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1/02 03:07:28
Name 이치죠 호타루
Subject [일반] 팔왕의 난
호타루입니다.

먼저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올 한 해 독자 분들의 앞길에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언젠가 써 보고 싶었던 주제였는데, 일단 여기 분들이 내공이 보통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제가 자치통감의 팔왕의 난 파트를 완전히 한 번 읽은 게 불과 어제였던지라 써도 되나 싶긴 합니다. 제가 관련 학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내용상 오류로 밝혀진 것들이 있을 수 있고, 또 주류 학계의 해석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웹툰 삼국전투기가 삼국시대의 종장인 천하통일편으로 돌입하면서 많은 분들이 팔왕의 난까지의 연재를 바라고 계시는데, 장담컨대 팔왕의 난 하나만으로도 최소 1년치 분량은 그냥 나온다에 한 표를 던지겠습니다. 꼭 군사적인 이야기가 있어서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팔왕의 난 시기는 군사적인 이야기는 적은 편이지만, 처음에는 정치판부터 맛이 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팔왕의 난 후반기에는 그야말로 중국 전역이 미쳐돌아가기 때문이죠.

자료출처는 자치통감인데, 제가 중국판 원서를 읽을 엄두는 안 나고, 권중달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저작을 읽었습니다. 제가 아직 진서 같은 걸 읽을 깜냥까지는 안 되는 터라, 웬만해서는 철저하게 자치통감을 따라갑니다. 나무위키는 참조하지 않았습니다. 읽고 나서 내용을 비교해 보니 어째 자치통감과 비교해 봤을 때 틀린 내용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해도 진짜로 중요한 부분을 틀린 내용이 수시로 뻥뻥 들어가 있어서...

이미 이벤트에 참여한 글이 있으니 이 글로 이벤트에 참여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새해를 하루라 치면 하루의 시작인 아침이니, 그럼 진나라판 아침 막장 드라마를 보시겠습니다.



워낙 글이 길어서 목차를 달아둡니다.

0. 발단
1. 양준
2. 가남풍
3. 사마휼
4. 사마륜
5. 사마경
6. 사마예
7. 사마영, 사마옹
8. 사마월
∞. 에필로그



Chp 0. 발단

모든 일에는 그 시작이 있기 마련인데, 팔왕의 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문벌 귀족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생긴 여파라고 할까요. 그 배경에는 구품관인법이 있었습니다. 자치통감 진기3 무제 태강 5년(284, 국내 번역본 기준 9권 p. 200. 이하 별 말 없으면 죄다 국내 번역본 9권을 기준으로 합니다)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아, 권중달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자치통감의 각 문장이 긴 게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 읽는 사람이 헷갈리는 경우도 있더군요. 그래서 원문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첨삭을 가했음을 밝혀 둡니다.

처음에, 이부(인사처)에서 천하의 모든 선비들을 다 심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군이 각 군과 봉국에 중정을 설치하고 주에는 대중정을 두어, 각 지방의 사람을 뽑아 등용하고, 덕망 높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일을 담당하게 하려 하였다. 각 지방의 사람을 심사하여 아홉 품계를 매기니 이를 구품이라 하였다. 행실이 올바르고 뛰어난 자는 그 품계를 올리고 행실이 모자라고 도의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 품계를 내렸다. 이부에서 이를 근거로 하여 사람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품계는 높은데 행실이 영 아닌 자들이 종종 나타났다. 이와 같은 폐단이 날로 심해졌다.

진군은 후한 말의 사람이고, 강유와 맞섰던 먼치킨 진태의 아버지이자 서주에서 유비를 만났던 바로 그 진군입니다. 그러나 진군 나름대로는 이 제도를 신경쓴다고 만든 것이었겠으나... 여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죠... 아니, 각 고을의 유력자와 선발관이 일종의 카르텔을 만들면 어쩌려고? 게다가 이 시기는 현대처럼 위아래가 뒤집히는 속도가 결코 빠른 것도 아니었기에, 이 제도만 있으면 권력 있고 재산 있는 놈들이 문자 그대로 천년만년 먹고 살 판이었죠. 결국 자연스럽게 지배층이 완전히 고착되고 부익부 빈익빈이 극심해지는 시기가 도래합니다.

이 시기의 사치가 얼마나 심했는지,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죠. 자치통감 진기3 무제 태강 3년 (282, p. 180) 이야기입니다.

후장군 왕개는 황제의 외삼촌이었고, 산기상시 석숭은 재상 석포의 아들이었다. (중략) 황제가 매번 왕개를 도와주었는데, 산호수를 하사하니 그 산호수의 길이가 2척이었다. 왕개가 석숭에게 이를 보여주자 석숭이 철로 만든 효자손으로 이를 부숴버렸다. 왕개가 노발대발하자 석숭이 "그럼 내 집에 있는 것을 가져가시오."라 말하며 집에 있는 산호수를 모두 가져오게 하니 길이가 3~4척이 되는 것이 6~7개나 있었고 왕개의 것과 비교하여 같은 것이 아주 많았다.

요즘 말로 치면, 황제가 자동차로 벤츠를 뽑아다 줬는데 그걸 보고 벤츠를 때려부수더니, 내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타고 가시오 하면서 차고를 열었더니 벤츠는 그냥 넘어가는 몇십억짜리 외제차가 잔뜩 있더라- 이런 이야기 정도 될까요? (제가 차알못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된 원인은 누구보다도 황제 그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근검절약을 내세울 때는 언제고 통일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치와 향락에 빠지니 정사에는 태만했고 후궁이 정말 만 명 가까이 되었을 정도였죠(자치통감 진기3 무제 태강 2년, 281년, p. 177). 그러자 황제의 장인인 양준과 그 두 동생이 정사를 농단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삼양(三楊)이라 하였죠. 그 위세는 전두환 대통령 때에 그 쓰리허 비슷한 정도, 아니 외척이니 그 이상이었을 겁니다. 그나저나 연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황제가 만 명의 후궁을 들인 것이 통일된 지 불과 1년 후였으니, 저 개인적으로는 황제가 정말로 그 비싼 털옷을 태우면서 사치를 그만두자 할 뜻이 있었는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그런 일화가 있기는 있었어요).

자, 소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부와 명예를 독점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어질 일이 뭐겠습니까. 권력 싸움이죠. 문제는 진나라 자체가 위나라의 멸망을 보면서 "아, 위가 멸망한 것은 인척들의 힘이 약해서였으니 우리는 인척들을 최대한 키워야겠다" 하면서 인척들에게 봉토는 물론 군사권까지 준 것이었습니다. 쿠데타가 툭하면 벌어지는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군사력인데 각 지역의 왕들이 군사력을 다 가지고 있다... 야심있는 왕이라면 대권을 충분히 넘볼 만한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팔왕의 난에는 인척들과 외척들이 깊게 관여합니다. 여기에 더불어서 인척에게 빌붙어서 한 자리 차지하려는 놈, 가진 권력을 지키려는 놈, 독립하려는 꿍꿍이가 있는 놈 등등 별의별 놈들이 다 튀어나왔으니 그야말로 진나라의 지배층 전체가 난에 끼여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죠.



Chp 1. 양준

통일이 된 지 10년 후(290년), 황제 사마염이 병상에 누웠습니다. 후사를 황제의 장인인 양준과 여남왕 사마량에게 맡기고 죽을 준비를 하는데... 양준 이 사람이, 황제가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서 황후와 짜고 유서를 고쳐(!!!) 자기 심복들을 싹 심어놓습니다. 그렇게 황제가 죽고 양준이 권력을 독점합니다. 양씨의 세상이 된 거죠. 이 때 누군가 양준에게 "여남왕이 군사를 일으켜서 양준을 치려고 한다"고 하자 양준이 두려워하고 황제의 친필을 써서 여남왕 사마량을 체포하게 합니다. 사마량은 밤을 달려서 허창으로 몸을 피해서 가까스로 화를 면했죠. 이 때부터 양씨가 정사를 완전히 장악했는데...

이 양준에게 찬밥 취급을 받은 맹관과 이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남풍이 이 둘과 짜고 쿠데타 계획을 세운 것이죠. 이조는 처음에 양준에게 걸려서 잡힐 뻔한 여남왕 사마량에게 군사를 일으키라고 권하지만, 사마량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조는 이 일을 형주의 군사를 다 총괄하던 초왕 사마위에게 이야기합니다. 사마위가 크게 기뻐하고, 황제에게 입조할 것을 청하죠. 여기에는 조금 복잡한 속내가 있는데, 양준 입장에서는 이 초왕 사마위와 연합하고 싶었습니다. 근데 이 초왕 사마위가 성질이 하도 개 같아서(자치통감에서는 용감하고 날카로운 점을 꺼렸다고 우회적으로 적고 있습니다만, 성격이 개차반이었다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좀더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군으로 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둬도 내가 제어할 수 있나 없나 간 보기를 하다가 선수를 빼앗긴 거죠. 거 옛말에 있잖습니까... 선즉제인 후즉제어인이라고. 딱 그렇게 된 겁니다. 하여간 사마위와 불편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던 왕준은 군소리 없이 초왕을 불러들이는데... 이게 결과적으로 양준의 목을 날리게 됩니다. 입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황명을 빌은 쿠데타가 일어났고, 바로 사마위의 군대가 그 쿠데타군의 일원이었던 거죠.

이 때 황태후가 비단에 글씨를 써서 양준을 구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고 하자 가남풍은 황태후도 역적이라고 몰아세우게 됩니다. 애초에 둘 사이가 고부 관계기도 했지만, 가남풍 폐립 문제가 오갈 때도 황태후가 뒤를 봐 준 일이 있었는데(p. 233) 그건 모르고 오히려 평소에 가남풍을 책망한다고 원망이 쌓였던 것이죠. 이 김에 황태후를 박살내려고 아주 난리 부르스를 칩니다(실제로 황태후의 어머니 되는 방씨까지 이 쿠데타로 죽었을 정도였으니 가남풍의 원한이 어마어마하기는 했었나 봅니다). 훗날 황태후가 죽자 이 황태후의 혼이 조상들에게 호소해서 자기에게 벌을 내릴까봐 두려워 가남풍은 시체를 바로 눕히지 않고 엎드려 눕히게 하고 장사지냈다는 이야기가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p. 252). 그 정도로 가남풍은 비정하고 독한 여자였죠.

두 가지 사담이 있는데 이 쿠데타군에 가담한 사람 중에 동안공 사마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마요는 제갈탄의 외손자가 되는 사람이라, 일찍이 그 인간흉기, 조자룡의 현신이라는 문앙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때 문앙이 양준 일파로 몰려서 삼족이 죽음을 당합니다. 자치통감에서 말하기를 이 날의 생사여탈권이 사마요에게 달려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양씨가 황태후가 될 때, 그러니까 이 쿠데타로부터 14년 전인 276년의 이야기인데 양준의 동생 양요라는 사람이 "한 집안에 황태후가 둘이 나오고서 멸문의 화를 입지 않은 예가 없으니 폐하께서는 부디 약조한 문서를 주셔서 제 목숨을 보전해 주십시오"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p. 118).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으나, 가남풍의 마수에서 살아날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남풍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여남왕 사마량과 위관을 불러 정사를 돌보게 하고, 초왕 사마위에게는 위장군의 벼슬을 내려, 오늘날로 치면 수도군단장 혹은 수도방위사령관 정도의 직책을 맡겼습니다(위장군의 위가 지킬 위(衛)입니다. 그리고 품계가 표기/거기장군에 이은 2품계이기 때문에 단순히 수도기계화사단장 정도가 아닌 수도 전체의 경비를 총괄하는 직책이라고 봐야 옳을 것 같네요). 이 때 사마량이 관직을 심하게 많이 뿌리고 다녀서 한 소리를 들은 바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는 일단 별다른 일이 터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 사마량, 위관과 함께 가씨 일족들이 조정에 대거 들어오는데 그 수장이 가남풍의 조카 되는 가밀이었습니다.

291년 3월, 혜제 원강 원년의 일이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복잡한데, 문제는 팔왕의 난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는 것이죠.



Chp 2. 가남풍

팔왕의 난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반드시 이 사람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이 없이는 이야기가 안 되거든요.

가남풍. 황태자의 부인. 지지리도 못생겼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좀 의문이 듭니다. 어쨌든 그녀는 진나라 최고의 공신 가충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니 가충 정도면 충분히 자기 딸을 황태자에게 시집을 보내고도 남을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죠. 문제는, 이 황태자가... 바보였다는 겁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진 혜제 원강 9년, 그러니까 무제가 죽고 황태자가 황위에 오른 지 9년 후(자치통감 진기5, p. 285)에 기록된 일입니다.

일찍이 황제의 정원에서 청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듣자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것들이 우는 것은 관부에서 시켜서 그런 건가, 아니면 자기들이 알아서 우는 것인가?"
당시 천하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자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는가?"

거 왜 그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말로 잘못 퍼진 걸로 유명한 그 빵이 없으면 고기를 드립 있잖습니까? 그게 실제 역사서에 그것도 천년 하고도 수백 년 전에 등장한 겁니다(...) 그래서 혜제가 백치가 아니었나 하는 의견도 있는데, 음... 솔직히 저는 좀... 자치통감을 읽고 나니까 약간 회의가 들더군요. 얘가 진짜 백치 맞았나 싶었습니다(저런 일화가 끼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근데 이건 한참 뒤의 이야기니까 지금 여기서 이야기할 수는 없고... 하여간 황제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백치까지는 아니라 해도 무능하고 띨띨한(아, 이 표현 정말 오랜만에 써 보네요) 황제였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걸 솔직히 아버지 되는 무제 사마염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어디 아버지뿐입니까. 내로라하는 공신들은 황태자가 띨띨한 놈이라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공신 중의 한 명인 위관(촉나라를 평정하고 종회와 등애를 죽인 그 위관 맞습니다)은 아예 술주정을 핑계삼아 결례를 무릅쓰고 잔치 자리에서 이런 짓까지 벌입니다. 진기2 무제 함녕 4년, p. 129에 있습니다.

위관이 황제의 의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황제가 말해 보라고 하자, 위관이 말하려다 말기를 세 차례 반복했다. 이어서 손으로 옥좌를 만지면서 말했다. "이 자리가 애석해질 수 있습니다." 황제가 속으로 깨닫고 이를 속이면서 "경이 정말로 취하였구려!"라고 하자, 위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이러다가 황제 자리가 아깝게 생겼는디요."라고 목숨을 걸고 이야기한 거죠. 그리고 황제는 속으로는 뜻을 짐작했지만 겉으로 "야 너 취했지?" 하면서 돌려보낸 거구요. 그래서 테스트를 시켜 보기로 했는데 당연히 자기 남편의 처지를 아주 잘 아는 가남풍 입장으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겁니다. 그래서 급하게 컨닝 페이퍼를 만들었는데, 이 때 또 다른 사람들이 죄다 고사를 인용하고 어쩌고 하니까 이걸 본 장홍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태자께서 공부 안 하는 건 천하가 다 아는데 고사를 인용하면 컨닝한거 티 나지 않겠수?" 가남풍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장홍에게 페이퍼를 만들게 시키니, 황제가 이를 보고 아주 기뻐하더라는 겁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남편이 낙동강 오리알 될 뻔한 걸 가남풍의 수완이 막은 거죠.

근데, 이러면 위관이 뭐가 됩니까. 그래서 위관이 불안해하니까 마침내 위관이 한 소리 했구나 하고 다들 알게 된 거죠. 그래서 가충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위관 이 늙은이가 거의 니 집안 작살낼 뻔했다." 가남풍의 위관에 대한 원한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런 위관을 불러서 정사를 돌보게 하니 가남풍은 대인배...? 양준과는 딱히 큰 관련이 없을 폐황태후 양씨의 어머니 되는 사람까지 죽인 가남풍이 그럴 리가요.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 때 중앙에 올라간 사마량과 위관은 가남풍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둘은 명망높은 공신이었던 터라 이 둘이 정권을 잡으면 가남풍이 멋대로 행동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이 때 수도군단장의 직위를 빼앗기고 다시 봉토로 내려갔던 초왕 사마위를 살살 꼬드깁니다. 초왕 사마위는 왜 군단장의 직위를 빼앗겼느냐? 그건 이 사람이 워낙 막 나가는 터라 위관과 사마량이 초왕을 쓰기를 꺼렸던 때문이었죠. 이를 잘 알고 있던 가남풍이 사마량과 위관을 쳐내기 위해서 사마위를 불러온 겁니다. 사마위를 위시하여 회남왕 사마윤,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을 불러, 앞서 양씨를 몰아낸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와 똑같이 하도록 하고, 사마량과 위관을 면직시키라는 조서를 내린 것이죠.

근데 첫 조서는 분명히 면직 선에서 끝내는 이야기였는데, 사마위 이 사람이 원한을 갚겠답시고 조서를 고쳐서 사마량과 위관은 물론 그 일파까지 싸그리 쫓아내고 반역의 무리인 사마량과 위관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반역의 무리, 대역죄인에게 주로 내려지는 형벌은 뭐다? 당연히 모가지죠. 그래서 사마위의 측근인 공손굉의 무리들이 몰려가서 여남왕 사마량을 주살합니다. 위관은 영회라는 사람이 죽였습니다. 일찍이 영회가 죄를 지어 위관에게 걸려 벼슬길이 시원찮게 된 일이 있었는데, 이 원한을 이 김에 풀어버린 것이죠. 291년 6월의 일이었으니, 양준 일파가 죽고 사마량이 권력을 잡은 지 넉 달만의 일이었습니다. 팔왕의 난에서의 팔왕 중 첫 번째 왕이 이렇게 죽었습니다.

자, 여기에서 일이 커지는데, 죽기는 죽었어도 사마량과 위관은 명망있는 노신이었고, 특히나 위관의 경우는 종회의 반란을 진압하고 촉을 평정한 공이 있는 선왕의 공신 중 하나였다는 거죠. 그러니까 조야에서 "야 이거 사마위가 너무 막 나간 거 아니냐?" 하는 불만들이 터져나왔습니다. 기성이라는 사람이 있어 사마위의 측근이었는데. 이걸 알고 있었는지 사마위에게 가서 "이 참에 가남풍도 날리고 정권을 잡으시죠?"라고 권했습니다만 사마위가 듣지 않았습니다. 어물어물대는 틈에 여론을 이용해서 선수를 친 건 역시 가남풍이었습니다. "이 자식들이 조서를 고쳐서 사람을 멋대로 죽였으니 처벌을 하도록." 그렇게 초왕 사마위도 목이 달아납니다. 더불어 조야의 여론과 가남풍의 명령에 의해, 사마위의 측근이자 사마량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공손굉과 기성은 삼족이 목이 달아났고 위관을 죽인 영회 역시 가족까지 목이 달아납니다. 사마량의 작위를 문성후라 하고 위관의 작위를 난릉군공이라 하니, 이렇게 가남풍의 차도살인지계(병법 36계 중 제3계로 남의 칼을 빌어 사람을 죽인다는 뜻입니다)는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팔왕의 난에서의 팔왕 중 두 번째 왕이 이렇게 죽었습니다.

이후 몇 년간 천하는 다소 평온해지는데, 가남풍 이 사람이 권력욕이 세기는 했지만 장화라는 사람을 중용한 덕분이었습니다. 장화가 나라를 그나마 그럴듯하게 꾸려 간 거죠. 그래서 국경지대가 약간 시끄러웠던 정도만 제외하면 자치통감에서도 딱히 적을 게 없었나 봅니다. 이 평온은 8년간 이어졌습니다.



Chp 3. 사마휼

사마염 이야기로 잠깐 돌아갑시다. 물론 사마염이 사마충의 바보됨을 모를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는 앞서 한 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시험 한 번 잘 봤다고 황위를 물려주었을 리는 없고... 믿는 구석이 있기는 있었습니다. 바로 황태자 사마충의 아들이자 황제의 손자 되는 사마휼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죠.

아, 근데, 이 사마휼이 나이를 먹어서 돈과 사치 맛을 알아서 그런지 아니면 지가 황제 자리에 오를 게 거의 확실해 보여서 그런지 애가 갑자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쳐놀기 시작합니다(...) 당시 황태자(사마염이 죽었으니 황태자 자리에 오른 것은 사마휼이었죠)의 월급이 50만 전이었다고 합니다. 일단 이 월급의 가치를 알아봅시다.

보통 지독한 기근에 전란까지 겹쳐져서 곡식 값이 금 값이 되는 상황일 때 한 석에 1만 전까지 치솟았다 하고는 합니다. 근데 이 한 석이 양이 얼마나 되느냐?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회남자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한 석은 120근이고 후한의 1근이 약 260g이었다고 하니, 당시 한 석은 약 31.2kg 정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산의 편의를 위해서 30kg이라 합시다(인플레의 영향도 있고 무엇보다 당시 쌀값이 귀하긴 했으니). 곡식 값이 최고가로 치고 올라가도 30kg에 1만 전이라고 했으니 그 50배면 무려 쌀 1.5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 그것도 물가가 그렇게 미친 듯이 치솟았을 때 이야기고 진시황대에 쌀 한 석이 1,600전이라고 했던 기록이 있는 만큼(BC 216년, 진시황 31년) 시대의 흐름과 인플레를 감안해도 못 되어도 3톤은 되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 "못 되어도 3톤"을 현재 쌀 시세로 계산해 보면, G마켓에서 인터넷으로 파는 쌀 가격이 20kg에 대충 4만 원이니까, 20 : 4만 = 3000 : X. X = 600. 그러니까 600만원 가까운 월급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지금 여기저기서 깎은 걸 감안하면 아마 실 월급은 거의 그 두 배쯤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리고 직접적으로 비교하려면 우리 나라 물가도 장난이 아닐 때에 쌀값이 4만 원이어야 말이 되는데, 사실 우리 나라 물가가 물론 장난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지만 적어도 쌀을 못 사서 굶어 죽는 사람이 길거리에 널부러진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감안하면 적어도 열 배는 곱해야 말이 될 것 같네요. 그러면 곱연산으로 하면 600만원 곱하기 최소 20~30 정도. 대충 따져도 벌써 1억이 그냥 넘어갑니다. 연봉이 아니고 월급이요. 이 엄청난 돈을 용돈으로 받아서 쓰는데, 더욱 골때렸던 것은 두 달치를 갖다 쓰고도 모자라다는 소리를 종종 해댔다고 했으니(...) 당대 귀족들의 사치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여기에서 또 알 수 있는 것이죠.

근데 그 머리가 어디 도망가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사치를 부리는 와중에도 귀신같이 가씨의 전횡을 포착합니다. 근데 머리는 좋았는데 사람이 어린 건지 아니면 형세판단이 덜 된 건지 자신감이 지나친 건지 그 모두인 건지 하여간 그걸 대놓고 드러내버리는 바람에 가남풍의 동생 되는 가밀과 척을 지게 되는 것이죠. 아까 여남왕 사마량이 들어왔을 때 가씨의 대표로 가밀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 가씨의 거두와 황태자가 으르렁대는 사이가 된 겁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황태자는 가씨의 소생이 아니었습니다.

이쯤되니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새될 판이라 가남풍 입장에서도 슬슬 다급해지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꾀를 냅니다. 일단 디지게 술을 멕여놓고, 취중에 자기가 뭘 베꼈는지도 모르게 유도하면서 글을 베껴쓰고 못 쓴 건 대충 글씨체를 조작해서 황제에게 갖다준 건데, 그 내용이라는 걸 간단히 말하면, "아버지는 이제 그 자리를 내려놓으시고 황후마마도 그만 내려오십시오. 제가 알아서 다 준비하겠습니다. 안 내려오시면 제가 직접 끝내 드리겠습니다." (자치통감 진기5 혜제 원강 9년, p. 296)

쉽게 말하면 이겁니다. "Succeeding you, Father."

당연히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황제는 (그게 가남풍이 부추겨서 그런 건지 황제 자신의 뜻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마휼에게 죽음을 내리라고 하는데 대신들이 일단 잡아말려서 태자를 폐서인으로 합니다. 뭔 뜻인지 황제가 모를 것 같지는 않았으니, 이게 제가 황제가 띨띨하기는 해도 완전히 백치까지는 아니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사마휼이 쫓겨내려갔는데, 이 폐서인 소동(?)은 더 큰 혼란의 전주곡일 뿐이었습니다. (아마 읽는 분들은 이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야 지금까지 읽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제 전주곡이 끝났다고!?)



Chp 4. 사마륜

조왕 사마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마씨와는 달리 이 사마륜은 가씨와도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침 이 사람이 거기장군 겸 우장군의 직위에 있어 병권을 가지고 있던 터라 주변의 측신들과 이야기를 했는데, 마침 가씨를 몰아내고 폐태자를 다시 세우자는 움직임이 물밑에서 감지되었습니다. 그걸 감지해서 사마륜과 의논한 사람이 손수라는 인물입니다. 근데 이 손수, 태자 복위보다 한술 더 떠서 사마륜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자치통감 진기5 혜제 영강 원년, p. 303).

"태자가 제자리에 돌아오면 공은 가씨들과 친했으니 공이 태자를 따른다 한들 가씨와 친한 죄를 면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요, 만일 좁쌀만한 죄라도 지었다가는 목이 달아날 것이요. 그럴 바에는 아예 가씨와 태자를 이간질시켜 태자를 죽인 후에 그 복수를 하는 것이 화를 면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사마륜이 은근히 가밀을 꼬드겨서 폐태자를 죽이도록 권고합니다(!!!). 아예 후환을 없애서 사람들의 희망을 꺾고 뒷일을 잠잠하게 해야 한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근데 가남풍이 8년 동안 자기가 정권을 잡으면서 촉이 둔해진 건지 방심한 건지 이 떡밥에 홀딱 넘어가버립니다. 그래서 독살을 시키려고 시도하는데, 폐태자된 사마휼도 뭔가 낌새는 알고 있었던 건지 항상 음식을 자기 앞에서 끓여서 맛보게 해서 독을 피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절굿공이 부대가 출동해서 폐태자의 머리를 때려죽입니다. 손수가 말한 기회가 드디어 온 거죠.

얼씨구나 기회는 이 때다 하고 사마륜이 제왕 사마경, 양왕 사마융과 연합하여 8년 만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가남풍이 이 때 잡히면서 한 말이 진기5 혜제 영강 원년(300, p. 307)에 나와 있는데, "개를 묶으려면 마땅히 목을 묶었어야 했거늘 꼬리를 묶어서 이 사달이 나는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곧 가남풍은 사마륜이 내린 독주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이 때 사마륜이 변방의 세력들을 진압할 때 군사권 문제로 원한이 생긴 사람들까지 싹 잡아들이죠.

나라를 제법 잘 이끌어갔던 장화도 이 때 잡혔는데, "나는 충신이다!"라고 하니, 장화를 잡은 사람이 "그럼 왜 태자가 폐서인될 때 절개를 지켜 죽지 않았단 말이오?"라고 물었습니다. 장화가 "내가 황제 폐하에게 올린 표문이 있으니 내 마음을 알 것이오."라고 대답했지만, 다시 "그러면 안 들어줬으면 응당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야 할 거 아니요?"라 묻자 마침내 말문이 막히고 말았죠. 결국 장화도 가남풍의 일파로 몰려 삼족이 이멸됩니다. 물론 단순히 가남풍의 일파라서 죽었다기보다는 대사를 함께 하지 않아서 죽인 것이 더 컸을 겁니다. 그리고 잡을 사람을 모두 잡은 후에 조왕 사마륜이 상국의 자리에 올라서 정권을 잡습니다(p. 309).

근데 이 상국이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동탁이 헌제에게 어거지로 빼앗았던 그 상국이요, 사마소가 조모에게서 뜯어냈던 그런 자리입니다. 뭐 전한 시대였다면야 소하의 예를 들어서 황실을 세운 공이 어쩌고 했겠지만 문제는 소하가 상국의 직위에 오른 건 거의 500년 가까이 전의 일이었고 동탁과 사마소가 강탈하다시피한 건 각각 백 년과 오십 년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찬탈의 조짐이 엿보인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조왕에게 반발한 사람이 회남왕 사마윤입니다. 어지간히 정병들이 모였는지 사마륜의 군사가 자꾸 패하는 건 둘째치고... 자치통감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p. 313).

주서사마 휴비가 몸으로 사마륜을 가려주었는데 화살이 그 등에 꽂히자 죽었다.

즉 사마륜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어마어마한 내전이 벌어졌다는 말인데, 이 위기가 참으로 기가 막히게 돌파됩니다. 사마륜 자신이 어떻게 한 게 아니라서 돌파'되었다'고 표현한 거죠. 일단 사마윤파의 대신이었던 진준이라는 사람이 황제에게 "싸움을 멈추는 깃발을 내려서 싸움을 중지시켜야 합니다"라고 했는데 이 때 싸움을 독려하는 깃발인 백호번을 들고 나가게 합니다. 황제가 바보라서 속은 거죠. 즉 사마윤파는 사마륜이 핀치에 몰리자 아예 잡아버리려고 독전의 깃발을 내려서 싸움을 독려할 심산이었던 겁니다. 근데 그 깃발을 들고 나간 사람이 복윤이란 인물이었는데 이 사람은 사마륜파였던 겁니다. 그래서 조서가 있는 척 사마윤을 꾀어내어 조서를 받들려고 하는 사마윤을 그 자리에서 잡아 죽입니다. 그렇게 사마윤이 어이없이 당하자 남은 건 사마윤파의 진멸뿐이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사마륜은 이 김에 반대파들을 싹쓸이를 하려고 시도하죠. 그 중에 아까 그 석숭과 왕개의 재산싸움 이야기를 했던 석숭도 끼어 있었습니다.

앞서 사마륜의 측근이라 말했던 손수는 일찍이 석숭의 애첩인 녹주를 자기에게 달라고 한 일이 있으나 거절당한 일이 있어 원한이 있었는데, 그래서 석숭을 이 때 잡아죽이려고 하자 녹주는 자살하고 석숭은 잡혀가면서 "이 놈들이 내 재산을 노리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잡으러 온 사람이 "야 임마, 그럴 거면 재산을 진작에 없앴어야지!"라고 하자 석숭이 아무 말 못 했다는 이야기가 있죠(p. 315). 그 재산이 다 어디서 왔겠습니까. 백성의 재산을 수탈하고 빼앗은 대가를 죽음으로 치른 셈입니다. 그렇게 석숭도 가족과 함께 목이 달아납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쿠데타를 방어하자 자신감이 들었는지 안 그래도 부어 있던 간이 더 크게 부풀어오른 건지 사마륜은 마침내 구석의 자리를 얻어갑니다. 방구석할 때 그 구석이 아니라 구석(九錫), 즉 왕망, 조조 등이 받았던 아홉 가지 특전을 의미하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수틀리면 지가 황제를 하겠다는 걸 천하에 공표한 꼴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사마륜의 사람들이 어찌나 인물됨이 변변찮았는지 자치통감에서는 이렇게 신랄하게 까고 있습니다(p. 317).

사마륜과 여러 아들들은 모두 완고하고 비루하며 무식하였고, 손수는 교활하고 탐욕스러우며 음란하여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악하고 아첨하는 인사들이었고, 오직 경쟁적으로 영화와 이익을 구하였고, 멀리 내다보는 꾀와 깊은 지략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뜻하는 것과 나아가는 방향이 어그러지고 달라서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였다.

덧붙이면 "천하가 손수를 섬겼지 사마륜을 섬기려고 하지 않았다"(p. 309)는 말과 손수가 멋대로 사마륜의 명령을 첨삭하는 일이 빈번했던 걸 보면(p. 328) 어지간히 사마륜도 바지사장이었나 봅니다.

이 때(서기 300년) 가남풍의 인척이었던 조흠이라는 사람이 촉 땅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천하가 통일된 지 이제 고작 20년. 사분오열되어 깨어지고 흩어질 조짐은 이미 이 때부터 보이고 있었습니다.



Chp 5. 사마경

가남풍과 사마윤의 목숨을 빼앗은 서기 300년의 대혼란이 지나고 사마륜은 드디어 대형사고를 칩니다. 천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죠. 이 때 사마륜과 함께 가남풍을 몰아냈던 제왕 사마경, 앞서 한참 전에 사마위의 쿠데타에서 군을 통솔했던 성도왕 사마영, 그리고 또 하나의 강력한 군벌인 하간왕 사마옹을 모조리 다 군사적으로 때려잡을 자신까지는 없었는지 일단 등용하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근데 문제는 이 제왕 사마경이, 가남풍의 일족을 멸했던 쿠데타에서 자기가 받은 보상이 짜다고 이미 속으로 조왕 사마륜을 원망하고 있었던 겁니다(진기5 혜제 영강 원년, p. 315). 게다가 손수가 이를 알고 사마경을 수도에서 내보내면서 앞서 초왕 사마위가 가졌던 불만을 제왕 사마경도 가지고 있었겠죠. 하여간에 기회를 보다가 사마경이 격문을 띄워서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과 함께 군사를 일으킵니다. 반란이 일어난 익주를 제외하고서도 전국의 사람들이 조왕 사마륜파와 제왕 사마경파로 갈려서 여기 붙냐 저기 붙냐 하면서 싸웠습니다. 내란의 스케일이 황궁 단위에서 전국 단위로 커진 것이죠.

하간왕 사마옹의 경우는, 처음에 사마경에게 붙은 무리들을 토벌하고 그 수장인 하후석을 요참하며 사마경의 사신을 사마륜에게 보내는 등 사마륜파로 행동했으나 중간에서 사마경파의 위세가 강함을 알고 스탠스를 바꿔서 사마경파로 들어갑니다. 조왕 사마륜에게는 아마 이게 좀 결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군사적으로 자신이 있으면 사마륜이 직접 나서면 될 일이었지만 사마륜과 손수는 그럴 만한 군사도 힘도 딱히 없었던 모양입니다. 애초에 사마륜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시점에서 이미 명분이라는 게 사라져버렸던 터라 꼼짝없이 외통수에 걸린 격이었죠. 그래서 한다는 짓이 무당을 시켜서 점을 쳐서 길일을 점쳐 싸움에 나가게 하지를 않나, 저주를 내리지 않나(그러니까 그 왜 사극에서 장희빈이 짚으로 된 사람에 비수를 꽂는 뭐 그런 것 정도를 생각하면 적당하겠네요), 신선이 나타났다고 대중을 현혹시켜서 민심을 붙들려고 하지를 않나... 이 꼴이 딱 왕망이 왕 망했던 바로 그 때의 일이나 진배없었습니다.

아 뭐 물론 상대방도 그렇게 군사적으로 변변했던 것은 아니라서 패하는 일도 있고 그러기는 했습니다만, 그런 국지전에서의 승리가 천하의 대세를 가를 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찬탈자를 벌하고 간신 손수를 죽인다는 명분이 사마경에게 있었던 이상 명분 싸움에서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판이었고... 보통 이럴 때는, 특히나 양군의 지휘관이 영 시원찮을 때에는 승자 측에서 예상되는 전리품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전공으로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밀리는 측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높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어 왔었죠.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사마륜의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 손수가 목이 달아나고 사마륜이 스스로 물러나서 다시 그 띨띨이 황제 사마충이 복위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런 걸로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가능성 따위는 애시당초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마륜의 부자가 목이 달아나니, 팔왕의 난에서의 팔왕 중 세 번째 왕이 이렇게 죽었습니다. 두 번째 왕과 세 번째 왕 사이의 간극이 상당한데, 그간 쌓이고 쌓인 게 터지기라도 한 것마냥 갑자기 이 때부터 전국이 정신없이 혼란 속으로 끌려들어갑니다.

아, 이 사마륜이 목이 달아날 즘에 같이 목이 달아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양왕 사마위. 초왕 사마위는 瑋를 쓰고 의양왕 사마위는 威를 씁니다. 하여간 이 양반이 목이 달아난 이유가 아주 가관인데, 띨띨이 황제, 혜제 사마충이 "이 놈이 나보고 황제 관두라고 하고 옥새를 빼앗았다"고 해서 죽은 겁니다(...) 그게 사실이긴 한데(p. 326)... 각주에는 이렇게 비아냥인지 뭔지 모를 문장이 하나 더 달려 있습니다. "아마도 사마충의 일생 가운데 유일하게 자기의 뜻대로 명령을 내린 것일 것이다(...)" (p. 343) 띨띨이 황제 혜제가 아예 백치 바보는 아니었을 거라는 두 번째 심증입니다.

이 전국의 혼란 가운데에서 전투 속에서 사망한 사람이 10만 가까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두 왕인 여남왕 사마량과 초왕 사마위의 경우는 황궁을 틀어막는 정도라 군사의 단위가 많아야 천 명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난이 아주 그냥 전국 단위로 확 퍼지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죽은 겁니다. 어쨌든 조왕 사마륜은 그렇게 죽었고 때맞춰서 촉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조흠이 자중지란 끝에 죽는 호재까지 이어지면서 어쨌든 사마경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래도 사마경과 사마영이 군사력이 좀 엇비슷했는지,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두 명 모두 구석의 특전을 받게 됩니다. 사마경은 대사마의 자리를 얻게 되구요. 아마 사마경이 사마영의 마음을 얻고자 한 일종의 화의의 제스처였을 겁니다. 애초에 사마륜은 황제에 오른 후에 등용을 했기 때문에 목이 달아났으니 자기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을까요? 그러나 이걸 읽었는지 어쨌는지 한 술 더 뜬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도왕 사마영의 측근인 노지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천하에 두 영웅은 함께 존재하는 법이 없으니 어머니가 아픈 것을 핑계삼아 영지로 돌아가서 일단 정사를 제왕에게 맡기시고 왕께서는 인심을 얻으십시오." (p. 346)

그렇게 인심을 우선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하는 물밑 작업이 시작됩니다. 일단 왕명은 성도왕이었지만 성도왕의 영지는 업성이었는데, 업에서 백성들을 위한 표문을 올리고 싸움의 뒷일을 수습하는 등의 일을 한 거죠. 모든 것이 노지의 꾀였습니다. 사마영 자신은 겉모습은 아름답지만 정신은 아둔하다 했으니, 딱 조왕 사마륜과 손수의 그것과 비슷한 관계였다고나 할까요.

이 때 사실상 촉 땅이 진나라의 관할 밖으로 이탈합니다. 앞서 익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조흠의 난이 자중지란으로 무너지긴 했는데 조흠보다 더한 이특이란 놈이 나와서 익주를 접수해 버린 거죠.

아무튼 이렇게 제왕이 정권을 잡았는데... 이 양반이 슬슬 맛이 가기 시작합니다. 황제의 동생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았는데, 문제는 이 황태자가 8살인데다가(누가 봐도 혜제 사후에도 자기가 다 해먹겠다는 의도였죠) 황제의 동생 중에 그 성도왕 사마영이 끼어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이 양반이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사치를 일삼는 등 미쳐돌아가서 인심을 잃기 시작했던 거죠.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칠 군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 큰 사고를 치는 인물이 하나 등장합니다.

이함. 이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사마경과 트러블이 나는 인물이었습니다. 앞서 하간왕 사마옹이 하후석을 요참한 일이 있었다 했었죠? 그 하후석을 잡아 죽인 게 이함이었는데, 문제는 이게 사마옹이 제왕파에 붙기 이전의 일이었다는 거죠. 게다가 사마경의 참군사인 황보상과 트러블이 나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불안하다 못해 자기가 사마경과 사마옹을 이간질시킵니다(!). 더구나 사마경은 이 하후석의 일로 사마옹에게 어느 정도 원한이 있던 상태여서 더더욱 이간질시키기 쉬웠죠. 거짓 조서로 사마옹이 군사를 일으키니 사마영이 이에 호응합니다. 웬일로 측근인 노지의 간언도 무시한 채로 말이죠. 그리고 장사왕 사마예가 여기에 가담해서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이죠. 골때리는 건 이 때의 이함의 계략이 바로 손수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는 겁니다. 장사왕 사마예가 제왕 사마경과 붙어서 사마예가 죽으면 그걸 명분삼아 제왕을 토벌한다는 게 이함의 계략이었던 것이죠. 사마예의 세력이 약해서 사마경이 이길 것이라 보고, 그 틈에 반란을 일으켜 사마경을 토벌한 후 황제를 물러나게 하고 사마영을 황제로, 사마옹을 재상으로 하고 자기가 실권을 잡겠다(p. 388)... 거 참 소인배들의 계략이란 것이 다 비슷비슷하긴 한가 봅니다. 아, 그리고 장사왕 사마예와 훗날 동진의 초대 황제가 되는 낭야왕 사마예는 다른 인물입니다.

화살이 황제의 발치에 떨어질 만큼 이번에도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여기서 제왕 사마경파가 패하자 앞서 조왕 사마륜의 경우처럼 내부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 사마경이 사로잡힙니다. 황제는 사마경을 살려 주고 싶어했지만, 장사왕 사마예가 사마경을 죽이고 그 무리의 삼족을 멸했습니다. 팔왕의 난에서의 팔왕 중 네 번째 왕이 이렇게 죽었습니다.

이 와중에는 이특이 죽고 장창과 이류라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이번에는 아예 형주, 양주, 서주, 예주 등을 줄줄이 휩쓸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옛 촉과 오 땅이 완전히 미쳐돌아간 거죠. 게다가 이들은 도적떼라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고 약탈하는 데에 정신이 팔렸습니다. 헬게이트는 이미 이 때 시작된 것이죠.



Chp 6. 사마예

앞서 이함의 계략이 반쯤 실패로 돌아간 건 아실 겁니다. 의외로 사마예가 승리를 거둬버리는 바람에... 그래서 이 이함이란 작자가 이번에는 사마옹을 들쑤셔서 사마예를 제거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게 역으로 들통이 나서 사마예를 제거하고자 작당한 사람들과 함께 목이 달아나죠.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되자 사마옹 입장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판이라 또다시 군사를 이끌고 일어납니다(정말 지긋지긋하죠?). 사마영은 이번에도 노지의 간언을 무시하고 사마옹 편에 붙어서 궐기합니다. 이 때 사마영의 진영 내부에서 다소 어이없는 사건이 일어납니다(p. 396).

육기. 육항의 아들로서 천하를 돌아다니다가 사마영의 밑에 들어가 있었는데요. 딱히 군사적인 재능에 능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마예의 군대에 밀려 있었는데, 이 때 사마영의 측근 환관이 육기를 참소하여 육기의 삼족, 육기의 동생 육운, 그리고 육기를 변호했던 손증의 삼족을 싹 잡아다가 죽입니다. 자기 편의 사람을 죽인 이런 어이없는 사태는 육기와 그 환관의 불화에서 비롯되었는데요, 환관의 아버지가 한단(업 인근의 요새)의 현령 자리를 얻으려고 하자 육기가 정론을 내세우며 안 된다고 막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또 그 환관의 동생이 멋대로 행동하여 군사들의 행패가 심하자 육기가 이들을 잡아들인 일이 있었는데, 일단 살려는 줬지만 얘가 무작정 개돌하다 패해 죽은 일이 있었죠. 근데 그 불화 건을 이 환관이 모를 터가 아니었기에 육기가 자기 동생을 일부러 죽인 거라고 의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쌓여서 참소를 해 육기의 사람들을 이멸한 것인데요... 이 환관의 이름이 아주 가관입니다. 맹구(孟玖).

한편, 의외로 이 장사왕, 군재가 좀 있었는지, 앞서 제왕 사마경의 군사들을 멸한 것도 그렇고 의외로 솜씨가 좀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간왕 사마옹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 혜제 태안 2년(서기 303)이었는데, 1년이 지나도록 버티면서 오히려 사마옹과 같이 군사를 일으킨 사마영의 군사를 6~7만이나 잡아다 죽이는 등(p. 407) 꽤 잘 버티고 있었죠. 자치통감에서는 사마예가 황제를 받들어 모시는 데에 예의 어그러짐이 없었고 성 내의 군졸들도 식량이 떨어져 감에도 동요하는 일이 없었다(p. 407)고 기록하고 있으니 꽤나 인망과 실력이 있었던 인물이었나봅니다. 기록대로라면, 군사를 일으킨 건 짤없어도,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으니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에서 묘사된 것처럼 자기가 회장직을 강탈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그러나 여기서 의외의 인물이 판을 뒤흔들어 놓게 됩니다.

동해왕 사마월. 황제의 재당숙이었던 그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잘 싸우던 사마예를 잡아다가 가두고 성문을 열어젖힌 거죠. 어떻게 보면 미친 짓이었습니다. 실상 사마영의 군사가 그리 강하지 못하고 사마예에 의해서 6~7만이 죽어나갔던 만큼, 게다가 사마옹의 휘하 장군이었던 장방이 공략을 포기했을 만큼 상태가 영 아니었는데 그걸 간과하고 잡아가둔 거죠. 당연히 군 내에서 후회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고, 이걸 모를 동해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방과 내통하여 사마예를 장방에게 보내서 빨리 죽이라는 신호를 주게 되는 것이죠.

장방이 어찌나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잔혹했던지, 사마예를 잡아 불로 구워 죽였습니다. 장방의 부하들조차 눈물을 흘렸다고 할 정도로 잔혹한 방법이었죠. 어쨌든 이로써 팔왕의 난에서의 팔왕 중 다섯 번째 왕이 이렇게 죽었습니다.

그런대로 내부 교통정리가 끝나고(=사마영이 껄끄러워했던 인물들이 모두 죽은 후) 사마영은 승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사마예를 가지고 거래한 사마월도 대리 상서령의 직위를 얻게 되죠. 이것이 혜제 영흥 원년(서기 304년, 진기 7, p. 408)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마영이 태제(사마영은 동생이기 때문에 태자가 아니죠)의 자리에 오르고(p. 413), 때맞춰서 양주와 서주의 도적 떼도 대충 평정됩니다. 당연히 제왕 시절에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던 사마담은 황후 양씨와 함께 폐출당하는 신세가 되었죠(p. 412).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고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 이번에는 사마영이 사마경처럼 맛이 간 겁니다.



Chp 7. 사마영, 사마옹

이쯤되면 지칠 만도 한데 벌써부터 남쪽이 막장인데도 서진의 황족들은 여전히 권력 다툼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독한 것들. 이 때에도 특기할 만한 사건이 하나 벌어지죠.

혜소.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혜강의 아들이자, 계군일학(군계일학이라고도 하죠?)의 고사의 주인공. 황제 사마염이 추천을 받아서 등용한 인물인데 추천한 사람이 역시 죽림칠현의 한 명이었던 산도여서 "경이 추천한 인물이면 한 단계 더 높여서 등용해야지" 하면서 비서랑 건너뛰고 비서승이 된 인물(진기2 무제 태시 10년, 서기 274년, p. 99). 사마광 선생님께서는 자치통감 내의 사설로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자식놈이 그 나라의 벼슬을 하다니, 충성스럽지 않았으면 만인의 비웃음을 받았을 것이오" 하고 깠지만 그만큼 충성스러움을 보여주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앞서 사마예가 정권을 잡았을 때 시중의 자리에 올랐는데 사마예가 죽자 면직되어 서인으로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황제의 호위를 맡게 됩니다. 호위를 맡을 일이 있었느냐? 네, 있었습니다. 동해왕 사마월이 쿠데타를 일으킨 거죠. 일단 선수를 쳐서 군권을 장악하고, 사마담을 원상복귀시킨 후, 사마영을 토벌할 군사를 일으킨 거죠(p. 414).

황제를 모시고 싸웠는데 동해왕 이 양반이 군사적인 재능이 영 꽝이었는지 황제를 놓고 동해왕군과 성도왕군이 서로 싸움을 벌이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집니다. 황제라고 무사했겠습니까. 뺨을 다치고 화살을 세 대나 맞았는데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는지 어쨌든 살아는 있었습니다. 동해왕의 군사가 계속 패했고 다들 도망가는 와중에 혜소 혼자 황제의 곁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물론 목숨이 성할 리가 없었죠. 황제가 옆에서 "그 자는 충신이다. 죽이지 마라!"고 말했는데도 사마영의 군사들이 "태제의 명령을 밭들고 있으며 오직 폐하만 가만히 두는 겁니다"라는 말로 반쯤 협박하면서 혜소를 죽이고 맙니다. 그 피가 황제의 옷에 튀었을 정도였다고 하죠. 풀 속에 떨어지고 여섯 개의 인수를 잃고 황제가 배고파해서 복숭아를 올리는 등 갖가지 막장상황이 벌어지면서 어쨌든 일단은 사마영이 기선을 잡았습니다. 황제는 사마영이 모셔(아니, 정확히 말하면 끌고) 간 거죠. 옷에 피가 묻은 걸 보고 그 옷을 빨려고 하자, 황제가 나서서 막았습니다. "혜 시중의 피이니 옷을 빨지 말도록 하라." 바보 황제였어도 자신을 위해 죽은 신하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나 봅니다.

하여간 이 사건을 기점으로 잠시 쉬어 갑니다. 다만 말 그대로 잠시 쉬어 갈 뿐이었습니다. 흉노족의 수령 유연이 자기 군사를 이끌고 오겠다고 속여서 사마영의 밑을 떠나 대대적인 정벌 준비에 착수한 것도, 앞서 이야기했던 낭야왕 사마예가 사마영에게서 탈출한 것도 이 때의 일입니다(각각 p. 423, p. 419).

이 때 안북장군 왕준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일찍이 조왕 사마륜을 털러 세 왕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백성을 데리고 사이에서 길을 막은 일이 있어(p. 417) 사마영과 원한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사마영을 잡아 족치려고(...) 군사를 일으킨 것이죠. 그래서 사마영은 급히 황제를 데리고 옛날 헌제가 장안 탈출하듯이 업을 탈출해서 낙양으로 향하고, 업성은 아주 그냥 왕준의 군사들에게 의해서 그야말로 완전히 엎어집니다.

낙양에 주둔하고 있던 것은 사마옹의 휘하에 있었으나 사실상 독립 군벌이나 다름없었던 장방이었습니다. 앞서 그 사마예를 불로 구워 죽였던 그 인물이죠. 여하간 장방의 힘이 아니었으면 사마영은 죽었을 터라 태제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어도(물론 사마담은 두 번째로 폐출) 실권은 장방이 가져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방의 군사들도 노략질을 일삼던 건 마찬가지였고 낙양이 그래서 피폐해지자 동탁처럼 장방이 장안으로 천도할 생각을 품게 됩니다. 물론 황제가 허락할 리 없다 보고 강제로 끌고 갈 심산이었고, 황제가 대나무숲에 피하자 끌어내 다그치면서 어거지로 수레에 질질 끌고 갑니다. 그나마 낙양을 싹 태우는 건 사마영 밑에 오래 있던 노지의 반대로 면하기는 합니다만... 어차피 낙양은 얼마 못 가서 영가의 난에서 박살나고 태워질 운명이라...

그렇게 황제가 장안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미 망할 대로 망한 사마영이라 더 이상 뭘 어찌하기는 힘든 상황이었고, 결국 사마영은 태제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자의로 물러났을 리는 당연히 없으되 뭐 군사가 있기를 합니까, 재산이 있기를 합니까... 그냥 얌전히 목숨이나 살아서 잠잠히 있어야 할 판이었죠. 황제의 형제가 스물 다섯 명이었는데 그 때 남아 있던 형제라고는 사마영을 제외하면 예장왕 사마치와 오왕 사마안뿐이었습니다. 사마안이 자질이 용렬해서 사마치를 세웠다고 했는데(진기7 혜제 영흥 원년, 서기 304년, p. 434) 솔직히 이 정도 상황이면 그냥 말 잘 듣는 허수아비 하나 골라서 세웠다고 봐야죠.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도 이 건을 밀고 있습니다. 표현을 빌자면.

其實司馬熾本人並沒有權力的野心.
기실(其實) 사마치(司馬熾) 본인(本人)은 결코(並) 권력을 가질(有權力的) 야심(野心)을 갖고 있지 않았다(沒). 애초에 자치통감에서도 사마치 본인이 겸손하고 소박하여 공부하기 좋아하니- 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그냥 어지간히 조용한 인물이었을 겁니다.

어이없게도 이 때까지 무려 3년을 사마예의 잔당이 버티고 있었는데(p. 439), 아직 사마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하여간 그 사실이 늦게서야 알려지자 그제서야 사마옹이 이들을 평정할 수 있었죠. 이 쯤에서부터 익숙한 인물들이 슬슬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흉노족의 선우 유연, 훗날 황제가 되는 갈족의 석륵, 낭야왕 사마예(앞서 몇 차례 나오긴 했습니다만) 등등... 하여간 이 때는 이미 전국 각지에서 병사들이 들끓는 대혼란기였습니다.



Chp 8. 사마월

이 와중에 정신을 못 차린 건지 어쩐 건지 동해왕이 다시 군사를 일으킵니다. 그래도 제법 군사들을 닥닥 긁어모았는지 그 세가 꽤나 강했던데다가 애초에 황제를 모시고 있던 사마영과 사마옹 측은 이미 힘이 다 소진된 터라, 또 이 와중에 내부에서 슬슬 자중지란이 일어납니다. 정말 지긋지긋하죠. 똑같은 패턴을 대체 몇 번을 보는 건지.

일단 장방이 죽었습니다(진기8 혜제 광희 원년, 서기 306년, p. 457). 워낙 가혹하게 사람을 잡았던지라 자기도 목이 달아날 것을 두려워했다고 하니 알 만하죠. 그러나 장방 한 사람을 죽여 사죄한다고 군사를 멈출 동해왕이 아니었습니다.

페이지가 갑자기 몇십 페이지씩 확확 넘어가는 걸 눈치채셨을지 모르겠는데, 민란, 변란, 각종 싸움, 국경에서의 북방 민족들의 준동 등이 다 생략된 겁니다. 즉 넘어가는 페이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확실하게 막장 상황이라는 이야기죠.

그리고 동해왕이 군사를 일으킬 때에 아까 그 왕준이 같이 손을 잡았던 터라 이번에는 제법 강했고, 급기야 함곡관이 떨어집니다. 사마옹은 간신히 목숨만 살았지만 장안성 하나를 지키는 정도에 불과했고, 이 와중에 왕준 휘하의 기홍이 이끄는 2만의 선비족이 장안을 철저하게 노략질하는 바람에 백관들이 도토리를 주워먹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알 만하죠. 어쨌든 이로서 황제는 다시 사마월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마영은 그래도 자신이 처신을 잘 했던 적이 있어 백성들이 여전히 따르는 하북으로 돌아가고자 했는데, 장사 유여가 군사를 몰아서 사마영과 그 두 아들을 잡아다 죽이게 됩니다(진기8 혜제 광희 원년, 서기 306년, p. 465). 팔왕의 난에서의 팔왕 중 여섯 번째 왕이 이렇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순서상으로 먼저 일어난 중요한 일이 있는데, 혜제가 사망했습니다. 떡을 먹고 중독되어 죽었다고 하는데(p. 466), 광희 원년에 죽으니 혜제의 나이 48세였습니다. 혜제의 황후 양씨는 네 번이나 폐위되고 또 조서로 인해 죽을 뻔한 것을 신하가 차단해서 사는 등 기구한 운명을 살았는데, 사마담을 밀었지만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예장왕 사마치였습니다.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이나 이에 영향을 받은 나무위키에서는 예장왕 사마치가 난을 일으킨 인물이라고 그리고 있습니다만,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사마치는 그냥 원래 허수아비성 인물이었다고 보는 편이 좀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바보 황제가 아니라 드디어 정사를 보는 황제가 등장하니 이제서야 무제 시대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사람들이 기뻐하였죠.

다만, 하간왕 사마옹의 경우는 동해왕 사마월이 조서를 내려서 사도로 삼아 부름에 응했으나 사마월의 동생 남양왕 사마모가 사마옹을 영접하는 자리에서 그의 장수를 시켜 목졸라 죽이고 세 아들도 죽입니다. 자치통감의 번역이 약간 어색한데, 각주에는 "사마모는 사마월의 동생이지만 후환을 막기 위하여 형도 죽인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권중달 교수님이 사마월과 사마옹을 헷갈린 게 아닌가 싶고, 중국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사마모는 사마월의 동생이니(사마월 항목 1번 각주 : 《晋书校勘记·卷三十七·列传第七·十七》:高密王泰之次子也 李校:高密王泰传言泰四子越、腾、略、模,是越为长子。), '형도 죽인 것이다'가 아닌 '형의 뜻에도 불구하고' 혹은 '형의 의견을 무시하고' 정도가 적합해 보입니다. 어쨌든, 팔왕의 난에서의 팔왕 중 일곱 번째 왕이 이렇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 왕인 동해왕 사마월이 정권을 잡으니, 이로써 팔왕의 난은 그 막을 내렸습니다.



Chp ∞. 에필로그

그러나... 이미 전국이 들썩들썩한 상태였고 내분으로 엄청난 수의 황족과 인명 피해가 났기 때문에 서진 황조는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하니 이것이 이어지는 영가의 난입니다. 아직 영가의 난 부분을 제가 읽지 못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제가 더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없겠네요.

여하간 이 팔왕의 난이 결과적으로 5호 16국 시대라는 희대의 막장시대를 불러온 것은 자명합니다.

사서에서 팔왕이라 지목되는 여덟 왕 및 그 치열한 내전의 향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굵은 글씨가 승자, 밑줄 친 사람이 팔왕.

양준 vs 사마위
사마량 + 위관 vs 사마위
가남풍 vs 사마위
가남풍 vs 사마륜, 사마경
사마윤 vs 사마륜
사마륜 vs 사마경, 사마영, 사마옹
사마경 vs 사마예, 사마영, 사마옹
사마예 vs 사마영, 사마옹
사마영, 사마옹 vs 사마월 (1차 사마영 승리, 2차 사마월 승리)

이 사람들이 죄다 7촌 이내였다고 하니... 피도 눈물도 없는 권력투쟁은 이렇게 수백 수천만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만 흘리게 한 채 무상하게 끝났던 것이죠.

팔왕의 난을 보고 있자면 묘하게 떠오르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이자겸의 난.

추가 - (댓글에도 달았습니다만) 팔왕의 난 기간 정리입니다.

황제 사망 및 양준의 집권 : 서기 290년 3월
가남풍 쿠데타 및 여남왕 사마량 집권 : 서기 291년 3월
사마량, 위관, 사마위 사망 및 가남풍 집권 : 집권 넉 달 후 (서기 291년 6월)
이후 약 9년간 잠시 휴식
사마륜 쿠데타 및 집권 : 서기 300년 4월
사마경 쿠데타 및 집권 : 서기 301년 4월
사마예 쿠데타 및 집권 : 서기 302년 12월
사마영 쿠데타 및 집권 : 서기 304년 1월
사마월 쿠데타 및 집권 : 서기 306년 12월

그러니까 서기 290년부터 서기 306년에 이르기까지 16년 8개월 동안 이 막장사달이 일어났고 그나마도 중간의 9년간은 가남풍이 정치 수완을 발휘해서 잠잠하던 시기였으니 실제적으로 이 모든 난리가 난 기간은 불과 7년 8개월입니다.



투고하고 보니 정말로 글이 길군요... 안 그래도 제가 평소에 쓰던 글도 긴 편인데 이건 정말 역대급인 것 같습니다. 오피스에서 세어 보니 공백 제외한 글자가 거의 2만 자 가까이 되네요(...)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감사한 일이겠네요(물론, 당시를 살아가던 민중들에게는 지옥이었겠습니다만). 그리고 자치통감의 내용이 틀렸다거나 해서 제가 틀린 점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키위새
16/01/02 03:34
수정 아이콘
글 잘 봤습니다. 추천~
16/01/02 03:42
수정 아이콘
보면 볼수록 처참한 삼국지의 결말...
sen vastaan
16/01/02 04:42
수정 아이콘
저 시기에 태어나 살다 죽은 사람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ㅠㅠ
이치죠 호타루
16/01/02 15:05
수정 아이콘
팔왕의 난 개막부터 마무리까지가 약 15년이죠.

황건의 대란과 십상시의 난이 서기 180~190년경, 삼국 시대를 거쳐 진의 천하통일까지 백 년이고, 중간에 20년 쉬고 전국이 들끓기 시작한 후 오호십육국 및 남북조 시대를 거쳐서 수가 천하를 통일한 것이 589년. 또 한 20년 쉬고 고구려 정벌 나갔다가 깨지고 전국이 들끓은 후 당나라가 들어선 게 한 20년 후의 일이니, 중간의 합계 40년의 휴식을 빼면 무려 400년 넘도록 통일되지 못하고 전란 속에서 살아야 했다는 거죠.
Rosenkreuz
16/01/02 05:12
수정 아이콘
권력욕이 무섭긴 무섭군요..피를 나눈 일가 친척끼리 그것도 7촌 이내일 정도로 가까운 사람들이 저런 살육전을 벌였다는게..
이치죠 호타루
16/01/02 15:19
수정 아이콘
사실 중국사를 뒤져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동복형제가 서로를 죽이는 등의 일을 정말 강바닥에서 모래 찾듯이 손쉽게 찾을 수 있죠. 7촌도 가까운 편이지만(제 손자와 제 생질이 딱 7촌일 테니) 그보다 더한 피의 막장극이 정말 한둘이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정관지치니 개원지치니 원가지치니 등등 정치를 잘 한 시대라고 호평받는 몇 안 되는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친족끼리의 살육전이 내내 이어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죠. 특히 이 위진남북조 시대는 더욱 그렇죠.
16/01/02 09:39
수정 아이콘
누가 승자인지 알 수 없는 시대..크크크
16/01/02 10:56
수정 아이콘
몇가지 사족을 부연해보자면,

엄밀히말해 당시 권력을 놓고 다툰 이들이 모자랐거나 바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냥 일반인의 그릇일 뿐인 것이고 삼국지 인물들이 워낙 후덜덜한데다 전지적시점에서 보니 상대적으로 멍청해보이는 것뿐 ..
요즘에도 단지 커뮤니티에서 덧글배틀한 정도로 원한을 갖게되어 루머를 퍼뜨리거나 모함하고 분위기에 편승해서 매장하는 사례는 정말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일반인들의 그릇이 이 정도이니 그들은 아무리 낮게 쳐줘도 일반인들보단 조금이라도 낫죠. 혜제도 바보나 백치라기보단 단지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보통사람 정도로 보입니다.(정몽준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요즘 정치인들도 물가나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 엄청 많은데 그들을 개인적으로 알거나 접해보면 엄청납니다. 그러니 장구하고 원대한 지혜를 갖추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겠죠. 또한 정치가 그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뜻도 될 겁니다.
이치죠 호타루
16/01/02 15:00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 것이 옳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 덕망이 높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정치를 하죠. 애초에 그 정도의 능력이 없었으면 정치에 관여할 그런 자리에까지 오르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다만 일반인이면 용납이 되지만 대국을 다루는 정치인으로서는 용납이 안 되는 생각과 언행이 있게 마련인데, 그릇이 보통 사람들과 비슷한 정도이다 보니 할 짓 못 할 짓을 구분두지 않고 생각없이 행동한 것이 결국 자신들의 파멸을 가져오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바로 그 점에서 식견이 좁고 모자라고 아둔하다는 사학자들의 비판을 듣는 것일 테고 말입니다.
16/01/02 15:03
수정 아이콘
맞는 말씀입니다~
양념반후라이
16/01/02 11:00
수정 아이콘
크킹도 이것보다는 덜 막장이죠.
만약 진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촉한정통론은 없었을거라 하더군요.
이치죠 호타루
16/01/02 15:13
수정 아이콘
저는 약간 생각이 다른 게, 진나라가 설령 이런 최악의 막장극 없이 수백 년을 갔다고 쳐도, 진나라 후에 유교사상이 떠오르는 시점에서 촉한정통론이 우세했을 것이라 봅니다. 일단 조조가 황실의 권위를 무너뜨린 것에서 황실 사람이 세운 유비에게 점수가 가고, 사마씨의 진나라가 고평릉 사변과 조모 살해사건으로 최악의 막장극을 치르면서 세워졌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유교적으로는 단죄받아 마땅한 국가죠. 천년만년 도교사상이 퍼져서 유교사상이 상대적으로 쇠약해지고 그냥 그런 게 있었다 정도로 되면 모르겠으되 통치자 입장에서 또 유교만큼 충성을 손쉽게 요구할 수 있는 이론도 흔치 않았으니, 언젠가 촉한정통론이 부상하는 건 중국의 계급체계가 무너지는 신해혁명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시간 문제였을 거라고 봅니다.
Jon Snow
16/01/02 11:44
수정 아이콘
이게 다 마속왕 등산 때문입니다..
이치죠 호타루
16/01/02 15:28
수정 아이콘
음, 기산의 정벌이 성공해서 촉이 장안을 비롯한 옹주와 서량 땅을 먹어도 위촉오 7 : 1 : 2의 비율이 6 : 2 : 2의 비율 정도로 변하는 정도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장안 일대를 제외하면 농서 땅이 딱히 인구나 식량이 잔뜩 나오는 지대도 아니고... 물론 제갈량과 장완, 비의, 동윤이 먼치킨이긴 했지만 전쟁이라는 게 먼치킨 몇몇으로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장안과 낙양이 어디 만만히 손쉽게 털 수 있는 성도 아니었다 보니, 가정의 삽질 없이 농서가 날아가도 삼국시대가 짧게는 50년, 길게는 1백 년 정도 연장되는 정도 아니었을까요. 아 물론 장안성이 날아가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겠습니다만 사마의나 유엽, 만총 같은 당시의 중신들이 그 정도를 수습 못 할 인물은 아니었으리라 봅니다.
-안군-
16/01/02 15:33
수정 아이콘
그... 그러니까, 이 난리가 나는게 기간이 얼마라고요?? (어리둥절)
이치죠 호타루
16/01/02 15:47
수정 아이콘
기간 정리한다고 해놓고 깜빡 잊고 있었군요.

황제 사망 및 양준의 집권 : 서기 290년 3월
가남풍 쿠데타 및 여남왕 사마량 집권 : 서기 291년 3월
사마량, 위관, 사마위 사망 및 가남풍 집권 : 집권 넉 달 후 (서기 291년 6월)
이후 9년간 잠시 휴식
사마륜 쿠데타 및 집권 : 서기 300년 4월
사마경 쿠데타 및 집권 : 서기 301년 4월
사마예 쿠데타 및 집권 : 서기 302년 12월
사마영 쿠데타 및 집권 : 서기 304년 1월
사마월 쿠데타 및 집권 : 서기 306년 12월

그러니까 서기 290년부터 서기 306년에 이르기까지 16년 8개월 동안 이 막장사달이 일어났고 그나마도 중간의 9년간은 가남풍이 정치 수완을 발휘해서 잠잠하던 시기였으니 실제적으로 이 모든 난리가 난 기간은 불과 7년 8개월입니다.

팔왕 중 일곱과 반란에 실패한 사마윤 그리고 양준에 가남풍에 폐태자 사마휼까지 열한 명이 죽었는데 16년 8개월이라고 쳐도(어째 이게 딱 200개월이군요) 평균 1년 반 약간 더 되는 기간마다 목이 달아난 격이죠. 중간 휴지기 9년 빼면 불과 8개월 하고도 열흘 가량.
-안군-
16/01/02 15:54
수정 아이콘
글만 쭉 읽었을때는 거의 100년은 지났을 것 같은 기간인데, 이건뭐... 7zip급 압축률도 아니고...;;
이치죠 호타루
16/01/02 16:01
수정 아이콘
더 큰 문제는,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북방 민족들의 움직임은 하나도 정리가 안 된 상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쁜 소식 - 권력 다툼이 치열해졌습니다.
더 나쁜 소식 - 내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더더욱 나쁜 소식 -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소식 - 팔왕의 난이 끝났습니다.
나쁜 소식 - 진이 사실상 지방 통치력을 상실했습니다.
아주 나쁜 소식 - 북방 민족들이 쳐들어오면서 혼돈의 카오스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대충 전진-동진의 남북조로 정리될 때까지, 그러니까 비수대전으로 전진이 무너지기 시작하기 전의 양강구도로 딱 확립되기까지 대충 50년이 걸렸고, 중간의 휴지기니 양강구도니 뭐니 하는 걸 싸그리 씹고 제대로 된 통일왕조가 나타나기까지 무려 280년 동안 이 혼란극이 이어집니다.

괜히 이 시기를 지칭해서 "중국사 유례없는 대혼란의 시기"라 하는 게 아니죠.
-안군-
16/01/02 16:06
수정 아이콘
아... 이 다음이 바로 그 유명한 5호 16국 시대(...)
어떤 책을 봐도 "그런 때가 있었다" 라고 간략하게 소개하고 넘어가는 그 혼돈의 카오스;;
이게 다 팔왕의 난 때문이다.. 뭐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흐흐흐...
이치죠 호타루
16/01/02 16:14
수정 아이콘
저는 5호 16국 대혼란의 책임을 이 정도로 나눕니다.

조비 5%. 사마소 10%. 사마염 20%. 가충 + 가남풍 30%. 팔왕들 35%.

엉뚱하게 조비가 끼어들어가있는데, 이는 조비가 워낙 황실의 인척을 옥죄어서 결과적으로 사마씨들이 조위를 뒤엎어버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고, 사마염이 인척들에게 영지는 물론 군권까지 줘서 수도를 방위하겠다고 구상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마소는 그 인척이 약한 것을 틈삼아서 조위의 황제, 폐제 고귀향공 조모를 죽여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힌 책임이 있습니다.

사마염은 사치에 몰두하고 집권계급의 고착화, 즉 문벌 귀족들의 천년만년 집권을 방치한 혐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왕들에게 영지와 군권을 줘서 혼란을 야기하게 만든 책임이 있죠.

가충과 가남풍은 제 가문의 영달에 눈이 멀어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혔고, 특히 가남풍은 쿠데타라는 선례를 만들어 군권이 있는 자들이 대권을 노리도록 한 매우 나쁜 선례를 만든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팔왕이야 뭐 얼씨구나 하고 쿠데타를 벌인 죄과죠.

이 모든 게 다 뒤섞여서 5호 16국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불러왔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안군-
16/01/02 16:18
수정 아이콘
정성어린 댓글 감사합니다. *^^*

그러니까... 본문에 나오는 내용들이 대략 85% 정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군요... 흐흐흐...
어쨌거나, 나라꼴이 저모냥이 되면 그 스노우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네요.
짱돌저그
16/01/02 17:23
수정 아이콘
진짜 막장 of 막장이네요 크크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혹시 게임 삼국전투기 하시나요?)
이치죠 호타루
16/01/02 17:30
수정 아이콘
삼전은 안합니다. 이미 모바일 게임 다른 거 하고 있는 것 때문에 통제가 안 되는 수준이라서요(...)
다만 매주 올라오는 삼전은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짱돌저그
16/01/02 17:35
수정 아이콘
아 아니시군요 동일한 아이디를 본 것 같아서 여쭤봤습니다~
삼전 웹툰은 진리인듯.. 끝나간다는게 너무 슬프네요.
공유는흥한다
16/01/02 22:42
수정 아이콘
문화대혁명 vs 팔왕의 난 100년뒤 중국에선 어떤 사건이 더 막장으로 기록될까요??
이치죠 호타루
16/01/03 02:51
수정 아이콘
문화대혁명에 한 표 던집니다.
문화대혁명은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역사가 후퇴한 사건이니 말이죠.
-안군-
16/01/03 17:41
수정 아이콘
문혁은... 중국 사람이랑 대화 할 일이 있다면, 아예 입밖에 꺼내서도 안되는 화제라고 들었습니다...;;
그냥,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의 수치라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7980 [일반] (삼국지) 조조의 세 아들 (4) [36] 글곰8898 18/08/23 8898 17
77948 [일반] (삼국지) 조조의 세 아들 (2) [49] 글곰10028 18/08/21 10028 47
75658 [일반] 문준희선수를 위해서 울어줬던 그 옛날 엠겜 국장님 [33] i_terran15556 18/01/31 15556 19
73751 [일반] (삼국지) 제갈량 : 웅크린 용, 하늘을 날다 [45] 글곰11423 17/09/14 11423 35
73668 [일반] [삼국지]당양의 장판은 어디인가? [31] 서현1215466 17/07/09 15466 24
73478 [일반] 원말명초 이야기 (10) 믿을 수 없는 기적 [22] 신불해10322 17/08/28 10322 56
73439 [일반] 원말명초 이야기 (7) 결코 원하지 않았던 미래 [19] 신불해7969 17/08/25 7969 38
73411 [일반] 원말명초 이야기 (5) 대의멸친(大義滅親) [21] 신불해8696 17/08/23 8696 56
73403 [일반] 원말명초 이야기 (4) 다모클레스의 칼 下 [25] 신불해7887 17/08/22 7887 52
68728 [일반] 사이토 마코토, '조선 민족 운동(3.1운동)에 대한 대책' [23] bemanner9000 16/11/17 9000 13
68445 [일반] <삼국지> 관우가 양번전쟁을 일으킨 것은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2] 靑龍5374 16/11/07 5374 6
68004 [일반] 유승민에게 왜 놀라시나요? [125] 발틴18425 16/10/17 18425 24
66392 [일반] 에르도안이 막장은 맞는데 사실 터키도 러시아처럼 대안이 없죠 [8] 군디츠마라6656 16/07/17 6656 0
64142 [일반] [역사] 1844년, 네덜란드 국왕이 일본 쇼군에게 보낸 친서 [9] aurelius7447 16/03/17 7447 6
63800 [일반] 처음으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일본 [68] 군디츠마라9269 16/02/29 9269 2
62986 [일반] <삼국지> 평가절하된 장군 하후돈. [47] 靑龍8944 16/01/08 8944 5
62877 [일반] 팔왕의 난 [27] 이치죠 호타루11582 16/01/02 11582 30
61878 [일반] 서진과 동진 막장 이야기 [19] 피아니시모9163 15/11/05 9163 0
59725 [일반] <삼국지> 하후돈이 초기 조위 정권에서 2인자인 이유는 무엇일까. [28] 靑龍8915 15/07/10 8915 9
59538 [일반] [역사] 1763년, 조선 사절단이 본 일본 [21] aurelius6410 15/07/03 6410 3
59481 [일반] [크킹 계층] 현실 정치인에게 트래잇을 달아봅시다 -김무성 [14] 어강됴리6164 15/06/30 6164 6
58860 [일반] [역사] 메이지 유신 직후의 권력투쟁사 (2) [12] aurelius5966 15/06/07 5966 1
57089 [일반] <삼국지> 유비와 똑같았던 유선. [23] 靑龍6363 15/03/21 6363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