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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4/08 14:05:38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자빠지다.
1. 일이 많다. 작년 여름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슬슬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 체계를 갖춘 회사를 다녀보지 않은 덕에 프로젝트 매니저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자영업 수준의 사업에서 프로젝트 관리란 간단하다. 설비를 구하고, 인력을 충원하고, 작업 시간을 조율하고, 초과근무수당을 정산한다. 요약하면 돈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구체화하면 돈을 꾸고 미납금을 돌려막는 일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단 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일간지 사회면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그렇듯, 흥미로운 일이 내 일이 되는 것은 흥미롭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일이다. 그래도 프로젝트가 엎어지냐 마느냐로 머리 싸매고 고민하면서 멘탈이 반쯤 빠그라진 작년 말보다는 지금이 낫다. 몇 배는. 한 몇년 정도는 왠만큼 나쁜 일이 일어난다 해도 작년 겨울을 생각하며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2. 나는 유능한 직원들을 고용하고 있다. 이 친구들은 굳이 술이나 바텐딩 관련 업무를 하지 않더라도 잘 살 것 같은 친구들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뭐라고 이 친구들을 헐값에 고용하고 있나. 문제라면 내가 딱히 엄청나게 악독한 경영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그걸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한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은 좋은 사람이고 그렇게 무능한 사람 같지도 않아요. 하지만 돈을 못 벌죠. 그리고 그게 사장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저도 여러 사장님을 모셔 봤고 여러 동료들과 일해봤고 그들이 여러 어려움을 겪는 걸 봤으니까. 그냥 이 판이 그런 거겠죠. 그리고 나는 이 판에 남아있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나를 설득하실 수 있나요? 나는 아직 그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3. 고맙게도 내 글에 관심을 가져주고 때로 내 글을 담당하기도 하는 어느 편집자와 술을 마셨다. 기자 출신인 그는 여러 좋은 조언을 해주었다. 그 중에 하나는 '대상을 넓혀보라는 것'이었다. 당신의 글은 나쁘지 않고, 코드가 맞으면 특히 더 좋다. 하지만 범용성 면에서 조금 아쉬울 때가 있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글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웃으며 받아쳤다. 그거는 내가 자영업자라서 그런가봐요. 자영업자가 어찌 오는 손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는 손님을 간판이나 가게의 분위기로 걸러낼 뿐이죠. 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굳이 여러 사람들이 내 글을 재밌게 읽어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와인과 보드카를 취할 때 까지 마시고 집에 오는 길에 생각했다. 쳇, 범용성 높은 글을 쓰고야 말겠어. 그리고 그 날 이후로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아, 절대로 그의 잘못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문제의 핵심도 아니다.

4. 내가 스무 살 무렵, 박민규가 등단했다. 당시 나는 나 스스로가 꽤 재기발랄한 글을 쓴다는 미친 생각을 했고 그래서 박민규가 싫었다. 일종의 동족 혐오랄까. 물론 동족이라 해도 이건 브론즈 나부랭이가 '난 페이커 싫어. 내가 롤을 해봐서 아는데, 롤을 하는 놈들은 다 인성 쓰레기라고'라고 말하는 수준이겠지만. 동족 혐오의 핵심은 질투와 극복의 욕망이다. 서른 무렵에 메리 로치를 읽게 되었고 나는 빠져들었다. 과학 저널리스트인 그녀는 미친 여자였다. 나는 연암 박지원을 조선 최고의 글쟁이라고 생각하는데, 메리 로치는 연암 박지원에 김종삼, 기형도까지 얹어서라도 트레이드하고 싶은 작가다. 우리는 재기발랄함이라는 단어 대신 메리로치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언어의 신이 있다면 그렇게 판결할 것이다. 박민규와 메리 로치와 이십대의 나와 삼십대의 나를 모두 아는 몇몇 친구들은 나를 놀렸다. 너 스무살 때는 박민규를 그렇게 미워하더니 지금은 메리 로치를 왜 이렇게 빠냐. 그들은 몇 가지 가설을 제안했다. 1) 박민규는 남자지만 메리 로치는 여자다. 2) 메리 로치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위대한 작가다. 3) 내가 늙었다. 극복은 피곤한 단어가 되었다.

5. 2002년, 조지 부시는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명명하며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비슷한 시기 동아리에 '악의 축'이 있었다. 동아리의 구성원들은 '말이 많고 개소리를 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며 회의 시간을 테러하는 데 일가견이 있던 세 명'을 '악의 축'이라고 불렀다. 내가 북한 역할이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이라크가 결혼했다. 며칠 뒤에는 이란이 결혼한다. 나는 옥탑방에 산다.

6. 매 주 여기저기 써야 하는 원고의 분량이 A4 네다섯 페이지, 원고지로 40페이지 정도 된다. 모두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이다. 하지만 어쩌지, 사랑이 좀 식은 것 같다. 아니, 사랑이 식은 게 아니다. 그냥 체력이 조금 모자라는 것 뿐이야. 꿍얼꿍얼 겨우 써내려가고 보내고 독촉 문자를 받고. 다른 글을 쓸 여력이 없다. 얼마 전 어느 손님이 '요즘은 글을 안 쓰시네요'라고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여력이 난 오늘 피지알을 검색했더니 한 달 반 정도 긴 글을 올리지 않았다.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니다.

7. 정치적인 비유나 개념을 쓰지 않고 글을 쓰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일이다. 테러와의 전쟁, 악의 축 같은 것은 정치라기보다 코메디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8. 나는 노래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음악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음치다. 노래방에 가면 언제나 익숙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과 너바나로 때우고는 한다. 한 달쯤 전, 직원 회식이 끝나고 노래방에 갔다. 난리가 났다. 넥타이를 머리에 두르고 트로트를 열창하는 직원들을 보면서, 아 이 친구는 정말 이름 아는 회사 영업직에 가서 커다란 계약을 수주해야 할 친구인데 박봉에 나랑 고생하고 있구나 생각을 했다(결코 비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런 류의 에너지를 좋아한다). 달빛요정을 부르며 기분이 이상해졌다. 사실 내 삶은 이진원씨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 벌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제는 집에 다 왔다. 나는 내릴 거다. 바퀴벌레만 나를 반기는 곳. 그 곳으로 나는 향한다, 그 녀석들과 함께 티비를 볼거다. 여기저기 빨래가 나뒹구는 방에서 한판 자주고, 내일 아침 다시 보자. 구질구질한 세상아, 버스에서 다시 보자. 그때에는 어딘지좀 말해다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361타고 집에 간다>

사실 내 삶이 그런 건 별 상관이 없다. 내 삶이니까. 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친구들이 있다. 나의 공적 자아는 패배주의와 이별해야 한다. 나의 벌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책임이다.

9. 나는 '친구'라는 말을 좋아한다. 서로 말을 놓는 것도 좋아한다. 그렇게 마흔이 넘은 친구가 몇 있었다. 내가 그들을 처음 알 때부터 그들은 마흔이 넘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올해, 몇몇 친구들이 마흔이란 나이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흔이 넘은 사람을 친구로 알게 되는 것과 친구가 마흔을 넘어가는 것은 기분이 조금 다른 느낌이다.

-

이렇게 비장한 척 하지만 나는 지난 주에 애인과 싸우고 삐진 채 집에 와서 혼자 허공에 성질을 부려댔다. 그리고 화를 풀려고 밖에 나가, 1993년에 생산된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예열도 하지 않은 채 급경사 언덕을 오르다 시동을 꺼먹고 뒤로 자빠졌다. 재수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데 나는 뒤로 자빠지고 왼팔에 깁스를 하게 되었다. 짜증이 나는 날이라고 20년도 넘은 바이크를 예열도 하지 않고 타다가 다치는 건 재수없는 일이 아니라 그냥 멍청한 일이다. 무언가 늙었고 무언가 젊었으며 무언가는 변하고 무언가는 그대로다. 빌어먹을, 20년된 바이크는 그렇게 자빠지고도 흠집만 좀 나고 멀쩡한데 나는 아직도 깁스를 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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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형
16/04/08 14:26
수정 아이콘
[내가 늙었다. 극복은 피곤한 단어가 되었다.]

이부분이 비수처럼 날아드네요
다리기
16/04/08 14:40
수정 아이콘
바이크도 20살이면 좋을 땐가 봅니다. 나이 더 먹으면 흠집 나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데...
피지알에 글 오랜만에 쓰시네요. 저는 글쓰고 싶은 마음만 품고 10년 넘게 못쓰고 있는데 글 볼 때마다 부럽습니다아
켈로그김
16/04/08 14:57
수정 아이콘
이제 슬슬 늙어간다는 것이 우리를 멈춰서 앉아있지 못하게 한다.. 는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네요. (왜????)
저도 계속 데굴데굴 굴러갑니다.
구르는 돌이지만 멈췄다가 굴렀다가 하기 때문에 이끼도 끼어있고 벌레도 사는건 함정.
감모여재
16/04/08 15:12
수정 아이콘
헥스밤님 정도면 아직 그다지 늙으신것도 아니지 않.. 앞으로 더 늙으실 일만 남았는데요
헥스밤
16/04/08 15:27
수정 아이콘
흐흐, 원래 처음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16/04/08 15:45
수정 아이콘
하하.. 북한만 미혼이라니..
프로젝트 잘 진행되시길 빕니다.
도들도들
16/04/08 16:12
수정 아이콘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Sgt. Hammer
16/04/08 16:46
수정 아이콘
언제쯤 사시미가 될 수 있을까 스끼다시 내인생
16/04/08 19:28
수정 아이콘
잘 보고 갑니다. 어서 쾌차하시길..
지니쏠
16/04/08 19:42
수정 아이콘
글 너무 좋아요! 못뵌지가 한참이네요.
쌀이없어요
16/04/09 02:06
수정 아이콘
북한이 넘어졌군요ㅠㅠ
윌모어
16/04/09 11:12
수정 아이콘
항상 글 잘읽고 있습니다!
갈매기
16/04/09 11:48
수정 아이콘
깁스를 왜 하시게 됐는지 의문이 풀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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