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5/11 12:22:24
Name 스타슈터
Subject [일반] "아직 늦지 않았다니까요?"
퇴근하고 회사 옆 버스 정류장에서 늘 그렇듯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의 예정 도착시간이 약 5분쯤 남은듯하여 좌석에 앉아 여유롭게 폰을 만지고 있었는데, 잠깐 한눈팔던 사이 내가 기다리던 버스는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정류장을 그냥 지나쳐가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일어서서 버스를 세우지 않았다지만 예정된 5분의 절반도 안되는 2분쯤이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 지나쳐버리는 게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물론 애초에 한눈을 팔고 있던 내 잘못이 크지만.

생각해보면 삶은 늘 그렇다. 내가 예상하던 바와 같이 늘 잘 풀리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때도 많다. 그렇다고 그게 딱히 누군가의 잘못이냐면 그런것도 아니다. 오늘 아침 출근길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딱 맞춰 도착한 버스를 타게 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는 일도 있지만, 내 생각 이상으로 잘 풀리는 일도 있다. 그러니 너무 일희일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너무 아쉬울 때가 있다. 시간에 쫓겨서 그럴 수도 있고, 기회가 단 한번밖에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정말 바라던 것을 이루지 못했을때의 심정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막차를 놓쳤을때의 기분이 아닐까. 마치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를 떠나보낸듯한 그 심정은, 허탈함을 넘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럴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대비하고 있을걸..."

하지만 결론은, 이미 늦어버렸다. 조금 더 일찍을 한탄할 때에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늦게 대비한 내 자신의 잘못 같기도 하고, 나를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지나쳐버린 그 버스가 잘못한것도 같지만, 사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 자신들이 보고 판단한것의 연장선상에서 그 결과를 맞이한 것이고, 모두 자신들 나름 최선의 판단을 했을 뿐이다. 내가 한눈을 팔았던건 그 잠깐의 여유를 즐기고 싶었기 때문일테고, 버스가 조금 더 빨리 지나친것도 탄 사람들이 목적지에 조금 더 빨리 도착하게 해주고 싶어서가 아니였을까.

버스를 지나치고 또 다른 버스가 바로 정류장에 섰다.

["어서 타요!"]
"이 버스 기다리는거 아니에요. 먼저 가세요!"
["아니 그러게 어서 타라니까요?"]
"저는 앞에 버스 탈 거라서 뒤늦게 달려나온거고 이 버스 잡은거 아니라니까요?"
["그러게 아직 늦지 않았다니까요? 지금 타면 앞에 버스가 신호등에 걸려서 따라잡을 수 있어요. 그러니 어서 타요 다음에 내려줄테니까."]

처음엔 뭔가 어리둥절 했지만 난 결국 그 버스를 탔고, 그 기사분의 말처럼 난 다음 정류장에서 환승으로 원래 타려던 버스를 탈수 있었다. 그 상황에서 그런 말을 건네준 기사분이 새삼 멋지게 느껴졌다. 뭔가 사소한 일이었지만 많은 걸 깨닫게 해준 고마운 에피소드였다.

절대로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기회는, 놀랍게도 바라는 것을 포기할 때 쯤에서야 찾아온다. 이미 늦었다고 결론지었을 때 쯤에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오는 행운이야말로, 이 세상이 아직 살만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런 행운을 가져다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친절이, 세상 전체를 바꿀 수는 없어도 개개인의 삶을 조금씩 더 풍요롭게 만들곤 한다.

나도 누군가의 행운이 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려운 일은 아닌데 좀처럼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일이지만, 생각해보면 너무 내가 놓친 것에 신경 쓰며 남들이 놓칠 뻔한 것을 잡도록 도와줄 생각을 까먹은 게 아닐까 싶다.

각박한 세상, 조금 더 여유를 가져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6/05/11 12:32
수정 아이콘
훈훈하네요. 마누라하고 아이한테도 이야기해줬는데 막 좋아합니다.
스타슈터
16/05/11 12:41
수정 아이콘
저도 이야기해줄 마누라와 아이가 있으면 더 훈훈할것 같습니다. 크크 ㅠㅠ
[fOr]-FuRy
16/05/11 12:3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추천드리고 갑니다. 제가 지금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어서 가슴 절절히 위로가 되네요.
스타슈터
16/05/11 12:43
수정 아이콘
위로가 되셨다면 제가 이 글에 담은 다짐이 어느정도 실행이 된듯 해서 기분이 좋습니다. 흐흐
김성수
16/05/11 12:42
수정 아이콘
크크크 근데 보통은 (1) 저 상황에서 싸움이 벌어지거나 (2) 꿍했다가 (3) 제가 잘못한 건가요? 이런 패턴이 많아서 흠칫했네요. 그게 아니라 영화적인 상황에 주인공이 되기를 택하셨네요. 앞 버스에 올라탄 한 여성을 쫓기 위함이면 완벽한데 말이죠. -_-; 글 잘 읽었어요 ~
스타슈터
16/05/11 12:46
수정 아이콘
절대로 놓친줄 알았던 여성이 있다고 글에 암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뜻이 아예 없다고는 안했습니다?! 크크
심해잠수사
16/05/11 12:48
수정 아이콘
멋진 이야기네요
16/05/11 12:57
수정 아이콘
다음에 여유되면 버스내 친절엽서나 운수회사 전화로 기사 칭찬해주면 기사도 기분좋겠네요
스타슈터
16/05/11 12:59
수정 아이콘
아쉽게도 외국입니다 (여기도 그런 시스템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네요). 크크
물론 그분에게는 아주 감사하다고 말하고 내렸어요. 흐흐
WeakandPowerless
16/05/11 13:14
수정 아이콘
저도 이런 적이 어릴 때 있던 거 같습니다. 요즈음엔 정말 접하기 힘든 일 같은데... 훈훈하면서 아련하네요
스타슈터
16/05/11 14:02
수정 아이콘
세상살기가 많이 빡빡해져서 여유도 없어지고 이런 친절함을 베풀 여유도 점점 사라지는것 같아요.. 그래도 자신이라도 잘하려고 힘내봐야죠 흐흐
꿈꾸는사나이
16/05/11 13:15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추천누르네요.
이런 사소한 일상얘기가 좋더라구요.
두부두부
16/05/11 13:15
수정 아이콘
기회, 위로, 격려, 기쁨 등을 주는건... 의외로 낯선이 일때가 많더라고요...
스타슈터
16/05/11 14:03
수정 아이콘
가까운 사람에게는 의외로 낯뜨거워서 힘들다는게 ㅠㅠ
하지만 그래도 노력해야겠죠? 흐흐
보로미어
16/05/11 13:28
수정 아이콘
과연 그럴까요?
믿고 싶습니다.
글 고맙습니다
간디가
16/05/11 13:30
수정 아이콘
담담하지만 정말 좋은 글이네요.이런 소소한 얘기가 더 많아졌음하는 생각에 추천 누르고 갑니다.스크랩해서 두고두고 볼 글이네요.
스타슈터
16/05/11 14:08
수정 아이콘
원래 일상이야기가 참 좋은데 담아내는게 쉽지 않은게 흠이죠. ㅠㅠ
16/05/11 13:41
수정 아이콘
좋은 경험담 잘 읽었습니다
메레레
16/05/11 13:52
수정 아이콘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혹시 퍼가도 괜찮을까요? 출처는 밝히겠습니다
스타슈터
16/05/11 14:06
수정 아이콘
물론 괜찮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훈훈함을 느끼는게 제가 바라던 바인데요. 크크
저 신경쓰여요
16/05/11 14:14
수정 아이콘
와... 멋지네요. 청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아요. 멋진 경험을 하시고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흐흐
광개토태왕
16/05/11 14:39
수정 아이콘
버스 기사가 판단력이 좋네요
스프레차투라
16/05/11 15:21
수정 아이콘
<좋은생각>에 투고해보세요.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타슈터
16/05/11 15:38
수정 아이콘
이런 것 해볼 생각 자체를 잘 안하다가 이참에 한번 알아보고 도전해보겠습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흐흐
16/05/11 20:03
수정 아이콘
와! 감사합니다. 제목에 이끌리듯 들어왔는데 더 좋은 내용의 글이네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싶었나봅니다 :)

번외로 크크 버스얘기.. 저도 타려했던 버스를 놓치고 따라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음 버스를 탄 적이 있는데요. 따라잡기 위해 탄 버스가 타려했던 버스를 역전하고, 환승하면 되겠다고 신나서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고 환승하려하는 순간.. 제가 타려던 버스는 그 정류장에서 아무도 안내리는지 그냥 지나가더라구여 크크 결국 택시탔던 기억이 있네요..크크 다 되는건 아닌가봅니다 흑흑
스타슈터
16/05/11 20:24
수정 아이콘
원래 소년만화의 핵심은 적절한 운이 필수라는 것이죠. 크크
적절한 운이 따라주니 소년만화 내용을 찍게 된거고 츄츄님은 운이 조금 부족했네요 ㅠㅠ
카멜리아 시넨시스
16/05/11 20:43
수정 아이콘
어느 나라에서 일어난 일인가요? 훈훈하네요
스타슈터
16/05/11 20:45
수정 아이콘
싱가폴에서 7년째 거주중입니다.
사실 버스 환승이 되는 나라가 몇 없어요. 흐흐
무무무무무무
16/05/11 22:46
수정 아이콘
저도 저런 거 많이 해봤는데 생각보다 잘 안되더라고요. 기사분이 센스가 좋으시네요.
아리까리
16/05/11 23:07
수정 아이콘
이 글보고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Eternity
16/05/17 00:09
수정 아이콘
뒤늦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추천 하나 더하고 갑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5129 [일반] [EPL] (오피셜) 데니 웰백 무릎수술로 9개월 아웃 外 [28] 낭천5804 16/05/12 5804 0
65128 [일반] 섹스의 진화 - 인간의 배란신호와 일부일처제 [25] 모모스201315202 16/05/12 15202 16
65126 [일반]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사용 권리에 대해서 미국에서 논쟁이 한참입니다. [109] OrBef13013 16/05/12 13013 0
65125 [일반] 뉴스 이것저것 [23] ohmylove5926 16/05/12 5926 1
65124 [일반] [노스포] 곡성 + 메가토크 후기 [17] 王天君7701 16/05/12 7701 7
65123 [일반] [단편] 봄은 다 가고 없었다. [13] 삭제됨2427 16/05/12 2427 11
65122 [일반] 라이터를 켜라 (2002) _ 어느 예비군의 편지 [24] 리니시아6508 16/05/12 6508 3
65121 [일반] [아이오아이] 오늘 역대급 라디오였네요 [37] naruto0516810 16/05/12 6810 0
65120 [일반] [무한도전] 고지용은 왜 정장을 입고 나타났을까 [34] Ace of Base13184 16/05/11 13184 6
65119 [일반] 구글 광고 재개합니다. 성인 정보 관련해서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10] OrBef4262 16/05/11 4262 6
65117 [일반] [아이돌] 트와이스-I.O.I-라붐 충동구매 후기. [32] 스파이어깨기7130 16/05/11 7130 1
65116 [일반] 일베가 또 광화문에 모일 예정인가보네요. [76] 릴리스10169 16/05/11 10169 2
65115 [일반]  [초강력스포] 곡성과 함께하는 피지알 씨네토크, 이야길 나눠볼까요? [96] ZolaChobo10030 16/05/11 10030 1
65114 [일반] [노스포] 곡성을 보고, 이 영화를 추천해야 하는가. [74] 유스티스10852 16/05/11 10852 0
65111 [일반] [I.O.I] 나는 왜 그녀들로 인해 고통받아야 하는걸까?? [85] 루카와9639 16/05/11 9639 11
65110 [일반] SM은 진화한다 땡큐 or 쏘리 [53] 삭제됨10191 16/05/11 10191 13
65109 [일반] 정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생활비 지원 적극 검토 [39] Secundo5960 16/05/11 5960 0
65108 [일반] 음주운전자에 술 판매자 방조로 입건 [37] 카롱카롱6588 16/05/11 6588 2
65107 [일반] 허위 성폭행 고발과 SNS 마녀사냥에 대한 글 [182] 리스키12957 16/05/11 12957 9
65106 [일반] "아직 늦지 않았다니까요" [31] 스타슈터9257 16/05/11 9257 85
65105 [일반] 젝스키스. YG 엔터테인먼트와 공식 계약/활동 재개 예정 [61] The xian11409 16/05/11 11409 3
65104 [일반]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드진 Top10 [2] 김치찌개5116 16/05/11 5116 0
65103 [일반] [I.O.I] 슬슬 김광수 시동거네요 [142] naruto05111224 16/05/11 11224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