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병때인지 병장때인지 휴가를 나와 싸이월드에 <일병휴가증후군> 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싸이월드가 사라진 지금은 역사 저 너머로 사라졌다. 2008년에 동명의 글을 하나 더 썼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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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휴가증후군, 이라는 병이 있다. 몇 년 전에 내가 발견한 사회학적 질병으로, 현재 DSM-4의 챕터에 포함될 수 있는지 심사중이다. 이 증후군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증후군의 가장 기본적인 증상은, 머리 속에서 '휴식'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웹서핑을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사람들과 만나려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한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잠을 자는 대신 다른 소모적인 일들에 매달린다. 그러다 새벽에나 잠에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또다시 다른 소모적인 일들에 매달린다. 사학도 H군은 대중 교통을 이용하면서 잠을 잔 적이 없다. 그는 아무리 피곤할지라도 언제나 책을 읽는다. 그러나 책의 내용들은 머리 속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기가 멍청하게 쉬고 있는 시간을 용납할 수 없어서' 책을 읽는다고 한다.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소모적인'에 있다. 일병휴가증후군에 고통받는 공대생 K양은 쉬어야 할 시간에 언제나 시집을 읽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딱히 시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왠지 무엇이라도 해야 될 것 같다'는 강박과 '피곤해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라는 두 가지 모순된 강박의 충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시집을 보게 된 것이다.
'소모적인 행동'이 문자 그대로 객관적으로 '소모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환자 M씨는 가정 사정이 그렇게 나쁜 편도 아니고, 돈이 필요한 상황이 아님에도,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한다. 근무 환경이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님에도, M씨는 강박적으로 일을 한다. 왜 그렇게 계속 일을 하냐는 내 질문에 M은 내게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안 하면 뭔가 이상해서요'라고 대답하였다. 돈을 버는 것. 공부를 하는 것. 생활에 충실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산적인 일이지만, 일병휴가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은 이 활동을 특정 맥락 속에서 소모적인 행동으로 바꾸어버리고, 강박적으로 행동한다.
또다른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증가되는 기본적인 욕망을 들 수 있다. 일병휴가증후군에 걸린 사람의 식욕과 성욕은, 일반적인 사람의 욕망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환자는 매 끼니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고, 매 끼니마다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으려 한다. 특정한 음식에 대한 집착도 이 질병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매일 콜라를 몇 캔 이상 먹어야 한다거나, 매일 술을 먹어야 한다거나, 초콜렛을 매일 두 개 이상 먹어야 한다거나 하는 증상들이 이에 속한다. 하루에 자위를 다섯 번 이상 하지 않으면 잠들 수 없다는 수의대생 Y군의 사례는, 그가 일병휴가증후군에 걸려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상의 사례들에서 도출할 수 있는 중심적인 양상은 이러하다 : 생에 대한 강박적인 탐닉. 휴가를 나온 일등병들의 행동 패턴과 유사하기에, 나는 이러한 증상을 '일병휴가증후군'이라고 몇 년 전에 명명했다.
일병휴가증후군은 그리고, 이 글이 쓰여진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피곤하고 졸립고 자고 싶은데 그리고 글 같은 건 내 삶과 별 상관이 없는데 왜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쓰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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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 시다. 오늘은 느즈막히 일어나 대학원 시절의 지도교수를 만나 저녁을 먹고,고등학교 시절 은사를 만나 잠깐 떠들다가 집에 와서 정리해야 할 세 개의 글을 정리했다. 하나는 바텐더로서 정리해야 하는 글이었고 하나는 필자로서 정리해야 하는 글이었으며 하나는 사실 정리할 필요가 전혀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었다. 나에게 한 푼의 이득도 주지 못할 세 번째 글을 제일 오래 붙잡고 있었다. 인공지능과 파업에 대한 쓰레기같은 자기위안적 글이다.
지난 주에는 정신없이 바빴다. 업장의 근무일정이 꼬여 6일 연속으로 출근했다. 그동안 어느 날엔가는 할아버지 제사를 다녀왔으며, 어느 날엔가는 영어 시험을 보았고, 어느 날엔가는 3주치 분량의 원고를 하루에 몰아썼다. 어느 날에는 소규모 칵테일 행사의 진행을 보조했다. 물론 자영업자에게 6일 연속 출근이란 60일 연속 출근마냥 당연한 일이고, 할아버지 제사란 장남의 의무다. 3주치 분량의 원고를 쓴 이유는 간단하다. 3주동안 원고를 밀렸기 때문이다. 모종의 필요에 따라 영어 시험을 보았는데 엉망으로 친 듯한 기억이다. 당연하게도 잇몸이 터지고 몸살로 고생했다. 그럴 나이니까. 술이나 담배나 커피를 끊어야 했는데 평소보다 두어 배를 해치웠다. 서너 배 정도 피곤한 느낌인데. 거의 백 퍼센트 정도의 확률로 나는 내일 늦게 일어나 어기적거리다 늦게 출근할 것이다. 직원과 단골 손님은 내 출근을 감상하며 '아, 사장님 두시간 지각하는거에 베팅했는데. 오늘은 바텐더님이 이겼네.' 라는 농담을 던질 것이고. 그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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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몇살. 일병을 지나 대충 상병이 되어가는 나이가 아닌가. 좀 더 체계적으로, 일을 일처럼 만들고 삶을 삶처럼 살아야 하는 나이인데. 퍼질러 앉아있을 때는 한없이 퍼질러 앉아있다가 일을 해야 할 때는 몰아 치운다. 말이 좋아 일병휴가증후군이지, 하는 짓은 훈련병 급이다. 나는 참 다양한 이유로 욕을 먹으며 살아왔는데, 저 행태 때문에 먹은 욕이 아마 내 삶에서 먹은 욕의 반 정도 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제발 일좀 성실하게, 체계적으로 하자. 성실하게 좀. 왜 이렇게 일이 밀리냐/제발 남들하고 속도좀 맞춰라. 좀 차분하게 가자. 너 혼자 그렇게 뛴다고 일이 되냐. 그러다 니 몸도 망치고 일도 망친다/할 거면 하나만 해라 게으르던가 뛰던가. 너 꼴리는대로 쉬다 뛰면 남들은 어쩌라고.
나도 잘 안다. 당신은 비슷한 이유로 세 번쯤 욕했지만 나는 지난주에도 지지난주에도 몇년 전에도 비슷한 욕을 먹었으니까. 나도 고치고 싶다고. 그리고 웃긴 이야기지만 그래도 많이 고친 게 이 정도야. 미안.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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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무튼, 오늘은 잠이 안 오니까 새벽까지 이렇게 이거저거 하다가 일기도 쓰고 그런 거 아니겠어. 하지만 도저히 뭘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데. 생산성과 효율성의 차원에서 지금은 일단 자는 게 최고지만 빌어먹을 잠이 와야지. 불면증이란 사람을 매우 짜증나게 만드는 일 중 하나다. 나는 하루에 두 시간에서 열세 시간 정도를 잔다. 한 달 정도 하루 평균 두 시간을 잔 적도 있고, 한 달 정도 하루 평균 열세 시간을 넘게 잔 적도 있다. 의지박약이 아니라고. 나는 나대로 노력하는데 뭐가 좀 꼬인 것 뿐이야. 나름대로 주어진 것에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잠을 자야지.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아까운걸. 하지만 자지 않는 시간동안 하는 것이라고는 기분 전환을 한답시고 현관에 나가 달을 바라본다거나, 수천 번은 들었을 음악을 또 한번 듣는다거나, 인생처럼 멈춘 토렌트를 지긋이 바라본다거나. 평소에 보지도 않던 밀린 웹툰을 몰아본다거나. 아이 썅. 이게 아닌데.
나는 군인이 아니고, 삶은 마라톤 같은 거라는데. 긴 길을 달려야 한다는데. 왜 나는 아직도 휴가 나온 군인처럼 시간에 치인 느낌으로 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내일 귀영해야 되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자고 싶지 않은 걸까. 그걸 내가 알면 지금 가게를 열 세개쯤 하는 유명한 바텐더든 바 매니저든 되어 있었겠지. 하지만 오늘 바텐더 업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인 박모씨 괄호 열고 사십사세가 공금횡령 및 업무상 배임혐의로 징역 10개월을 구형받았다지. 한국인 바텐더 최초로 세계 대회에서 우승했던 사람인데, 성공한 사업가였는데, 참. 삶은 마라톤 같은 거라는데 보스턴 마라톤 같은 건가. 결승 지점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 일 모르니 일단 오늘을 즐기세요. 자지 말고. 케 쎄라 쎄라. 카르페 디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막막하기도 하고. 그런 새벽. 그리고 주말. 그리고 연말. 세상 일이 그렇듯이 어떻게든 되겠지요. 자, 어떻게든 살아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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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까요? 거기서 솔직하게 놀아버리면 그만인데, 그건 또 양심상 껄끄러우니까 일 A 가 아닌 일 B 를 하는 거죠. 저도 인생이 일 B 만 하면서 정작 중요한 일 A 는 항상 대충대충 합니다. 자꾸 이러면 강제 캐삭당하는 수가 있는데.... 그 사실이 무서워서 더더욱 일 A 를 시작할 엄두도 안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