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lass="content_image" src="http://media.infobarrel.com/media/image/127691_max.gif" alt="" "border-width: 0px; margin: 0px; padding: 0px; cursor: pointer; vertical-align: top; max-width: 728px;">아직 남태평양의 섬들을 속속들이 알기 전 시대였기에 매우 탐험적 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블라이는 선장으로서 예전부터 알고 있던 멜 깁슨, 아니 플레쳐 크리스챤(Fletcher Christian)을 부관으로 데리고 갑니다. 바운티 호의 전체 승선인원은 40여명이었습니다.
블라이는 당초 태평양에 가기위해 남아메리카 끝인 Cape Horn을 지나려 했으나 나쁜 기상여건으로 이 항로를 포기하고 아프리카 끝인 희망봉을 넘어서 호주 남쪽의 태즈매니아 섬을 거쳐(아래 지도의 1번 경로) 타히티 섬(아래 지도 번호 2번)에 가게 됩니다.
타히티 섬 도착일이 1788년 10월 26일이니 무려 10개월의 대장정이었습니다.
* 영화 The Bounty(1984)에서 케이프 혼을 지나려다 악천후를 만나는 장면
* 바운티 호의 여정을 표시해 놓은 지도(5번 X 표시에서 반란 발생)
무려 열달의 항해 속에 도착한 타히티는 선원들에게 왜 고갱이 이 섬과 섬의 여인들에게 빠져들었는 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남태평양의 다른 섬들의 원주민들이 흔히 매우 호전적이고 카니발리즘(특히, 피지 등)이 흔했던 것에 비해 타히티 섬의 원주민들은 영국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빵나무를 수집하고 장거리 항해를 버틸 수 있게 일정수준으로 키우려다 보니 바운티 호는 계획에 없던 5개월을 타히티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 바운티 호를 반기는 타히티 원주민들: 31년전의 멜깁슨과 안쏘니 홉킨스
이 5개월은 오랜 항해에 지친 젊은 선원들에게 너무나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우선 선원들은 원주민 여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일부는 거의 살림을 차리는 수준으로 발전합니다. 일부 선원은 아예 원주민 문신을 하고 원주민 말을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크리스챤(멜 깁슨)도 그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 멜깁슨, 아니 크리스챤과 원주민 여인의 데이트 장면: 1984년 영화를 보면 나름 고증에 충실한(?) 장면을 많이 마주치게 됩니다.
영국 해군의 규율을 유지하고자 했던 블라이(안쏘니 홉킨스) 선장마저도 항해일지에 타히티 여성들이 우아하고 매력적이라고 적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꿈같았던 5개월이 다 지나고 바운티 호는 1789년 4월 4일 자메이카에 빵나무를 전달하기 위해 다시 먼 항해를 나설 때가 되었습니다. 영국에 남겨둔 게 많지 않던 선원들에게 타히티의 삶을 뒤로 두고 다시 죽을지도 모르는 항해에 나서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을 것입니다.
대서양으로 가기 전 인근 섬들을 둘러보던 중에 이미 풀릴대로 풀린 선원들과 조지 왕의 군대로 칼같은 규율을 잡으려는 블라이 선장의 대립은 점점 첨예화 됩니다. 특히 항해 처음 케이프 혼 돌파에 큰 혼이 났던 선원들은 다시 케이프 혼을 지나 자메이카에 가는 것에 큰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이런 와중에 3명의 선원이 배를 버리고 탈주하는데 그만 멀리 못가고 붙잡힙니다. 이중에는 리암 니슨, 아니 챨스 처칠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블라이 선장의 명령으로 혹독한 채찍질을 버텨야 했습니다. 또한 블라이 선장은 일일이 배안의 식량을 확인해 사라지는 것이 있으면 그 범인을 철저히 색출하여 가혹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 도망가려다 붙잡힌 챨스 처칠(리암 니슨)의 태형 장면
임무를 우선하고 흐트러진 규율을 잡으려는 블라이 선장과 타히티에 두고 온 여인에 미련이 많았고 선장을 폭군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크리스챤의 관계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됩니다.
결국 1789년 4월 28일 일단의 선원들은 통가 섬 인근 해역에서 크리스챤을 지도자로 삼고 선상 반란을 일으킵니다.
한밤 중의 기습으로 배를 점거한 반란세력은 블라이 선장과 그를 따르는 충성파 22명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선상반란이라는 극단적 선택에도 불구하고 선장과 장교단을 살해하지 않은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아무래도 사이는 나빠졌지만 크리스챤이 옛 정을 감안했거나 자신도 속했던 영국군의 품위를 고려한 조치로 보입니다.
블라이 선장 일행의 믿기지 않는 여정
이제 충성파는 조그만 보트에 의지해 약간의 먹거리로만 망망대해를 헤쳐가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보트가 너무 작다보니 일부 충성파와 수동적 선원 7명은 바운티 호에 남겨져 타이히로 돌아갈 때 하선하게 됩니다. 충성파도 서로 운명이 갈리는 순간입니다.
이제 19명의 블라이 선장 일행은 나침반도, 해도도 없이 죽음의 항해를 시작합니다.
* 보트에 버려진 블라이 선장 일행
블라이 선장 일행은 위 지도의 16번 지점부터 항해를 시작하는 데, 인근 토푸아 섬에 물과 식량을 얻으러 갔다가 호전적인 원주민의 공격으로 한 명이 죽게 됩니다. 이에 블라이 선장은 카니발리즘이 들끓던 인근 섬(이들 위험 해역은 블라이 선장의 이름을 따서 '블라이 워터'라고 불리게 됩니다. )에 들리지 않고 곧바로 네덜란드 령인 17번 티모르 섬까지 노를 저어 가게 됩니다. 지도의 초록색 점선을 따라 무려 47일 동안 6,701km의 대여정에 도전한 것입니다.
* 블라이 선장 일행이 탄 보트의 경로
더 놀라운 것은 1789년 6월 14일 당시 네덜란드 령인 서티모르 쿠팡(현재는 인도네시아 령)에 도착할 때까지 겪은 인명손실은 토푸아 섬에서 원주민에게 죽은 한명에 불과하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극심한 환경 속에 허기에 지친 이들은 쿠팡에 도착한 직후 4명이 병으로 죽고 2명이 영국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죽긴 하지만 어쨌든 항해를 마친 이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결국 19명 중 블라이 선장을 포함한 12명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굶주림 속에서도 서로를 뜯어먹지 않고 남은 식량을 철저히 안분하며 엄격한 규율 속에 버틴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 이 항해는 정말 믿겨지지 않을 수준입니다.
블라이 선장은 1790년 3월 15일 영국 해군성(Admiralty)에 도착하여 바운티 호의 반란을 보고하는데, 2년 하고도 11주만의 귀환이었습니다. 한편 이 초유의 사태에 놀란 해군은 반란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수색대 판도라(Pandora) 호를 타히티에 보냅니다.
쫓기는 크리스챤과 반란자들
한편 크리스챤 일행은 우선 항로를 타히티로 돌립니다. 타히티에 도착하자마자 억류한 충성파 7명과 스스로 남기를 청한 일단의 반란세력 선원들을(리암 니슨이 분한 처칠 포함) 남기고 크리스챤을 포함한 9명은 영국 해군을 피해 다시 긴 항해를 떠납니다. 물론 타히티를 떠나기에 앞서 이들은 타히티에서 연을 맺었던 원주민 여인들 12명(11명이라는 기록도 있음)과 6명의 원주민 청년을 배에 태웁니다. 사실 대부분의 원주민 여성들은 어디에 가는지도 모르고 납치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안전한 섬을 찾아 헤매다가 남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무인도 핏케언 섬(위 지도에서 10번 위치)을 찾아내어 1790년 1월 5일 착륙합니다.
그리고 크리스챤은 1월 23일 영국해군의 추적을 피하고 이탈자를 방지하기 위해 바운티 호를 불태웁니다.
* 영화 속에서 핏케언 섬 도착 후 불태워지는 바운티 호
영국 해군의 추적과 남은 자들의 행적
추격대를 태우고 온 판도라 호는 타히티 섬에 도착하자 남아있던 반란선원과 충성파 선원, 중도파 모두를 잡아들여 영국으로 압송합니다. 하지만 리암 니슨, 아니 처칠은 이미 다른 동료에 의해 살해되어 없었으며 처칠을 죽인 선원도 타히티 원주민에 의해 살해된 다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판도라 호의 귀환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호주 인근의 대보초에 좌초하면서 상당수의 사람이 익사했는데 바운티 호의 잔존 선원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겨우 살아남은 자들 중 반란파 3명은 영국에서 재판 후 교수형에 처해졌고 일부 반란파는 사면을 받았습니다. 충성파 등은 바로 풀려납니다.
블라이 선장은 바운티 호의 반란으로 배의 지휘권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놀라운 판단력과 불굴의 의지로 귀환한 것을 높이 평가받고 반란의 정황을 인정받아 해군에서의 경력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1790년 11월부터 새로운 배를 맡게 되고 계속 승진하여 호주 뉴사우스웨일즈의 총독 그리고 영국해군의 제독(Vice admiral of the blue)까지 승진합니다.
핏케언에 정착한 크리스챤 일행은 그리 행복한 생활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구조적으로 여자의 수가 남자보다 적다보니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치열해졌고 또한 크리스챤이 이런 와중에 죽으면서(살아서 영국으로 돌아왔다는 괴담도 한때 영국에서 유행을 했습니다.) 리더쉽의 공백이 발생한 것도 혼란이 지속된 한 원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6명의 타히티 남자들은 소유물도 없이 노예처럼 취급받자 이들의 불만이 폭발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타히티 남자들은 모두 살해되었으며(바운티 선원에 의해 살해되거나 타히티 남자들이 죽인 선원의 부인들이 복수로 죽은 경우도 있습니다.), 극심한 폭력이 이어지며 반란선원 중 4명만 살아남게 됩니다.
그런데 살아남은 이들 중 맥코이와 퀸탈은 폭력성으로 섬주민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고 합니다. 그나마 섬의 자생 식물로 알코올 제조법을 터득한 맥코이는 술에 취해 여자들을 괴롭히다가 나중에 만취 상태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남은 퀸탈은 나머지 두명의 생존 선원인 에드워드 영과 존 아담스에 의해 결국 살해됩니다.
이제 살아남은 성인 남자는 영과 아담스뿐인데 이둘은 섬 도착 후 사건들을 기록한 '바운티 바이블'을 남깁니다.
이제 섬에 평화가 찾아오자 영과 아담스는 종교에 점점 의존하게 됩니다. 이들은 학교를 짓고 아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영이 병으로 죽자 성인 남자는 아담스만 남게 되는데 9명의 여인들 그리고 이전 선원들이 낳은 20여명의 아이들과 함께 섬을 지킵니다.
섬에 들어온지 20년을 넘었지만 그동안 외부인과의 교류는 전혀 없었습니다. 몇몇 배들이 섬근처를 지나가고 그중 일부는 잠시 섬에 들려 코코넛을 따갔지만 섬주민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섬 정착 28년째인 1808년 토파즈라는 미국배가 섬에 상륙합니다. 선장인 매튜 폴거는 10시간의 짧은 체류시간이었지만 자신을 마중나온 벌거벗은 청년들이 완벽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또한 존 아담스와 9명의 여인들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외부에 이를 알리겠다는 다짐을 하고 섬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폴거 선장이 섬에 관해 영국 해군에 보고한 내용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1814년 영국 해군 함정이 핏케언 섬에 오게 되는데 존 아담스의 지도아래 종교적으로 신실한 섬 공동체의 모습을 보고 감화되어 존 아담스의 죄를 사면해 주었습니다.
영국은 1838년 핏케언 섬을 식민지로 편입합니다.
두 섬으로 나뉜 후손들의 선택
영국의 품안에 다시 들어간 핏케언 사람들은 드물지만 외부인들이 몇몇 들어오며(사실 고립된 섬이다 보니 inbreeding 이슈가 심각했습니다.) 인구를 조금씩 늘려갑니다. 그런데 늘어난 인구가 살기에 섬이 너무 협소해지자 섬주민들은 영국 정부에 새로운 섬을 찾아달라는 청원을 올립니다.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1856년 5월 3일 193명의 섬 주민 전체가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 사이에 있는(위 지도에서 뉴질랜드 북섬 왼쪽 위의 노란색 바탕 섬) 노폭크(Norfolk) 섬으로 5주간이나 배를 타고 이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향을 잊지 못한 17명이 1년반만에 핏케언으로 돌아오고 27명도 5년후에 돌아오면서 바운티 호의 후손은 두 섬에 나뉘어 살게 됩니다.
특히 소수가 선택한 핏케언 섬은 전체 주민이 40~100명 수준으로 150년을 넘게 버텨옵니다. 가장 최근 인구도 47명이라고 합니다.
노폭크 섬은 그나마 인구가 2천명 정도로 증가하는데 절반이 바운티 호의 후손들입니다.
핏케언 섬의 운명: 고립사회의 비극
존 아담스의 종교화 노력으로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던 이 섬에 1886년 한 선교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선교사 존 테이는 일요일이 아닌 진정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테이의 열정적 전도에 힘 입어 섬 주민 모두가 예수 재림파(Seventh-day Adventist)의 신도가 되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는 맨 앞에서 소개한 대로 바운티호 반란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잇따라 만들어지면서 이 절해고도에 세계인의 관심이 쏠리게 됩니다. 1935년에는 미국에서 다큐필름을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 1935년 미국의 다큐필름(9분짜리): 4분부터 보면 섬 주민 모습이 나옵니다. 언급되는 주민의 성을 보면 크리스챤이 제일 많고, 영, 맥코이가 언급되어 있으며 바운티 선원의 성이 아닌 것은 Warren이 유일하게 언급되고 있는데, 다큐 촬영 60년전 섬에 정착한 포경선 선원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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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멜깁슨/안쏘니 홉킨스의 영화를 마지막으로 핏케언 섬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다시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2004년 이 섬은 뉴스의 사회면을 장식하게 됩니다.
1999년 이 섬에 임시로 파견된 영국 경찰관 Gail Cox는 15세 소녀에게 섬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를 듣습니다.
바로 섬 소녀들에게 자행되어온 성폭력이었습니다.
콕스 경관의 문제제기로 호주, 뉴질랜드 경찰의 도움을 받아 지난 20년간 이섬에 거주한 모든 여자들과 남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그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는데 섬내 성인남자 거의 모두가 15세 이하 소녀들 대부분을 의례적으로 강간한 전력이 드러났습니다. 이 중에는 시장인 스티브 크리스챤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사법처리도 쉽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영국령이지만 영국과는 너무 멀고 피의자들을 모두 영국으로 압송하게 되면 섬의 기능이 유지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영연방에 속하기는 하지만 엄연한 외국인 뉴질랜드 판사와 변호사들이 파견되어 영국법에 의거해 재판을 벌이는 매우 드문 일이 연출되었습니다.
한편 자신들도 과거에는 피해자였으며 재판 당시는 가해자의 부인이나 엄마인 섬 여자들이 조직적인 대응을 하기 시작합니다. 재판당시까지 시장으로 섬의 지도자였으나 피의자로 전락한 스티브 크리스챤의 부인인 올리브 크리스챤은 13명의 성인 여성들(당시 주민이 47명을 고려하면 거의 모든 성인 여성)과 함께 Underage sex는 폴리네시안 사회의 전통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가해자 남성들을 옹호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들은 경찰에 혐의사실을 털어놓은 소녀들로 하여금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이었다고 증언을 번복하도록 하였고 일부 제보는 경찰의 돈을 받고 한 것이라는 주장도 펼쳤습니다.
재판에 대한 섬 주민의 반발은 이 사건이 해군기지를 설립하려는 영국의 음모이다라는 이야기까지 만들어냈습니다. 실제 피고인들은 자신들은 바운티 호 반란자들의 후손으로 당시 영국 시민권을 포기했으므로 영국의 사법관할에 있지 않다고 항변을 하기도 했습니다.
2004년 10월 재판부는 6명의 남성에게 35건의 성폭행에 대해 유죄를 선고합니다. 다만, 이들에 대한 형량은 2년에서 6년에 불과했는데, 절해고도의 고립 사회의 여건을 반영한 매우 관대한 형량이었습니다.
그나마도 피의자인 섬의 남자들이 스스로 만든 감옥에 일과가 끝나고 갇히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 재판으로 인해 영국정부는 이 섬에 큰 돈을 들여 길을 닦고 현대식 감옥을 건설해야 했으며 이 덕분에 핏케언 섬의 인프라가 크게 개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모든 피의자가 형기를 끝내고 정상생활로 복귀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섬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져 섬 주민들이 외부인을 더욱 꺼리게 되었고 뉴질랜드 등에 나간 섬 사람들이 자신들의 출신을 숨기는 일이 발생하고 있답니다.
아직도 영국 정부는 이 곳에 파견되는 공무원들이 미성년 자식을 동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 이 사건을 다큐로 제작한 영국 TV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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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외부 유입이 제한되어 있고 인브리딩 위험에 크게 노출되었던 이 작은 섬은 이제 더 이상 신생아가 태어나지 않고 젊은이들(특히 여성들)이 섬을 떠나면서 서서히 무인도의 길을 향해 가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 그나마 최근 핏케언 섬에 다녀온 것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영국청년의 영상을 보면 흥미있는 구석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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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폭크 섬의 운명: 새로운 반란이냐 아니면 완전한 귀순이냐
이제 이글의 계기를 마련해 준 노폭크 섬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섬은 한때 중죄인의 수형지였으나 버려졌다가 핏케언 섬에서 이주한 바운티 호의 후손들의 거주지가 되었습니다.
비록 40여명의 후손이 다시 핏케언에 돌아갔으나 100여명의 후손들은 섬에서 정착하며 포경선의 선원들을 받아들여가며 인구를 늘려갔습니다.
그러다가 1901년 호주가 실질적으로 독립하며 호주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으나 1979년 자치를 허용받습니다. 별도의 자치행정부와 의회를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인데, 노폭크 섬은 뛰어난 풍광으로 호주와 뉴질랜드의 관광객을 유치하며 경제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관광객이 크게 줄어들자 이 섬의 재정은 적자를 면하지 못하며 호주정부에 돈일 빌려 겨우 지탱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부채 규모가 1,140만 호주 달러에 이르고 상환가능성이 낮아지자 호주 정부가 섬의 자치권을 회수하고 직접 통치겠다는 개혁안을 내놓게 됩니다.
이에 노폭크 섬의 대표들은 섬의 통치주체를 묻는 주민투표를 해서 이를 근거로 유엔에 호소하자고 하고 있습니다. 파이낸셜 타임즈가 이를 보도하면서 또 반란의 기운이 커지고 있다고 기사 제목을 뽑은 것입니다.
하지만 주민 중에는 차라리 호주에 정식으로 편입되어 호주의 사회보장체계에 접근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물론 그동안 안내던 소득세를 호주에 납부해야 하는 부담이 생깁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나 유려한 골프코스가 있고 빼어난 소나무가 있다지만 인구 1,800명에 빚도 많은 섬이 과연 호주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살림을 꾸려갈 수 있을지는 지켜볼 대목입니다.
* 노폭크 섬의 위치
* 노폭크 섬의 빼어난 풍광과 소나무
* 섬의 소나무를 상징화한 노폭크 깃발
대모험과 이상...그러나 비루한 현실
이미 세상에 많이 알려진 바운티 호의 반란이지만 최근 뉴스를 갱신할 겸 다시 한 번 정리해 봤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운티 호 반란은 블라이 선장이나 크리스챤 모두 나름 이해가 가는 면이 있습니다. 비록 폭군처럼 행동하기는 했지만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려는 철두철미한 군인 과 하극상을 벌이긴 했으나 낭만과 자유를 추구한 크리스챤 중 누구 하나를 일방적으로 탓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다만, 저런 극단적 상황에서 반란으로 바다위에서 대살육을 벌였거나 블라이 선장 일행이 쪽배에서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카니발리즘 속에 죽어갔다면, 또는 영국해군의 추적으로 크리스챤 일행이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면 당시에만 반짝했던 사건에 지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타히티가 보여주는 열대의 낭만, 친구였지만 반란으로 맞선 서로 다른 가치관의 소유자들 그리고 살육을 피했던 반란의 마무리, 무엇보다 블라이나 크리스챤 일행의 경이적인 이후 행보는 수차례 영화로 다시 만들만한 매력적인 소재 같습니다.
한편 바운티 호의 후손들의 250년의 삶을 보면 고립 사회가 갖는 근본적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외부 문명세계에서 고립되고 유전자의 외부유입이 차단된 소규모 공동체가 폭력과 소녀 강간으로 얼룩져간 것을 보면 씁쓸함이 남습니다.
폐쇄적이고 더 이상의 모험(또는 활력)이 없는 사회는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부에는 전례없는 야만이 하나의 문화로 위장하여 자리를 잡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노폭크의 경우도 2천명도 안되는 공동체가 이리저리 경제자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세금을 납부하는 호주 시민이 될 것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을 보면 기존 체제(문명?)의 엄중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끔 제 글이 방송 '서프라이즈'와 유사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긴 하는데, 남태평양의 섬 이야기는 나우루 공화국 과 이글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론: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Collapse)에 나온 핏케언 섬 이야기
예전 책들을 들쳐 보니 다이아몬드 교수가 핏케언 섬에 관해 쓴 것이 있길래 간단히 소개합니다. 핏케언 섬은 1790년 바운티 호의 반란자들이 정착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였으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1000년부터 1450년 사이에는 인근 섬들간 활발한 교역이 있었던 유인도 였다고 합니다.
핏케언 섬에서 480km 떨어진 인근에서 가장 컸던 망가레바(위 세번째 동영상의 연을 파는 영국청년의 핏케언 방문기에서 핏케언 직전에 머물던 섬) 그리고 160km 떨어진 헨더슨 섬들 모두 유인도였고 세 섬 사이에 서로 필요한 물자를 교환하며 의존적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 폴리네시아인들의 타히티에서 이스터섬까지의 이주경로에 놓여있던 망가레바, 핏케언, 헨더슨 섬
가장 사람 살기 좋았던 망가레바 섬에는 다용도 도구와 장식용으로 쓸 굴 껍질이 많았으나 단단하고 날카로운 돌(흑요석)을 구할 수는 없었고 이는 핏케언 섬에 풍부한 현무암을 통해 수요를 충족했으며, 가장 극한의 환경이었던 헨더슨 섬은 풍부한 새알과 새고기를 공급할 수 있었답니다.
문제는 그나마 망가레바 섬은 어느 정도 자립이 가능했으나 핏케언과 헨더슨 섬은 망가레바와의 교역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망가레바의 인구가 늘어나며 생태계 훼손이 극심해지자 제한된 먹거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거세지고 카니발리즘이 횡행하는 전사들의 세계(이스터 섬의 비극과 유사합니다.)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런 극단적 갈등의 사회에서는 며칠이 걸리는 장거리 항해를 할 여유가 없어지고 눈 앞의 이익만 지키거나 탐하게 되었답니다.
결국 망가레바로부터 카누가 오지 않게 되자 카누를 만들여건이 안되었던 각각 100여명과 수십명에 불과했던 핏케언과 헨더슨 섬 사람들은 서서히 몰락을 향해 갔다는 다이아몬드 교수의 설명입니다.
특히, 석회암 섬이었던 헨더슨 섬 사람들은 단단한 돌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새의 뼈를 이용한 온갖 대체품을 만들며 힘겨운 생존을 이어간 절망적 노력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