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유로파카페에서 좋은 글을 봐서 한 번 올려봅니다.
카페 가입해야 읽을 수 있는 글이어서 작성자분의 허락을 받고 복붙하였습니다.
한 번에 다 올리려 했는데 글자제한이 있는지 안 올라가서 우선 2편까지만 올립니다.
첨부된 그림, 동영상과 함께 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아래 링크도 첨부합니다.
중국에 대한 글을 썼을 때 좋은 보론을 해주셨던 것만큼은 안 되겠지만 저도 나름 추가적인 떡밥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Charment4님은 반동좌파를 넘어에서 좌파 혹은 진보세력이 현재 시대의 변화상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고 그렇기에 그들이 제시하는 내용이 되려 진보적이라기보다는 반동적이라고 한 바가 있고, 저도 많은 부분은 이에 동의합니다(저를 예전부터 봐오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저는 열렬한 좌파였고, 사실 지금도 그런 부분은 많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1. 각 시대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얻는다
이언 모리스는 그의 저서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각 시대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얻는다."라고 한 바가 있습니다. 즉, 어떠한 사상이나 관념이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할 때 그에 적합한 사상과 관념이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는 것이죠. 사실 약자들이나 피착취자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레토릭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진승과 오광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고 한 것이 2천년 전입니다. 서양에서는 와트 타일러의 난이 있었고, 그 후에 이자성의 난과 러시아의 푸가초프의 난을 거쳐 프랑스에 최초의 근대적 평등주의적인 정치가인 바뵈프와 블랑키가 등장했죠. 이 전통은 마르크스로 이어져 레닌과 스탈린, 마오쩌둥, 카스트로로 이어졌고 그들의 후계자들은 지금 몬트리올의 세계사회포럼에서 여전히 자신들의 이상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등주의 운동이 가장 위협적인 세력을 갖추었던 때는 언제일까요. 1848년 공산주의 최초의 조직화된 정치운동을 추동한 강령인 <공산당 선언>이 나온 뒤부터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인 1953년까지의 약 100여년일 것입니다. 그 이전의 평등주의자들은 잠시 수도를 점령하고 왕의 목을 칠 순 있었어도 결국 착취자들의 손에 역으로 털리거나 본인들이 새로운 착취자가 되곤 했습니다. 물론 성공을 거두는 가능성 자체도 희박했고요. 스탈린 사후를 볼까요. 흔히들 좌파가 마지막으로 위용을 떨치던 시대의 종말을 1991년 소련 해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리 보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서구권 사회 내부의 기존 질서에 위협이 되던 공산주의 운동은 스탈린 시대 이후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평등주의자들이 선거경쟁에 참여하거나 세계대전을 통해 새로이 능력을 갖춘 시민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기존 질서에 포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953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위협이라는 것은, 그 실체도 알고보니 별 거 아니었을 뿐더러 그 위협은 구성원들 사이의 사회계약을 위협하는 기존 형태라기보다는 그저 강대국 간의 경쟁, 훨씬 전통적이고 관리 하기 쉬운 위협이었습니다. 물론 소련이 망한 뒤에는 아예 관에 못을 박아버렸죠. 지금은 세계사회포럼이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으실테지만 80년 전에 글을 아는 사람 중 코민테른의 존재를 모르던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2. 함께할 때, 우리는 강합니다(Вместе, Мы сила).
그렇다면 왜 1848년부터 1953년까지의 기간이 평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가장 강력했을 때였을까요. 산업의 조직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1848년 이전의 제1차 산업혁명은, 아직 미숙한 빈곤한 농촌인구를 무작정 흡수할 수 있던 때였습니다. 초기 산업혁명 당시 영국 노동자들의 현실은 정말로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도시에서 그런 비참한 삶을 견뎌내야 했던 걸까요.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영국 농촌의 현실도 그와 별반 다를 거 없을 정도로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UC 어바인의 케네스 포머런츠 교수는 그의 저서 대분기에서 1800년대 초까지 영국 농촌에서의 삶이 사실 동시대 중국 농촌에서의 삶과 질적으로 크게 차이가 있지 않았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합니다. 런던과 베이징의 실질임금이야 당연히 이 때 가면 큰 폭으로 벌어져 있긴 했고 그런 차이가 산업혁명을 추동하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산업혁명 여명기의 영국은 극히 토지집약적, 노동집약적인 농촌으로 맬서스 트랩의 무게를 버겁게 견디고 있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혁명으로 유의미한 경제성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절망적인 영국 농촌에서 꿈도 희망도 없이 단조로운 삶을 사느니 살기 팍팍하고 비참한 도시생활을 견뎌야 한다고 치더라도 런던이나 맨체스터, 리버풀에 가게 된 겁니다. 즉 당시 노동자들은 선택권도 없었고, 당연히 교섭능력도 없었으며, 비참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공산당 선언이 나올 때쯤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1848년은, 아이러니하게도 유사 이래로 영국의 임금이 가장 높았던, 흑사병 직후의 임금을 돌파한 첫 해였습니다. 상황이 바뀌고 있던 것입니다. 산업의 성장이 폭발적으로 시작되고, 더 생산성 있는 노동자와 군인을 만들기 위한 교육의 보급, 그리고 노동자들 본인의 조직화로 인하여 이들이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을 상대로 파업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더하여, 노동자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들은 이직이라는 다른 형태로 공장을 위협할 수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노사 간의 교섭이 시작되는 노동시장이 탄생하게 될 전조였습니다. 즉, 마르크스의 그 호소력 있는 명문장들이 노동자를 각성시킨 게 아닙니다. 그저 이전에는 없던 힘을 갖게 된 노동자들이 그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켜줄 호소력 있는 명문장을 필요로하게 된 겁니다.
산업혁명의 파급과 그로 인한 산업구조의 변화도 이런 흐름을 부추겼습니다. 19세기 좌파 운동의 가장 강력한 진앙지가 독일이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대서양 건너 미국과 유럽 대륙으로 건너간 산업혁명의 물결에 제일 잘 적응한 두 나라 중 하나가 독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독일인들은(더불어 다른 하나였던 미국인들은) 영국에서 배워온 산업혁명의 정수들을 자신들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맞추어 진화시켰는데 바로 2차 산업혁명에 발동을 건 것입니다. 국가 주도 하의 국민교육은 기술교육을 잘 받은 효율 좋은 인적자원을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냈습니다. 지금껏 세계의 학교를 규정짓는 프로이센 교육 모델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소규모 기업들이 아닌 콘체른이라는 형태의 기업집단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를 주도한 건 전기, 화학이라는 신산업이었고 특히 전기가 가지고 온 동력 상의 새로운 혁명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거대한 작업장을, 그것도 고도의 자본이 집적된 기계화된 공장을 탄생하게 합니다. 대기업이 중심이 된, 굴뚝에서 매연이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공단은 그렇게 독일과 미국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대공장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경제구조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줬습니다. 자본집약적인 단일 대공장에서 모여 있는 노동자 집단을 조직하는 것이 소작업장에 분산되어 있는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타격을 입히기도 쉽습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의 최고존엄이었던 디트로이트의 포드 공장이라던가 플린트의 GM 공장 하나만 잡고 노동자들이 파업 하면 그냥 임금 올려주는 것 빼고는 사실상 답이 없던 겁니다.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전설적인 노동 영화 <노마 레이>의 파업 장면입니다. 2분 15초부터 보시면 되는데.. 영상 안 보실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노조 조직가인 주인공 노마 레이가, 마침내 공장에 올라가서 "노동조합"이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든 채 침묵으로 호소하자 동료 노동자들이 모두 자신들의 기계의 전원을 꺼버리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 건 실제로 제2차 산업혁명을 거쳐서 형성된 작업장의 속성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고정비용이 상당히 많이 투자된, 자본집약적 단일 대공장을 노동자들이 장악할 경우 자본가로서는 대처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영화는 미국을 다루고 있지만 미국의 좌파는 아시다시피 그렇게 강력하진 않았고.. 하여튼 19세기 말에 가면 독일 노동자들의 힘은 절정에 이르렀고, 총파업 위협만으로도 사회를 뒤흔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 그랬듯 제2차 산업혁명은 독일과 미국에서 다시 다른 선진 산업국가들로 확산되었고, 대부분의 산업도시에서는 막강한 노동조합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들이 가진 조직력과, 조직력에서 나오는 자금은 사회주의 정치를 위한 자원으로 동원되었고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진짜로 친목질 조직에서 본격적 정치조직의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공산당과 사민당이었죠. 이들은 의회에 진출하거나, 정치권 밖에서 투쟁을 전개하거나 하는 식으로 기존 질서를 위협했습니다. 러시아와 같이 2차 산업혁명을 구질서의 한계로 인하여 애매하게 받아들인 나라에서는 전쟁의 혼란에 이어 나라가 뒤집어졌습니다. 조직화된 대공장 노동자들이 극히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수도를 봉기로 먹어버린 겁니다. 노동자 조직과 정치세력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 절정에 달한 때였죠.
이 때가 바로 인류 역사를 통틀어 평등주의 운동이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치던 때였습니다. 노동자 국가로서 소련이 무지막지한 군대를 보유한 채 서구의 좌파들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사실 스탈린은 현실정치인이기에 훨씬 현실파악을 잘 했지만요). 막강한 노조 조직은 여전히 강력한 쟁의행위로 자신들의 힘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이렇기에 자본가들로서는 타협을 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노동자들이 조직화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정부구성에 참여한 뒤로 압박은 더 심해졌죠. 서유럽에서는 그렇게 복지국가가 탄생했고, 일본은 주도적으로 노동자들을 포섭해 공산권 이외 국가 중에서는 최고의 고용안정성을 보여줬습니다. 이것이 대중정치로서 좌파정치가 만들어낸, 인민의 힘과 노동자의 힘이 보여준 결과물이었습니다.
3. 하늘에서 자본이 빗발친다!
그러나 시대는 계속 변하는 법입니다. 1차 산업혁명이 2차 산업혁명에게 자리를 내줬는데 2차 산업혁명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었죠.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포드주의의 시대는 사회발전의 새로운 물결을 타게 되는데 바로 세계화와 아웃소싱이었고 자본의 반격이 다시 시작됩니다. 브레턴우즈 체제로 GATT와 IMF, IBRD가 등장하고 적어도 제1세계에서는 미국이 제공하는 세계안보라는 공공재로 정치적 안정을 이뤄내자 경제통합에 다시 시동이 걸린 겁니다. 마침내는 공산권도 무너졌고, 결정적으로 중국이 문을 열었죠. 이러한 흐름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교통과 통신의 비약적인 성장이었습니다. 이제 공장을 기존의 공업중심지 바깥에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럽의 공단들은 70년대에는 에스파냐로, 그 뒤에는 동유럽으로, 최종적으로는 중국으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플린트의 자동차 공장들, 피츠버그의 제철소는 독일과 일본과 경쟁하는 것도 버거워했습니다. 그들은 선벨트로, 멕시코로, 그리고 역시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습니다.
교통과 통신이 이런 걸 어떻게 가능하게 해줬을까요? 첫째로는 러스트 벨트(미국 중서부의 이제는 몰락한 산업도시들)가 흥하게 된 입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 지역은 오대호 연안의 풍부한 광물 및 목재에 더하여 오대호를 중심으로 한 수운 네트워크를 따라 발달했습니다. 시카고를 비롯한 중서부의 도시들은 북아메리카 최대의 도시권인 뉴욕 메갈로폴리스의 시장과 대서양 항구 너머 유럽 시장에 대한 우수한 접근권이 최대 장점이었습니다. 이리 운하를 비롯한 수운망을 통해 타 지역보다 훨씬 싼 운송비가 이 지역의 최대 강점이었죠. 이런 입지 조건을 다른 데서 찾을 수 없고 이미 상당한 자본을 투자한 대공장이 있는 한 노동자들은 교섭 상의 많은 이점을 누릴 수 있던 겁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시기 주간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라는 미국 역사상 마지막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이루어지자, 러스트 벨트가 갖는 마지막 이점인 운송비 비교우위는 사실상 최초의 사형선고를 맞이했습니다. 미국 남부로 공업단지의 이전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제 구태여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주면서까지 사업을 디트로이트에 유지할 이유가 사라진 셈이죠. 그리고 최초의 사형선고라고 함은 두번째 사형선고도 있다는 셈인데 운송 상의 대규모 혁신이 바다에서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표준화된 컨테이너의 등장은 항만의 물동량 처리를 놀랍도록 효율적으로 만들어줬습니다. 이제 미국 내에서의 산업 이전을 말도 안 되는 규모로 넘어서는 대규모 산업 이전의 시대를 만들어낼 교통 상의 예비단계는 거의 갖춰졌습니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 통신의 발전, 정보기술의 발전입니다. 우선 제2차세계대전을 통해 세상에 본격적으로 선보이게 된 컴퓨터가 생산 영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냈습니다. 북한이 자랑하는 CNC입니다. 컴퓨터로 제어되는 절삭가공을 시작으로 공장에 자동화 물결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구태여 말도 안 듣는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고용할 이유가 자본가로서는 또다시 사라지게 된 셈입니다. 두번째는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디지털화되었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공간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계 도면, 디자인, 제품의 기능, 사용자들의 피드백, 기계의 사용법 등 모든 정보가 디지털로 변환되자 이 정보들은 곧바로 새롭게 문을 연 중국을 향해 태평양을 건너게 됩니다. 기존에 러스트 벨트나 라인-루르 지역의 대공장들을 유지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정보 이동의 한계 때문도 있습니다. 제조업의 최고존엄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는 수많은 부품들을 수직적으로 통합해내야하고 몹시 많은 공정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을 한 데 모아야 집적의 경제도 달성할 수 있고 하청업체들 간의 커뮤니케이션도 빨리 이루어져 여러모로 효율적입니다. 사실 이는 인터넷 시대인 지금도 무시 못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적어도 기술적인 한계는 돌파하게 된 셈입니다. 수많은 공정들을 이제는 분리시켜서 세계 각지에 배치시킬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만들어진 타이어와 일본에서 만들어진 전자장비를 중국으로 모아서 중국에서 만들어진 잡다한 부품과 함께 조립시키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엔 이런 무시무시한 업무량을 처리할 조직력 자체가 확보가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위성통신과 해저케이블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해졌고, 대공장 체제를 유지할 마지막 유인조차 사라지게 된 셈입니다.
결국 본토에서는 자동화된 공장이 고부가가치 생산품을 찍어내면서 노동자를 고용할 필요가 없어졌고, 대량생산되는 제품들은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 입지하게 되면서 역시 유럽이나 미국의 대공장에서 고용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나마 미국이나 유럽에 남아 있는 제조업이래봤자 남부 미국, 동유럽으로 이전할 것이었고 그조차도 대공장과는 거리가 먼, 단일 공정에 전문화된 훨씬 작아지고 최적화된 공장이었죠. 노동자들에게 전이되는 부는 점차 쪼그라들었습니다. 생산에서 노동자들이 기여할 수 있는 게 적어졌기 때문이죠. 대신 고등교육을 받은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런던, 뉴욕, 프랑크푸르트의 금융가로 모이거나 실리콘밸리, 드레스덴을 비롯한 테크노폴로 가서 공장 수십개를 모은 것보다 많은 돈을 창출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대공장 노동자들의 아들들은, 모라벡의 역설로 인해 자동화 되기도 당분간 어려운 서비스업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허나 이런 서비스업 직종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도 어려워서 소득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실업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안정된 직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임시직들만 넘쳐 흐르기 시작했죠. 계층이동은 이제 과거의 꿈이 되어버렸고, 고등교육 받은 사람들은 더욱 넓은 세계와 연결되는 반면 저학력 저소득층은 자신들의 지역사회가 황폐화되는 걸 지켜만 봐야했습니다. 당장 이 나라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4. 결론...?
애석한 점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라고 해야할지, 하여간 여기에선 어떤 악의적인 세력의 획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일반적인 우파들의 서사대로 무지몽매한 개돼지 대중을 선동시켜 말도 안 되는 이상향에 사람들의 돈과 시간과 그리고 생명을 낭비하게 만든 좌파란 건 없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이익을 위해, 처음에는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과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조직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노동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도널드 서순은 "설령 마르크스주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노동자 정치가 강력한 힘을 쓸 것"은 어차피 마찬가지라고 지적합니다. 다시말해 마르크스주의는 강력한 노동자들의 힘이 만들어낸 이념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각 시대는 각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얻습니다.
그렇다고 좌파들의 서사대로 자신들을 끝간 데까지 쥐어짜려고 하는 악의적인 자본가들도 찾기 힘듭니다. 물론 저는 사회적인 권력관계를 놓고 봤을 때 상대적 약자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남녀가 되었든(메갈은 별개로 한다고 치더라도요)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가 되었든 간에 말입니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이 정말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들도 각자의 야심이 있는 사람들이고 사업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게 저런 선택들은 한 것입니다. 저는 당연히 알량한 인생의 의미나 이런 게 고용불안정과 실업이 가져다줄 한 인간의, 그리고 가족의 황폐화와 디트로이트의 몰락을 대신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세계화는 개발도상국들로 하여금 위대한 탈출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지만 선진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몰락은 전혀 아름답지 않은, 몹시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수없이 양산해냈습니다. 하지만 좌파의 서사대로 자본주의 돼지들의 악의적 획책보다는 자본가들이 스스로의 사회경제적 이득을 추구한 결과물(그리고 아무리 대공장 노조들이 강하다고 해봤자 그들이 최종적 권력관계에서는 을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지금의 상황인 겁니다. 사실, 마르크스가 진짜로 위대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면 저는 이러한 사회집단 간의 갈등을 종교적, 도덕적 서사보다는 계급 간 이익관계의 충돌로 드라이하게 바라보았다는 점을 그 중 하나로 꼽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이 근대 평등주의의 역사를 더 잘 설명해준다고 믿습니다.
여하간 그렇게 뉴욕, 런던, 도쿄라는 세계 3대 도시의 자본가들이 승리하는 것이 역사의 귀결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요지는 명백합니다. 특이점 이전에는 역사의 귀결 그딴 거 없다는 겁니다. 이언 모리스는 역시 그의 저서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사회발전의 지속은,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힘 또한 만들어낸다."라는 존나 위대한 문장을 또 쓴 바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힘들 말입니다.
1. 반동좌파를 넘어
2. 밑의 Charment4님의 글에 더하여 (1) - 근대 평등주의의 흥망성쇠
Eagle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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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y don't really care about us
평등주의의 시대는 결국 1980년대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오자 사실상 파탄이 났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레이건과 대처는 평등주의의 대오를 분쇄하고 평등주의의 이상 하에 세워진 사회협약을 박살냈습니다. 그 뒤에는 일사천리였고, 전 글에서 썼듯이 금융과 정보기술로 성장하는 뉴욕과 런던, 프랑크푸르트와 몰락해 가는 리버풀, 디트로이트, 피츠버그의 대비가 선명해졌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이나 동네는 그들이 왜 잘 나가는 이유를 물을 때 자기들이 잘해서라고 하는 경향이 있죠. 뭐 절반은 맞습니다. 그리고 망하는 사람이나 동네에 가서 니들이 망한 이유가 뭐니라고 물으면 남들이 나쁘다고 합니다. 이것도 대체로 절반 정도 맞긴 합니다. 디트로이트가 망한 이유는 사실 디트로이트 시 정치의 문제가 컸습니다. 러스트 벨트의 모든 도시가 망한 것이 일단 아닙니다. 디트로이트의 시 인구 대부분은 고졸이었고 고학력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고부가가치의 산업을 유치시키기에 유리한 인적자원에 부유한 시의 재정을 투입했다면 디트로이트가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망하진 않았을 겁니다. 민권운동가 출신의 흑인 시장 콜맨 영의 어리숙한 정책들은 이런 경향도 강화시켜줬죠.
그렇다고 해서 디트로이트가 븅신이라 망했다고만은 당연히 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디트로이트가 진짜로 인적자원에 각잡고 투자를 해서 샌프란시스코라던가 하는 혁신 클러스터로 도약했다고 칩시다. 그래봤자 포드 공장의 노동자들은 해고 되는 것밖에 답이 없습니다. 어차피 선진 경제에서 이루어지는 제조업 혁신은 모두 자동화와 도요타의 린 생산기법을 필두로 시작된 조직 방식의 근본적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MIT나 스탠포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디트로이트 공대의 고학력자들은 자동차 공업을 끝간 데까지 자동화시키고 최첨단 전자장비로 무장한 차를 내놓아 세계를 놀래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초부품을 제공하는 곳은 결국 중국일 것이고 그걸 조립하는 건 결국 기계일 겁니다. 더군다나 운 좋게 하나가 이런 식으로 도약했다고 치더라도 러스트 벨트의 모든 도시들이 이런 식으로 도약할 수도 없습니다. 뭐가 되었든 사회발전의 결과물로 러스트 벨트는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스스로 되물어 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우리들의 삶은 어쩌다가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인가? 그들의 자녀들은 더욱 빡칠 수밖에 없던 상황입니다. 적어도 대공장에서 일하던 부모들은 안정적으로 취직해서 젊은 시절을 즐기기라도 했지, 이제 신세대들은 젊은 세월조차도 못 즐기고 맥도날드 알바나 전전해야합니다. 까놓고 말해 이렇게 묻는 것은 인간이라면 매우 이성적인 겁니다. "TV에서는 양복 빼입은 젊은 금융인들이나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수백만 수천만 달러를 긁어모았다고 나오는데 왜 우리들은 태어난 것조차 버거워서 삶의 무게에 질질 끌려다녀야 하는가?" 불평등이 심해지자 150년 전 그들의 조상들을 사로잡은 질문들이 다시 자손들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조상들은 자신들을 착취하는 자본가들을 탓할 수 있었고 실제로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실제로 착취를 한다 만다와 별개로 투쟁 및 교섭 상대를 잘 골랐다는 겁니다. 하지만 자손들은 이제 자본가들이 우리를 착취한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평등주의가 이미 파산해버린 것입니다. 소련의 몰락이 평등주의의 주가를 깎아먹은 것도 컸지만, 기존의 평등주의에 입각한 정치인들에 실망을 한 것이 제일 주효했습니다.
조직노동이 후원해주는 이들 평등주의 정치인들은 사실 노동자와 같은 편으로 보이긴 해도 같은 존재는 아닙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정치인이고, 수많은 이익 집단들 사이에서 협상을 해야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자국의 경제성장률이 계속 떨어지고 자본은 해외로 계속 튀려고 하는 상황에서 과거 대공장 체제의 유물인 평등주의 이념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것은 선거 경쟁에서의 패배를 뜻했습니다. 몇몇 평등주의 세력은 자신들이 하던대로 하다가 결국 몰락했습니다. 다른 평등주의 세력들은 노조를 버렸습니다. 기존 노동계와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파탄난 것까진 아니었어도 과거처럼 의회에서 확고한 노조의 대변자 포지션을 취하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렸죠. 영국 노동당이 채택한 제3의 길은 이러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평등주의는 그 기반도, 그리고 결과물도 이제 폐허만 남았습니다.
한 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3차 산업혁명이 절정에 이르고 있던 1996년, 마이클 잭슨은 인간의 존엄성을 더이상 보여주지 못한다고 사회를 고발했던 유명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제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They don't really care about us(그들은 사실 우리를 보살펴주지 않아)! 그리고 그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죠.
Tell me what has become of my rights
Am I invisible because you ignore me?
Your proclamation promised me free liberty, now
I'm tired of being the victim of shame
They're throwing me in a class with a bad name
I can't believe this is the land from which I came
You know I really do hate to say it
The government don't wanna see
But if Roosevelt was living
He wouldn't let this be, no, no
내 권리가 어떻게 되었나 한 번 말해보시지
나를 무시하다 못해 이제 보이지조차 않나?
당신들의 선언은 나에게 자유를 약속했지, 이제
나는 수치스런 희생물이 되는 것에 지쳤어
그들은 나를 모욕하는 이름으로 분류해 던져버리지
난 이 땅이 내가 태어난 곳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아
내가 정말 이런 말 하기 싫어하는 거 너도 알겠지만
정부는 우릴 보려하지 않아.
만약 루스벨트가 살아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걸, 절대. 절대.
마이클 잭슨이 명곡 제조기인 걸 감안하더라도 이 노래의 메시지는 여전히 울림이 큽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루스벨트가 만들어낸 뉴딜동맹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고 미국의 대공장은 여전히 잘 굴러가던 1950년대라면 이 노래는 히트하지 못했을 겁니다. 가사가 공감이 안 갔을테니까요. 그리고 더욱 애석한 점은 가사와는 다르게 루스벨트가 심지어 살아돌아온다고 해도 평등주의를 재건할 수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사회발전의 장기적인, 의도치 않은 결과물이었기 때문이죠. 마이클 잭슨이 본인을 세계적 팝스타로 만들게끔 했던 그 정보 통신 기술의 발전이 바로 이러한 사태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언 모리스의 말대로 사회발전은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힘 또한 만들어 냅니다.
2. 인민이여 죽창을 (다시) 들라
그렇다면 폐허 위에서 자동화와 세계화, 정보화로 이루어진 제3차 산업혁명의 패배자들은 이제 누구에게 기대야 했을까요? 한동안은 그래도 경제가 어영부영 성장해서 불만이 직접적으로 표출되진 않았습니다. 일단 맥도날드 알바라던가 그다지 좋지 못한 사무직이라던가 자리 잡으면 선진국 사회는 기초적 사회보장 제도는 잘 되어 있었기에 불만을 그렇게 빡세게 표출할 것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일자리를 앗아간 중국 공장에서 나온 저가의 중국산 공산품과 역시 그들의 직장을 몰락시킨 혁신들은 어찌되었든 삶의 만족도를 높여줬습니다. 베이비붐 세대인 아버지 세대는 GM 공장에서 꿀 빨면서 일하긴 했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저렴한 중국산 하이얼 백색가전에 더하여 수많은 오락거리와 편의를 제공해주는 소프트웨어들 모두를 구비할 수는 없었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슬아슬한 상태는 늘 지속될 수가 없는 법입니다. 2008년에 이러한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경제적 충격이 너무 큰 폭으로 찾아왔고 살기는 더 팍팍해졌습니다(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이제는 진짜 뭔가 잘못되어감을 느꼈고, 젊은 세대라던가 과거의 안락함을 기억하던 옛세대라던가 모두가 현 상황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이 소련의 핵개발 프로젝트를 전담한 이고리 쿠르차토프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기가 울지 않으면 어떻게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겠소?" 인간의 아이는 연약하기에 울음을 통해 어머니나 주변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조금 더 자란 뒤에는 언어를 익히게 되고 언어를 통해 조금 더 상세한 의사전달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표출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자라고 나서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는? 주먹질을 하죠. 3차 산업혁명의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이런 다양한 방식들을 통해서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이들은 현상을 나름대로 진단해보았습니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비참하게 내몰았는가? 1949년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이 패하자 미국 내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했습니다. "Who Lost China?" 누가 중국을 잃어버렸는지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이었죠. 이들도 "누가 우리 자신들을 잃어버렸는가?"하는 책임소재를 규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누가 책임을 져야하는지 알아야 그들을 향해 울어보거나, 정중히 말해보거나, 주먹질이라도 할 수 있는 겁니다.
한 그룹은 과거의 평등주의가 여전히 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존의 평등주의 세력은 대공장 노조 위주라서 자신들을 포괄할 수 없었고, 자본가들의 탐욕에 맞서기 위한 새로운, 더 폭넓은 좌파 정치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금융 중심지인 월스트리트의 1%가 자신들의 배때지를 불리기 위해 99%를 착취한다는 주장이 폭발했습니다. 시작은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였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잘 아시다시피 5년 뒤 버니 샌더스의 엄청난 인기로 귀결되었습니다. 재밌는 건 샌더스는 매우 새롭고 참신한 사람으로 여겨지긴 하고 어느 정도 맞긴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그의 사상과 신념은 매우 오래되었다는 겁니다.
사실 샌더스의 주장은 조직노동의 지도부가 포괄해온 기존 평등주의 정당들의 변신을 거부하고, 새로운 지지자들, 즉 3차 산업혁명의 패배자들을 통해 조금 더 퓨어한 평등주의를 밀어붙인 것에 가깝습니다. 러스트 벨트의 일반 노동자들은 노조 지도부와 달리 힐러리는 싫어하되 샌더스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이를 입증해줍니다. 노조 지도부들은 민주당의 충성스러운 지지파로서 민주당이 점차 조직노동 의존도를 탈피하는 과정에 있었어도 그저 관성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왔기에 민주당의 변화상도 그럭저럭 따라갔습니다. 역설적으로 오래된 자들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노동자들은 그런 것보다 자신들의 기대이익에 맞춰서 지지자를 결정했습니다. 이젠 더이상 조직노동이 온전히 포괄하지 못하는, 3차 산업혁명의 패배자들은 과거 1차 산업혁명의 패배자들과 마찬가지로 평등주의에 매료되었습니다. 이쪽도 역설적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오래된 사상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3. 마왕이여, 일어나세요.
그러나 이것만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기존의 평등주의 세력 뿐만이 아니라 보수주의 세력도 3차 산업혁명의 흐름에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선거 경쟁을 통해 지지자를 동원하던, 고전적인 20세기의 정당 민주주의는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미디어의 발전, 소득 불균형의 심화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매튜 크렌슨과 벤저민 긴스버그의 명저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줍니다. 보수주의자들이었건 평등주의자들이었건 과거에는 당기관지를 비롯한 신문들과 지역 사회의 당세포들을 통해, 그리고 교회, 노조 등 자신들의 지지세력이 포진하고 있던 사회조직을 통해 경쟁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백만장자와 억만장자들이 엄청난 금액을 정치인들에게 기부해주고, 안방까지 스며든 미디어가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의식을 결정짓게 되자 대중들을 동원할 유인이 사라졌습니다. 선거는 그저 형식적인 확인절차가 되어버렸습니다. 의회는 잠재적 지지동맹의 이익에 근거하여 정책을 내놓고 협상을 하던 정당 간의 게임이 아니라 지하드 전사들의 성전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실질적인 결정들은 이제 법원에서 법조 엘리트들이 결정하게 됩니다. 이런 보수주의자들의 실패는 오바마가 임기 말에 무슨 빠칭코 잭팟 터트리듯이 터트린 진보적 업적들에서 잘 드러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의회는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씁니다. 그런데 왜 오바마케어, 동성결혼 등 수많은 진보적 의제들이 오바마 의중대로 놀아나버린 것일까요? 이는 의회에서 지지자들 간의 세력 싸움으로 결정난 것이 아닌 최고위층 엘리트인 연방대법관들의 쇼부치기로 결정났기 때문입니다.
공화당이 이빨만 털지 실제로는 전혀 보여주는 게 없다고 생각한 보수주의자들 또한 이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게 됩니다. 정치는 대표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게다가 3차 산업혁명은 보수주의자라고 비껴간 것이 아닙니다.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이라고 모든 이슈에 진보적일까요? 사실 진보적이냐 아니냐의 중요한 변수로는 교육이 작용합니다. 러스트 벨트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고등교육 받은 사람이 많지 않죠. 이곳 노동자들이 평등주의 정치인들을 지지한다고 민주당을 뽑긴 해도 동성결혼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 반대로 나오는 신실한 기독교인일 수도 있단 말입니다. 실제로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 중 유의미한 수는 힐러리도 샌더스도 아닌 다른 사람을 지지하게 됩니다. 네.. 이쯤 되면 짐작하시리라고 생각되는데 바로 이 즈음부터 티파티가 부상했고, 공화당이 점점 막나가기 시작했으며, 그 궁극은 마왕 도널드 트럼프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들의 지지층은 문명과는 거리가 먼 딥사우스 지역의 암흑의 심장, 바이블 벨트이긴 합니다만(솔직히 이름부터 병..신 같지 않나요), 어찌되었든 나름 전국적 세몰이를 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점입니다. 이렇게 미친 것 같은 놈들이 어떻게 이런 이변을 일으킨 걸까요? 샌더스는 나름 상식인 축에라도 들어간다고 치더라도 트럼프는 도저히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번에 말했지만 이언 모리스는 "각 시대는 각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얻는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트럼프 같은 놈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포퓰리즘의 역사는 실제로 상당히 장구합니다. 그렇다면 하필 지금, 2016년에서야 트럼프류의 사람들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뭘까요? 옛날에는 굳이 트럼프 같은 놈을 지지할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사회가 좀 안정적으로 굴러간 반면 지금은 그렇지 못해서입니다. 아까 3차 산업혁명의 패배자들이 다시 창끝을 자본가로 돌리면서 사회를 바꿔야한다고 샌더스를 소환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3차 산업혁명의 패배자 중 또다른 그룹은 자신들의 이익을 기존 공화당이나 보수당이 대변해주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였고 그들 나름대로 "누가 우리를 잃어버렸는가"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바로 이민자들이 문제라는 겁니다. 멕시코 놈들이, 아랍 놈들이, 동유럽 놈들이, 아시아 놈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았는다. 그들이 이 위대한 나라에 무임승차해서 이 나라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물론 내 직장도 같이 타락해서 나를 짤랐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한다.
트럼프 지지자들과 샌더스 지지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이익은 더이상 기존 정치구도, 즉 보수주의자와 평등주의자들의 경쟁에서 전혀 대변받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실제로 트럼프와 샌더스 지지자들이 공통점으로 밀어붙이려는 정책이 뭡니까. 보호무역 정책입니다. 자신들의 일자리를 앗아간 근본적인 원흉이 바로 중국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트럼프는 몰락한 석탄산업 종사자들에게서도 지지를 받은 바도 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기후변화와 탄소배출을 얘기하는 것을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다고요. 힐러리는 그들을 신경 써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영국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바로 브렉시트입니다. 보리스 존슨이 도널드 트럼프와 비슷하게 생긴 건.. 솔직히 심하게 비슷하긴 하지만 어쨌든 전적으로 우연이라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브렉시트 이전의 영국 정치구도를 보세요. 역시 새롭지만 낡은 사람인 제레미 코빈이 노동당을 다시 왼쪽으로 돌려놓고, 캐머런이 포괄 못하는 영국독립당의 나이젤 버러지나 보리스 존슨이 세몰이를 하던 것이 미국과 놀랍도록 흡사합니다. 3차 산업혁명이 가장 격렬히 진행된 곳이 영국이라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영국은 1차 산업혁명의 어머니지만 선발주자의 함정 때문에 2차 산업혁명에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독일은 커녕 사실상 프랑스에게도 밀렸죠. 하지만 영국의 수도 런던은 세계최강국의 수도로 쌓아놓은 입지가 있었고, 유럽 최대의 금융중심지로 도약했습니다. 영국 드라마도 세계인을 사로잡았고, 막스 플랑크와 함께 런던은 유럽 학문 연구의 최고 중심지로 남아있었습니다. 유럽에서 3차 산업혁명에 제일 잘 적응한 나라 중 하나는 영국일 겁니다. 그러나 1차 산업혁명의 후계자들은 그만큼 철저히 박살났습니다. 대처는 그 시작을 끊었을 뿐입니다. 리버풀, 맨체스터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도 이민자와 자신들을 신경 써주지 않는 기존 정치인들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기어이 일을 저질렀죠. 진짜로 유럽연합에 나가겠다고 선언해버린 겁니다. 3차 산업혁명에서 개꿀을 빤 사람들은 드디어 제대로 놀랐을 겁니다. 런던의 세계시민들은 세계화와 유럽연합을 통해 온갖 꿀을 다 빨아먹은 사람들입니다. 월스트리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실제로 미국이든 영국이든 국민소득은 세계화 이후에도 엄청나게 올랐는데, 정작 중위소득은 20년 째 변함이 없습니다. 사회의 분열이 더욱 가속화되고 정치는 불안정해져만 가며, 이는 기존에 꿀을 빨던 사람들을 또다시 위협하고 있습니다. 제2차 산업혁명의 여명기에 제2인터내셔널을 비롯한,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조직노동이 사회를 계속 흔들어놓은 그러한 불안정의 시대가 다시 시작되는 겁니다. 이런 불안정은 샌더스고 트럼프고 코빈이고 존슨이고 할 것 없습니다. 샌더스는 상식인처럼 보이죠? 극단화된 정치 시스템에서 포퓰리스트적인 지도자들은 지지세력 내부에서 선명성을 무기로 활약하려고 합니다. 샌더스가 상식인이라고 해도 샌더스 다음에 올 사람은 분명 샌더스보다 더 막나가는(혹자는 소신있는 이라고 평하겠지만) 사람이 틀림 없을 겁니다. 공화당에서 정상인 취급 받았던 테드 크루즈도 티파티의 일원으로 트럼프급은 아니지만 역시 만만찮게 미친놈이었다는 건 포퓰리즘적 과격주의가 레벨을 높여가며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을, 즉 중간보스가 마왕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새로운 좌파에서는 그런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시리자의 치프라스입니다. 이 사람 작년에 뭔 미친 짓을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놀랍도록 무력했는지 천하만방이 알고 있습니다.
4. 개돼지가 아니라 말
그런데 2차 산업혁명기와 같은 불안정의 시대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2차 산업혁명기의 조직노동은 점차 늘어만 가는 자신들의 경제적 중요성을 협상 레버리지로 사용하여 (고통스럽긴 했지만)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3차 산업혁명의 피해자들은, 오히려 경제적으로 점차 쓸모 없어지는 사람들이 결성한 연합이라는 점입니다. 이 사람들이 아무리 죽창을 던지겠다고 해도 그 죽창은 힘이 딸려서 맞지를 않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때문에 샌더스와 트럼프, 코빈과 존슨은 그들의 인기가 얼마나 높던 간에, 마르크스와 스탈린, 독일 사민당과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해냈던 것만큼 사회의 권력관계를 재편해내고 새로운 사회계약을 창출할 수는 없을 겁니다. 자신이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면 뭔가에 기여를 그만큼 해야하는 법이죠.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건 발언권에는 기여도와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요. 공정성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99%의 인간은 이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를 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 평등주의를 폐허로 만들어버렸고, 평등주의의 폐허 위에 탄생한 지도자들 또한 필연적으로 허약하게 만듭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바실리 레온티예프는 인간의 노동이 향후 어떻게 될지 탐구한 바가 있습니다. 바실리 레온티예프는 역사 속에서 인간과 비슷한 존재를 찾아봤습니다. 바로 말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철도가 마차를 경주로 이긴 직후에 말이 교통 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뉴욕, 런던, 파리 할 것 없이 19세기 말의 도시들은 마차를 끄는 말들과 그 말들의 똥(...)으로 가득찼던 도시였습니다. 공각기동대 처음에 보면 "기업 네트워크가 지구를 뒤덮고, 전자와 빛이 거리를 휘저어도 국가와 민족은 사라지지 않은 근미래"라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배경을 던져줍니다. 19세기 말 미주와 유럽의 도시는 "철도와 전신이 지구를 뒤엎고, 가스등이 도시를 밝혀주어도 말들과 마차들은 사라지지 않은 가까운 과거"였던 셈입니다. 오히려 인류 사회 간의 연결망과 교류가 늘어나자 말의 수요는 훨씬 늘었습니다. 1840년부터 1900년까지 말과 노새는 미국에서 6배가 증가해 2100만 마리가 됩니다. 기술이 발달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말을 필요로할 것으로 보였죠. 그러나 내연기관이 확산되고, 저번에 대공장 체제를 설계한 포드님이 T형을 미국 전역에 꽂아주기 시작하자 말의 운명도 거기까지였습니다. 1960년 말은 2100만 마리의 놀라운 위용에서 300만 마리로 90% 가까이 줄어들었습니다.
레온티예프는 인간도 이와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고 봤습니다. 알파고가 한창 흥했을 때 인공지능 때문에 인간이 모두 직업을 잃게 되는 것 아니냐고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산업혁명으로 다들 그 소리 했는데 결국 새로운 산업이 고용을 창출하지 않더냐? 걱정 노노해 라고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온티예프의 생각대로라면 산업혁명으로 확대된 인간의 노동은 마치 철도의 도입으로 말의 사육이 부수적으로 확대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침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무언가가 진정 찾아온다면 그 때 인간이 말의 운명을 맞이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나향욱님은 우리를 개돼지라고 깠지만 알고보면 우린 개돼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들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린 말들에게 투표권을 주진 않았죠. 인간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기 시작한 선진국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정치적 의사를 자유로이 표현하고 투표로 정치인들을 교체할 권리를 줍니다. 즉 2차 산업혁명기의 노동자들처럼 경제적 권력관계에서 나름의 주도권을 잡고 이익을 추구할 수는 없을지라도 자신들을 진정 말의 운명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엿을 먹여줄 수 있습니다. 영국인들의 52%는 결국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민자들이 문제의 근원이 아니기에 주소지를 제대로 잘못 찾으신 것이었고 현명한 선택은 커녕 앞으로도 회자될 자폭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중요한 건 브렉시트 혹은 트럼프 지지세가 자폭이라는 것보다도, 사람들이 자폭과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된 이유, 그리고 그것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입니다. 그 모든 것 뒤에는 끝없는 사회발전과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힘 사이의 경주가 있는 것이지요.
그럼 이 X같은 세상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요? 다른 비전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건 오버워치를 하고 와서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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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브렉시트로 시작해서 메갈사태의 역풍을 보고 생각해 둔 건 있었지만 정리되지 않았는데 이걸 그대로 쓰면 되겠네요. 이런 분이 참 고맙죠.
개인적으로 이런 계층을 임프라고 정의 해 봤는데 이 사람들을 어떻게 포용하는가가 진보진영의 새로운 숙제가 될 거라고 봅니다. 반대로 보수 세력이 품을 수도 있지만 이 사람들을 이용하려고 하는 순간 브랙시트의 재림이 올거라는 걸 생각하면 차라리 브랙시트가 터진 게 다행일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적어도 서방세계에선 고민을 시작했겠죠.
최소한의 통찰력이 했다면 할 수 있을 만한 예상이지만 언론과 정치인이 숨기고 있었던, 그런 미래가 되겠네요.
샌더스와 트럼프의 지지 모두 대중의 무력감과 자포자기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현지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여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런 의미였네요.
그런데 제가 어릴 때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말로 사람들이 놀고 먹을 거라고 장밋빛 미래를 기대했나요?
본인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만큼의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요.
자본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윤율은 줄어드는데 기술혁신이나 기타 다른 방법에 의한 생산성 향상은 한계가 있으니 결국 자본이 있는 사람들은 인건비를 최대한 후려치려고 하죠.
그리고 그 결과가 개발도상국으로의 생산기지 이전,임시직 늘리기,이민자 늘리기,자동화 설비 도입 같은 것들로 나타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국가가 이민자를 받는 이유도 저렴한 노동력을 원해서이고 인공지능 개발을 하는 이유도 공짜 노동력을 얻고 싶어서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이 향상되고 사람의 가치가 올라갈수록 사람값은 비싸집니다.
자본가들을 악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이런 현상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건 확실하죠.
왜냐하면 자신들의 생산비가 올라가니까..
어디 미국 실리콘밸리 같은데서는 연봉을 몇천달러를 줬네마네 하지만 그건 그 노동자들이 아무나 가질수 없는 고급기술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생산에 빠질수 없는 핵심부품이기 때문이지 별다른 기술이나 지식이 없는 평범한 노동자들은 24시간 내내 불평없고 문제없이 생산을 착착 해내는 기계들에 비하면 정말 문제 많은 존재들이니까요.
근미래의 인류는 결국 우주로 나가거나 기술적 특이점이 오지 않는 이상 답이 없을거 같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