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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11/13 01:20:53
Name Camellia.S
Subject [일반] 역사는 반복된다. 이승만의 하야과정을 되돌이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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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틀 무렵이자 통금 해제시간인 26일 새벽 5시경부터 데모의 기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울은 비상계엄이 경비계엄으로 바뀔 사이도 없이 이날 5시를 기해 국무원 공고 87호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모든 차량의 운행을 중지시켰다. 계엄군은 일찍부터 남대문·시청·중앙청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삼엄한 경계를 폈지만, 누가 모이라고도 시위하자고도 하지 않았는데 학생들과 시민들은 세종로 또는 국회의사당 쪽으로 계속 가고 있었다.

아침 6시 가까이 되자 군중은 “선거 다시 하라!”,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오전 8시경 종로 입구에서 동대문 일대에 걸쳐 군중들이 가득 찼다. 서울 지역 계엄사령관 조재미 준장은 2개 중대로 하여금 군중을 밀어붙이려고 했으나, 오히려 사단장 자신이 파고다공원 부근에서 시위대한테 포위되었고, 병사들도 행방불명이 되었다.

오전 9시경에는 이미 3만여 명이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웠고, 이들은 계엄군 저지선에 다가섰다. 어디서 왔는지 트럭 여러 대를 타고 질주해온 소년 데모대가 “군인들은 우리 편이다”라고 외치며 광화문 네거리에 배치된 3대의 탱크 위에 빼곡히 올라탔다. 군인들은 방임 상태였다. 9시 30분경 일부 군중은 이기붕 집을 습격했다. 무방비 상태였다. 수박덩이-그 당시로는 먹기 힘든 철 이른 수박이어서 오랫동안 화제가 되었다-가 내동댕이쳐졌고, 인삼·설탕포대·양탄자·침대 등이 불길에 던져졌다. 9시 45분경 파고다공원에 몰려든 수많은 데모 군중이 이승만 동상의 목에 철사줄을 걸어 쓰러뜨렸다. 독재·부정선거·냉전의 상징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군중들은 철사줄에 맨 동상을 질질 끌며 종로 2가에서 세종로 쪽으로 갔다.

군인들은 몸이 굳어 있는 것 같았고, 군중들은 이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소년 데모대 등 약 5천 명의 군중이 “경무대로 가자”면서 중앙청으로 향하자 광화문 바리케이드에서 최루탄이 발사되었다. 시위대가 다시 대오를 갖춰 나아가자 10시경부터 콩 볶듯 공포를 무수히 발사했다.

아침 일찍 허정이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경무대로 갔을 때 김정열 국방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강경히 진언했다. 허정도 같은 의견을 말하니 이승만은 하야를 결심하려는 눈치를 보였다.

김정열은 경무대에 도착하기 전인 오전 9시 10분경 매카나기로부터 대통령을 신속히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받은 바 있었다. 매카나기는 대통령이 군이 요구하는 학생 대표와의 면담을 받아들이고, 재선거 실시 문제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의 장래 역할에 대해 숙고하도록 건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독재자 이승만의 권력을 지켜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어느 곳에도 없었다. 눈치 빠른 프란체스카도 결심을 하라고 속삭였다. 한참 동안 말없이 듣고만 있던 이승만은 “그럼 내가 물러나지”라고 뜻을 밝혔다. 박찬일 비서가 받아썼다.

곧이어 매카나기 주한미대사와 매그루더 주한유엔군사령관을 불렀다. 이들은 대통령 하야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매카나기 대사, 매그루더 사령관과 의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오기 전에 밖의 사정이 급하니 빨리 성명을 내보내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이 급보가 전해진 몇 분 후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시민·학생 대표 5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대통령은 불신의 눈초리로 송요찬을 바라봤다.

시민·학생 대표는 이승만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바깥에서는 무언가를 발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표들은 다시 사임을 요구했다. 이승만은 국민이 원하면 사임하겠다고 말하고, 잠시 후 떨리는 목소리로 망명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대표들은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사임인 듯-필자) 유일한 길이라고 답변했다. 오전 10시경 이승만은 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은 하야 성명서를 보여주었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겠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모든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가장 중요한 대통령직 사임에 대해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것은 대통령직 사임에 대해 미련을 남기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2항에서 “3·15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라고 표현한 것은 분명히 자신의 잘못을 절대로 시인하지 않는 이승만 특유의 책임 회피였다. 3·15부정선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가 4월 26일의 시점에서도 3·15선거가 부정선거였다는 것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자신은 전혀 책임이 없는 것처럼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부통령 선거 결과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아주 심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었다.

거의 반 시간에 걸친 시민·학생 대표와의 면담이 끝난 후 이승만은 이미 와 있는 매카나기와 매그루더를 만났다. 매카나기는 이승만의 사임 얘기를 듣고 그에게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찬사를 던지고는 “국민이 원한다면”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이승만은 불쾌한 표정이었다. 이날 오후 허정 수석국무위원은 이재학 국회부의장에게 “국민이 원한다면”은 자구상 문제이지 하야는 확정적이라고 설명했다.

10시 20분경 또는 그보다 약간 늦게 계엄군의 조재미 사단장과 시민·학생 대표들, 계엄사 선무반은 이승만의 하야를 방송하면서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자고 호소했다. 10시 30분 중대 발표를 예고하던 라디오에서는 이승만의 사임 성명이 발표되었다.

갑자기 거리는 터질 듯한 감격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무어라고 했죠?” 하며 다시 묻고 확인했다. 신이 나서 두 손바닥으로 지프차를 두드리는 사람도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이 날짜의 한 신문은 “이 소식에 접한 국민들은 홀연 천지를 진동케 하는 환호성을 폭발시켜 온 거리를 축하와 감격의 도가니로 화하게 했다”라고 썼다.

사임 성명 이후에도 혼란과 흥분은 계속되었다. 11시 15분경 고대생 시위대를 습격한 깡패들이 수용되어 있는 동대문경찰서에 군중들이 몰려들자 경찰은 무차별 사격을 가해 4명이 즉사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했다. 격분한 군중들은 경찰서를 불질렀다. 최인규의 양옥집도 불에 탔다.

광화문에서 중앙청에 이르는 일대에 십만여 명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11시 45분경 4·19 때 동급생을 잃었던 수송국민학교 어린이 1백여 명이 “국군 아저씨들,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애절한 시위를 벌였다.

4·26은 4·19와 닮은 점이 많았다. 학생·시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거 시위에 참여한 것도 그렇지만,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부산에서는 오전에 94세 된 노인을 선두로 시위가 시작되어 곧 수십만 인파로 불어났다. 부산시청·경남도청 앞은 인산인해였다. 데모대 앞에는 초등학생들이 내달았다. 시내 교통은 삽시간에 차단되었다.

이승만의 사임 소식을 들은 시위대는 여러 경찰서 유리창을 부수었고, 부산 중부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죄수들을 내보냈다. 경찰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도청 문짝도 부서졌고 자유당 사무실, 반공청년단 건물 등이 계속 파괴당했으며, 부산시장 배상갑의 집이 불살라졌다. 그와 함께 역전 일대를 중심으로 질서찾기운동이 벌어졌다.

이승만 사임 방송이 있은 지 얼마 후인 오후 1시 대구의 경북대 교수들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청구대 교수들은 2시 30분경 거리로 나왔다. 수천 명의 시위대는 오임근 경북지사로 하여금 나와서 사과하도록 했다. 이날 밤 반공청년단장이자 민의원인 신도환 집과 자유당계 사람들의 집이 파괴되었고, 일부 파출소가 전파 또는 반파되었다.

포항에서도 학생시위가 있었다. 김천의 시위대는 김철안 의원 등의 집을 습격했다. 그 밖에 울산·밀양·안동·상주·경주 등지에서도 시위대들이 자유당·반공청년단·서울신문사 지국 등의 건물을 파괴했다.

대전의 학생들은 오후 4시경부터 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은 도청에 몰려가 김학응 지사와 경찰국장, 대전시장의 사임을 요구했다. 시위대는 자유당 사무실 등을 파괴하고 두 곳의 경찰서 및 일부 파출소를 습격했다. 시위는 밤 12시까지 계속되었다. 공주의 학생들과 천안농고생 및 강경·조치원·예산 등지의 학생들도 시위를 벌였다. 인천·목포·여수·임실·원주·제천·묵호 등지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계엄사령부는 이날의 시위로 24명이 시망하고 113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중상을 당해 1960년 7월 19일까지 사망한 희생자를 포함해 1960년 3~4월 시위에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85명이다. 이 중 남자가 173명, 여자가 12명이다. 나이별로 보면 19세까지가 81명, 20~29세가 81명으로, 29세 이하가 대다수이며 특히 10대가 많은 것이 눈에 띈다. 30~39세는 10명, 40~49세는 6명, 50세 이상은 3명이고, 4명은 나이를 알 수 없다. 이 중 초중고생이 54명이나 되고, 전문대생과 대학생은 22명이다.

4월 26일 오후 국회는 여야 의원 54명으로 구성된 시국수습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에서 제시한 “①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하야한다. ② 3·15정부통령 선거는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한다. ③ 과도내각하에 완전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 ④ 개헌 통과 후 민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즉시 실시한다”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이승만의 사임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그에 앞서 오후 1시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 수만 명이 참석하여 열린 국민대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의를 한 바 있었다.

서울대 등 서울 시내 26개 학생 대표들로 구성된 4·19혁명학생대책위원회에서는 3·15부정선거의 원흉인 한희석·최인규·임철호·장경근·이존화 등을 즉시 체포하여 엄중 처단하고 국제 여론을 오도하는 주미대사 양유찬과 주일대사 유태하를 즉시 파면할 것,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을 조속히 개정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학생들은 거리의 정돈과 청소에 나섰다. 26일도 19일처럼 매우 긴 하루였다.

누가 봐도 이승만의 대통령 사임은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었고, 어느 누구도 이승만의 권력 유지를 위해 애쓰지 않았지만, 이승만은 최후의 안간힘을 다했다. 27일 비서들이 국회에 제출할 사임서를 초안해 내밀자 이승만은 서명을 거부했다. 여러 비서들이 서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자신이 사임하자마자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겼다. 허정과 김정열이 번갈아 설득했지만, 자신이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고 막무가내로 설명했다. 허정이 질서유지를 장담하자 결국 굴복해 다음과 같은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나 이승만은 국회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

4월 28일 새벽 경무대 관사 36호실에서 이기붕과 그의 부인 박마리아, 그의 큰아들이자 이승만·프란체스카의 양자인 강석, 둘째 아들 강욱이 자살했다. 이기붕은 26일 밤 서울로 돌아왔었다. 30일 간소한 조사도 없이 15분도 안 되는 영결식을 마치고 값싼 목관에 허술한 수의를 입은 채 망우리로 갔다. 28일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그의 사저인 이화장으로 갔다. 29일 최인규가 구속되었고, 잇달아 국무위원·자유당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승리의 화요일’ - 드디어 이승만 정권 무너지다 (이승만과 제1공화국, 2007.,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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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비합리적인 면과 합리적인 면을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가끔 역주행하기도 하지만, 앞 뒤로 비꺽거리는
와중에서도 조금씩 전진한다고 생각합니다.
12일 광화문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시위에서 약 100만명이 모였다고 합니다(주최측 추산·경찰 추산 26만명). 이는 2008년 광우병 집회의 70만명을 크게 넘긴 것으로서,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입니다(http://v.media.daum.net/v/20161112230605119). 이제 탄핵안을 준비해야 한다고 봅니다. 국민들과 야당들도 하야가 아니라 끌어내자 혹은 탄핵하자 라는 구호를 외치는게 타당하다고 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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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the kick
16/11/13 01:26
수정 아이콘
지난 9년간 역사를 많이 되감아 왔지요. 이제 드디어 이승만이 하야하는 부분까지 되감으셨네요. 즐겁게 감상해야겠습니다
누렁쓰
16/11/13 01:30
수정 아이콘
그나마 현실파악이 되는 주변인들이 등을 떠밀어줘야 한다는 말인데, 이 정권에 그런 인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람쥐룰루
16/11/13 01:43
수정 아이콘
동그란 바퀴라고 생각하고 달아놓은 바퀴가 알고보니 네모난 바퀴였을때 그걸 떼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 그럴 힘이 있는지 알아보는 시험대가 된듯 합니다.
별빛의샘
16/11/13 02:11
수정 아이콘
앞으로 일어날 탄핵안 의결, 헌재심판결과에 관계된 인물들 모두가 국민들의 심판대 위에 놓여질 것입니다.
건이건이
16/11/13 02:39
수정 아이콘
오늘의 집회.. 100만명이 넘는 상징적인 숫자가 정치권에 큰 영향을 줄거라고 믿습니다,,,
인간흑인대머리남캐
16/11/13 04:12
수정 아이콘
좀 다른 거 같은데요.. 저 땐 진짜 폭력성이 장난아니었군요. 반복이었다면 지금 내각에 있는 몇명의 집을 습격했겠죠. 앞으로 새누리당과 빅근혜의 목의 빳빳함 정도를 보면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저들이 어제 이 시위를 어찌 생각했는지.
데오늬
16/11/13 05:34
수정 아이콘
9년동안 나라를 반세기 퇴보시켰군요.
빠독이
16/11/13 07:38
수정 아이콘
장난감 차처럼 뒤로 감을수록 더 힘차게 멀리 나가는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집회가 장난감 차를 뒤로 당기던 손을 놓게 하는 데 중요한 기점이 되면 좋겠습니다.
16/11/13 07:58
수정 아이콘
이승만도 끝까지 버티고버티다 내려왔네요. 지금도 보다 긴 호흡으로 장기전을 준비해야할거 같습니다.
Korea_Republic
16/11/13 10:10
수정 아이콘
이럴수록 내년 대선 결과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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