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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8/26 03:55:11
Name lenakim
Subject [일반] 군인의 눈물
주의) 재미도 감동도 없습니다.


몇 년 전 일이다.

지금은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떤 부대로 as를 갈 일이 생겼다.

멍청한 시공팀이 외부 실리콘 코킹을 제대로 안쏴놔서 비가 샌다는 것이다.

창은 몇 개 없었지만 위치가 문제였다. 안에선 실리콘을 쏠 수 없으니 사다리를 써야하는데 너무 높았다.

나와 사장님은 커다란 사다리를 가지고 낑낑대며 일했고 우리 뒤에서는 군인들이 보도블럭으로 흙바닥을 포장하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차량을 가지고 한번에 옮기던가, 구루마라도 쓰던가 정 안되면 지게로 등에 지던가 할 것을

몇십 명의 군인들이 양손에 보도블럭을 하나씩 들고 나르고 있었다.

햇빛은 쨍쨍 내리쬐고 군인들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어쨌든 일은 힘들긴 했지만 금방 끝났고 우리는 병사식당 앞에서 쪼그려앉아 팩우유를 마시며 감독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리는 군인 두 명을 보게 되었다.

한 명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취사병이고, 다른 한 명은 회색 활동복을 입고 있었다.

딱히 할 것도 없었던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회색 활동복을 입고 있던 사람도 취사병이었던 모양이다. 들리는 말로 보아 새로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것 같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취사병은 가뜩이나 바쁜 와중에 새로 들어온 취사병의 굼뜬 움직임이 맘에 들지 않았고

어느 날 신입 취사병이 실수를 저지르자 짜증이 난 고참 취사병은 이렇게 말했다.

'야, 이렇게 할 거면 그냥 생활관 가있어라. 그냥.'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죄송하다고 하거나, 앞으로 잘하겠다고 하거나, 혹은 꾹 참고 계속 일을 하겠지만

이 신입 취사병은 좀 달랐다. 그는 진짜로 생활관으로 가버렸다.

당연히 한 명이 빠진만큼 일은 더 바빠졌고 고참 취사병보다 더 고참이었던 취사병이 한 명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당연히 '애들 관리 안하냐'로 시작되는 내리갈굼이 시전되었고, 어떻게보면 문제의 원흉이었던 고참 취사병은 열이 받을대로 받아서 생활관으로 가버린 취사병을 잡아왔다.

그리고 긴 갈굼이 시작되었다. 뭐라고 갈궜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서 생략하겠다. 아무튼 신입 취사병은 갈굼당하다가, 울어버렸다.

진짜로 울었다. 고참 취사병은 당황했는지, 혹은 화가 더 났는지 그냥 병사식당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신입 취사병은 병사식당 벽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울었고, 마침 훈련이 끝나 식사를 하러온 여군이 신입 취사병을 안아주며 위로하는 것 까지 본 우리는 마침 온 감독관에게 작업의 결과를 확인시켜주고 그 부대를 빠져나왔다.

-끝-

ps. 모 정비대대에 일을 하러 가보니 요즘 생활관은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생활관 벽면을 각종 서브컬쳐 캐릭터들이 채우고 있더라. 그런데 그 중에는 나루토의 이타치도 그려져 있었다. 간부들이 나루토를 안읽어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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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테
16/08/26 04:19
수정 아이콘
공사감독병으로서 반갑습니다. 유쾌한 업자 아저씨들이 이것저것 도와주고 위로해준 덕분에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지요. 재작년 딱 이맘때쯤 문혜리였나? 거기에 기가 막히게 맛있는 중국집이 있는데, 이러면 안된다고 극구 손사래치던 저를 이끌고 들어가서 짜장 짬뽕 탕수육에 고량주까지 얻어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방탄모를 도둑맞아서 발을 동동 구를 때 폭우속에서 시간+기름+돈낭비까지 해가며 여태껏 공사했던 소초들을 같이 샅샅이 뒤질 정도로 많이 정들었더랬지요. 정말 그분들 아니었음 죽도록 괴롭히던 감독관이자 소대장인 놈 정수리에 대검 꽂아넣고 자살했을 겁니다.
16/08/26 04:27
수정 아이콘
사람을 살리는건 이유없는 선의죠. 요즘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번 현장 감독관이 사이코라서 피곤하네요;
소야테
16/08/26 04:39
수정 아이콘
애초에 업자 앞에서 일부러 목에 힘주라고 교육을 받습니다. 니들이 공사아저씨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뭣도 모르니까 얕보인다, 우리가 갑이고 저쪽이 을인 걸 명심해라, 계속 딴지걸고 물어보고 귀찮게 굴어라 등... 간부 니들도 공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크. 아 한가지 기억나는 게, 준공할 때 우리 감독관이 준공할 때 단가 후려쳐서 마이너스 이익을 기록한, 같이 다닌 업체 팀장의 모가지가 날아갔더랬지요. 준공서류 작성하면서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목소리가 몹시 침울하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해고를 당했다는군요. 공사비 깎아봤자 자기한테 좋은 것도 없는데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정말 극성맞게 준공액수 깎는다고 징징대거나 갑질하더라니. 아, 사실은 좋은 게 있을지도.
대호도루하는소리
16/08/26 04:29
수정 아이콘
문혜리라면 설마 신철원위쪽에 문혜사거리,검문소있는..
소야테
16/08/26 04:32
수정 아이콘
네, 거기 맞아요. 와수베가스랑 포석정도 아시겠네요 흐흐
대호도루하는소리
16/08/26 13:36
수정 아이콘
아 저는 그 밑에 운천쪽에서 있었는데..ㅠ 문혜검문소, 성동검문소는 누가 지었을까 검문소드갈때마다 생각했는데 공사병이 있군요..
써니지
16/08/26 06:52
수정 아이콘
제가 군대 있을 땐 작업하다가 힘들면 그냥 내무실 들어가서 편지쓰거나 공중전화에서 전화하는 후임한명 있었습니다. 한창 작업하다가 보면 사람 한명 없어졌고, 그래서 다들 찾다보면 늘 내무실이나 공중전화에서 발견했죠. 사람은 서로 신기할정도로 다르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해준 친구죠.
방과후티타임
16/08/26 08:09
수정 아이콘
저도 군인 시절에 갈굼당하다가 왜이렇게 사는가 싶어서 운적 있는데요. 뭐...ㅜㅜ
그때 저를 갈구던 그인간은 잘 살고있나 싶네요
검검검
16/08/26 09:46
수정 아이콘
부대에서 죽고 싶었을때 마음을 돌리게해준건 옆중대 선임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그분이 타준 커피, 담배였습니다.
그후로 골초가 된건 함정...
16/08/26 10:24
수정 아이콘
여군이 신입을 안아주며 위로했다고요? 상상이 가지 않는다...
16/08/26 11:27
수정 아이콘
여군이 안아주다니.. 빅픽쳐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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