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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2/15 22:22:11
Name Eternity
Subject [일반] 폼생폼사론
폼생폼사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오래 전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일요일 주말을 이용해 큰맘 먹고 함께 에버랜드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 무섭다던 T-Express도 타고 이것저것 놀이공원에서의 재미를 만끽하며 즐겁게 놀던 우리는 밤이 늦어서야 에버랜드에서 나왔다. 그날은 마침 내가 아버지차를 빌려 타고 나온 날이었다. 이유는 그녀를 바래다주기 위해서. 나의 집은 서울 근교의 도시였고 그녀의 집은 경기 남부였으니 용인 에버랜드를 기점으로 정확히 정반대였다. 그 야밤에 그녀가 사는 경기 남부의 집까지 바래다주고 고속도로를 타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는 게 제법 부담스러웠지만, 내일 출근할 그녀를 위해 얼른 집에 바래다주고자 주차장을 나오면서부터 급하게 차를 몰았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했던 문제는 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동시에 생겨버렸다. 영동고속도로의 상행선과 하행선의 갈림길에서 순간의 실수로 하행선이 아닌 상행선을 타버린 것. 초행길인데다 밤이 어두워 표지판이 잘 안보이기도 했고 순간적으로 내비가 버벅거린 탓도 있었지만 어쨌든 순전히 내 잘못이었다.

‘헉.. 이걸 어쩌지..?’
상행선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속으로 가슴이 철렁 했다. 그래도 처음엔 그녀에게 자못 여유있는 척 허세를 부렸다. “뭐 금방 길이 나오겠지. 일단 가보자.” 그런데.. 고속도로는 가도 가도 옆으로 빠지는 길이 안보였다. 서울로 올라올 때는 미처 몰랐는데 이렇게 빠지는 길이 없나 싶었다. 이러다가는 수원까지 직행할 불길한 느낌. 이 ‘No Way Out’ 위에서 운전대를 잡은 나는 슬슬 긴장으로 불안해졌고 심기는 점점 불편해져갔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저 멀리서 한쪽으로 빠지는 나들목을 간신히 발견하고 다행스런 한숨을 내쉬며 그쪽으로 핸들을 트니, 웬걸.. 여기도 고속도로처럼 쭉 이어져 도저히 나가거나 유턴할 길이 안보이는 도로였다. 정신을 차리고 도로표지판을 보니 길은 판교를 향하고 있었다. 판교라.. 그 판교신도시? 매스컴을 통해 지겹도록 말만 들었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지의 도시였다. 이러다 아빠차로 접촉사고라도 나면 그땐 정말 큰일이었다. 야밤에 처음 가보는 초행길이라 눈은 두리번 두리번, 몸은 긴장되고 맘은 불안하지, 어찌어찌 여친을 무사히 바래다준다손 치더라도 우리 집엔 언제 가나 생각만 해도 까마득하지, 내일 출근까지 생각하니 암담해졌다. 이쯤되니 나의 불편한 심기는 도를 넘어 신경질적인 짜증과 태도로 이어졌다. 그냥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이 상황 자체가 모든 게 이유 없이 짜증나고 화딱지가 났다. 그냥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못마땅했다. 괜한 미안함에 내 눈치를 보며 나를 다독이는 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건만 나는 점점 솟아오르는 짜증과 신경질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아.. 이러다 집엔 또 언제 들어가냐.. 아.. 진짜 짜증난다..”]
[“야 그러길래 누가 운전하는데 정신 사납게 옆에서 그렇게 떠들래?!”]
[“이래서 내가 놀이공원 가지말자고 했어, 안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차를 끌고 오지 말았어야 되는 건데.. 너 바래다 줄라다가.. 진짜, 에휴..”]

이유 없이 그녀를 탓하는 책망과 짜증 섞인 원망은 갈수록 끝이 없었다. 이러다간 “애도 아니고 왜 이렇게 놀러다니는 걸 좋아하냐”, “넌 왜 그렇게 먼데 사냐.”, “왜 애초에 사귀자는 내 고백을 승낙했냐.” 라는 식으로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며 따질 기세였다. 만약 내가 조수석의 그녀 입장이라면, “야, 드러워서 안타. 택실 타든 걸어가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 그냥 집에 가!”라며 운전석의 내게 쏘아붙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연애를 하며 처음 내보이는 나의 폭포수 같은 독설과 험상궂은 기세에 당황하며 움츠러든 조수석의 그녀는 마치 죄인마냥 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내 지난 글인 <비치(Bitch)론> 식으로 얘기하자면 나는 그녀를 일종의 'Little Bitch'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사실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잘못이 있다면 이렇듯 찌질하고 속 좁은 나란 놈이랑 사귄 죄밖에 더 있는가? 그럼에도 그녀는 마치 그녀가 고속도로 진입 순간, 조수석에서 운전석으로 온몸을 던져 쇄도하며 핸들을 직접 상행선으로 꺾어 돌린 것처럼 미안해하며 눈치를 봤다. 아마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 그 야밤에 판교 신도시까지 차를 몰고 갔다가 다시 유턴해서 영동고속도로를 다시 타고 그녀의 지방도시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서울로 올라갈 나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인한 괜한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속마음도 모른 채 나는 계속해서 논리 따위는 애저녁에 쌈싸먹은 신경질과 망언(?)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중간에 샛길이나 유턴구역이 있었는데도 초행길이라 긴장한 탓에 놓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차는 결국 판교 인터체인지가 되어서야 다시 수원 방향으로 유턴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와 잠시 쉬려고 들른 용인 휴게소에서도 나는 “입맛도 없다”, “여긴 음식이 왜 이러냐”며 김치찌개와 공기밥을 팽개치듯 반이나 남기며 ‘넌 지금 그게 입으로 넘어가냐?’라는 눈으로 그녀와 그녀의 라면을 번갈아 쳐다보다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중에 그녀가 회상하길, 그날만큼 심술궂고 험상궂은 내 표정을 본적이 없다고 했다.

어쨌든 시간이 흘러 어찌어찌 그렇게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졸린 눈을 비비며 다시 상행선을 타고 우리 집 앞까지 무사히 도착한 후 뜨끈뜨끈한 차를 주차장에 세워놓고 내방에 무사히 눕고보니,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오며 그날의 내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의 짜증과 신경질을 이기지 못하고 그 모든 감정의 찌꺼기를 엄한 상대방에게 쏟아내며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내 모습 말이다. 그나마 용인-판교였으니까 다행이지, 같이 해외여행이라도 갔다가 타국에서 야밤에 길이라도 잃어 멘붕한 상황이었다면 아마 내 옆의 그녀를 'Great Bitch'로 만들어선 쥐잡듯이 구워먹고 삶아먹는 걸로는 부족해서 능지처참에 부관참시(?)라도 할 듯 달려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무언가 한편으론 아찔해지고 또 한편으론 씁쓸해졌다. ‘내가 고작 이거 밖에 안 되는 놈이었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이렇게 그날은 누군가와 연애를 하며 내가 처음으로 나란 인간의 마음의 깊이와 바닥을 체험한 날이었다. 그녀 앞에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내 그릇의 깊이와 크기라는 게 너무나도 얕고 옹색하며, 얄팍하고도 앙상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나름 연애에 있어서는 제법 로맨티스트(?)에 센스있고 다정다감한 나이스가이-_-라고 생각했던, 내 마음의 크기가 (드럼통까진 아니어도) 그래도 빨간색 양동이 정도는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드럼통, 양동이는 개뿔. 온갖 허세와 겉멋으로 덕지덕지 포장된 마음의 흙포장을 슬쩍 파내고 나니 한 숟가락을 다 뜨기도 전에 바닥을 드러낸 손바닥만한 유리접시가 거기에 있었다. 물론 이날의 일 말고도 그 후로 여러가지 다툼이나 갈등도 많았지만 이 날의 기억이 그녀와 사귀는 동안,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도 이상하게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비치(Bitch)론’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그 이유는 결국 그녀를 향한 미안함과 동시에, 그렇게 바닥을 드러내며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나 스스로의 못난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과거의 여러 경험 탓일까. 나는 이제라도 내 주변 사람에게든 나 스스로에게든 조금은 덜 부끄럽고 싶다. 원래 삶은 부끄러움의 연속이라지만 나는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씁쓸히 자조하던 김수영이 되고 싶다. 스스로의 부끄러움은 돌아보지 못한 채 쏟아내는 감정의 표출과 배설이 진정 우리의 연애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부자유를 택하겠다. 더불어 누군가의 말처럼, 이 모든 반추의 조각들이라는 게 기실 따지고 보면 고상하고 거룩한(?) 척 덕지덕지 발라놓은 포장지에 불과하고, 그걸 걷어내고 보면 결국 나를 위한 폼잡기이자 자기 자신을 위한 별볼일없는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나는 그러고 싶다. 연애라는 게, 그리고 삶이라는 게 어차피 이 한 목숨 행복해지기 위한 발버둥이라면, 누군가가 아닌 날 위해서라도 그렇게 발버둥치고 싶다. ‘비치(Bitch)론’이라는 거창한 제목과 그럴듯한 수사로 한껏 포장을 했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들이다.

그냥 앞으로 만나 사랑하고 연애하게 될 그 누군가와 놀이공원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길을 잘못 들어 헤매게 된다면, “아씨.. 거봐, 내가 놀이공원 오지말자 그랬잖아?!” 라며 원망 섞인 얼굴로 엉뚱한 신경질을 내뱉기보다는, 조수석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감한 얼굴로 내 눈치를 보는 그녀에게 “야밤에 같이 이렇게 드라이브도 하고 좋네 뭐 크크” 라며 별일 아니라는 듯 씩 웃어주고 싶다. 나는 그러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내 그릇이 그 정도가 못된다면 폼이라도 그렇게 한번 잡고 싶은 게 내 솔직한 마음이다. 이게 그녀를 위한 배려이든, 날 위한 자위행위이든 그게 뭐가 중요할까? 폼잡기든, 자위행위든, 그 누굴 위해서든, 내가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 이정도 폼은 한번 잡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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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15 22:42
수정 아이콘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고(심지어 자기 자신도!), 이를 받아들인다면 이는 곧 나의 전체는 순간에 놓여있으며, 그렇기에 나의 순간은 누군가에게 있어 나의 전체가 된다는 이야기로 또한 이어질 수 있겠지요.

그렇기에 우리의 본질이 악함이라 말할지라도 그것을 가리기 위한 위선은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악보다 낫습니다.
자연스러움이 곧 좋음은 아닐테니까요.
지나가던선비
15/12/15 23:19
수정 아이콘
저도 갑자기 옛날 기억이 떠오릅니다
15/12/15 23:40
수정 아이콘
후~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제가 요즘 와이프에게 딱 저러고 있다는 생각에 움찔하게 됩니다.
스스로의 감정을 컨트롤 못하고 날선 비난을 서슴없이 내뱉고나서는 그 화남을 논리적으로 포장하고자 노력하는 내 자신이 서글퍼집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어이없는 감정의 폭주를 와이프에게 유독 많이 보였던거 같은데..많이 미안해지네요..
사실 매번 비슷한 이유로 싸우기에 그러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지켜낼 자신이 없어서 더욱 앞날이 깜깜하네요.. 허허
수신제가의 문제인지 구조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인지...잘 모르겠습니다
입 다물어 주세요
15/12/16 00:00
수정 아이콘
저랑은 반대네요.
글에서는 화내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필요 이상으로 화를 냈다면, 저는 화를 낼 상황에서도 화를 못 냈거든요.

수많은 순간에 그냥 입다물고 꿍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고 정당하게 화를 냈어야 했는데 하고 생각해봅니다.
15/12/16 00:11
수정 아이콘
저도 운전하다 화를 못 참고 심하게 짜증 내서 그걸 빌미로 헤어졌죠. 한동안 자괴감과 내 그릇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하며 힘들었었어요. 그 이후에 다른 연애를 하면서 참고 감정을 조절하였지만 뭐랄까 이런 상황이 생길 때 마다 참고 애써야 하는 제가 싫더라고요.
바꿀 수 없는 원래 그런 사람 같아서 서글서글 둥글둥글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해요.
15/12/16 07:55
수정 아이콘
외모가 아닌 내면에서 나오는 폼이라는 것은 여유와 대범함에서 나옵니다.

여유와 대범함은 상대방에 대한 관용과 자존감에서 나오지요. 그게 없으면 폼이 나오지 않죠.

그걸 깨달은 직후에 관용과 자존감을 지키고 여유와 대범함을 보임으로써 사람으로서 품격이 올라간 것이 느껴졌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폼을 잡으실 필요는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 애인 앞에서는 반드시 - 폼을 잡으시길 바랍니다.
15/12/18 23:42
수정 아이콘
올해 겪은 일과 너무나 같아 공감이 가서 계속 읽어보게 되네요.
깨닫기 이전의 미성숙했던 제가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가만히 손을 잡으
15/12/16 10:25
수정 아이콘
좋은 여자 였군요.
-안군-
15/12/16 16:50
수정 아이콘
옛생각이 나네요... 저도 차 산지 얼마 안됐고, 그때는 네비도 없던 시절...
이정표만 보며 달리다가 거진 2시간을 헤맨 끝에, 간신히 아는 길에 접어들었죠.

그때 그랬거든요...
안군: "야, 내 차가 오랫만에 미녀를 태워서 들떴나보다. 이게 정신을 못차리네?"
그녀: "아놔, 오빠, 그런게 어디있어요? 깔깔깔~"

그녀는 지금 다른 멋진 남자와 가정을 이뤄서, 두 살 된 아들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네요. 후후...
15/12/16 17:20
수정 아이콘
저도 제 차가 생기기 전에는 에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운전할때도 신경질 안 부릴거야... 라는 망언을 하고 다녔죠.
본격적으로 운전하기 시작하면서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소린지 깨달았지만요.
양주오
15/12/27 17:06
수정 아이콘
고속도로에서의 신의 야습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살면서 그런 경험을 드물지만 저도 경험해보았습니다. 이불을 찰수록 더 부끄러워질 그런 기억도 참 많았습니다. 잊고 싶었지만 잃을 수도 없었던 그 숱한 순간들,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전 어떤 영화를 흉내내자고 작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몽땅 다 기억하자고, 부끄러움을 영원히 잊지 않으려고 기록까지 해나갔습니다. 닌자는 칼에 맞아 죽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고 군담들은 전한)답니다. 그때부터, 당장 내일이라도 신 이 녀석 또 저를 시험코자 별안간 날벼락처럼 폭풍우를 퍼부울지라도 이제는 왜인지 두렵지 않아졌습니다.
좋은 글 연이어 두개나 정말 잘 읽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아니 행복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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