갔습니다.)


- The xian -

P.S. 광고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제조사는 이니셜 처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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