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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11/17 02:18:46
Name 눈시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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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러일전쟁 - 그대여 죽지 말아라




북조선왕국이 거슬리는군요 -_-; 보시다시피 만주가 다 벌판이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산과 강이 참 많죠. 여기에 숲과 밭도 엄청나게 있구요.

뤼순 이외에 기억해둘 곳은 선양입니다. 만주의 중심도시로 현재도 랴오닝성의 성도죠. 참 여러이름으로 불립니다. 원래는 선양(한국식으로 심양)이었고 후금이 점령해서 만주어 묵던(성경)으로 고칩니다. 청이 중원을 지배한 후에는 펑톈(봉천)이 되었죠. 청이 망한 후에는 군벌 장쭤린(장작림)이 다시 선양으로 고쳤고, 만주국을 세운 후에는 다시 펑톈으로 고치는 등 한족이냐 만주족이냐에 따라 명칭이 계속 바뀝니다.

현재명칭은 선양이지만 그 때는 펑톈(봉천), 묵던 등으로 불렸으니 여기에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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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대본영이 설치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전시체제에 들어갑니다. 육군을 이끄는 참모총장은 오야마 이와오, 이후 만주군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이끌죠. 해군을 이끄는 군령부 총장은 청일전쟁 때 초대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던 이토 스케유키였구요.

해군이 서해와 동해에서 제해권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동안 육군은 상륙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에 말이죠. -_-; 목표는 만주, 한국의 협조가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걸 위해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됩니다. 반대하는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하면서까지 강행한 것이었죠. 이미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온 상황에서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러시아 공사야 일본군이 오자 급히 탈출했구요.

뭐 늘 그랬죠. 이 때 나름대로 중앙군으로 친위대 시위대를 만 명 가까이 보유하긴 했지만 (지방군인 진위대는 2만 이하) 편제상 그랬던 거라 정원이 다 차진 않았고, 장비는 좋은 편이었지만 훈련은 부족했습니다. 싸워도 일본군에게 안 됐겠지만 고종도 결사항전할 생각이 없었죠. 이러니 기껏 키운 군대도 아무런 힘을 못 씁니다. 국방보단 황실보호용, 그것도 국내의 반란진압부대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이것도 꺼려한 일본이 러일전쟁 동안 군축을 시킵니다. 이게 군대해산으로 이어지게 되죠.

한일의정서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고 한국은 국내에서 일본의 활동에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 일본의 승인 없이 이에 위배되는 조약을 맺지 말 것을 중심으로 합니다. 이렇게 급히 기본 방침을 정했고, 세부사항을 정하기 위해,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뜯어먹기 위해 3월 이토 히로부미가 대사로 특파됩니다. 고종과 만나서 어르고 달래면서 각종 이권을 뜯어갔죠.

경의선, 경부선 부설권이 일본에 넘어갔고, 미완성된 철도를 빠르게 건설하게 합니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니 우마차를 징발하고, 사람도 짐꾼으로 징발했죠. 일본 해군이 점령한 진해 등 일본군이 주둔할 곳도 내어줘야했구요. 이걸 넘어서 서해 중북부의 어업권부터 황무지 개간권까지 넘겨주게 됩니다. 군사, 외교, 경제 전방위에 대한 침탈이었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워주는 거니까 이정도는 협조해라는 걸로 나온 결과였습니다.

+) 이걸 어떻게 할 것인지를 5월에 일본 내에서 정한 게 [대한시설강령]입니다.

8월에는 1차 한일 협약이 맺어집니다. 일본인을 재정고문으로, 외국인을 외교 고문으로 하고, 중요한 외교에 대해서는 일본과 먼저 얘기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고문정치의 시작입니다. 이 때 재정고문으로 온 메가타 다네타로가 화폐정리사업을 했고, 외교 고문으로 온 미국인 스티븐스는 귀국해 친일발언을 하다가 장인환에게 암살당합니다. 이승만이 이에 대한 변호를 거부한 것도 유명하죠.

1차가 있으니 당연히 2차도 있죠. 그 2차가 바로 을사조약입니다. 통감부를 설치해 외교권을 빼앗죠.

이후의 비극과는 별개로 이 때 한국도 전시체제가 되면서 큰 고난을 겪습니다. 청일전쟁 때처럼, 평안도가 제일 심했죠. 러시아군은 기병을 위주로 평양 주변까지 내려와서 약탈과 살인을 하고 갔습니다. 일본군이 진격하면서 그건 멈췄지만, 대신 일본군의 지원에 동원되었죠. 사실상 일본군의 군정이 시작됩니다. 말이 잘 안 통해서 그런지 한국인들의 뺨에 색깔을 칠해 뭘 수송하는지 분류했다 합니다. 여기에 자신들의 집도 철도를 위해 헐리거나 군인의 주둔을 위해 뺏깁니다.

반일감정에 의한 사보타주도 계속됐습니다. 단순 반일뿐 아니라 저렇게 당해서 한 것도 컸죠. 연락선을 자르거나 철도를 파괴하는 등의 활동이었죠. 일본군은 이걸 강력하게 처벌합니다. 여기까지라면 이해가 가지만 단순 절도도 엄벌했고, 주둔군이 저지르는 범죄도 당연히 있었죠.

"오늘날 전쟁은 인간사의 마지막 심판자이며 또한 국민성을 최후로 시험하는 관문이다. 이 시험에서 대한제국 국민은 실패했다.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를 통과해 가려고 하자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도망갔다. 그들은 문짝이며 창문이며 할 것 없이 주워갈 수 있는 것 모두를 등에 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 종군기자 잭 런던

+) 잭 런던은 미국의 유명한 사회주의자로 이 때 종군기자로 와 있었습니다. 한국까로 위처럼 한국은 독립국가로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죠.

일본군이 물자를 사들이면서 물가도 폭등합니다. 생필품을 구하기가 힘들어지게 됐죠. 평양의 재정을 일본군 지원에 쓰느라 이들을 도울 수도 없었구요.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떠납니다. 일본군은 진남포(현 남포)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을 잔뜩 데려왔구요.

전체적으로 돈을 러시아보다 더 잘 쳐주고 횡포도 덜하긴 한 것 같습니다. 청일전쟁처럼 말이죠. 전쟁특수로 이득을 본 사람들도 있구요. 하지만 일본군의 주둔이 훨씬 길었고, 군표를 남발해 경제를 망치기도 했죠.

북부지방엔 항일의병도 있었습니다. 간도관리사인 이범윤은 사포대를 조직해 러시아군과 함께 일본군에 싸웠죠. 그 외에도 일본군에 쫓긴 의병들이 북부, 특히 주 전장이 아니었던 함경도에서 싸웠습니다. 러시아는 이들을 규합해 한인의용군을 만들 시도를 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않습니다. 이후 이들이 연해주지역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구요.

한국 내의 여론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개화파를 중심으로 일본 편을 드는 이들이 있었고, 전쟁 중 만들어진 일진회처럼 확실한 친일세력도 있었죠. 반면 대규모 의병은 아니지만 철도를 공격하는 등 반일 활동도 일어났구요. 아무튼, 한국 전체의 분위기로 본다면 일본에 협조하는 거였습니다.

+) 안중근은 이범윤과 함께 항일을 할 때도 그가 러일전쟁 때 러시아와 함께 싸운 건 틀렸다고 했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이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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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과 함께 육군 사령관도 결정됩니다. 쿠로파트킨이었죠. 전쟁 전부터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작전을 주장했습니다.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만주는 방어하기 너무 넓었고, 병력은 여기저기 퍼져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어디로 향할지도 몰랐죠. 러시아군이 우위에 설 때까지 방어에 집중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후퇴하게 합니다. 쿠로파트킨은 그 범위를 펑톈을 넘어 하얼빈까지도 가능하다고 봤습니다. 일본군은 러시아측의 예상보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고, 한반도와 랴오둥 반도라는 두 길로 상륙해 옵니다.

한반도에서는 압록강에, 랴오둥에는 다롄 등 상륙이 예상되는 곳에 병력을 배치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방침이 이랬으니 상륙을 막긴 힘들었고, 병력을 한 곳에 집중한다고 뤼순은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방침이 군사적으로 잘 한건지는 쉽게 판단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확실히 실패했죠.

2월부터 한국에 일본군의 상륙이 진행됐고, 북으로 향합니다. 3월 말에 평양을 확보하면서 진남포도 상륙지가 됩니다. 이어 랴오둥 반도 상륙도 진행됐죠.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 때 이 곳에서 전쟁을 했고, 압록강과 뤼순 등 주요 목표도 그 때와 같았습니다. 이래서 초반의 작전은 그 때와 비슷하게 갑니다.

4월 23일, 4만이 넘는 1군이 압록강에 집결합니다. 러시아군은 2만 5천여 정도로 방어선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었죠. 하지만 긴 방어선에 흩어져 있었고, 방어력도 약했습니다. 일본군은 첩보와 정찰을 통해 방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러시아군은 일본군을 만만하게 보고 이걸 숨기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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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해 고칠 필요까진 없겠죠?

29일, 일본군은 방어진의 약한 부분을 찔러 도하에 성공했고, 러시아군은 일본의 주공을 파악 못 하다가 포위당하게 됩니다. 다행히 기관총의 활약으로 포위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퇴각할 수 있었죠. 여차하면 후퇴한다는 방침 때문이기도 했구요. 이렇게 러시아는 첫 지상전에서 패했고, 일본군은 10년만에 다시 만주로 진격합니다. 일본군의 피해는 천여명, 러시아는 2~3천여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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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부터  2군도 랴오둥 반도에서 상륙을 시작합니다. 우선목표는 뤼순과 만주를 끊는 거였죠. 반도의 목 부분을 공격하는 거였습니다. 진저우(금주)의 난산(남산)이었죠. 25일부터 진저우성과 난산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고, 다음날에 성을 점령합니다. 이어 아침부터 난산의 고지를 공격합니다. 일본 해군도 함포로 지원했고, 좌측을 공격한 4사단이 진지를 점령하면서 저녁에 러시아군이 후퇴, 점령하게 되었죠. 이렇게 뤼순을 고립시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충격받을만한 일이 있었으니...

러시아군의 피해는 천사백여명, 반면 일본군의 피해는 무려 사천여명이었죠. 단 이틀만의 전투로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죠. 난산 공격에서 사용한 포탄은 34600발, 총알은 220만 발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청일전쟁 기간 동안 소비한 것과 같은 양을 하루만에 써버린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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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심 기관총

시바 료타로는 언덕 위의 구름에서 일본이 근대의 힘과 만났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 때 쓰인 게 최초의 현대적인 기관총인 맥심 기관총입니다. 이런 기관총으로 무장한 고지를 점령하려 한 것이고, 피해가 클수밖에 없었죠. 무기는 계속 발전했고, 러시아군은 청군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소모전은 일본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죠.

한편 러시아측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수라 해도 기관총으로 잘 방어된 진지가 하루만에 뚫린 거였으니까요. 러일전쟁사에서는 병력의 차이도 컸지만 포탄부족과 방어를 맡은 포크가 제대로 지휘를 못 한 것을 원인으로 보고 있죠. 문제가 또 있었으니 위의 다롄에 있는 물자와 기지를 제대로 파괴하지 못 하고 도망쳐 온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막사부터 화물선, 석탄까지 마음껏 쓸 수 있었죠. 여기에 병력수를 보면 뤼순의 방어병력도 그리 딸리지 않았는데 역공을 생각 못 하고 있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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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파로 전쟁의 원인 중 하나라 할 알렉세예프. 하지만 전쟁에선 영 못합니다. 군사지식이 부족해서 명령도 애매하게 내렸고, 방어 위주였던 쿠로파트킨과 계속 대립합니다. 패배의 책임이 총독인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도 클 겁니다. 결국 10월에 잘립니다.

지휘부에서는 총독 알렉세예프와 사령관 쿠로파트킨이 대립합니다. 알렉세예프는 뤼순을 구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쿠로파트킨은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입니다. 이에 알렉세에프는 차르의 허락을 받아내서 그걸로 뤼순 구원을 주장합니다. 쿠로파트킨은 러시아군이 일본군과 대등해진 상황에서도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고, 차르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병력을 파견합니다. 이에 일본군도 요격하기 위해 북상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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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4일, 양군이 만난 곳은 드리시(득리사), 이 이름을 따서 일본은 도쿠리지, 러시아는 텔리수 전투라 부릅니다. 양측의 병력은 각기 3~4만여 정도였지만 러시아군은 원래 계획에 비해 적게 갔고, 특히 대포의 수에서 100문도 안 됐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200문이 넘었죠.

여기서 일본군은 러시아군보다 한 수 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러시아군은 대포를 배치하는 데에도 서툴렀던 반면 일본군은 강력한 포격으로 방어가 덜 된 러시아군에 피해를 주었죠. 여기에 다음날부터 4사단은 우측으로 우회기동해서 포위했고, 기병대도 좌측으로 러시아군의 후방을 교란했습니다. 러시아 기병은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구요. 결국 러시아군이 후퇴하면서 이 전투도 일본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일본군의 피해는 천여명, 러시아군은 삼천여명이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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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일본 기병여단을 이끈 게 아키야마 요시후루입니다. 진격의 거인의 작가가 존경한다고 해서 우익논란이 일어난 사람이죠. 뭐 군인으로서는 존경할만 합니다. 조선에도 우호적인 사람이었구요. 식민지 조선이겠지만. 얘기하면 너무 길어질테니 나무위키라도 봐 주세요 '-'a 해군의 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그의 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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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항, Port Arthur, 아서왕 할 때 그 아서입니다. 러시아에선 포트 아르투르라 불렀다는군요. 해군항인만큼 우선순위는 해군에 있었고, 육군도 만주의 러시아 주력군이 우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갔죠. 러시아 해군이 숨죽여 있긴 했지만, 일본 해군의 피해도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발트 함대가 제 2 태평양 함대가 되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죠. 이들이 뤼순의 함대와 합친다면 결과는 끔찍했을 겁니다. 해군은 단독으로 뤼순을 점령할 수 없었고, 전함도 두 척이 기뢰에 당해 4척밖에 없어서 해전에서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5월이 되면서 육해군은 뤼순 공략을 합의합니다. 육군이 뤼순을 점령하게 된 것이죠. 2군이 상륙해서 거점을 잡았지만, 이래서 2군의 2개 사단(1, 11)을 중심으로 한 3군이 편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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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군의 사령관은 노기 마레스케, 청일전쟁 때 연대장으로 뤼순을 점령했던 이입니다. 은퇴했지만 이 때 다시 등용되었죠. 그의 휘하에 독일 유학파인 이치지 고스케가 참모장으로 임명됩니다. 이들은 6월 초에 상륙했고, 천천히 진격해 갔습니다. 한편 6월 20일에 만주군 총사령부가 설치되면서 만주에서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게 되었죠.

+) 위의 진저우 공격 중 그의 첫째아들이 전사합니다. 그리고 3군에는 그의 둘째아들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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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군의 진격상황, 그냥 흐름만 봅시다. 이 과정에 있는 러시아군의 방어진지는 여러모로 부족했고, 탈환 시도도 계속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일본군에 전투 고지 한번에 수백에서 천이천씩의 피해를 강요하고 있었죠. 일본군은 요새에 대한 정보 부족 등으로 빠르게 진격하지도 못했구요. 그러는 동안 요새는 강력하게 보강되고 있었죠.

+) 이 과정에서 태평양 함대가 탈출을 시도하는데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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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의 물자는 충분하지 않았고, 러시아군이 잘 저지르는 -_-; 지휘권 문제도 일어납니다. 관동군 사령관인 스테셀 중장은 해임됐고, 요새사령관인 스미르노프 소장에게 지휘권을 넘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서를 숨겼죠. 이런 어이없는 행동으로 명령은 두 군데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포병대 지휘관도 둘이었다고 하구요.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다면 더 오래, 더 잘 막아낼 수 있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수밖에요. 그래도 희망은 있었으니, 7사단장 로만 콘트라첸코 소장이었습니다.

그는 공병 출신으로 03년 말에 요새에 왔고, 부족한 상황에 대해 한탄했다 합니다. 곧 그가 중심이 되어 요새를 지었고, 개전 후에는 요새의 전 장병이 미친듯이 매달렸습니다. 몇년간 지은 것보다 포위되기까지의 몇달 동안 지은 것이 더 많은 수준이라 합니다. 역시 닥쳐야 하는 게 사람이죠 (...) 그는 요새를 전부 돌아다니면서 강력하고 효율적인 요새를 만듭니다. 해군의 함포도 받아서 배치하고, 기관총들을 교차사격할 수 있게 효율적으로 배치했죠. 진지는 콘크리트로 방어하고 진지마다 지하로 교통로를 만들었고, 올라오는 길에는 고압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을 둘렀습니다. 지뢰는 물론이었죠. 장병들을 만나서 사기를 고취시키는 것도 있지 않았구요. 물론 이러고도 부족한 면이 많았습니다만, 일본군에겐 충분히 재앙이었죠. 요새에 사거리 긴 중포가 부족한 게 아쉽긴 했지만 각 방면을 지키는 보병과 포병의 지휘권을 일체화했고, 좋은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 그런데 이 요새 말고는 일본군이 축성 부분에서 잘 한것 같습니다. 쿠로파트킨이 일본군의 공병을 부러워했다고 하네요

요새의 병력은 2개 사단과 방어병력, 해군의 지원병력을 포함해 4만이 넘는 병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정도면 쿠로파트킨의 방침이 어느정도 이해가 가긴 하네요. 요새의 비축식량은 (육류 20일분을 빼면) 종류별로 120~200일정도가 있었다 합니다. 항복할 때 남은 식량을 보면 정말 아껴서 먹은 것 같네요.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일본군에 먼저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러시아군은 고립된 상황에서 정말 잘 싸워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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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 요새는 29km에 달했는데 그 중 9km가 바다쪽이었습니다. 일본 해군을 막는 역할이었죠. 육지는 동쪽이 8km 정도로 가장 강력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쪽은 5km 정도로 정상에 있어서 접근이 어려웠고, 서쪽은 7km 이하로 취약한 곳이었죠. 원래 방어선을 더 키우려 했지만 안 됐고 전진기지 몇 개만 있었죠. 그 중 하나가 그 유명한 203고지였구요. 원래는 방어선을 더 멀리 할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없었고, 때문에 방어선 외곽에서 시가지는 물론 함대까지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해군이 요구한 것은 서쪽이었습니다. 203고지 등 서쪽의 고지들을 점령하면 항구를 제대로 감제(=관측)할 수 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3군에서는 논의 끝에 동쪽을 선택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논란을 만들게 된 결정이었죠. 서쪽을 거부한 이유는 철도, 도로와 멀어서 보급이 곤란하다는 점, 평지라서 엄폐가 어렵다는 것, 서쪽은 많은 전진기지를 먼저 잡고 요새를 공격해야 하기에 공격해야 할 곳이 너무 많아진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여기에 서쪽의 방어력을 너무 강력하게 보았고, 반면 동쪽은 약하다고 보았구요.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양측의 입장 차이로 해군은 함대 공격을 원한반면 육군은 요새 점령이 목표였던 것이죠. 이후의 엄청난 피해 때문에 욕을 많이 먹지만 이게 옳은 선택이었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6월 말 대본영은 뤼순 공략을 서두르라고 명령했고, 7월 중순이 되면서 해군도 함대를 공격해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노기는 서두르지 않았고 러시아군의 방어를 살피면서 역습에 대비한 방어진지를 만듭니다. 실제 러시아의 역습이 계속 있었고 다 막아냈죠. 방어의 일등공신 콘트라첸코가 주도했는데 이 점은 비판받는 부분입니다.

그러는동안 추가병력이 도착했고 3군의 규모는 4만 8천여에 이르게 됩니다. 총공격 날짜는 포병의 증원이 완료되는 8월 18일로 잡았죠. (이후 하루 늦춰집니다) 그 전인 7일에 전진기지를 공격하기로 합니다. 3일간의 전투를 통해 다구(대고)산과 샤오구(소고)산을 점령합니다. 여기서도 2천8백여의 피해를 입습니다. 러시아군은 그 절반 정도였죠. 여기에 대포를 설치해 함대에 피해를 주었고 러시아 함대는 다시 탈출을 시도, 황해해전이 일어납니다. 역시 다음편에서 다루겠습니다.

양군의 합의하에 요새의 타국인들이 탈출했고, 일본군의 최후통첩 러시아군이 스테셀은 거부합니다. 절차는 다 끝났으니 이제 싸울 때였습니다. 작전을 세우고 지휘부도 전선 근처로 이동했죠. 전 전선에서 포격을 한 후 공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공을 속이기 위해 서북쪽의 양동작전도 준비했구요.

"여러분께서는 전쟁을 직접 목격하고자 매우 긴 여행을 하셨습니다. (중략) 그러나 불굴의 돌격이 완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때맞추어 도착하셨습니다."

노기가 종군기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기자들 앞이니 더 센척해야 한 것도 있겠지만, 상황을 꽤나 낙관적으로 보는 걸 알 수 있죠. 네 뭐 한 번 점령했던 곳이니까요.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19일, 이틀간 전 전선에 걸쳐 포격이 진행됩니다. 탄약고가 폭발하는 등 요새는 많은 타격을 입었고 21일에 총공격을 시작합니다.

24일까지 진행된 공격으로 일본군은 전사 5017명, 부산 10843명이라는 피해를 입습니다. 말 그대로 한 개 사단이 날아간 것이었죠.

포격을 아무리 한들 철조망을 파괴할 순 없었습니다. 공병이 길을 만들고 철조망을 잘라가면서 진격해야 했죠. 그렇게 올라가면 기관총과 수류탄이 맞이해 줬습니다. 러시아군은 그저 돌격해오는 일본군에게 총알을 뿌리면 될 뿐이었죠. 야습을 해도 탐조등, 조명탄 불빛 아래에서 기관총 세례를 받았습니다. 힘들게 적진 근처까지 진격하면 러시아군도 뛰쳐나왔구요. 죽어라 산을 올라온 쪽과 내려와서 반격하는 쪽, 어느 쪽이 더 힘이 남아있었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죠.

"대체로 상당히 정확한 편이었던 일본군 첩보부가 어떻게 요새가 지닌 무한한 힘의 근원을 평가하지 못했는지 또 그런 모험적 방법에 대해 미리 경고하지 않았는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중략) 일본군은 자신이 파괴하려 했던 대상이 얼마나 견고한지 잘못 계산했다."

당시 일본군에 있던 영국의 군사평론가 노리가드는 이렇게 평했다 합니다. 말 그대로였죠. 요새의 방어력을 너무 무시한 거였습니다. 그 결과는 이리 처참했죠. 일본군이 아무것도 못한 건 아니었습니다. 양동이었던 서북쪽에서 산을 점령하긴 했고, 주공에서도 점령한 보루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엄청난 피해에 비할 바가 아니었죠. 이렇게 큰 피해가 나자 공격을 거부하는 병사도 나타났고, 심지어 상관 살해도 일어났습니다. 결국 노기는 공격중단을 명령했구요.

단기간에 요새를 점령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빨리 점령해야 했죠.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말입니다. 이러니 더 많은 피가 흐르게 되죠.

러시아군의 피해는 전사 500, 부상 4500 정도라고 합니다. 극과 극이었죠. 하지만 2개 사단으로 넓은 전선을 막기는 힘든 것도 명백해졌구요. 이걸 알렉세예프에게 알렸지만 그게 왜? 수준이었죠. 그나마 무력화된 해군이 요새 방어에 동참하면서 병력이 늘긴 했습니다.

이렇게 1차 총공격은 끝이 납니다. 네, 1차라는 것은 그 이후가 계속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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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영화 203고지의 예고편입니다. 극우적인 요소도 (시작부분 빼면) 딱히 없고 꽤나 처절하게 만들었더군요.

http://egloos.zum.com/beholderer/v/789104

요사노 아키코라는 일본의 유명한 시인이 있습니다. 동생이 러일전쟁에 소집되자 "그대여 죽지 말아라" 라는 시를 지었죠. 뤼순을 점령하든 말든 우리가 뭔 상관이냐, 덴노는 전쟁터에 나갔냐 하는 등 상당히 센 내용이고, 지금도 일본의 대표적인 반전시로 다뤄진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비국민 취급도 당했다고 하네요. 정작 이랬던 사람이 중일-태평양 전쟁 때는 종군위문을 가고 개전찬양시를 쓰는 등 반대모습을 보여줍니다. 생각이 바뀐건지 비국민 취급받고 못 살겠다 느낀건지... 착잡한 부분이죠. 아, 그녀의 동생은 살아돌아왔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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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17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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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당시만 해도 한인들의 분위기는 '설마 일본이 우리나라를 먹기야 하겠어?' 였던 건가요? 한일 합방 전후에 막 일어났던 의병 활동을 생각해보면 저 당시에는 왜 잠잠했는 지가 잘 이해가 가질 않더라구요. 겨우 5년 차이인데 말이죠.
16/11/17 02:58
수정 아이콘
네. 청일전쟁 때도 점령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개화파의 경우 오히려 덕분에 자기들이 원한 개혁 했고) 반러감정도 반일 수준으로 있었구요. 전장도 한반도가 아니었구요. 이번에도 청일때처럼 가겠지 수준이었을건데...
끝나고 갑자기 외교권을 뙇! 우리 지켜준다메 그러니까 우리도 도와줬잖아 이렇게 충격을 먹게됐구요 ㅠ
16/11/17 03:04
수정 아이콘
흑흑흑 외교란 잔인한 거군요.
16/11/17 03:18
수정 아이콘
네 잔인하죠 ㅠㅠ...
candymove
16/11/17 09:16
수정 아이콘
러시아 가볍게 때려잡은게 아니라 꽤 고전했네요..
16/11/17 21:42
수정 아이콘
네 앞으로 더 큰 일이 벌어집니다 =_=;;
16/11/1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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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주변국에 다 시비털고 눈에 뵈는게 없던 시절인가 봐요. 저 시절을 그리워 하는게 오늘날 일본 극우들 이지요?
우린 딱히 어딜 먼저 침략하고 턴 기억도 없는데 왜 극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16/11/17 21:45
수정 아이콘
아직까지는 눈치 많이 볼 때였죠 크크. 이것도 나중엔 귀축이라고 하는 영미덕에 날뛸수 있었단거니... 극우들도 그때그때 다르지만, 이때를 좋아하는 건 같죠
우리나라 극우는 방어적이라 할만한데 하는 걸 보면 일본이 저랬던 거 부러워하는 쪽이죠
에인셀
16/11/17 17:00
수정 아이콘
일본 옛날 대하드라마 '오싱'을 책으로 읽을 때 저 시가 나왔던 게 생각나네요. 아아, 아우여 그대를 위하여 우네. 그대 죽는 일 없어라- 이렇게 나왔거든요. 어릴 때 나름 감명깊게 읽은 시인데 몰랐던 뒷얘기가 나오니 감회가 새롭네요.
16/11/17 21:48
수정 아이콘
오 그렇군요. 찾아봐야겠네요.
네 저도 공부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어요. 이래저래 많은 생각이 드네요 '-'
담배피는씨
16/11/17 22:06
수정 아이콘
203 고지를 보고 느낀 점은 인간은 무의미한 삽질을 좀 해봐야 사고의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슬프게도 결과론 적으로는 무의미 하지만 과정으로서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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