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패널로 참가하고 있는 팟캐스트
[영화계]에서, 이번에는 CGV 아트하우스에서 큐레이터로 계신 윤나리 님을 게스트로 모셨습니다. 영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베넷 밀러 감독의 근작인 <폭스캐처>에 대해 논의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영화계 43화 1부 : 게스트 윤나리 큐레이터 님
http://www.podbbang.com/ch/8720?e=21812599
영화계 43화 2부 : 폭스캐처(게스트 윤나리 큐레이너 님)
http://www.podbbang.com/ch/8720?e=21812598
이와 관련하여 윤나리 님의 <폭스캐처> 녹음 해설과 비평문을 동의 하에 인용해봅니다.
http://www.cgv.co.kr/arthouse/curator.aspx#2
음성해설 : 위 링크로 들어가셔서 페이지 하단의
[큐레이터 음성해설 듣기]를 살펴보시면, 2번째 페이지의 위에서 첫 번째 줄/오른쪽에서 두 번째 칸에 윤나리 큐레이터 님의 폭스케처 음성 해설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윤나리 큐레이터 님께서 음성해설 하신 영화가 여럿 있으니 경청을 권해봅니다.
아래는 비평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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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전불가능한 대상에 대하여 : 베넷 밀러 <폭스캐처>(2015)
<폭스캐처>에서 존 듀폰이라는 인물의 불가해함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면이 있다. 모친의 죽음 후, 모친이 아끼던 명마들을 풀어두고 크게 손짓을 하며 말들이 사라지는 곳을 응시하는 존 듀폰이 공허한 표정을 짓는 그 순간이다. 이 영화가 존 듀폰이 가진 기형적 감정의 실체가 모친에 대한 인정욕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때, 바로 이 장면은 존 듀폰이라는 존재 자체를 잠식해버린 욕구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속박해오던 무언가에 대한 해방감이라고만 단정짓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 미세하게 남는 일그러짐을 해방감 바깥, 그의 욕망이 향해 있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선회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과거 폭스캐처 농장의 아카이브 영상으로 시작한다. 폭스캐처라는 레이싱팀에 소속된 선수들이 명마를 타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장면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그들을 훑거나 시합을 기다리는 장면까지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화면이 지나가고 나면 ‘폭스캐처’라는 타이틀이 나타난다. 이후 레이싱을 이끄는 여우가 화면을 가로지르다 저 멀리서 사라진다. 이 사실적 화면이 지시하는 것을 존 듀폰의 이야기가 실제로 발생한 일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오프닝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 아카이브 영상을 존 듀폰이라는 인물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존 듀폰의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될 것인지를 알려주는 하나의 지표와도 같은 것이다.
폭스캐쳐 농장의 아카이브 영상이 지나고 나면 마크 슐츠의 레슬링 연습 장면이 나온다. 이후 그가 형 데이브 슐츠 대신 학교에서 연설하는 장면, 샌드위치를 사 먹은 후, 꽤 높은 계단을 올라 자신의 집에 들어가는 순간들을 연이어 보게 된다. 존 듀폰을 사유하게 만드는 방식이 영화의 첫 아카이브 장면에 있다면, 마크 슐츠의 경우는 그가 대상이 되는, 혹은 그가 바라보는 ‘시선’에서 찾을 수 있다. 시선의 보다 깊은 관련성은 마크 슐츠가 처음 나오는 순간부터 줄줄이 등장한다. 그가 레슬링 연습을 마치고, 학교에 연설을 하러 왔을 때 대기 공간에서 그가 향한 시선과 정확히 어긋나는 대기실 밖의 학생을 등장시킨다. 이 때 학생은 무심하게 자신의 손을 만지고 있다. 이후 단상에 선 마크 슐츠가 ‘조국’과 ‘레슬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학생들의 표정은 제각각이다. 호기심 어린 눈빛과 지루한 순간을 간신히 이겨내는 눈빛들이 교차한다. 공감의 눈빛이라고 간주하기 힘든 이 장면 이후에는 대기실 밖의 학생과 딱히 다를 바 없이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연설에 대한 사례비를 제공해주는 사람은 그가 데이브 슐츠가 아니라고 할 때 그제서야 그를 바라본다. 햄버거 가게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이 그는 시선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그가 바라보는 햄버거 가게의 직원들도 시선을 떨군 채 마주한 사람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다. 별다른 대사 없이 마크 슐츠의 동선을 따라가며 그의 움직임 혹은 표정에 의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단서들이 제공되는 듯하지만, 이 움직임들을 형성하는 외부의 시선으로서 마크 슐츠를 규정짓기 보다는 마크 슐츠가 가지고 있는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무능력한 시선과 욕망의 상관관계
영화에서 마크 슐츠는 초상화를 바라보거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거나 대부분 바라보는 대상들이 명확한 편이다. 영화 초반 식사 중 벽에 걸린 그림(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을 바라보는 장면이 분명한 사례 중 하나다. 이런 시선들 중 마크 슐츠의 시선을 꽤 인상적으로 포착하는 장면이 있다. 마크 슐츠는 존 듀폰의 필라델피아 사유지에 방문했다가 그의 서재에서 거액의 연봉과 함께 폭스캐처팀에 합류할 것을 제안 받게 된다. 바로 이어진 장면은 마크 슐츠가 존 듀폰이 제공한 곱게 정돈된 침대가 있는 방에 앉아 열린 창문 바깥으로 뭔가 응시하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꽉 다문 입을 한 그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장면을 한참 동안 보여준다. 하지만 마크 슐츠가 무엇을 바라보는 것인지 정확하게 그 대상을 카메라에 담지 않는다. 마크 슐츠가 향한 시선은 바라보는 대상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 때, 부재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이전에 마크 슐츠에게 부재한 대상이 ‘있다’는 사실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 부재의 근원지가 꽤나 흥미롭다. 이 부재는 마크 슐츠의 것이 아니라, 존 듀폰에게 실현되지 않은 욕망의 그것으로 전유된다. 마크 슐츠의 시선은 일종의 존 듀폰이 가진 욕망의 대리물인 셈이다.
이 부재의 시선에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존 듀폰은 전쟁의 흔적이 남은 사유지의 한 공간에서 애국선열들이 조국의 자유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설명한다. 그는 중요한 것을 상기시켜주는 이 공간에 대한 호감을 표한다. 그리곤 마크에게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것이라 말한다. 이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넓은 벌판에 서 있는 두 사람뿐이다. 그들 앞에는 어떤 실체도 없지만, 오직 상상을 통해 전쟁의 순간을 상기해야한다. 이 상상은 ‘위대한 일을 해낸’ 애국선열과 자신들을 동일시할 것을 요구한다. 마크 슐츠의 방에서 바라본 모호한 시선은 뒤이어진 존 듀폰과의 장면을 통해 대상의 부재가 곧 실체없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크 슐츠의 이 시선은 폭스캐처 팀에 합류하기로 한 후 변주된 방식으로 다시 등장한다. 사유지의 한 별채에서 지내기로 한 뒤 집을 안내 받고 나서 침대에 걸터 앉아 창 밖이 아닌, 불이 꺼진 촛대 사이에 있는 난로 상단의 초상화를 바라본다. 세로 장식이 일정한 간격으로 위치한 이 벽면에서 바라봄의 대상은 완벽하게 초상화가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의 가로막힌 이 변주된 시선은 그가 시선의 능동성을 얻는 것에 실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 그는 듀폰가의 역사가 담긴 비디오를 본다. 그들이 전쟁터에 탄약을 제공하며, 세계 최대의 화학 기업이 된 이야기가 내레이션으로 전달되며, ‘미국 최고의 재벌가’라는 텍스트로 화면이 종결된다. 실제 역사의 단편들이 영화 속 이미지로 전시되는 것은 상상을 통해 애국선열들의 업적을 상기해야했던 이전 장면의 부재를 메꾼다. 전쟁영웅들의 영광과 동일시되는 듀폰가의 과업은 그들이 결국 ‘최고의 재벌’이라는 꽤 이상한 구조로 봉합된다. 이 사유지의 출입 이후부터 그가 볼 수 있는 세계는 존 듀폰의 주도하에 그가 제공하는 일련의 이미지들로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존 듀폰은 마크 슐츠의 시선을 제한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의 시선을 자신의 욕망을 대체물 간주한다. 마크 슐츠가 온 그 날 밤, 존 듀폰은 마크 슐츠가 머물고 있는 별채로 찾아와 그에게 새를 관찰할 것을 권유하며 망원경을 건넨다. 하지만 마크 슐츠는 이 망원경으로 새를 보지 않는다. 폭스캐처팀에서 어느 정도 적응했을 무렵, 존 듀폰은 마크 슐츠를 불러 데이브 슐츠를 데려오라고 다시 재촉한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처음으로 갈등이 생긴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 서재를 빠져나온 마크는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을 달린다. 그는 가로막힌 울타리 끝까지 가서 어딘가를 응시하다 망원경을 꺼낸다. 마크 슐츠가 바라보는 것은 그에게 금지되었던 것 중 하나인 말을 돌보고 있는 존 듀폰의 모친이다. 존 듀폰이 끝내 데려올 수 없는 데이브 슐츠는 그가 모친을 대상으로 한 인정욕구를 완벽히 해소할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이자 씻겨내지 못한 잔여물과도 같다. 존 듀폰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발생한 후 마크 슐츠가 존이 건넨 망원경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는 이 장면은 마크 슐츠 자신이 존 듀폰의 인정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데이브 슐츠를 데려와야하는’ 대리자라는 것을 확실히 규정하는 장면이다. 상상을 통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영웅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마크 슐츠 본인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처럼 마크 슐츠는 존 듀폰이 욕망하고 있는 가장 분명한 실체 그의 모친과, 존 듀폰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데이브 슐츠를 인도해야하는 대리자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브 슐츠를 데려올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과 존 듀폰의 욕망 대상인 모친을 이어주는 장면은 마크 슐츠를 통해 가능해진다. 망원경이 존 듀폰이 포섭하려는 욕망의 대상을 비추는 도구라면, 마크 슐츠는 이 도구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마크 슐츠의 시선이 존 듀폰의 욕망에 종속된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다시 질문을 바꿔 존 듀폰에게 ‘시선을 점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존 듀폰은 자신이 후원한 레슬링대회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이 짜고 치는 경기를 보러 올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예상과 달리 대회 현장에는 경기를 바라보는 관중들로 붐빈다. 하지만 이 관중들은 존 듀폰이 메달을 획득할 때 그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는다. 존이 고용한 경찰이 존 듀폰의 상대였던 백발의 노인에게 은밀하게 봉투를 전달하는 장면을 보면, 이 관중들이 경기장에 온 동기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가능해진다. 존 듀폰은 승리를 기뻐하며 시종일관 웃고있지만 이런 존 듀폰과 달리 마크 슐츠는 이 시선들에 피로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다시 말해, 존 듀폰은 기형적인 시선을 판별해내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오해한다고 할 수 있다. 존 듀폰에게 시선이란 방향 혹은 의도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직 그가 시선을 ‘얼만큼’ 독점하고 점유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존 듀폰은 시선을 점유한다는 것을 욕망의 실현이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좀처럼 인정해주지 않는 모친이 체육관을 방문하였을 때 선수들을 불러모으곤 “가운데를 비우라”고 말한다. 모친의 시선이 정확하게 그에게 닿을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그는 레슬링의 기본 자세부터 조국에 대한 애국심까지 연설해가며 직접 레슬링의 주요 동작을 재연하지만 모친은 몹시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그 곳을 빠져나간다. 모친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존은 더 이상 그들 앞에서 연설을 이어가지 않는다. 시선을 점유하지 않은 순간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존 듀폰은 본인의 모친을 포섭하는 것에 실패했지만, 대신 마크 슐츠를 그 부재의 상황에 끊임없이 위치시킨다.
마크 슐츠가 폭스캐처팀에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차를 몰고 존 듀폰의 사유지로 들어올 때, 그 순간의 화면은 살짝 반사되듯 일그러진다. 즉, 그가 들어오는 장면이 전지적 시점으로 서사적 필요성을 위해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유리를 통해 그 장면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시선의 주인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마크 슐츠가 존 듀폰의 사유지를 떠나는 순간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마크 슐츠가 이삿짐센터 차를 타고 그의 사유지를 빠져나갈 때, 그가 이곳에 들어오는 장면에서 나타났던 반사된 유리의 일그러짐이 또 한번 등장한다. 이어진 장면은 존 듀폰이 유리창 앞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다. 그는 마크의 등장부터, 마크가 이 곳을 나가는 순간 그의 시선을 통해 그 ‘열림과 닫힘’의 경계를 만든다. 그가 들어오는 순간의 ‘열림’과, 그가 이곳을 나가는 순간의 ‘닫힘’은 존 듀폰의 시선을 통해 경계를 이루게 된다. 이 경계는 처음과 끝뿐만이 아니라, 그가 존 듀폰의 정원에서 레슬링 스텝을 밟는 장면을 바라볼 때도 등장한다. (물론 이 때의 시선도 존 듀폰의 것이다) 건물의 기둥이 일종의 프레임을 만들어 마크의 독무대를 만들어놓은 듯이 나타나는 장면은 마크가 존 듀폰이 점유하려는 욕망의 대상임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또한 이 욕망의 포획은 존 듀폰이 부재한 순간에도 마크 슐츠를 지배한다. 폭스캐처팀을 떠나자고 데이브 슐츠를 찾아와 권유하는 마크 슐츠의 뒤로 여러 장의 사진들이 있다. 레슬링팀의 선수들과 존 듀폰의 사진인데, 전체적으로 블루톤으로 형성된 이 장면에서 유독 빨간 옷과 미국 국기가 배경이 된 존 듀폰의 사진은 대화상대인 마크, 데이브슐츠 형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자꾸만 일탈하도록 만든다. 마크 슐츠는 형 데이브에게 떠남을 재요청하며 마치 누군가 자신을 감시라도 하듯이 “나 여기에 못 있는거 알잖아”라고 말하며 존 듀폰을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언급하지 못한다.
박제된 대상으로서의 욕망
존 듀폰은 마크의 시선을 독점하려는 그 목적과 동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더 많은 주체들에게 대상화시키려고 한다. 시선을 가진 주체들이라면 누구에게든지 항상 응시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업적이 듀폰가가 지금까지 해온 일종의 영웅적 업적, 그리고 그 이전 애국선열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함과 동일시되며, 그들처럼 인정받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존 듀폰은 살아있는 자신의 삶, 재현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시공간에 제한받지 않는 응시의 대상으로서 ‘박제’시키려고 한다. 다큐멘터리의 이미지들은 정확히 과거의 현전성을 재현한다. 하지만 존 듀폰이 의도하는 다큐멘터리는 재현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재현을 피한 차선책으로서 ‘박제’와 같은 순간을 통해 현전성을 동시적으로 입증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를 대입해보면 더욱 문제가 명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데이브 슐츠가 존 듀폰에게 살해당한 후, 데이브 슐츠가 살아 있을 때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기록이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은 더 이상의 현전이 불가능할 때이다. 데이브 슐츠가 삶을 더 이상 영위할 수 없는 순간, 그의 사진은 그가 살아생전 했던 일들, 함께한 사람들, 다시 말해 살아있을 적의 의미 있었던 순간들을 소환한다.
그렇다면 존 듀폰은 왜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했을까. 존 듀폰은 모친과 마크 슐츠의 신뢰를 잃은 뒤 바로 자신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고 한다. 이 때 존 듀폰의 서재 책상 앞에 위치했던 카메라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이 카메라 있던 자리에는 원래 무엇이 있었을까. 간발의 차이로 카메라가 놓인 그 자리이전에 있었던 것은 바로 ‘총기’다.
군인이 직접 탄환을 장착해준 총기의 총구는 무기력한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는 존 듀폰을 겨누고 있다. 이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 카메라라는 것은 그냥 지나치기 힘든 기호가 된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박제된 채 삶을 존속시키려는 존 듀폰의 비정상적인 내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편집된 다큐멘터리 장면들은 그가 위대한 멘토이자, 아버지이자, 황금독수리라고 말하지만, 그 다큐멘터리를 보는 대상은 오직 존 듀폰 밖에 없다. 과거의 기록은 그것을 해석하는 현재의 욕망을 필수적으로 동반한다. 총구가 그를 겨누었을 때, 탄환이 발사되었다면 다큐멘터리가 완성된 후 그 결과물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현전불가능한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야말로 이미지를 대하는 근원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현전이 불가능한 삶의 재현으로 기록되었어야할 이 다큐멘터리는 그가 죽은 채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채로 박제되었다는 모순을 만든다.
마크 슐츠는 존 듀폰이 준 망원경으로 새를 보는 대신 그가 박제해둔 찬장 속의 새를 바라본다. 마크 슐츠는 끝내 살아 있는 새를 보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사유지의 하늘 위를 나는 새 떼를 보여주는 장면을 등장시킨 뒤 이후에 새가 떨어지는 낙엽처럼 변모한 듯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온전한 새를 응시의 대상으로 삼지 못한 마크 슐츠가 응시의 대상을 선택할 시선의 능동성마저 박탈당했다는 것을 은유한다. 존 듀폰은 폭스캐처 농장의 아카이브 영상이 가진 사실성을 자신의 다큐멘터리에서 끝내 획득하지 못했다. 존 듀폰이 점유하고자 욕망했던 시선은 결국 어떤 사실성 및 주체성도 갖지 못했다. 자신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바라보는 존 듀폰은그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의 시선 속에 가두는 파국을 초래했다.
현전불가능성에 대하여
베넷 밀러는 <폭스캐처>(2015) 이전에도 실화를 다룬 영화를 두 차례나 만들었다. <카포티>(2006), <머니볼>(2011)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들이며, <머니볼>의 경우 오클랜틱의 신화를 실제 아카이브 화면과 당시 라디오 음성이 영화 곳곳에 나타나기도 했다. <카포티>에서 기억할만한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 영화의 오프닝일 것이다. 살해당한 가족들을 보여주기 전 카메라는 가족들이 사는 집 거실에 놓여있는 그들의 사진을 보여준다. 이 사진들은 <폭스캐처>의 데이브 슐츠의 사진처럼, 죽기 직전의 모습을 각인시키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폭스캐처>의 오프닝에 등장한 실제 폭스캐처 레이싱팀을 보여주는 이 아카이브 영상은 이 영화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을 명시한다. 곧이어 나오는 할리우드의 두 배우가 연기한 슐츠 형제는 이 아카이브 영상이 지시하던 현존성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아카이브 영상의 실제로 존재했던 순간이 가공의 이미지와 연결되는 지점에서 순식간에 발생되는 공백은 되려 이 서사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존 듀폰이 자신을 현재진행형의 신화적 인물로 위치시키고 싶어했던 욕망처럼, 영화는 과거라는 죽음의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재생된 시간으로 부활될 것을 요청한다. 실존했던 과거와 영화적 현재의 순간에 벌어진 틈은 공백 그 자체를 인정하며 동시에 분열된 감상의 태도를 요구한다. 사진 속에 각인된 인물의 모습과 영화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인물은 과거에 속박된 죽음을 상기시키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으로 현현(顯現)된다. 베넷 밀러는 실화와 가공의 픽션을 넘나드는 서사의 밀집된 지역 안에 무능력한 공백을 필연적으로 위치시키며, 이 무능의 영화적 조형들이 영화가 가진 매체적 욕망을 드러내도록 만든다. 영화가 박제하려는 대상은 시공간을 초월한 욕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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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을 통해 윤나리 님께서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을 더할나위 없이 너무나도 잘 말씀해주셨다고 보기에, 더하고 빼고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와는 별도로 제가 이 영화에서 미진하게 느꼈던 점을 적어보겠습니다.
일감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인물 구도 설정의 문제입니다. 마크 슐츠와 존 듀폰의 갈등은 그럭저럭 흥미로운 구도가 나오지만, 어느 순간 마크 슐츠와 데이브 슐츠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힘이 빠져 버리죠. 형제 간 갈등은 갑자기 휘발되어 버리고 마지막에는 존 듀폰만이 남습니다. 이것은 데이브 슐츠가 너무 안정적이고 내적 갈등이 없는 평면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만약 데이브 슐츠도 표면적으로는 듬직하고 건강하며 성숙한 자아를 갖춘 듯 하지만 이면에는 지위에 대한 위협감과 의존심과 명예욕에 휘둘리는 결핍된 자아를 갖춘 인물로 그렸다면 훨씬 흥미로운 서사를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PTA의 <마스터>가 좋은 보기가 되겠지요. <마스터>의 경우, 처음에는 광휘와 통찰을 과시하는 랭케스터 도드가 프레디 퀠을 압도하고, 그러면서 우매한 프레디가 랭케스터라는 선각자에게 의존하는 식의 노예-주인의 관계가 구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존하는 사람보다 의존받는 사람이 더 큰 의존성을 보인 바, 랭케스터야말로 빈 껍데기고 알맹이가 없는 인물로서 프레디 같은 이들의 지지와 의존과 신뢰가 없이는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는, 타인들의 의존의 대상이 됨으로써 가까스로 자아의 안정감을 지탱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 서사가 진행되면서 드러나며, 결국은 노예와 주인의 위치가 변증법적으로 전복되고 프레디가 상황을 주도하게 되죠. 해서,
마크 슐츠 : 형에 대해 존경과 의존심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형에게는 열등감을, 영에게 의존하는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끼고, 이런 양가감정 속에서 자립적 개인으로 당당히 서기를 원하지만, 그에 맞는 내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 인물.
데이브 슐츠 : 얼핏 보면 건전한 자아를 구축하고 있는 것 같지만, 자신보다 열등한 지위에서 자신에게 의존하는 동생을 지탱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인물로, 동생의 입지가 자신을 위협하거나 동생이 자신에게 의존을 포기하는 순간 자아가 흔들릴 수 있는 인물.
존 듀폰 : 어머니에 대한 인정욕에 몸부림치며 성과를 내려하고, 그런 욕망의 결핍의 발로로,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고 형제들을 폭군처럼 휘두르는 데에서 내적 만족감을 느끼는 인물.
이렇게 설정했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훨씬 더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으로 질풍노도 같은 삼각관계를 흥미롭게 그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마크와 데이브가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계속되고, 그 와중에 존 듀폰이 형제를 손아귀에 넣고 저울질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듀폰의 갈증은 만족할 수 없는 것이고, 형제는 나락으로 치달아가고 존 듀폰은 활력을 잃고...그렇게 밑바닥까지 떨어진 이들이라면 서로 총질을 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마치 <우리 선희>의 문수와 동현과 재학이 표면적으로는 단일체를 이루지면 이면에서는 경합하듯 말입니다.
위와 같은
서열의 전복이라는 코드의 구현은, <폭스캐처>의 중심 인물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위적인 것입니다. 남성들 간의 관계는 형제애적/동업자적 협동과 제왕적 경쟁이라는 양 축을 오가기 마련이지요. 눈 앞의 미션을 해결하기 위한 실용에 있어서는 모두가 의리와 형제애를 내세우지만, 잠깐 지나면 냉혹하고 인정 없는 서열 다툼이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많은 역사적 사례에서 대업을 이루기 전까지 열렬하던 군신관계나 친우관계가 대업을 이룬 이후 숙청과 반란과 내전으로 전화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친한 친구일수록 서로에게 막대하며 상대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상대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애쓰기 마련인 것도 같은 이치죠. '야 니가 깝쳐봐야 이 형님에게 안 돼'라는 식의 말은 남성들 사이에서는 클리셰 오브 클리셰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쟁이 발생하고, 경쟁은 감정적인 상처와 균열을 낳으며, 이것이 남성적인 자기연민과 자의식과잉으로 이어지죠. 이렇듯
우리는 하나이지만, 나는 너보다 낫다는 것, 여기에서 보이는 자아도취와 자뻑, 자기과시, 그리고 그 사이에 발생하는 상호 간의 갈등과 적대, 그 결과로 남는 자기 연민/자의식 과잉, 이런 것들이야말로 남성 간 관계의 본질입니다. 그리하여 동맹과 서열다툼, 그에 대한 회한과 후회는 표면적으로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단히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총체인 것이죠. 친구 간에도, 형제 간에도, 부자 간에도, 이는 예외가 아닙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함축하는 명대사가 "아버지,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가 되겠지요. 드라마로는 <용의 눈물>이 대표적입니다. 이성계와 이방원, 이방원과 이방간, 이방원과 양녕대군 등이 그러한 좋은 예이지요. 애초에 <용의 눈물>이라는 것 자체가 의리와 분열의 아이러니 사이에서 흘려지는 자기연민적 눈물을 상징하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 같은 맥락이고요. 누가, 어떤 식으로 '그렇게 아버지가 되'느냐. 난봉꾼이냐 니힐리즘적 이론가냐 성자냐 사생아냐.
여하간 우리 모두 결국은 대장 노릇하고 싶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중2병의 소년들이 아니냐는 것이죠. 이러한 작품들은 남성들 사이의 관계는 뜨겁게 단합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언제든지 파국과 반목과 반란과 전복이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이 항존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외에 비슷한 것은 워낙 원형 서사적으로 흔한 터라 다른 영화에서도 쉬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부2>의 마이클과 프레도의 갈등, <아모레스 페로스>의 옥타비아와 그의 형의 갈등, <버드맨>의 리건과 마이크의 갈등이 다 그런 것이지요. 앞서 말한 <우리 선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주축 인물들이 남성이라면, 남성적인 관계가 구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작품에서 베넷 밀러가 의도한
[미국의 현실]과 맞물렸다면 한층 더 흥미로웠겠지요. 위대한 미국이라는 것 역시 한꺼풀 벗겨보면 느와르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정네들의 자의식 과잉과 자아도취와 자기연민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그 와중에는 우열을 가리기 위한 골육상잔과 이전투구가 뼈대와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역설할 수 있으니까요. 모두가
[국부]가 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개인의 차원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나 국부의 자리는 공란으로 남으며, 그저 국부가 되기 위한 투쟁만이 있을 뿐이죠. 아버지가 결핍된 사람들이 만들어낸 아버지 없는 나라라는 식의 접근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영화에서도 어느 정도 이 방향을 의도했을 것도 같고요.
물론 이런 식의 각색을 했다면 마크 슐츠를 비롯한 사건 당사자들이 반발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 점에서 실화를 소재로 삼은 것이 이 영화가 가진 잠재력의 족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어차피 <폭스캐처>도 사실에 충실한 작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크와 데이브는 의사擬似 부자처럼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둘은 한 살 차에 불과했으며, 마크가 떠난 직후 데이브가 듀폰에게 살해된 것처럼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10년 가까운 세월의 시차가 있으며, 마크와 데이브와 듀폰이 함께 듀폰 가家에서 생활한 적은 없다고 하죠. 이렇게 어차피 극적 구성을 위해 각색을 했다면, 좀 더 과감한 지점까지 나아갔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이왕 각색을 할 것이라면 더 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머니볼>이 아주 적절한 각색과 왜곡을 통해서 멋들어진 극을 구성했듯이 말이죠.
여기에 부수적으로
소재 활용의 차원의 문제가 있습니다. 남성 서사의 재현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이를 살리는 데에 레슬링만한 소재는 없지요. 레슬링 자체가 지극히 남성적인 스포츠고, 매우 육체적이고 실전적인 투기鬪技니까요. 남성들 간의 권위와 권력에 대한 경쟁과 반목과 질시, 그에 대한 전복을 다루는 데에 있어, 서로 몸과 몸을 맞대고 몸을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레슬링만한 소재도 드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레슬링은 다소 가벼이 소비되었지요. 초반부의 마크와 데이브의 연습 장면을 제외하면 레슬링 자체가 등장 인물들의 감정골과 갈등, 경쟁심을 적극적으로 다룬 장면이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그 점에서 크게 아쉬웠습니다. 베넷 밀러의 전작인 <머니볼>이 야구를 소재로 삼아 그것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기존의 야구관을 뒤집는 인물]을 제시함과 동시에
[기존의 야구 드라마라는 장르 관습을 전복하는 서사구조]를 띠고, 반동적 인물과 반동적 서사구조 양자가 상호 호응하면서 야구 자체, 야구만의 고유한 무언가와 특수한 로컬 룰을 파괴하고 보편 법칙으로서의 과학이 가지는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훈고학적인 쾌감과 반전감을 우리에게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말입니다(이에 대해서는 <머니볼> 리뷰를 참조 바랍니다.
https://pgr21.com/?b=8&n=60225). <머니볼>은 야구가 대체불가능한 것이며 야구 이외의 다른 종목을 소재로 리메이크 할 수 없는 영화이지만, <폭스캐처>는 레슬링을 다른 종목으로 대체하여 번안했어도 시나리오를 만드는 데에 큰 문제는 없지요. 그래서 레슬링의 비중이 아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존 듀폰의 동기 설정이라는 캐릭터 메이킹의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존 듀폰의 심리 묘사는 절절했지만,
[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한 이]라는 설정은 미진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창작자 입장에서 바라보면, 듀폰에게 개연성과 캐릭터를 부여해야한다는 것은 당위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듀폰이 겪고 있는 내면의 딜레마와 갈등을 설정했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필연이지요. 이때에,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다'라는 설정은 다소 진부하고 동력이 약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람이 비탄에 빠질 수 있는 원인은 엄마 이외에 좀 더 매력적이고 섬세하고 세련된 것들이 더 많으니까요. 특히 악역에 개연성을 부여해야한다는 것 그 자체가 클리셰가 되어버리고 클리셰와 코드와 장르 관습의 발전이 극에 달한 오늘날은 더더욱 말입니다. 무능합니다만 제가 감독이었다면 작가를 좀 더 채근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스캐처>는 등장 인물들의 감정의 밀도와 이를 전달하는 영화적인 연출, 메타포, 미장센만으로도 충분히 수작이라고 할만합니다. 저는 그저 철 모르는 아이가 이미 완성되어 있는 성숙한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고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몇 가지 아쉬움을 토로했을 따름이지요. 이 영화를 접하시는 많은 분들께 적절한 소개와 지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음...제가 느낀 감흥으로 마무리지어보자면,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사실 저는 이외에도 팟캐스트를 하나 더 운영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만 두 개 하고 있는 셈인데요. 팟캐스트라는 매체 자체가 음성 외에는 어떠한 수단에도 호소할 방도가 없는 터라, 논리나 담화의 수준 못지 않게 발성과 발음과 어조가 매우 중요합니다. 제 경우에는 부정교합을 갖고 있는 터라 발음도 좋지 않고, 발성도 훈련되어 있지 않은 터라 많은 청자 분들께서 발성의 기술적인 미흡함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곤 하시죠. 해서 제법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데, 이번에 모신 게스트님을 뵙고서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처음으로 모신 전문가 게스트시기도 했고, 그에 걸맞게 영화의 분석 수준도 전문적이시기도 했으며, 방송 들으시면 아시겠지만 발성과 언변이 매우 탁월하시더군요. 저는 갖고 있지 못한 미덕인지라 부럽기도 하고 아쉬움도 들고 그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