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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5/31 18:49:38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고려 말 양백연의 이야기 - 어느 정치적 인물의 초상

 

 

 


고려 말, 우왕 시기의 내부 정치는 크건 작건 거의 모두가 이인임이라는 거대한 정치가의 그림자 아래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우왕 시기 이인임의 영향력은 매우 막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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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나님의 위엄~~"

 

 

 

 


 물론 그토록 강력한 이인임의 세력에 돌을 던지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명덕태후, 지윤, 그리고 신진 유신들의 저항 등 많은 반대 요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이인임은 이를 극복해 내었고, 그 어떤 도전자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지금 글에서 언급할 인물인 양백연(楊伯淵) 역시 이인임에게 제거 당한 많은 반대파 중 한 사람에 속하는데...

 

 

 

 


* 여담으로 공민왕 시기 고려사의 기록 등으로는 양백안(楊伯顔)이라는 이름이 확인되는데, 이 인물은 양백연의 오기로 보입니다. 즉 동일인물이라는 것.

 

 


 양백연의 집안은 본래 고려인이 아니었습니다. 양백연의 가문은 본래 원나라 가문으로, 그의 아버지 양기(楊起)는 원나라의 관리였습니다. 말하자면 양백연은 원나라 사람, 즉 중국인이었고, 어린 시절 부친과 함께 고려에 귀화한 인물이었습니다. 양기를 시조로 내려오는 가계가 바로 청주양씨(淸州楊氏) 가문이 됩니다. 이 청주가 바로 중국의 청주를 말함은 물론입니다.

 

 

(다만 이 족보가 사실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렇다면 전반부의 설명을 많이 뜯어고쳐야 할 겁니다. 아무튼 일단 여기서는 넘어가겠습니다)

 

 


『청주양씨대동보』에 따르면 양기는 원나라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무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과 중서성정승을 지낸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정말인가는 차치하고, 원나라 사람인 양백연의 가문이 고려에 오게 된 계기는 1351년 중국에 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고려로 귀환할 당시, 양백연의 아버지 양기가 이를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는 아직 원나라의 영향력이 여전하던 시기, 그러한 가문의 인연 탓인지 양백연은 공민왕 시절 여기저기 자리를 계속 옮기며 관직 생활을 하다, 판각문사(判閣門事)에 재직하며 별달리 크게 독특 할 것 없어 보이는 관직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재밌어지는데, 바로 양백연의 성격 때문 입니다. 고려사에서는 양백연의 성격이 편첩(便捷)하다고 평했는데, 동작의 빠름을 묘사할때 종종 사용하는 편첩이라는 말을 사람의 성격에 붙였다는 것은, 양백연의 성격이 약삭빠르고 교활한 면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또한 양백연은 자신의 얼굴을 치장하는 걸 즐겼으며, 무엇보다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탐했습니다(貪財好色).

 

 

 


교활한 성격에 얼굴 꾸미기를 좋아하고 재물과 여색을 사랑하는 성격…… 어떻게든 사단을 벌이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 같은 요소들입니다. 결국 양백연의 그 성격은 문제를 만들어서, 판밀직(判密直) 신귀(辛貴)의 부인인 강씨와 간통을 벌이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요소가 있습니다.

 

 

 양백연이 간통을 했던 여자인 강씨의 부친은 찬성사로 있던 강윤성(康允成)이라는 인물의 딸 입니다. 기록상 확인되는 강윤성의 딸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로 이 신귀의 부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신덕왕후' 입니다.

 

 

 그럼 신덕왕후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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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사람.

 

 

 

 

 즉 양백연은 조선 왕조의 태조가 되는 이성계의 부인인 신덕왕후의 누나와 간통을 한(……) 인물이 됩니다. 1차 요동원정이나 1370년대 후반에 이성계와 양백연이 전투에서 같이 호흡을 맞춘 적도 있는데, 이 무렵이라면 이성계도 신덕왕후 강씨와 혼인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시기입니다.

 

 

 말하자면 이성계는 자기 부인의 누나와 간통을 한 남자와 같이 팀 먹고 전투에서 싸웠다는 건데, 그런 사실을 의식 했다면 상당히 묘한 기분이었을 듯.....

 

 

 


 또 여담으로, 이 신덕왕후의 누나이자 신귀의 부인인 강씨라는 여인도 보통 여인은 아닙니다. 기록상으로 양백연과 사통한 것이 확인되는 강씨는 또 다른 간통 기록(!)도 있는데, 그 대상은 바로 공민왕 시기의 중요한 네임드 인사 중 한 명인 '김용' 입니다. 남편인 신귀가 지방으로 좌천되어 있는 사이에 홀로 남은 강씨는 그야말로 살판이 나 간통을 했고, 양백연 - 김용 뿐만 아니라 수많은 대신들과 함께 불같은 '고려의 달밤' 을 찍었습니다.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신귀(辛貴)가 지방으로 좌천되어 가 있는 사이 그 처 강씨(康氏)가 홀로 지내면서 거리낌 없이 음행을 저질러 대신들 가운데 그 여자와 간통한 자가 많았는데 김용도 마찬가지였다. 신귀의 모친이 어사대(御史臺)에 알려 관련자들을 국문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김용은 권세있고 왕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혼자 모면했다. ─ 고려사 김용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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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판 국민 호구 신귀. 자기가 없을때 자기 집 베겟머리에 눕지 않은 조정 동료들이 없다더라.

 

 

 

 

 남편이 없어졌다고 바로 살판 났다며 간통하러 들락거린 사람들이 고려의 조정 대신이라는 것도 낯뜨거운 스캔들이고, 그 정도로 대신들을 거침없이 함락시킨 강씨도 미색이건 뭐건 보통이 아니었을듯 싶습니다. 아무튼 조정 대신들이 '베갯머리 동서' 였다는 이 희대의 스캔은 참다 못한 신귀의 어머니가 사건을 호소한 탓에 조사가 벌어졌고, 왕이 직접 보호해주는 김용 정도 되는 인물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양백연의 경우는 헌사에서 파직당한 후, 금고 형에 처해졌습니다

 

 


 여자문제로 타격을 받게 된 양백연이었지만, 양백연의 여자 버릇은 여기서 끊긴건 아닌 것 같습니다. 후술하겠지만 뒤에 이 문제로 심각한 곤혹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일반적인 신료로서의 양백연의 커리어는 끊김이 있게 되나, 당시의 시대상 덕분에 양백연은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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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들에겐 지옥같은 난세인 동시에, 무인들에겐 기회의 시기였던 고려 말.

 

 

 

 

 일반적인 원나라 계열 기성세력으로서 양백연의 경력은 어중간하게 끝나게 되었지만, 그는 곧 완전히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됩니다. 북방과 남방에서 수없이 외적이 쳐들어오는 당대에 급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 중 두각을 나타내는 1인으로 양백연은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 앞서 1363년, 공민왕에 대한 도전이었던 '흥왕사의 난' 이 벌어집니다. 이 당시 최영은 우제(禹磾)·안우경(安遇慶)·김장수(金長壽)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반란군을 처단하여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양백연 역시 이때 기회를 놓칠새라 최영의 무리에 함께 하여 반란군 토벌의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어 화려하게 정치계의 중심 중 하나로 컴백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원나라에서 귀의한 양백연의 출신은 전형적인 기성세력의 그것이었습니다.

 

 

 

 양백연이 한번 파면되기 전 판각문사로 있을 당시 확인되는 행보로 원나라의 황후천추절(皇后千秋節)에 이를 축하하는 경하사로 임명되어 원나라를 다녀왔던 것이 그 증거중 하나입니다 . 그러나 이후 양백연은 반란과 외적 침공이 끊임없이 벌어지며 흔들리던 고려에서 '무인' 으로써 자리를 잡으면서, 가장 기성세력 같은 출신성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혼란기에 군공으로 입신' 한다는 특이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대세가 바뀌는 당시 싱황에서 양백연 개인으로써는 오히려 더 좋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원나라 출신인 양백연은 이제 정반대로 원나라 기황후의 사주를 받은 덕흥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황해도의 자비령을 방비하는 임무를 맡는가 하면, 1차 요동 원정의 지휘관 중에 한 사람으로써 포함되어 '어제의 조국을 적극적으로 공격' 하는 행보를 보이며, 원나라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끊어버렸습니다. 고려의 떠오르는 유능한 무인으로써 자신의 성분을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 했던 것 입니다. 물론 성격이 착해졌다는 것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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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방에서 원나라의 직접적인 위협이 사실상 거의 일소된 이후, 양백연은 다른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왜구와의 싸움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그는 서북면 원수로 있을 당시 평안도까지 침입한 소규모 왜구를 쫒아내기도 하고, 왜구가 발호한 틈을 타 일어난 100여명 가량의 초적 무리를 격멸 시키기도 했으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정에서 배치한 지휘사, 도순찰사 등으로 여러차례 언급 되며 자주 기록에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행보는 임견미, 변안열, 그리고 이성계와도 일맥상통 하는 부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왜구의 침입이 점차 거대화되고 격렬해짐에 따라, 소규모 교전 위주로 전과를 올리던 양백연의 전공 역시 점차 기하급수적으로 거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377년, 안그래도 이미 왜구의 소굴이 되어 있던 강화도에서, 50여척이나 되는 왜구의 대규모 함선이 갑자기 출몰하여 부사 김인귀를 척살하고 고려 병사 1,000여명을 포로로 사로잡는 희대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병사 100명을 포로로 잡아도 대규모인데, 무려 1,000여명이나 되는 병력이 포로로 잡히다니!

 

 


 아무리 왜구에 천지가 유린 당하고 있던 당대 고려의 처지라 해도, 이런 사건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훗날 진포대첩에서 활약하기도 하는 장수 나세는 이때 양백연과 함께 5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강화도로 가서 이들을 쫓아내는 성과를 거두었고, 양백연은 나세와 함께 강화도 곳곳에 숨은 왜구를 찾아 소탕 작전을 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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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풍 전투에 대한 과거의 포스팅

 

 

 

 강화도에서 작전 다음 해인 1378년, 양백연은 자신의 커리어에 있어서 일대의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어쩌면 '나라를 구했다' 고 까지 표현할 수 있는 작전에 참가하게 됬던 겁니다.

 

 

 

 1378년, 수도 개경과 지척인 착량 어귀에 상륙한 대규모 왜구들은 미처 고려의 수비군이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수도 개경 으로 진군해 왔습니다. 고려군은 최영을 중심으로 방어라인을 구축했지만 시간이 너무나도 촉박한 탓에 전투력의 정비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왜구가 수도 개경으로 가는 길목인 해풍에서 유일하게 버티고 있었던 것이 최영의 군단이었으며, 그 최영의 군단이 무너지면 개경은 바로 함락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대에 양백연이 부장으로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전투 도중, 수비군 중 본대인 최영의 군사가 (작전상 후퇴였는지 그저 패주였는지 확실하지 않은) 퇴각을 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최영과 그 부하들이 전장에서 이탈함에 따라, 작전지역에서 교전을 치루는 유일한 장수는 바로 양백연 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최영 부대가 완전히 패주했으면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작전상 퇴각이었다고 해도 교전 부대가 붕괴되면 모든 것이 끝장날 순간이었으나, 양백연의 부대는 적을 상대로 계속 버티는 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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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양백연의 부대가 필사적으로 버티는 동안, 저 멀리서부터 대라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이성계의 정예 기마 부대가 너무 늦지 않은 정확한 타이밍에 전장에 도착했던 겁니다.

 

 

 이성계의 부대는 양백연의 부대와 교전하고 있던 왜구의 측면을 후려쳤으며, 그 시점에서 패잔병을 수습한 최영의 군대 역시 다시 전장으로 복귀 했습니다. 결국 왜구는 삼면으로 완전히 포위되어 섬멸되었습니다.

 

 

 

 이때 우왕은 개경에서 문무백관들과 함께 짐을 전부 꾸리고 피난할 준비만 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전투의 승패에 따라 왕이 개경을 버리고 몽진하느냐 마느냐가 걸린 국운이 걸린 전투였는데, 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겁니다. 엄청난 승리였습니다.

 

 

 

 해풍 전투에서 기세를 타며 이름을 과시한 양백연은 계속해서 큰 전공을 올리게 됩니다. 해풍 전투의 다음 해인 1379년 5월, 무려 2,7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왜구가 진주에 쳐들어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왜구는 규모도 규모였지만, 전체 2,700명의 병력 중 700명이나 되는 병력이 기병이었고, 상당한 전력을 갖춘 부대였습니다.

 

 

 

 하지만 양백연은 우인열, 배극렴 등과 함께 이를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웁니다. 천단위가 넘는 병력을 격파하는 건, 당시 빈번하던 왜구 토벌전 중에서도 분명히 돋보이는 굉장한 성과였습니다.

 

 

 

 단 이렇게 상당한 실적을 계속해서 거둔 양백연이었지만, 민간에서의 인기는 좋지 못했습니다. 워낙 거칠고 군사를 움직이면서도 백성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탓에, 민간에서는 "차라리 왜구를 만나는게 낫지 양백연의 군대를 만나진 않아야 한다." 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비단 양백연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당대 고려군과 지휘관들 역시 민간에 대해 피해를 심하게 끼치는 편이었습니다. 민간에서 인기가 좋았던 당대 고려 장수는 이성계 정도였고, 아마도 속전을 중시하여 최단시간 안에 전투를 끝내고 민폐를 끼치기도 전에 사라지는 부대 특성이 원인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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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양백연의 계속 되는 공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조정 내에서도 당연히 주목받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2,700명의 왜구를 격파하고 양백연이 개선한 그날, 고려 왕들의 영정이 있고 역대 왕들이 자주 들린 천수사(天壽寺)에서 이를 환영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왕은 양백연에게는 금 50냥, 비단, 안장 얹은 말, 궁중의 술을, 우인열 등에게는 은 50냥, 비단, 궁중의 술을 내리는 포상을 내렸습니다. 포상을 받은 양백연은 "내 공에 비해 상이 너무 과하다." 며 하사받은 금을 다시 사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탐욕스럽다' 는 말을 듣던 양백연이 이런 행보를 취한 것은, 스스로 몸을 사리려는 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우왕은 양백연의 사양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에 비해 상이 너무 과하다.' 라고 한 양백연에게 오히려 이렇게 대꾸하기까지 합니다.

 

 

 

 "상이 많다니? 오히려 그대의 공에 비하면 이 상이 너무나 부족할 지경이오."

 

 


그리고 도당에 명해 다시 한번 잔치를 열어주게 했는데, 누가 보더라도 이건 특별한 총애이자 파격이었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에는 양백연이 이러한 총애를 바탕으로 공을 믿고 교만하게 굴자, 이인임과 임견미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탄핵했다고 합니다. 양백연이 공을 믿고 이를 뻐겼을 수는 있습니다. 다만 생각해 볼 것은, '공을 믿고 교만하게 굴기에 탄핵했다' 는 것을 단순히 '양백연 성격이 더러워서 그랬나 보네.' 라고 보기에는 너무 단순한 사고라는 점입니다. 그야 공을 믿고 교만하게 구는데 불만을 가질 수야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인임' 과 '임견미' 가 불만을 가진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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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종간나 눈에 거슬리는데....?"

 

 

 

양백연에 대한 우왕의 특별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대우는, 우왕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보려는 발버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인임에게 있어서 이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을 것 입니다. 즉 이인임에게는 우왕의 칼이 될 수 있는 인물을 제거해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다.

 

 

 

헌사에서 양백연을 지적하고 물고 늘어진 것은, 본래 말이 많았던 양백연의 여자 문제였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양백연은 처제와 간통을 하고 다닌다.


2. 양백연은 전 판사 이인수의 첩을 빼앗았다.


3. 양백연은 밤중에 기병 수십명을 보내, 죽은 밀직 성대용의 집을 포위하고, 수절한 상태이던 성대용의 측실을 강간했다.

 

 

 

 

 이 탄핵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양백연의 평판을 감안해 보면, 진실이라고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어 보이긴 합니다. 다만, 양백연의 품성에 관한 이야기야 당대에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을 것이고, 새삼 그것이 제기된 것은 이인임, 임견미가 헌사를 부추겼기 때문입니다. 즉, 단순한 성품에 관한 지적이라고 보기엔, 정치적 의도가 진하게 배여져 나오고 있습니다.

 

 

 

 개선장군이던 양백연은 순식간에 관직을 삭탈 당하고 유배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묘한 부분이 있습니다.

 

 

 

 

 양백연이 탄핵을 당하고 유배되기 직전, 그날 밤에 환관 임보(林甫)와 한진(韓軫)이라는 두 인물이 갖혀 있는 양백연을 불러들이려 했습니다. 두 명의 환관은 왕명을 내세워 조작한 서신으로 양백연을 빼내려고 했으나 이들이 보낸 심부름꾼이 중간에 잡혀버리고 말았고, 오히려 임보와 한진 역시 잡혀가는 결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런데…… 정말로 '조작' 이었을까?

 

 

 

 환관들이 갑자기 왕의 서신까지 조작하여 권력을 잃은 죄인과 접촉하려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정말로 우왕이 양백연을 빼내려고 시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실패하자 꼬리 자르기를 시도한 것일 수 있다는 말 입니다. 우왕은 앞서 보았듯 양백연에게 호의적이었고, 후술하겠지만 이후에도 양백연을 비호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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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이 단순히 '음행' 이었다면, 이 일은 양백연 개인의 정치적 커리어에 타격을 입히는 정도에서 끝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건은 곧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는데, 바로 '최영' 의 개입 탓이었습니다.

 

 

 두 명의 환관이 양백연을 빼내려다가 실패한 사건 이후, 최영은 우왕에게 건의를 올렸습니다.

 

 


"상호군 전천길이라는 자가 예전에 저에게 말하길, '양백연이 두 명의 시중을 죽이고 자신이 수상이 되려고 한다' 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그 일당을 엄히 문초하여 진상을 확인하시옵소서."

 

 


 최영의 말에 우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리석은 자의 망령된 말을 믿고 여러 재상들에게 피해를 주지 마시오.”

 

 

 

 양백연을 비호하려는 의도가 진하게 나오는 말이었지만, 최영은 전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품행 문제였던 양백연의 옥사는 최영의 건의로 본격적으로(본래도 정치적이었지만) 정치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최영은 전천길, 한진, 임보와 전 제학(提學)이던 김도(金濤)를 양백연의 일파로 몰아 옥에 가두고 강도 높은 심문을 가했습니다. 여기서 또 기묘한 우연인지 필연인지, 김도는 이인임과 틈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을 모두 두들겨 패니 매에는 장사 없다고, 전천길, 한진, 임보는 모두 최영이 원한 대로 말을 맞추게 됩니다.

 

 


 "양백연이 음모를 꾸며 자기는 좌시중이 되고, 최영은 우시중으로 만들고, 성석린을 대사헌으로, 임보를 반주(班主)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3명이 있는 말 없는 말을 할때, 김도만은 끝까지 연관성을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합니까? 버티면 버틸수록 지독한 고문만 더해지는것을... 그렇게 볼기를 맞고 기절하다가 다시 일어나기를 세차례에, 참혹한 고문에 결국 김도도 앞서 말한 3 사람과 같이 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양백연의 음모' 라는 실체를 만들어내는 목적을 달성한 최영은, 이번에는 자기에게 음모를 말해줬다는 전천길까지 잡아다 고문하여 성석린, 지문하 윤승순, 판밀직 김용휘, 동지밀직 유만수, 양백연의 아우 양계연등의 이름을 캐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옥사는 점차 커지게 되어, 양백연의 아우 양중연, 양자연과 그 친구인 임의, 신렴, 전법판서 안득희, 판사 김남귀, 조숙경, 이귀, 전 직문하 홍림, 전 소부윤 조희보 등등이 줄줄히 연좌되었고, 유학자인 홍중선도 연좌되었습니다. 이건 또 우연인지 필연인지 홍준선은 우왕의 스승이었던 인물로, 우왕이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끝장나게 된 겁니다.

 

 

 


 이렇게 관련된 인물들 중 당사자인 양백연을 비롯한 6명의 핵심 인물이 모두 처형 당했고, 나머지도 장형에 처해졌습니다. 양백연의 집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었고 그 자녀들은 노비가 되었습니다. 위풍당당한 개선장수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어진 참극이었습닌다.

 

 


 이 사건에 있어서 최영은 양백연의 처형이지만 정작 사이는 좋지 않기로 유명하던 김용휘를 참작해준 것 외에는 조금의 사정도 두지 않았습니다. 관련자들은 정말로 엄하고 모질게 고문했고, 혐의가 약해보이는 사람들도 줄줄이 사탕처럼 엮어들어가 처벌을 면치 못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심하다'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양백연은 대중들은 물론 역사 동호인들에게도 그다지 친숙한 이름은 아니긴 합니다. 때문에 양백연을 다룬 '평' 자체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양백연의 옥사 사건에 대한 몇몇 학계의 평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평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양백연(楊伯淵)은 공민왕 초기부터 꾸준히 전공을 세워 정치적으로 성장해 왔던 인물이다. 또한 숙청되기 직전까지 이인임(李仁任)·최영(崔瑩) 등과 정치적으로 충돌한 적이 없어 숙청당할 구체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전공을 믿고 교만하게 행동한 것이 빌미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 옥사는 양백연 개인의 처벌에서 시작되었지만, 최영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사건은 확대되어 윤승순(尹承順), 성석린(成石璘), 유만수(柳曼殊) 등 고위 관직자들을 포함한 20여 명이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관직에서 쫓겨난 대규모 옥사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옥사가 확대된 것은 환관과 외척 등을 기반으로 왕권을 행사하려 한 우왕에 대해 이인임·최영 등 무장세력들이 반발하였기 때문이다.

 

실제 홍중선은 외척으로 이인임·최영 등에 의해 우왕 3년에 제거된 지윤(池奫)을 대신해 우왕의 왕권 강화를 후원해줄 인물로 인식되었다.…」

 


이형우, 「우왕의 왕권강화노력과 그 좌절」 『역사와현실』 23, 1997, 113~124쪽.

 

 

 

 


 이 외에도 몇몇 찾아볼 수 있는 양백연의 옥사에 대한 대체적인 시각은, 이것이 단순히 양백연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양백연의 뒤에 있는 '우왕' 을 겨냥하는 공격이라는 시각들입니다. 우왕은 떠오르는 신흥 무인인 양백연을 비호하여 자신의 장기말로 사용하려 했고, 환관등을 이용하여 접촉도 꾀하였으나 이는 이인임 등에게 모두 간파 당하고 저지 당하고 맙니다.

 

 

 


 이인임은 자신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양백연이 싹을 튀우기도 전에 완벽하게 눌러 버렸을 뿐 아니라, 여기에 더해 틈이 있던 홍중선, 김도 등까지 모두 엮어 끝장을 내버렸다. 특히 같이 정방에서 권력을 나누던 홍중선의 경우는 더욱 치열하게 올가미를 씌운 경우인데, 이인임이 홍중선을 처리한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당시 사지로 여겨지던 명나라로 가는 사신으로 홍중선을 추천

 


② 그런데 홍중선이 요동의 나하추 때문에 가질 못하자 자기 일파를 시켜 탄핵

 


③ 유배 되어 홍중선이 힘을 잃어 저항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양백연의 옥사에 말려들게 해 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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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양백연 등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이고 사건을 키워 모두를 쓸어버린, '이인임의 사냥개' 로 활동했던 사람이 바로 최영이었다는 점 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이전 이인임의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지윤을 처리하는데도 한몫을 거들었던 것이 최영이었고, 우왕의 유모인 장씨가 이인임 일파인 임견미 등을 처리하려 할때 이를 저지한 것도 최영이었습니다. 그리고 양백연 등을 제거하는데 있어 가장 활약한 사람 역시 최영이었다. 최영은 이인임의 가장 확실한 방패였고, 그가 이인임을 지지하는 한 그 어떤 공격도 무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뭐 이 말은 바꿔 말하면...

 

 

 

 1379년. 이 해는 양백연의 옥사와 홍중선의 죽음, 유모 장씨의 유배가 모두 일어난 해 입니다. 이인임과 우왕의 보이지 않은 신경전은 이인임의 절대적 완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우왕은 마지막 남은 희망으로 명덕태후 곁으로 거처를 옮겨 태후의 만수무강을 빌었으나, 다음해인 1380년 1월 명덕태후마저 사망하면서 사실상 우왕으로서 이인임을 제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사라지고 맙니다.

 

 

 

 

 

“선왕께서 갑자기 별세하시고 전하께서 겨우 열 살 나이에 대통을 이으시니 도처에 우환이 많고 인심이 동요하여 사직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어린 나이로 능히 태후의 가르치심에 따라 법도를 잘 지키고 스승을 좇아 배움을 즐기셨으며 날마다 장상(將相) 대신들과 함께 경연(經筵)을 열어 수신과 치국의 도리를 강론하셨습니다.

 


또한 위의(威儀)와 모든 행동거지에서 작은 실수도 저지르지 않으시니 각 나라에서 온 사신들이 다들 탄복하며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총명하고 영특하여 장차 나라를 태평하게 할 임금이 될 것이다.’라고 칭송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왕위를 넘보는 무리들이 역심을 품지 못하게 조종의 영령들께서 잘 알아 돌보아주신 결과 우리 전하께 일찌감치 맏아들을 내려주시어 조정의 왕업을 잇게 했으니 이는 진실로 삼한이 만세토록 누릴 복록입니다. 이러한 좋은 기회에 전하께서 어찌 자손만세에 전할 국가의 대계를 세우지 못하시겠습니까?

 


금년 정월 이래 항간에는 전하께서 어린애들과 어울려 사냥에만 마음을 쏟아 후원에서 말을 달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시던 초기였던 어린 시절에도 그와 같은 짓을 하지 않으셨는데 하물며 이미 나이가 차 왕비까지 맞으신 지금 어찌 그런 일을 하셨겠는가? 오로지 국가를 통치할 근본 원칙과 법규를 지어 만대에 제시해야 할 터인데 어찌 그런 일을 기꺼이 하셨으랴? 만약 그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모두 어린애들의 소행이리라.’

 


그런데 최근 전하께서 날마다 불량배들과 어울려 의장과 경호를 내팽개치고 민간의 거리를 쏘다니시니 숙위(宿衛)하는 관리들은 그저 빈 대궐만 지킬 뿐입니다. 또한 행인들은 용안을 뵙고도 그 신분을 모르고서 그저 불량배로만 여기고 행차를 가로막고 불손한 행동을 하는 자까지 생겼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다들 실망하여 저마다 ‘주상께서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셨는가?’라고 말하며 대신과 백관들도 하늘만 멍히 쳐다보며 몰래 탄식할 뿐 전하의 진노가 두려워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 1380년 우왕 6년 백군녕의 상소 中

 

 

 

 


 고려사의 기록에서 그전까지 간헐적으로 보이던 우왕의 광증과 기이한 행보에 대한 기록은, 이 무렵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당시 조정 관료 중에 한 사람이던 백군녕은 상소문에서 "그토록 총명하던 주상이, 어찌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셨단 말인가?" 하고 놀라움과 슬픔을 모두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왕의 미치광이 같은 행보 모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을 테고, 조선 왕조의 이데올로기를 위한 조작과 왜곡이 전혀 없을것이라 보는 점도 무리일 겁니다.

 

 

 

 

하지만, 유독 그러한 모습이 '우왕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가 된 시점에서 자주 나오게 되었는지, '총명하던 왕의 변질' 을 슬퍼하는 신하의 상소문이 그 시점에 나오게 되었는지는, 조금 묘한 점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고려 말은 폭풍 같은 시대로서, 수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순식간에 도약하고 몰락하고를 반복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그런 시대의 흐름을 타고 최종적으로 정점에 오른 인물이구요. 양백연은 그런 시대의 흐름에 올라 타 가다가 정점에 가지 못하고 결국 거기서 밀려 떨어져 정치적 흐름 속에 제거 당한 수 많은 사람 중에 한 명입니다. 다만 그런 인물 하나를 중심으로 보더라도, 제법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사방으로 확장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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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블빠
17/05/31 18:53
수정 아이콘
새로운 드라마의 산실 고려말 크크...
카루오스
17/05/31 18:57
수정 아이콘
햐... 이건 또 다른 재밌가 있네요. 정도전에서 다뤄지지 않은게 아쉽네요.
스웨이드
17/05/31 19:01
수정 아이콘
흥미진진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17/05/31 19:04
수정 아이콘
역시 현실 정치판의 치열함이란 드라마에 비할바가 아니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방청객
17/05/31 19:43
수정 아이콘
고려후기 왜구라고 하는 존재가 순전히 일본인으로만 구성된 집단이었나요? 아니면 중국처럼 체제에 불만을 가진 자국민도 포함하는 집단이었나요? 궁금해서 여쭈어봅니다.
17/05/31 20:02
수정 아이콘
와 중간까지만 해도 남의 여자와 간통하러 다니던 한량이 인생역전하는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끝이 너무 비참하네요 무슨 드라마 한편 본 줄 알았네요 사료에 드러나지 않는 실제 정황이 너무 궁금하네요 ㅜㅜ
17/05/31 20:07
수정 아이콘
신불해님 글은 늘 재밌어요 헉헉 글만 써주세요
전립선
17/05/31 20:40
수정 아이콘
캬 박영규 이인임은 몇번을 봐도
17/05/31 21:22
수정 아이콘
항상 흥미로운 이야기들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17/05/31 21:50
수정 아이콘
추천
신의와배신
17/07/28 07:58
수정 아이콘
신불해님의 글을 다시 읽어보는 중인데 무심코 지나쳐간 글이 있네요. 저는 잘 모르는 이야기였고 이 글로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어느 사내의 이야기네요.

요약하자면 여색을 좋아하고 인심도 잃었으나 전공만은 최고를 달리던 장수 한명이 또다른 장수의 모함을 받고 사망한 사건을 다룬 글이네요.

개인적으로 해풍전투에서 최대의 의문은 최영의 퇴각부분입니다. 듣보잡인 양백안(이 사람이 양백연인줄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이 후퇴를 안하고 버티는데 최영은 왜 후퇴를 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이 옥사 사건을 읽고 추론부분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최영은 겁에 질려서 해풍을 버리고 도주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와중에서 후퇴를 거부한 양백연과 크게 다투고 명령거부를 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백연이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자 그날의 추태를 덮기 위해 앙갚음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신불해님께 묻고 싶은 무수한 질문이 생겨 이렇게 댓글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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