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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1/17 00:56:42
Name The xian
File #1 1988.jpg (236.5 KB), Download : 60
Subject [일반] 응답하라 1988(드라마 이야기 아닙니다.)


내가 다닌 학교. 내 또래의 남자 아이들 중 얼마 정도는 - 드물게는 여자 아이들도 - 더운 여름에도 하얀 도복을 입어야 했다. 실력은 부족했고 다리는 또래에 비해 잘 안 벌려졌기에 나는 후보 신세였지만, 또래 아이들에게 미안해서라도 고생스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큰 행사에 - 그것도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행사에 - 참여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 행사 준비를 위해 초등학생들을 연병장에 데려가 군인 아저씨들과 몇 시간이고 연습을 시켰다면 안 믿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가 경험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경험한 가장 넓게 보였던(실제로 정말 가장 넓은지는 알 수 없으니까) 연병장은 육군훈련소의 연병장도, 사단 연병장도 아니었다. 내가 6학년 때 본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제3공수특전여단 연병장이었다. 천 명의 인원이 한 명 같이 움직여야 하는 시간. 수백 수천 번의 연습을 했고 동작이 한 순간이라도 틀리면 공수부대원들이든 도복을 입은 어린이든 나와서 얼차려를 받는 것은 당시 분위기에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옳다 그르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뿐이다.)

아쉽게도, 후보 신세인 나는 그 행사가 있었을 때 푸른 잔디를 직접 밟지는 못했다. 몇 주 뒤 그보다 조금 작은 행사에서 직접 밟을 기회는 있었지만. 나는 주전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린 마음이었던 그 때는 그런 일이 안 서운했을 리 없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해하게 되었고 나이 드신 사범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이 사진의 작은 기념품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주전과 같이 챙겨 줄 정도로 나를 많이 배려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그저 감사할 뿐이다. 작년 방송을 보니 하얗게 색이 바랜 검은 띠를 매고 나온 사범님의 모습이 아직도 꼿꼿하고 정정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지금 나에게 그 때의 도복은 당연히 맞지 않는다. 그 때에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을 가지면서 공부 좀 한다고 주위 아이들을 내려보기 좋아했던 교만한 아이는 어느덧 마흔 줄의 성격 유별나고 후덕한 아저씨가 되어 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내게 이런 1988년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테지만. 이 별 것 아닌 기념품이 증명하듯, 내게 있어 1988년은, 내 자유 시간을, 내 방학을 모두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그런 시간이었다.

혹시 응답하기 싫으냐? 응답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죽는 날까지 영원히 기억하면 되지 뭐.


- The x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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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군
15/11/17 01:16
수정 아이콘
저도 그 때 도로에서 성화봉송 주자를 봤던 기억이 있네요. 정말 꼬꼬마시절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것만은 제가 6살적 이야기인데도 아직 기억에 남아있어요.
The xian
15/11/17 09:10
수정 아이콘
누구나 기억에 남는 추억이 한둘씩은 있는 게 올림픽이지요 뭐.
bloomsbury
15/11/17 01:53
수정 아이콘
1988년이면 저도 역시 서울 올림픽이 생각나네요. 당시 관중 동원령이 내렸는지 학교에서 표를 단체로 구매해서 미국 : 소련의 농구 경기를 구경하러 갔었는데 당시만 해도 학교 주변에 북한의 삐라가 떨어지고 뿔 달린 북괴가 그려진 반공 포스터를 그리고 단체로 이승복 어린이의 영화를 관람하고 학교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저렇게 불쌍할 수가 있느냐며 꺼이꺼이 울던 시절인데, 제 기억이 정확한 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련이 미국을 이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관객이 태반인데도 불구하고 소련을 응원하는 함성이 농구장 가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에서 배운 반공교육에 충실하게 소련놈들 졌으면 좋겠다며 친구들과 이야기 하다가도 관객들 분위기에 휩쓸려 소련 응원하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88년 서울 한복판에서 소련을 응원하는 함성이 가득찬 농구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하루하루입니다. 그 하루 중 그 순간만의 현상이겠지만.
The xian
15/11/17 09:07
수정 아이콘
그 때 농구 결승전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소련을 응원했던 것은 소련을 올림픽에 참가시키기 위한 이미지 개선 노력(?)과 더불어 미국 쪽 헛짓거리 때문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변정일 선수에 대한 편파판정 및 NBC의 편파보도, 미국 선수들의 절도사건 등이 겹치면서 우방국인 USA(미국)에 대한 분위기는 가히 최악이었지요. 오죽 미국인들 짓거리가 기분이 나빴으면 오랜 동안 적국으로 인식되었고 KAL기를 격추시킨 주범이었던 URS(소련)를 응원하는 소리가 USA 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퍼졌을 정도였겠나 싶습니다...;;
아케르나르
15/11/17 17:22
수정 아이콘
소련 국가 이니셜이 USSR로 기억하는데, 아니었나요?
The xian
15/11/25 11:29
수정 아이콘
USSR이 맞는데 3글자로 줄일 땐 URS로 줄였습니다.
아케르나르
15/11/25 14:18
수정 아이콘
아, 그렇게도 줄이는군요. 몰랐네요.
15/11/17 02:05
수정 아이콘
88년 제가 중2때네요. 그땐 정말 전가카와 보통사람 노가카가 이끄는 "대"한민국이 정말 크게 되고 앞으로 우리모두 잘 살게 될거라고 믿었었죠.
The xian
15/11/17 09:02
수정 아이콘
(믿어지지 않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25세까지 민주정의당/신한국당/한나라당의 지지자였습니다.

노태우 선거 포스터에 광주학살원흉이라고 욕하고 뭔가 붙여놓으면 경찰서 가서 신고했던 어린이였고요.
15/11/17 06:27
수정 아이콘
전 아무런 까닭없이 전 대통령이 싫었습니다. 그냥 느낌이 안 좋았어요
The xian
15/11/17 09:08
수정 아이콘
저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맨 뉴스만 틀면 첫머리에 나와서 지겨웠었죠.
표절작곡가
15/11/17 07:05
수정 아이콘
혹시 평화의 댐 성금 직접 내신 세대 아니십니까???

어린이 코 묻은 돈 뺐어갔다는 그거....
The xian
15/11/17 09:00
수정 아이콘
직접 냈습니다. 그리고 제 기억이 맞다면 한 번만 낸 건 아닌 듯 합니다.
미남주인
15/11/17 14:06
수정 아이콘
저희 학교만 그랬는 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두 번은 냈던 게 확실해요. 선생님의 명에 따라 제가 걷었는데 두 번은 또렷하게 기억나거든요.

그 외에도 수재의연금이니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니... 그런 걸 수시로 내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세금도 아니고... 이런 건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걸 텐데 말이죠.
아케르나르
15/11/17 17:25
수정 아이콘
제 기억에는 평화의 댐 성금은 한 번 냈었고, 방위성금이라고 해서 학기당 한 번? 혹은 학년당 한 번 정도 내던 게 있었습니다.
한달살이
15/11/17 08:46
수정 아이콘
제가 국민6학년, 마눌님이 중2때..
드라마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The xian
15/11/17 09:11
수정 아이콘
저는 드라마는 거의 안 보기 때문에 이번에도 패스할 듯 합니다. 재미있게 보세요.
가만히 손을 잡으
15/11/17 09:13
수정 아이콘
시절은 하수상하였지만 개인적으로야 아름다웠던 시절입니다. 그때는 이런 배가 없었어...
The xian
15/11/17 09:15
수정 아이콘
저도 그때는 지금보다 두세 배는 머리가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대신에 성질머리도 두세 배 나빴던 것 같고요.-_-)
하민수민유민아빠
15/11/17 09:19
수정 아이콘
전 저 때 유치원 다닐 때인데...
올림픽은 기억이 하나 안나고 그때 좋아했던 여자아이가 기억나네요.
이름까지도 기억이 납니다.
The xian
15/11/17 09:32
수정 아이콘
좋은 일이군요. 저는 그 때에는 좋아했던 여자아이가 없었으니까요.
15/11/17 09:21
수정 아이콘
저 메달과 케이스 기억 나네요 ^^
전 이사다니다가 잃어버렸는데...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
88올림픽때 국제방송센터에서 자원봉사 했었어요(엄밀히 말하면 자원은 아니고 이것도 학생동원이었지만...)
센터내에 콜라등이 나오는 음료수가 무제한이었고 매일 빵도 줬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보다 교통비 명목으로였나....하루에 4천원인가 받았던거 같아요
친구 몇명이서 같이 했었기 때문에 매일 그 돈으로 고수부지에서 술 먹었던 기억이 ;;;

그러던 어느날인가....술에 취해 객기로 뭉친 고딩 8명이 한강대교 위에 있는 아치로 건너가 보자며 일렬로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고 왜 그런 미친짓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뭐 철없던 나이라고 스스로를 위로 합니다 ;;

메달 오랜만에 보니 반갑고 새록새록 떠 오르는 기억들이 있네요 ^^;
The xian
15/11/17 09:33
수정 아이콘
저도 태권도 연습하는 동안에 국가에서 간식 등이 꽤 잘 나왔습니다. 대신 태권도 훈련은 꽤 힘들었지만 말이죠.;;
버디홀리
15/11/17 12:22
수정 아이콘
86 아시안게임 자원 봉사자입니다. 무려 고3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미남주인
15/11/17 14:02
수정 아이콘
어르신~ 경로우대석은 이쪽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Thursday
15/11/17 15:22
수정 아이콘
아재들... 저 포대기에 업혀있거나 기어다닐 때인데 정정하시군요...
저글링아빠
15/11/17 15:55
수정 아이콘
패럴림픽 행사에 참여하셨나 싶네요.
주택은행에서 패럴림픽 표를 무료로 나눠주고 학교에서는 관람기 작성을 시키는 방식으로 사실상 동원을 하고 그랬었죠 흐...
아케르나르
15/11/17 17:33
수정 아이콘
88년에 국딩 4학년 이었습니다. 그 전해에 대선이 있었고, 어린 나이에도 1번은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더랬습니다. 또 그럼에도 1번이 유력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고요.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인솔해서 거리로 나가서 성화봉송을 맞기도 했었고, 또 올림픽 기간 중에 참 날씨가 좋았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본문에 언급하신 이승복 관련 영화는 정말 끔찍했습니다. 영화 내용도 잔인한 면이 있었지만, 그런 걸 국민학생 대상으로 꼭 틀어줄 필요가 있었나 하는 점에서도요. 그 어릴 때 본 영화의 몇몇 장면들이 삼십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생각나는 걸 보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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