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 가입하고 두번째 글이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에 대한 글이었는데 브라질 상황이 다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추가 소식을 전하며 룰라에 대한 못다한 이야기를 적어 봅니다.
바로 그를 브라질에서 실질적으로 면책특권이 있는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급한 불을 꺼 보자는 안입니다. 브라질 현직 장관들은 대법원에 의해서만 재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결론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뇌물에 대한 기소를 피하기 위해 어거지로 장관이 된다면 아무리 명예가 많이 실추 되었다고 해도 비겁하다는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여간 이 시점에서 룰라의 성장과 정치 역정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어머니의 결단과 성장과정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G20 회의에서 브라질의 룰라를 세상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대통령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같은 정치인으로 80%에 육박하는 지지율에 대해 칭찬과 부러움이 섞인 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룰라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자신의 어머니가 브라질의 지독하게 가난한 북동부에서 상파울루로 이사를 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자기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거나 일찍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브라질 북부의 여건은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들인 흑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가뭄과 절대빈곤으로 아프리카에 비유될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기대수명도 상당히 낮았습니다.)
룰라의 가족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브라질의 가난한 북동부 주인 페르남부코의 소도시에서 살았습니다. 룰라의 어머니 도나 린두는 7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남부에 일자리를 찾는다며 집을 나갔기에 혼자 모든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답이 없는 상황이 되자 1952년 도나 린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당나귀, 시계 등)을 시장에 내다 팔아 여비를 마련하고 남편을 찾아 남부로 정처 없는 길을 떠납니다.
세계에서 4번째로 국토가 넓은 나라답게 7살의 막내를 포함한 7명의 아이들과 도나 린두는 이 트럭, 저 트럭의 짐칸을 옮겨 타면서 밤에는 트럭 밑에서 잠을 청하며 13일을 버텨야 했습니다.
룰라는 도나 린두가 데리고 내려온 7명의 아이들 중 7살짜리 막내 아이였습니다.
갖은 고생을 하고 상파울루 인근의 남편을 찾긴 했으나 남편은 이미 딴 여자와 2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도나 린두는 남편과 그의 정부가 사는 집으로 비집고 들어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동거를 시작합니다. 룰라의 아버지는 이 두 여인으로부터 무려 23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합니다.
룰라는 그의 형제 중 유일하게 초등학교를 마치는 행운아였지만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선반공이 되기 위한 견습생이 되어 금속 노동자의 길을 걷습니다.
노조활동가로 단련되어 가던 룰라는 1978-1979년 군부독재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인플레가 그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시점에 자동차 산업 단지 대파업을 이끌면서 일약 전국적 스타가 되었습니다.
* 대파업 시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는 룰라: 이 장면은 아닌 것 같지만 연설 도중 스피커가 고장 나 수많은 군중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따라 하며 앞에서 뒤로 전달한 일화는 꽤 유명합니다.
급진 좌파에서 실용적 중도 좌파로
룰라와 그의 동지들은 이 파업의 여세를 몰아 1980년 노동자당(PT당)을 창당합니다.
노동자당의 핵심 세력은 크게 3부류인데 첫째는 해방신학에 영향을 받은 가톨릭 풀뿌리 조직들로 당내 최대 계파를 이루었습니다. 이 중에는 도시 빈민의 건물 점거운동이나 농촌의 무토지 운동을 주도하던 활동가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둘째는 1960~197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강경 무장투쟁을 벌였던 게릴라 출신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쿠바 등지로 망명생활을 하며 독재 기간을 버텨오다가 사면령(1979) 이후 노동자당 창당에 참여했습니다.
셋째는 좌파지식인들과 학생들이었습니다.
노동자당은 이렇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다른 좌파 정당이 사상투쟁이나 노선투쟁으로 분열되었던 것과 달리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내부 분파를 허용함으로써 분열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노동자당은 1990년대 말 열성당원이 23만 명이나 되는 브라질에서 가장 성공한 좌파당으로 성장합니다.
노동자당의 성장은 1940년대 30만 명의 당원으로 바르가스를 압박하던 공산당에 비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당은 내부에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이 주류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또한 쿠바에 망명을 했던 지휘부가 있었음에도 쿠바나, 또는 무장 게릴라 시절 마오주의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중국이나, 또는 더 이전 시기에 세계 공산당의 지휘부 노릇을 했던 코민테른을 조종한 소련의 직접적 영향을 받거나 이들 나라를 맹목적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친사회주의 성향의 좌파당으로서 사회주의 국가들(특히, 쿠바)에 대한 심정적 연대의식은 높았습니다.)
또한 노동자당은 설립 시점부터 대중운동과 풀뿌리 조직에 기반하고 있다 보니 이데올로기에 고착했던 공산당에 비해서는 외부의 동태적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으며 보다 실용주의적 입장에 설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노동자당이 지방자치제에 기초해서 성장한 것은 당 지도자들이 통치 경험을 통해 현실 문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고 참여 민주주의의 원칙(즉, 민주집중제라는 허상에 빠지지 않고)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통치 스타일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공산당처럼 완고한 이데올로기에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고 하여도 암울한 독재 시절 좌파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되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 전체를 악마시 하는 경향이 컸던 것처럼 룰라도 초기에는 매우 급진적 주장을 펼쳤습니다.
첫 번째 대선 도전으로 콜로르(나중에 부패 혐의로 탄핵된 대통령)와 맞붙었던 1989년 선거에서 룰라는 은행의 국유화와 대외 채무의 즉각적 지불 중단을 주장했으며 노동자당은 중도파나 우파와 결코 연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두 번째 대선 도전으로 카르도주(군부독재 시절 같은 좌파 그룹으로 둘은 친했다고 합니다.)와 맞섰던 1994년 선거에서는 헤알화 도입은 선거용 사기이고 에너지나 통신 부분의 민영화는 국가 주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카르도주는 자신이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된 계기를 유력 대권주자였던 룰라가 헤알화 계획을 중단시킬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형이 공산당원이었음에도 한 번도 진지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았던 룰라는 거듭된 대선 도전 실패와 헤알화 계획의 대성공을 목도하면서 더욱 온건한 실용 주의자로 변신했습니다.
세 번째 도전으로 카르도주와 다시 맞붙은 1998년 선거에서는 이전과 다른 입장을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헤알화 플랜으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한 것은 중요한 성과이며, 민영화된 회사들은 입찰 과정에 문제가 있을 때에만 감사에 들어가겠다며 카르도주의 업적을 일부 인정했습니다. 또한 급진적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무토지운동(MST)에 대해서도 브라질같이 대국에서는 농업개혁을 위해서 남의 땅에 침입할 필요는 없다며 거리를 두었습니다.
네 번째 도전인 2002년 대선에서는 브라질의 대외 채무를 존중할 것이며 민영화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고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경제성장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쳐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룰라는 대선 캠페인 기획자로 정치 마케팅 전문가인 Mendonca를 영입하는데 그는 선거 슬로건으로 "평화와 사랑의 상징 룰라(Lula, Peace and Love)"(재즈 페스티벌 제목 같군요)를 내걸어 룰라에게 덧씌워진 급진적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려 노력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노동자당은 제휴 세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다른 정파(중도파나 심지어 우파까지도)와의 연대를 시사했는데, 결국 중도파의 표를 더 얻기 위해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우파인 자유당(PL) 대표이자 복음주의적 개신교도인 섬유 재벌 호세 알렝카르를 선정했습니다.
선거 막판에는 "브라질 민중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개했는데, 여기서 룰라는 카르도주의 헤알화 계획을 유지하겠다고 다시 명시적으로 선언하였으며, 경제적 안정과 경상수지 및 인플레이션의 통제는 브라질의 소중한 유산으로 지켜나가겠다고 공표했습니다. 룰라는 이 공개편지를 노동자당 명의가 아닌 룰라 개인의 이름으로 발표함으로써 노동자당 보다 더 유연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기존의 입장과 달라진 주장에 대해 룰라는 "세계가 변했고 브라질이 변했다. 노동자당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라고 답했습니다.
심지어 대선 승리 이후에는 은행가들이 너무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들이 망했을 때 세금으로 감당해야할 구제금융 규모를 생각하면 부자인 지금이 차라리 낫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룰라가 기존 입장을 뒤엎고 바뀔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실용적 가치관이 주효하긴 했으나 노동자당의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룰라의 오른팔이자 나중에 비서실장이 되었던 지르세우(Dirceu)는 1995년 당대표가 되고나서 완고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당지도부에서 대대적으로 몰아내며 룰라의 변신을 측면에서 도왔습니다.
그러나 룰라의 입장 변화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기업가들과 외국 투자가들 그리고 금융인들은 룰라가 2002년 대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패닉 상황에 빠집니다. 헤알화는 1달러당 2.15헤알에서 3헤알로 40% 가까이 폭락했고 중앙은행이 헤알화의 추가 하락을 막고자 금리를 인상시켰더니 이제는 막대한 규모의 공공부채에 대한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디폴트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러자 브라질에 들어오는 자본 유입이 갑자기 멈추어 버립니다.
임기 말의 카르도주는 IMF와 협상을 통해 긴급구제자금 300억 달러를 받기로 하는데 자금 집행의 대부분이 선거 후 시점이다 보니 선거 결과에 따른 불확실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카르도주 대통령은 모든 후보를 불러 모아 IMF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재정긴축을 통해 재정잉여금 4.5% 마련을 포함한)에 동의를 하라고 압박합니다.
룰라를 포함한 거의 모든 후보들이 지지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였습니다.(군소 좌파 후보 한 명만이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룰라의 길, 차베스의 길
룰라는 2002년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46.4%를 얻으며 과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결선투표에서는 61.3%로 카르도주의 후계자인 PSDB당의 세하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룰라의 당선은 1970년 선거로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칠레의 아옌데 당선과 유사했지만 룰라의 정책은 비극적 최후를 맞은 아옌데의 좌파 노선과는 매우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1998년 집권으로 라틴 아메리카 좌파 집권의 물꼬를 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도 달랐습니다.
특히 차베스와 룰라는 비슷한 시기 모두 노동자와 빈민의 지지를 받고 집권했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차베스가 볼리바르 혁명과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서방 정치권과 금융권을 제국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점점 급진주의의 길을 걸었던 것에 비해 룰라는 급진주의에서 온건주의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결정적 차이를 보였습니다.
아마도 룰라와 차베스가 다른 길을 걷게 된 데는 두 지도자의 서로 다른 인생역정과 두 나라의 차별적 정치유산이 한 원인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한 명은 독재정권 아래서 노조를 이끌며 저항했지만 세 번의 대권 도전 실패에서 보여주듯이 인내심을 잃지 않고 합법적 틀 내에서 권력에 오르려고 하였던 반면, 다른 한 명은 군인으로 민선 정부(비록 문제가 많은 정권이긴 하였으나 그래도 선거를 통해 집권한)를 쿠데타로 전복시키려 했던 야심가로 나중에 선거를 통해 집권하기는 하였지만 합법적 통치 질서 안에 자신을 가두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두 지도자가 반대했던 전임 정권의 역할도 중요한 차이점이 되었습니다. 민선 정부이긴 했으나 좌충우돌 속에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한 차베스의 전임 정권에 비해 룰라의 전임 정권(카르도주 정권)은 인플레이션의 통제와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며 큰 인기를 얻었고 임기 말에도 국민적 지지를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기에 룰라가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룰라가 계승한 카르도주의 정책은 비단 헤알화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빈곤구제의 대표적 정책이 된 Bolsa Familia(가족기금)도 원래는 카르도주의 Bolsa Escola의 확대 개편이었습니다.
룰라 집권 1기를 카르도주 집권 3기라고 부르는 사람들(긍정적이든 부정적 의미든)이 많았던 것은 이런 정책의 연속성 덕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정권 모두 빈곤구제에 열심이었으나 그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의 차이도 컸습니다. 차베스는 국영석유회사 PDVSA의 매출 중 일부를 직접 끌어다 빈곤구제정책의 재원으로 사용했으나 룰라는 세금으로 재원을 마련함으로써 전체 경제의 균형을 유지하고 구성원 간 이해를 조정하는데 보다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즉, 룰라와 차베스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데는 민주주의에 대한 개인적 신념의 차이와 함께 브라질과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유산 그리고 경제정책의 시행 방법의 차이도 한몫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룰라는 같은 좌파 지도자로서 차베스에 대해 우호적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2008년 차베스가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임기 제한을 철폐하고 영구집권을 시도하는 국민투표 운동을 벌였을 때도 룰라는 차베스에 대해 지난 100년의 베네수엘라 역사에서 최고의 지도자라며 추켜세웠습니다.
하지만 차베스가 무리수를 둬가며 개헌을 통해 3선에 나선 것과 달리 룰라는 3선 개헌에 나서라는 지지자의 요청과 우호적 환경 속에서도 단호히 이를 거절하며 민주적 가치관의 차이를 재확인하였습니다.
현재 브라질과 베네수엘라는 모두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갈등이 다시 커지고 있지만 폭력적 도심 시위 속에 44명의 사망자를 낸 베네수엘라와 100만 명이 넘는 시위에도 사상자가 한 명도 없는 브라질은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