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원 가량이었다. 2005년의 내 일병 월급은. 내가 군생활을 하던 강원도 양구는 강원도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로 불렸다. 운전병을 길러내는 강원도 홍천의 '제1야전수송교육단'에서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춘천이나 원주 등의 대도시로 자대배치를 받던 이등병들의 환한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들은 마치 도끼를 찍어 나무를 오르는 호랑이를 밑에 두고 가까스로 동아줄을 잡던 <해님 달님>의 오누이 같았다. 반면 나와 함께 양구로 자대배치를 받은 이들은 마치 감옥으로 끌려가는 죄수처럼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으로 수송버스에 올랐다.
오지의 제왕(?)답게 양구 군부대들의 위수지역(衛戍地域)은 양구였다. 즉, 외출이나 외박을 나가도 양구군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속칭 '점프를 뛰어' 몰래 양구를 벗어나도 서울로 가기엔 그 여정이 너무나 멀고 험난했다. 그래서 양구의 군인들은 대부분 점프를 포기한 채 양구읍내를 전전했다. 이러한 현실을 너무나 훤히 안다는 듯 양구의 군인 물가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평일 민간인에게 천원이던 PC방비는 군인들이 외출, 외박으로 쏟아져 나오는 주말이면 군인들에게만 2천원으로 뛰었고 여관, 모텔 등의 숙소도 매한가지였다. 이른바 군복을 입은 이들만을 위한 '군복 프리미엄' 혹은 '특별 할증'. 그래서 주말에 한번 외박을 나가려면 넉넉잡고 최소한 10만원 이상의 경비는 필요했다. 한 달 월급이 4만원 정도에 불과한 일병에게 당시 10만원은 매우 큰돈이었다.
그래서 나는 외박을 나갈 즈음, 돈이 없을 때에만 아주 가끔 부모님께 돈을 부쳐달라고 했다. 평소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 돈을 타 쓰는 것이 죄송스러웠던 나는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돈을 달라고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군생활 동안에도 강원도 양구까지 힘들게 차를 끌고 다녀가실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싶지 않아 2년동안 면회도 오지 않으시게 했다. 그렇다보니 꼭 필요한 일도 아닌데, 내가 놀러나가기 위해 돈을 부쳐달라는 게 괜히 죄송스럽고 미안했다. 그래서 10만원이 필요해도 5만원 정도만 부모님께 부쳐달라고 하는 게 보통이었다. 혹여 아들 걱정에 더 보내주실까봐 '외박'이라는 말은 빼고 '그냥 5만원이 필요하다', '이 돈이면 충분하다'고 말씀드리곤 했다. 그렇게 보내주신 5만원과 수중에 남아있는 2~3만원 가량의 남은 월급을 합쳐서 7~8만원 가량의 돈으로 외박을 나가곤 했다. 솔직히 빠듯했지만, 비싼 밥 안 먹고 아껴서 놀면 충분히 가능한 돈이었다.
그리고 그날도 그렇게 외박준비를 하며 저녁 개인정비시간에 부모님께 콜렉트콜 전화를 드리고 끊는 참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소대의 일병 맞선임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나와 함께 외박을 나가기로 한 그룹 중의 일원이었다. 그는 내게 물었다. 부모님께 얼마를 보내달라고 했냐고. 나는 5만원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2만원 가량의 현금을 합쳐서 7만원 정도로 외박을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의 표정이 금새 못마땅하다는 듯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말했다. "이왕 보내달라고 할 거 한 10만원이나 20만원 정도 넉넉하게 보내달라고 하지, 5만원이 뭐냐. 그걸로 외박 나가서 뭘 하냐. 니가 그렇게 7만원만 가지고 외박 나가면 같이 나가는 동료들한테 부담이고 민폐를 끼치는 거다. 돈도 없으면서 무슨 외박을 나가냐."
그는 부끄럽지도 않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책망했고 순간 나는 그렇게 우리 소대에서 가장 뻔뻔한 녀석이 되어버렸다. 모르겠다. 그 순간 욱하는 마음에 화가 나기보다는, 왜 그렇게 민망하고 부끄러웠는지. 그는 우리 소대에서 가장 부유한 고참이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왜 10만원이 아닌 5만원만 부모님께 부쳐달라고 하는지. 그게 왜 나한테는 죄송스런 일인지. 그 이유를 하나하나 설명하기에는 그와 나 사이의 마음의 거리가 너무 아득했다. 그래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그런 줄 몰랐다'고만 짧게 대답했다. 사실 그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외박을 나가서 어느 한명이 돈이 부족하면 나머지 인원들이 알게 모르게 부담을 느끼고 신경을 쓰게 되는 것도 일면 맞는 얘기다. 사회였다면 돈을 잘 버는 친구가 더 쓰면 그만이지만, 고만고만한 월급을 받는 군인들의 주머니 사정이란 다들 비슷했으니 분명 누군가에겐 부담이나 불편을 주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우리 부모님도 10만원, 아니 20만원이라도 내가 부쳐달라고 하면 부쳐주실 분들이었다. 그 시절 부모님은 식당을 하고 계셨고 나름 장사도 잘되는 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작 3천5백원짜리 백반을 팔아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부모님이 하루종일 얼마나 고생하시는지를, 고등학생 때부터 홀서빙과 배달 일을 거들며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내게 '부모님이 아들에게 부쳐주는 10만원'과 '아들이 부모님에게 받는 10만원'의 무게는 달랐다. 부모님께는 아주 기껍고 가벼운 10만원일지 몰라도 내게는 너무나 무거운 액수였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그는 알 턱이 없었고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난 그냥 '그런 줄 몰랐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왜 그랬을까. 돌아서는 그 순간에 나도 모르게 울음이 차올랐다.
나는 외박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고참에게 그런 얘기를 듣고 아무렇지 않게 외박을 나갈 만큼 뻔뻔하진 못했나보다. 그렇게 차마 내무반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내무반 막사 뒤편으로 향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막사 뒤 비닐하우스 앞에서 나는 숨죽여 한참을 펑펑 울었다. 그냥 그 순간에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민망하고, 부끄럽고, 서러웠다. 눈가가 빨개지도록 한참을 울어도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고 있는데 멀리서 고참 한명이 내게 다가왔다. 평소 나와는 별로 친분이 없던 옆 분대의 상병이었다. 아마 맞선임과 내가 나누던 대화를 멀찍이서 대략 들었던 모양이다.
"외박 나갈 때 이 돈 보태 써라."
그의 손에는 만원짜리 지폐 다섯장이 쥐어져있었다. 그는 더 말없이 5만원을 건넸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한사코 거절했다. 그 돈이면 그의 한달치 상병 월급이었다. 내가 계속해서 받질 않자 그는 억지로 내 활동복 바지 주머니에 욱여넣으며 말했다.
"이거 그냥 주는 거 아냐. 빌려주는 거야. 그러니까 받어."
그제서야 나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목이 메어 그냥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말했다. "그만 울고, 들어가자."
그렇게 나는 부모님이 보내주신 5만원과 고참이 빌려준 5만원을 합하여 그 주말의 외박을 무사히, 나름 풍족하고 즐겁게 다녀올 수 있었다. 외박을 다녀온 후 두 달치의 월급을 모아 두 번째 월급을 받는 날에 곧바로 고참에게 5만원을 내밀었다. 그는 자신이 돈을 빌려줬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는듯 했다. "안줘도 되는데.." 그는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었던 듯 멋쩍게 웃으며 돈을 받았다. 아마 내가 돈을 갚지 않았으면 그는 아마 제대할 때까지 5만원 얘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제대를 하고 사회생활을 하던 중, 친한 친구 한명을 오랜만에 만난 일이 있었다. 친구는 부모님과의 불화로 잠시 집에서 나와 홀로 알바를 하며 고시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밥을 든든히 챙겨주고 싶어서 삼겹살집에를 갔는데, 삼겹살을 너무 깨작깨작 조심스럽게 먹는 것이 이상했다. 양이 부족해서 그런가 싶은 마음에 더 시킬 테니까 마음껏 먹으라고 했더니 친구가 말했다. 끼니를 너무 자주 거른 탓에 위장이 약해져있는데다 고기를 하도 오랜만에 먹으니까 급하게 기름기 있는 걸 먹으면 탈이 날 거 같아서 조심히 먹는다고. 그 말에, 무언가 가슴이 아팠다. 고기를 참 좋아하는 친구인데, 너무 조심스럽게 먹는 그 모습이 내 마음을 쓰리게 했다.
그렇게 친구와 이런 저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기 위해 버스정류장 앞에 다다랐다. 친구의 두 눈에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득 차오르는 게 보였다. 나는 문득 급하게 주머니와 지갑을 뒤졌다. 수중에 딱 5만원짜리 지폐 한 장과 만원짜리 다섯장이 있었다. 그 10만원을 꺼내어 친구에게 슬쩍 내밀었다. 친구는 놀란 눈으로 손사래를 쳤다. 괜찮다고, 얼른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그때 문득, 막사 뒤에서 눈물을 훔치며 5만원을 거절하던 스물두살의 어느 일병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친구의 점퍼 주머니에 돈을 욱여넣으며 말했다. "야 이거 빌려주는 거야. 나중에 너 취직하면 이자 쳐서 몇배로 받을 거야!" 난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돌려받을 생각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친구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 순간 친구의 두눈이 뜨끈해지는 듯 했다. "그럼 남의 돈 꽁으로 먹을려고 했냐 너?크크" 나는 더 짓궂게 장난을 쳤다. 친구를 울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버스에 올라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친구는 버스가 떠날 때까지 오래도록 자리를 뜨질 않았다. 헤어지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양구에서의 그 밤을 떠올렸다. 만약 오래 전 그 날, 맞선임의 질책으로 결국 주말에 외박을 나가지 못하고 내무반에 쓸쓸히 남아있었다면 그때의 내 맘은 어땠을까. 지금의 내게 예전보다 약간이라도 마음의 온기가 더해져있다면 그건 아마 그날 밤 내게 쥐어진 5만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5만원을 받으며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선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주변 누군가의 부족함을 내 불편으로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이가 아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쁘게 여기는 사람. 박봉이지만, 작게라도 누군가와 가끔씩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번다는 것 자체로 감사할 줄 아는 마음. 2년간의 힘든 군생활 가운데서 내가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상명하복의 군대 문화도, 조직에 순응하는 조직논리도 아닌 바로 이 '5만원의 추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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