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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2/01 21:39:48
Name -안군-
Subject [일반] 아버지와의 드라이브
1. 작년 이맘때쯤, 아버지께서는 구청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의 보일러실 관리직을 맡아 일하게 되셨습니다.
사업을 접으신 후, 한동안 벌이가 없이 지내시던 차에, 일거리가 생겨서 좋아하셨죠.
그렇게 근 1년을 일하셨는데, 어제부로 잘리셨습니다.

문화센터에서는 매년 용역업체를 입찰을 통해 결정하는데, 이번에 용역업체가 다른 곳이 선정되었답니다.
아버지도 기존 용역업체의 파견직이셨기 때문에, 그냥 잘리신거죠.
(계약직 2년 보장은 개뿔. 이렇게 하면 그냥 쉽게쉽게 뽑고 자르겠네. 돈도 최저임금 수준으로 줬으면서...
공공기관이 이모양인데, 사기업보고 저 법을 지키라면 참 잘도 지키겠네?)
그래서, 아버지가 그동안 그곳에서 지내시면서 모인 옷가지 및 자잘한 물건들을 가지러, 제 고물차를 몰고 나갔습니다.
영등포에서 강남까지 갔다오는 길은,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도, 시간은 엄청 걸리더군요...

2. 오는 길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친구 부모님 초상 소식이 자주 오더니만, 요새는 친구들이 갔다는 소식이 더 많이 와. 허허허..."
저희 아버지는 45년생. 해방둥이십니다.
"바로 몇달 전까지만 해도, 나랑 동창회 사무실에서 바둑 두던 친구가 며칠 전에 갔다는구만."
그러면서 그 친구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시더군요.

"그 친구, 암튼 공부는 지지리도 못했거든, 그때만 해도, 우리 고등학교에서 왠만하면 서울에 있는 명문대는 다 갔는데,
그 친구는 3수를 해도 안되는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울시립대 세무과에 야간으로 들어갔어.
그리고는 세무공무원이 됐는데, 그때만 해도, 공무원은 상고 나온 애들이나 하는거였거든.
그래서 나름 대학 물 먹은 친구랍시고, 조사과로 발령이 났지."

한 숨 돌리시는 동안, 운전대를 잡고 있던 제가 무덤덤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분 입장에서는 잘 풀렸네요."

아버지는 이야기를 이어가시죠...
"그랬지. 거기서 그 놈이 어떻게 처신을 했는지 알아? 회사들 세무조사를 들어가면, 그 조사과 직원들이 나가게 되는데,
그 친구가 가서 딱 보면, 예를 들어 이 회사가 10억을 탈세를 한거야?
그럼 이렇게 하는거지. '이거, 세금 3억만 내게 해 드릴테니, 7천만 나 주쇼.' 회사 입장에서는 땡큐 아냐?
그러면, 그 친구는 거기서 밤을 새가면서 장부 기장을 다 맞춰주고, 7천만원 받고, 세금 3억만 내게 해주는거지."

뭔가 느낌이 쌔...합니다.
"그거... 잘못된거 아니에요?"

"잘못됐지. 세무서 입장에서도, 이 친구가 영 실적을 못 올리거든, 그래서 승진도 안돼고, 맨날 조사과장 자리에 있는거야.
근데, 그 친구 입장에서는 그게 좋은거지. 승진해서 국세청쪽으로 올라가기라도 하면, 그럴 기회가 안생기거든.
그러는 동안에 그 돈으로 강남에 빌딩을 3개나 샀어. 맨날 밤새고 다니니 원래 마누라랑은 이혼하고.
세무서에서도, 이거 계속돼면 감사당해서 자기들도 위험하겠다 싶으니, 그만두라고 압력을 넣어서, 세무공무원은 그만두고,
그러고나서 나이 50돼서 20살 아래 여자랑 재혼을 하데? 부부동반 모임 나오면, 무슨 조카하고 나온거 같았지.
지금은 그 여자랑 낳은 딸이 한 20살 됐을거야. 그런데, 그렇게 허무하게 가더라고."

제가 건조한 목소리로 한 마디 합니다.
"뭐... 그 딸은 금수저 물었네요."

"..." 아버지께서 말씀이 없으십니다.

3. 대학생때의 아버지는 꽤나 미남에다가 혈기넘치는 기독청년이셨던 모양입니다.
(아버지, 왜 그 얼굴은 안 물려주셨... 아흑.. ㅠㅠ)
당시 예수교 장로회 청년연합(장청)의 임원이셨던 아버지는,
서슬 퍼렇던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여 장청 소속으로 유신반대 연대성명을 내십니다.
그리고... 뭐, 당연히 빨간줄 갔죠. 다니시던 대학에선 제적당하고.

곤경에 몰리신 아버지는 그 당시 뒤에서 박수쳐주고, 등 떠밀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하나같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른척하고, 입 싹 씻더랍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태까지도 반 야당 성향의 말씀을 자주 하시는 편입니다. 원래, 맞서 싸우던 적보다, 배신자가 더 미운 법이거든요.

어쨌거나, 전과자는 여러모로 금융적인 제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로 참 어렵게 어렵게 저를 키우셨어요.
가난한 삶 속에서도, 제가 어렸을 때 부터, 아버지께선 종종 "사람은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그게 이기는거다." 라고 하셨죠.

...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좀 더 머리가 큰 다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나이가 40이 다 돼고 나니... 오히려 정의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이번에 아버지가 당하신 일과,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분 얘기를 듣고 나니, 더 혼란스럽네요.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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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갈수있을까?
16/02/01 21:45
수정 아이콘
40년전이나 지금이나 힘든건 똑같네요
정의는 진짜 살아 있는겁니까?!
-안군-
16/02/01 23:33
수정 아이콘
뭐, 그래도 지금은 저렇게 대놓고는 못하는 세상은 됐으니...;;
해원맥
16/02/01 21:48
수정 아이콘
아버님께서는 옳게 사셨습니다.
세상이 요지경인지라 바르게 산 사람들이 허탈감을 느끼는 것이죠
-안군-
16/02/01 23:34
수정 아이콘
허탈감이 증오가 돼고, 그게 역으로 발산되는 경우도 왕왕 있더군요.
유신반대 하시다가 전과자까지 되신 분이, 야당 얘기만 나오면 빨갱이라면서 흥분하시는거 보면... 하아...
부들부들
16/02/01 22:07
수정 아이콘
역사의 큰 흐름을 멀리서 지켜보면 이순신이고 안중근이고 김좌진이고 다 의인이고 위인이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죠.
그렇지만 그런 분들이 있기에 그나마 망할뻔하고 없어질뻔한 이 나라가 존속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후세에 재평가 받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지금 당장이 뼛속까지 시릴 뿐이죠.
하루 빨리 정의가 바로 서는 나라가 되길 빕니다만.. 최소한 제가 살아있는 동안은 못 보겠죠.
-안군-
16/02/01 23:36
수정 아이콘
역사 앞에서 개인의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그게 사실 제일 안타깝죠.
그냥 후세의 평가고 자시고, 지금 당장 나 잘 살고 보자... 라는 관점에서 보면, 친일파마저도 이해가 가죠... ㅠㅠ
그저 어렸을땐, 착한놈/나쁜놈 구분이 쉬워서 편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혼란스러워요.
16/02/01 22:08
수정 아이콘
옳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외적인 보답이 있다면, 누구나 옳게 살 거고, 그럼 그건 더 이상 옳게 사는게 아니라 그냥 영리한 행동이라 불리겠지요. 현대 사회에서 옳게 사는 이유는 그냥 '나쁘게 살 때 생길 양심의 가책을 이길 수 없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뭐 대충 속임수를 쓰면 이득 좀 볼 것 같은 상황을 가끔 맞닥드리는데, 아... 도저히 못 하겠더라구요.
-안군-
16/02/01 23:38
수정 아이콘
굳이 현대 사회가 아니더라도, 과거로 갈수록, 남들 괴롭히고, 약탈하고, 권력에 빌붙고, 전횡을 휘두르던 사람들이 사실....더 잘 살았죠.
그나마 현대로 오면서 시스템이 갖춰져서 그렇지,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흐릿하던 시대에는 지금보다 오히려 더 했을거라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의인'들이 더더욱 대단한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오렌지나무
16/02/01 23:39
수정 아이콘
아버님이나 그 친구분이나
자기 인생에 후회가 없다면
잘 사신겁니다.
-안군-
16/02/02 01:06
수정 아이콘
아버지께서는 그 때 일을 많이 후회하십니다... 그게 문제죠.
가끔, 빨갱이 놈들한테 속았다고 하실때면... 감당이 안됩니다;;
하지만, 그당시 박정희가 옳았다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뭐랄까... 자기모순에 빠져계셔요...
일제시대때, 독립투사/반일 운동가였던 사람이 이후 친일파로 변질되는 경우가 약간은 이해가 돼요.
가장자리
16/02/01 23:49
수정 아이콘
그래도 그렇게 손해보고 사신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세상이 이나마라도 되는 거겠죠.
그게 뭐 잘나고 싶고 정의롭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그러지 않으면 못사시는 분들이 있죠.
송곳처럼 그렇게 튀어나오시는 분들이요. 웹툰에서 최규석씨가 잘 그리고 있지요.
-안군-
16/02/02 01:10
수정 아이콘
그 점에 있어서는 분명히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저라면 그렇게 못 할 것 같거든요.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저희 아버지는 사람을 너무 잘 믿으시는게 탈이에요. 그러니 배신을 당하셨죠... ㅠㅠ
뭐,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딜 가나 기회주의자들, 뒤에서 이득만 보려고 드는 사람들, 어그로꾼들은 늘 있는거 같아요.
밀물썰물
16/02/02 04:47
수정 아이콘
아버님과 오랫만에 긴 대화 나누신 것 아닌가요?
아버님 상황은 좀 슬펏지만 님께서 운전하시면서 아버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좋은 기회가 되었네요.

제가 아는 분 한분은 아이들이 대학 들어가면 얼굴보기 힘든데, 집에 들어오기는 하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아들 얼굴 보기도 힘들고 주말이면 나가고 해서 대학 졸업할 때가 된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대학 졸업반에 실습 나간다고 어딜 갔는데 일부러 갈 때 또 올 때 따라가서 오가면서 이야기 많이 했다고 좋아하시더군요.
-안군-
16/02/02 10:15
수정 아이콘
아버지께서 사업을 그만두시고 난 이후로는 이런 기회가 종종 있기는 합니다.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시는걸 워낙 좋아하셔서요.
근데, 항상 씁쓸함이 남는 건, 그래도 바르게 살아보겠다고 애쓰던 소시민의 말로가 저렇게 초라하다는 것 때문이겠죠...
평생을 누구 헤꼬지도 못하고, 교활한 짓도 못하면서 미련하게, 우직하게 살아오신 분이신데, 남은게 아무것도 없다는게...
밀물썰물
16/02/02 12:12
수정 아이콘
글세 그것이 남은 것이 없는 것인지 남은 것이 없어보이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위에 예를 들신 세무서에서 일하신분 그분은 아주 나쁜 것만 남아 있어보입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고 또 자본주의의 부작용이 많은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나쁜 것이 아니고 그에대한 부작용을 사회가 어떻게 처리하냐의 문제입니다) 오래 살아서 돈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실적으로 잡히지 않아서 그렇지, 아버님께서 남기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정신은 남기셨다고 봅니다.
그 정신을 님께서 옳게 잘 받으신다면 아버님께서 좋은 것 남기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냥 제 생각입니다.
데보라
16/02/02 20:52
수정 아이콘
뒤 늦게 읽고 꼭 댓글 달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글 남기게 되네요! 아버님의 과거를 아들된 입장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아버님의 인생에서 남는것이 되겠지요

요즘 들어서 남에게 인정 받는 것 그것이 가족인것이 본인이 납득할 만 한것인가 만큼 중요하다고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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