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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11/16 23:41:34
Name 사라세니아
Subject [일반] 너희의 하루를 함께
성격이 양반은 못 되는 터라, 조금만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누굴 놀리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런 주제에 묘하게 소심한 구석이 있어서 별로 싸움이 나거나 한 적은 없지만서도. 얼마 전에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친구를 놀려먹다가, 순간적으로 내가 친구를 놀리는 레퍼토리가 매우 단순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 그냥 말 하면 태클걸기 : 응 아니야~, 집에 가~, 그래 알겠어 너 재수강~ 등
2) 혼밥티 밈을 응용한 놀리기 : 응 너 친구 없다고? 알아~, 뭐어라고? 혼자 수업듣는 찐따라고? 등

1)의 경우는 놀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깐죽대는 것 혹은 말장난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받으니, 내가 친구를 놀리는 방식은 2)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2) 방식의 약올리기는 나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나는 과에 친한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말도 잘 걸지 않는다. 물론 대학의 모든 과 사람들이 즐거운 인싸 생활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학교의 특성상 나처럼 과 생활을 아예 등지고 동아리에 올인하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다. 특히, 우리 과와는 아예 모르는 사람인 양 굴면서도 다른 거의 모든 과에 친한 사람들이 산재해 있고 어떤 과에서는 거의 그 과 사람인 양 인싸생활을 하는 케이스는 더더욱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친구 없음'은 오히려 내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갔고, 이런 '친구 없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친구 없다고 놀리는 것은 항상 먹히는 유머 코드였고, 나는 제법 유쾌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를 깎아내리면서 광대 노릇을 하지 않아도 자신감있게 굴 수 있었던 것은 기저에 '실제로 나는 친구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1학기까지만 해도 이런 '친구 없음'을 단순한 컨셉으로 내세우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나 자신을 '친구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지금에야 과에 친구 없는 걸 그냥 조금 특이한 배경정도로 생각하지만 그 당시는 휴학이나 반수를 생각할 정도로 괴로운 문제였다. 원래 사회성이 떨어졌던 탓도 있고, 처음에 친해졌던 그룹에 한 일주일 정도 끼어 있다가 그 사람들(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의 스테레오타입에 가깝지만)에게 인간적인 실망을 느껴 스스로 거리를 뒀던 것도 없잖아 있다. 더군다나, 나는 3월에 CC를 했다. 연애는 얼굴로 하는 게 아니라는 불변의 진리를 그 때 깨달았지만, 이후로 계속 혼자인 걸 보면 뭐 엄청나게 불변의 진리는 아닌 거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지만, 그리고 사실 그 당시에도 어느 정도 결말을 예측하고 있었지만, 심지어 그다지 좋아하는 마음도 없었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CC를 했다. 다른 과 다른 학년이라 헤어져도 마주칠 일이 없다는 계산 하에 성립된 관계였었다. 한 달도 지속되지 못한 관계를 뒤로 하고 나는 계속 쭈그러들었다.

이랬던 내 대인관계는 내가 본격적으로 공부에 뛰어들면서부터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CPA를 준비한다든가 자격증 시험을 보고 스펙을 쌓는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인문학자가 꿈이었고, 전혀 관계 없는 전공을 하면서도 그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실제로 공부한 시간과는 별개로) 노력하고 헌신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계기였다. 나는 그때서야 정말 완벽하게 실패했고 불행했다고 생각했던 고등학교 생활을 뒤돌아보았다. 내신은 개판이었고 수능은 답이 없었다. 대인관계는 연애 금지이고 소문 잘 도는 학교에서 2년간 못 생긴 내가 괴롭힘당하던 그 얘와 연애한 탓에 거의 파탄이 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치만 뭐, 생각이 바뀐 후 다시 뒤돌아보니 나는 결과적으로 수능날 원점수가 20점 가까이 올랐고, 좋은 사람들을 정말로 많이 만났으며 꿈 덕분에 정말 행복했었다. 친구가 없고 평판이 나쁘다는 것은 나의 자격지심이었던 것 같다. 만약 친구의 기준이 나 얘랑 친해! 하며 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친구가 남들에 비해서 적었을지도 모른다만, 내 친구의 기준은 조금 달랐다. 각자의 생각과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어느 정도는 침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관계. 어떤 기준을 정해서 명시적으로 너 친구야!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나와 사고방식이 비슷하고 어느 정도 둘 사이에 두께가 쌓인다면 어느 순간 저 사람이 내 친구지. 라고 믿어버렸던 것도 같다.

서문이 길었다만(어쩌면 본문보다 긴 걸지도 모른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시험을 보러 간다. 나와 함께 학교 언저리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각자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해 이야기했던 사람들, 기숙사 비좁은 방에서 움베르토 에코와 강신주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우리, 울던 녀석을 그대로 데려다 같이 운동장을 걸으며 아무 의미 없이 내뱉은 말들까지 함께 수능장으로 걸어간다. 내가 사랑하는 내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 시험장으로 발길을 딛는 사람들은 동기와 후배들이지만, 다른 고등학교 사람들과 너무 비교되는 학벌 콤플렉스로 힘들어하는 후배를 위해 망설임없이 자신의 시간을 쏟는 선배들 역시 이들과 함께 걸어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수능 백일날에 나는 다른 친구와 술을 마시고, 내가 고삼 때 죽었던 어떤 친구 얘기를 하다가, 반쯤 취해 방에 들어와서 이런 사람들에게 백일 응원 문자를 MMS에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길게 써서 보낸 다음 다시 만난 세계를 들으면서 울었다. 나는 휴가 나온 군인을 놀리며 맥주를 마시다가 그냥 죽은 사람 이야기와 산 사람들 이야기를 번갈아 했다. 군인은 네가 자살해버릴 줄 알았는데 느물느물한 어른이 되었다 했고, 나는 쌍욕을 퍼붓다가, 작년의 어느 여름날 이후 육개장을 그닥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군인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지갑 속 단체사진을 보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어쩐지 나는 조금 괜찮아졌다. 그 날 밤 내가 술기운 때문에 운 것인지, 고인이 생각나서 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요즘 생각해보면, 그 때의 나는 행복해서 울었던 것도 같다. 멀리 떨어져 있는 수험생들에게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내가 느끼는 연대감이 명백하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전술했던 대인관계에의 트라우마를 극복한 시점이 정확히 수능 백 일 전이었다는 것으로 봐서 더욱 그렇다.

가장 머리를 때리는 순간은 의외로 제일 흔했던 시점인 것 같다. 혼자 밥을 먹고 있으면 너무 자연스럽게 선배 뭐해요~ 하면서 앞에 앉던 후배 녀석이나, 저녁 시간에 같이 걷던 운동장들. 쉬는 시간에 잠깐 나와서 보는 밤하늘이 그랬다. 이 모든 시간들이 한데 엉켜 내 수능으로 다가왔고 나는 하등의 후회가 없다. 나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 그들에게도 비슷한 시간이 엉켜질 것이다. 1년의 시간이 더 붙어있을 뿐이다. 녀석들 중 아무도 내가 다니는 대학에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아예 지역이 달라질 만큼 멀어질 것이고, 어쩌면 수능 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자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에 선배와 했던 단순한 약속의 느낌으로. '우리 다음에 보자' 라는 말에, 정말 그 사람과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그래'가 아니라 '언제?'라고 답하기로 했던 짧은 약속처럼.

나는 너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로 너를 판단하고 함께할게. 시험의 결과가 아니라 너라는 사람을 응원한다. 연말 시간을 많이 비워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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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마상에
16/11/17 01:27
수정 아이콘
이제 좀 덜할 때도 되었는데, 이 맘때만 되면 마음이 이상해지고, 다들 잘 다녀오세요-라는 말을 되뇌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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