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7/03/03 02:02:37
Name 시간
Subject [일반] 하, 이제 내가 한 미역국이 엄마 미역국보다 맛있네~
"아 0선생님. 잘 계셨어요?" 나 그 집주인이에요."
모르는 번호 전화는 왠만해서는 받지 않는데, 영 특이한 번호라 받았더니, 집주인이었다.
이년 전 부동산에서 전세 계약서를 작성할 때, 그래도 살 사람과 얼굴 한번은 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던,
집만 다섯 채 이상 갖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그 후 이년 만에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네 선생님, 어쩐일이십니까 전화를 다 주시고"
참,, 나도 사회인이 되었나보다.
이미 한달 전부터 새로 구할만한 집들을 하루에도 서너번씩 0빵, 0이0부0산에서 검색하던 나인데도, 짐짓 "엣헴, 난 아무것도 아쉬울 것이 없소" 하면서 전화를 받아버렸다.

뭐 여차저차 상호묵시적 계약연장이라는 제도 하에 나는 단 돈 백원의 전세보증금 상승 없이 지금 이곳에 더 머무르게 되었다.
주변 시세는 못해도 이천은 뛰었는데.. 그 간 단 한번도 집주인에게 문자 한 번 안한 나의 공덕이 아닌가 싶다.


나이 서른 먹도록, 군대 시절 제외하고는 한시도 엄마가 개어주지 않은 팬티를 입어본 적이 없던 나인데,
그 무슨 패기로 집을 뛰쳐나갔었는지, 그 시간이 벌써 이년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 나의 독립계획은 오로지 하나였었다. 성공한 직장인의 싱글라이프.
밤에 아무도 없는 집에 비밀번호를 띡띡띡 누르고 들어와, 진열장에서 그날 마음에 드는 술을 꺼내어, 그날의 술에 맞는 잔에 가득 따라 붓고는,
오늘도 수고한 나에게 한 잔.

솔직히 말해 내 자취 공약의 절반은 저것이었다.

하지만 자취를 해본 그 누구든 알 것이다.
자취란, 내 한 몸과의 싸움이다.
내 한 버러지 소리 안 듣게 살만큼 해 나가는데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의 싸움이며,
전체 이용시간의 1/100이라도 되면 절이라도 하면서 낼 수 있는 관리비와의 투쟁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고, 하루하루, 오늘 뭐 먹지?의 고뇌의 연속이다.


처음에는 집에서 싸다 준 김치로 끓여낸 김치찌개도 무언가 맛이 안맞는 것에 좌절했었다.
그런데 그런 날들이 지속되다보니, 스스로 꺳잎절임을 담그고, 회식날을 대비해 북엇국을 미리 끓여놓고, 주말용 미역국을 셋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홀로사는 자취생 주제에, 게다가 일주일에 이틀이나 집에서 저녁을 먹을까 하는 주제에,
고기용 무쇠팬, 볶음용 스킬렛, 전골용 냄비. 국물용 냄비, 심지어 계란후라이용 냄비까지 갖춘 부루주아 자취생이 되어있었다.

자, 솔직히 얘기해서 나는 내가 만들어서 먹는 모든 음식들에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일부는 못마땅할 수 있겠으나, 애초에 내가 자신없는 음식은 하지를 않았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다는 것이 가장 정합한 설명일 것이다.

그 중 내가 가장 아쉬워 한 요리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미역국이다.
나도 기억은 잘 못하지만, 엄마가 그랬다. 나는 갓난쟁이 때부터 미역국이라면 그저 좋아했다고.
아마 신생아때부터 병원에서 검사결과 요오드가 부족하다며, 해조류 멕이라고 했던 것이,
지금의 내 식성을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자취생활을 하면서 나는 미역국을 종종 끓였는데, 하, 이게 도통 신기한것이, 아무리 미역국을 끓여도 도무지 엄마가 해주던 그 맛이 나지를 않았다.
내가 요리를 못하나? 아니다. 오징어볶음, 장조림, 심지어 해물탕까지, 내가 한 것이 외려 더 맛있었다. 근데 왜 미역국은 이럴까..
거진 삼년 째 나는 미역국의 미스테리를 품고 자취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 국물 낼 때, 멸치랑 다시마랑 넣고 국물 내야지"
내가 끓인 미역국을 먹고는 여자친구가 한 말이다. 처음에는 왜 끓였냐며 승질 부리더니, 나중에는 두 그릇이나 먹어놓고서는 말이다.
"무슨 소리야? 미역국은 고기 볶은거랑 미역볶은것에서 우러나는 맛인데. 다시다는 이미 연0 한 숟갈 넣었어"
"하,, 역시 이거 잘 모르네, 암만 그래도 국물맛을 낼라면 더 해야지, 오빠가 원하는 맛이 이거보다 훨씬 더하구만, 그러면 더 해야지. 고기볶고 미역볶고 물 넣고 할 때, 다시마랑 멸치도 넣어, 그러고 끓이다가 중간에 빼, 쓰니깐."

하 씨, 사기당한 기분이다. 내가 이미 미역을 신나게 볶고 한시간동안 끓였는데, 대체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뭐 그 이후 나는 여친 말은 "딱 한번만" 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주 후,, 나는 들른 엄마집에서 미역국을 먹으며, 드디어 이 말을 했다.
하, 이제 내가 한 미역국이 엄마 미역국보다 맛있네~


물론 몇가지 변명거리는 있었다. 고기를 조금쓰고 대신 조개로 때우려했던 것이 크지 않았다 싶다.
해조류로 끓인 미역국과 고기로 끓인 미역국의 차이는 어마어마 하다.
근데 그런것보다 더 큰 이유는, 이제 엄마는 더 이상 미역국을 맛있게 끓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미역국은 그야말로 나만 환장하는 음식이었다. 아빠와 동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메뉴이다.
그냥 여차저차 내가 일요일에 온다니깐 산악회 일정은 일정대로 대충 준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여자는 나이가 들 수록 남설호르몬 비중이 높아져 사회적이 된다고 했었나? 주말이면 산악회나 모임에 가느라 바쁜 몸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내뱉은 그 말을 하자마자, 금방 다시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저녁식사는 곧 끝났다.


잘 모르겠다. 언젠가 내가 해준 음식을 엄마가 해준 것보다 더 맛있다라고 해줄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이건 우리 아빠한테 배운 요리야 라고, 이름도 잘 모를 여자에게 해주더라도 좋겠다.
근데, 뭔가 지금의 이런 기분은, 뭔가 좀 그렇다.. 마냥 좋지많은 않네.




한줄 요약 : MSG는 넣으면 맛있습니다. 천연MSG? 더 넣으세요, 더 맛있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유리한
17/03/03 02:57
수정 아이콘
어제는 고기 사러 나가기 귀찮아서 집에 참치캔 있길래 참치 미역국 끓여먹었습니다. 국거리가 떨어져서..ㅠㅠ
참치 미역국도 뭐 별거 없이 기름은 빼버리고 참기름에 미역이랑 참치 볶다가 간장 넣으면 끝.
저는 따로 멸치 국물은 안내고 그냥 해먹습니다.

저도 요리하는거 좋어해서 여러가지로 테스트를 해봤는데,
미역의 품질하고 간을 무엇으로 맞췄냐 (국간장 vs 조선간장 vs 액젓 vs etc..) 정도가 맛에 영향을 크게 주더군요. 뒤로 갈수록 천연msg 폭발 아니겠습니까 크크
저는 소금은 안쓰고 조선간장이나 액젓을 씁니다. 아니면 3:1 정도로 섞어서 써요. 액젓종류를 가리지는 않구요.
액젓은 한번 끓이고나서 쓰면 좀 더 깔끔한 맛을 내지만 귀찮아서 그냥 씁니다.

근데 그런거 다 필요없고, 어제 끓어놓은 미역국이 제일 맛있습니다. 크크
(뭐 김치찌개나 카레도 마찬가지인데.. 맛이 국물로 나왔다가 다시 재료로 들어갔다가 다시 국물로 빠져나와서 그런다나..
저는 그냥 속성으로, 국물을 졸이고 찬물을 넣어서 다시 졸이고.. 서너번 반복하는 방법을 씁니다.)
17/03/03 03:05
수정 아이콘
진간장2에 국간장 1씁니다. 레시피 상으로는 최적인데, 그럼에도 무언가 계속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ㅜㅜ
혓바닥이 죄인인가 ㅠㅠ
냉장고 기법은 인정합니다 이건 진짜임
구밀복검
17/03/03 03:24
수정 아이콘
http://www.seehint.com/hint.asp?no=13090
http://chefnews.kr/archives/10697

요약하면 감칠맛은 글루탐산/이노신산/구아닐산의 조합을 통해 극대화된다는 이야기. 가장 쉬운 예시로는 멸치(이노신산)/다시마(글루탐산)/표고버섯(구아닐산) 조합이 있죠.
17/03/03 11:48
수정 아이콘
역시 역사와 전통의 멸치 다시마 표고 !!!
17/03/03 10:15
수정 아이콘
어리굴젓 담아 놓은게 너무 짜서
고민인데

어리굴젓 국물 따라 내고
거기에 무우나 양파를 넣어 보아야 겠습니다.

국물로 미역국을 끓여 보고.
이워비
17/03/03 12:05
수정 아이콘
가츠오부시로 국물응 내보세요
또다른 미역국이 찾아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0966 [일반] 타고난 재능, 능력, 실력 vs 성실한 마음 (feat. 박진영) [68] nexon11628 17/03/06 11628 3
70964 [일반] 청와대 행정관, 검찰/특검 수사중에도 탄핵반대 단체 대표와 수시로 전화통화 [12] 光海7285 17/03/06 7285 2
70963 [일반] “전투태세 준비 끝”…박사모, ‘죽창 태극기’공개 [73] 서현1214039 17/03/06 14039 0
70962 [일반] 박영수 특검이 오늘 수사결과를 발표 했습니다. [40] 光海13600 17/03/06 13600 9
70961 [일반] 그 많은 의경은 어디로 갈까? [23] kurt9807 17/03/06 9807 0
70960 [일반] 김문수, 조갑제의 현재 모습을 보고 문뜩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44] 서현129105 17/03/06 9105 1
70959 [일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를 해소할 획기적인 방안 [68] ZeroOne13693 17/03/06 13693 0
70958 [일반] 오늘의 우리말 [31] 삭제됨6644 17/03/06 6644 9
70957 [일반] 옥수수 먹을래? 콩 먹을래?... [15] Neanderthal7119 17/03/06 7119 12
70956 [일반] 북한이 또 미사일을 쐈습니다. [55] 홍승식10372 17/03/06 10372 1
70955 [일반] 어느 아재의 강변테크노마트 폰 구입기 & 기타 Tip (& 뒤늦은 반성문) [66] 제랄드15749 17/03/06 15749 8
70954 [일반] 리쌍과 우장창창 양측 합의 성공 [65] 아지메13158 17/03/06 13158 2
70953 [일반] 악몽을 꾸다 [3] 설탕가루인형형4046 17/03/06 4046 1
70952 [일반] 수시가 자사고보다는 일반고에 유리하다 [42] moqq9410 17/03/06 9410 0
70950 [일반] 오늘자 리얼미터 조사 [129] Lv312690 17/03/06 12690 6
70949 [일반] 최초로 삼국지를 본 서양인들, 그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34] 신불해25839 17/03/06 25839 37
70948 [일반] IF) 손학규가 만덕산을 좀더 일찍 나왔더라면? [33] ZeroOne10615 17/03/06 10615 3
70946 [일반] 라이언 레이놀즈 왈...[로건]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 수준... [59] Neanderthal10772 17/03/05 10772 4
70945 [일반] [K팝스타6] 어디까지 올라갈까? TOP10 멤버별 개인적인 예측 [14] 빵pro점쟁이5091 17/03/05 5091 0
70944 [일반] [시] 로얄럼블 [3] 마스터충달3744 17/03/05 3744 5
70943 [일반] 제가 좋아하는 인디가수 - 신현희와김루트 [13] 물탄와플8873 17/03/05 8873 1
70942 [일반] EPL, 아르센 벵거의 시대가 이제 완전히 끝나고 있다 [26] 삭제됨8964 17/03/05 8964 11
70941 [일반] [영화]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오프닝.avi [10] 리콜한방6699 17/03/05 6699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