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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7/03 00:39:12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1763년, 조선 사절단이 본 일본

1763년, 영조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이들이 본 일본은 의외로 꽤 정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이 왜 통신사를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통신사 외교 형식에 있어 잘못된 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꾀뚫고 있었습니다. 


" 관동(關東)에 원가강(源家康)이란 자가 있었는데 바로 뇌조(賴朝)의 후예로서 사람됨이 침착하고 말이 적었으며, 용모가 잘생긴데다가 날래고 사나워 싸움을 잘하였으므로 감히 그와 칼끝을 겨룰 자가 없었다.

수길이 이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자, 드디어 그와 강화를 맺고 그 아들 수뢰(秀賴)를 가강의 딸에게 장가들였다. 수길이 죽으매 가강이 꾀를 써서 그의 딸을 빼내고 군병을 일으켜 수뢰를 쳐서 죽이고 따라서 평씨를 멸망시키고 다시 관백이 되었으니, 실은 원씨의 옛날 직책을 회복한 것이다.
이때부터 정이대장군을 세습(世襲)하되 혹은 종1위(從一位)가 되기도 하고, 혹은 정1위(正一位)가 되기도 하였다. 그 뒤로 승습(承襲)하여 아홉 사람에게 서로 전하였는데, 지금 관백 가치(家治)는 가강의 6대손이 되는 것이다. 간혹 국왕이라고도 일컫다가 길종(吉宗)에서부터는 일본대군(日本大君)으로 고쳐 일컬었으니, 이는 바로 임금도 신하도 아닌 명호(名號)가 바르지 못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미 부득이해서 교린한다면 왜황(倭皇)과 동등한 교제를 해야 옳다. 임금도 신하도 아닌 관백과 그 예의(禮義)를 동등히 하는 것은 더욱 수치스럽고 분한 일이다.
들으니, 관백이 새로 즉위한 뒤에 반드시 우리나라의 통신사를 청하는 것은 대개 남의 힘을 빌려 군중의 마음을 진압하려 함이라 하니, 더욱 한심하다. 또 들으니, 옛적에는 관백이 오히려 왜황에게 더러 조근(朝覲)하였는데, 백여 년 뒤로는 이 예절 또한 폐지하고 행하지 않는다 한다. 그러므로 조금 지각이 있는 자들은 울분한 뜻이 없지 않고, 더러는 비웃는 말도 있다.
만약 참다운 영웅이 그 사이에 나온다면 쟁탈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들으니, 그 배치한 규모가 매우 치밀하여 66주(州)의 절반 넘게가 관백의 심복이며, 또 백성에게는 전세(田稅) 외에 다른 징수하는 것이 없고 사역(使役)하는 일이 있으면, 곧 삯을 지급하므로 백성에게 원망하거나 배반하는 뜻이 없다고 한다.
또 궁벽한 해도(海島)에 위치한 나라여서 군장(君長)의 분별이 처음부터 밝지 못하고 누추한 풍속의 그 유래가 이미 오래므로, 풍습을 변화시키는 일은 하루아침에 하기 어렵고, 명분(名分)을 바루는 일은 반드시 밝은 식견이 있는 자를 기다려야 하니, 이로써 말하면 반드시 옛일을 변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선 사절단은 이미 일본에 천황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조선군주와 일본의 정이대장군이 대등한 관계로 맺어진 것은 잘못된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언젠가 정이대장군을 무너뜨리고 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가 돌아올 것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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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도 신하도 아닌데 위엄과 복을 만드니 / 匪辟匪臣作威福
관백이란 도대체 어떠한 벼슬인지 모르겠네 / 不知關白是何官
어찰을 전할 적에 심장이 찢어지는 듯 / 親傳御札心如碎
임진년을 추억하니 눈물이 쏟아지네 / 追憶辰年淚欲瀾
동래(東萊) 시장 삼초는 부질없는 무역(貿易)이라 / 萊市蔘椒徒日易
교릉의 송ㆍ백은 봄이 아직 차가운 걸 / 喬陵松栢尙春寒
화융 정책 본래부터 왕의 뜻이 아닐진대 / 和戎本自非王意
한 질의 《춘추(春秋)》를 밤 깊도록 읽노라 / 一部麟書乙夜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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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명칭 회답사라 통신사라 붙여 / 使名囘答更通信
애써 화친하려는 한관이 부끄럽네 / 辛苦和戎愧漢官
통역에만 의지하니 욕(辱)을 참는 일도 많아 / 象舌徒凭多忍垢
마도(馬島) 정세 자못 험해 파란이 또 일까 두렵네 / 馬情殆甚恐推瀾
해마다 교린하느라 인삼(人蔘)도 없어지고 / 交隣蔘貨年年盡
별 부딪치는 무지개 빛은 밤마다 싸늘하구나 / 衝斗虹光夜夜寒
시인의 잠계는 예전부터 절실하여 / 從古詩人箴戒切
이릉의 비바람을 수심 속에 바라본다오 / 二陵風雨帶愁看
부사(副使)



이렇듯 사절단은 막부가 통신사를 요청했던 목적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외국사절단을 통한 국내정치적 입지의 고취 말이죠. 그리고 이것이 조선에 별로 유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사절단에 참여했던 원중거는 오사카, 교토, 에도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 그리고 활기에 크게 놀랐고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돌아가서 임금에게 보고할 때는 나쁜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일종의 허위보고를 합니다.


임금은 저들이(일본이) 조선의 문무(文武)를 따라가기 어렵다지? 라고 묻자 귀국한 사절은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일본에 대해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어필하지 않았던 것이죠. 


사실 임란 후 통신사를 재파견한 이래 사절단은 꾸준히 일본 도시들의 화려함과 활발함을 논하고, 일본에 왜황과 쇼군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차이와 모순을 도대체 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던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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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도둑
15/07/03 01:04
수정 아이콘
일본의 경제력이 한반도를 따라잡은게 고려시대?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도깽이
15/07/03 01:10
수정 아이콘
사실 문화적 수준을 제외하고 단순한 군사력이라던지 생산력과 같은 국력으로 따지면 고려시대 때부터 내내 일본이 한수 위죠...
애초에 국토와 인구수 차이가 존재하니...
마음속의빛
15/07/03 12:45
수정 아이콘
공부하다가 알게 되었지만, 류큐왕국(오키나와현)은 1972년 이전까지 지금의 일본과는 따로 독립된 국가였다고 들었어요.
지금 존재하는 일본과 그 당시 존재하던 왜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지네요. (언젠가 한 번 일본 역사에 대해 배워봐야겠어요)
도깽이
15/07/03 01:08
수정 아이콘
조선은 폐쇠된 농업국가였으니 어쩔수 없지 않나 싶습니다. 폐쇠된 문명이 내부개혁만으로 자기혁신을 이륙한다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외부와의 충돌과 교류가 있어야지만 혁신이 일어날텐데 위로는 중국으로 막혀있고 바다로는 교역을 거이 하지 않았으니 깐요.(문물을 전파받을 수 있는곳은 중국이 유일한데 청나라 조차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양국가들에게 한참뒤쳐졌으니...)
리스트컷
15/07/03 01:27
수정 아이콘
게임사이트니 게임스럽게 이야기하자면..
입지 자체가 일본이 한반도보다 좋죠.
한반도의 장점이라면 저 중국님에게 이것저것 받아먹어서 테크 따라가기 좋다는건데..
그게 왜인들 입지선정 포텐에서 밀리기 시작하면서 뭐.. 생산력부터 시작해서 쭉 질수밖에 없는거죠.
The Genius
15/07/03 01:32
수정 아이콘
지금도 우리나라의 중국이나 일본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는 할 수 없는데 그때라고 다르겠습니까.
매직동키라이드
15/07/03 01:41
수정 아이콘
지금도 사회모순 해결이 안 되고 있는데 뭐 그때는 별 재주 있었겠나 싶네요(...)
별빛달빛
15/07/03 02:09
수정 아이콘
어딜 감히 왜놈들을 배우자고 하는 것인가? 이제보니 왜놈들에게서 향응을 제공받고 역심을 품고 온 것이 아니냐? 라든가... 괜히 공격받기 좋은 빌미를 만드느니 그냥 듣기 좋은 소리로 보고를 하는 게 낫겠죠. 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 대단하다 그러면 너 친일파! 라고 욕부터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오죽했을런지요. 배울 게 없는 오랑캐 놈들이다라고 보고하면 과연 그렇지~ 하고 정신승리하기에도 좋은 다들 듣기좋은 훌륭한 보고가 되는 거겠고요.
aurelius
15/07/03 12:50
수정 아이콘
맞아요. 분명 그런 정치적 문제가 크리티컬했던 거 같아요.
카시우스.
15/07/03 02:16
수정 아이콘
1.
일본 도시의 활발함을 배우자는 의견은 조선 자체가 검약과 향촌중심의 자급자족 경제를 추구하는지라 애초에 받아들여지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일본의 실상을 본 통신사들이야 직접 접함으로 충격을 받았겠지만 그렇지않은 자들은 결사반대엿겟죠.

2.
명분을 중요시하고 소중화라고까지 햇던 조선이 국왕이 아닌 막부를 상대해야했던것에 클레임이 없었다는건 좀 신기하네요. 일본에 크게 데인경험이 있어서 괜히 긁어부스럼 만들기 싫었던걸까요?
aurelius
15/07/03 12:51
수정 아이콘
저도 그 부분이 가장 의문입니다. 왜 조선 관료들은 조선왕이 쇼관과 대등한 예를 취해야 하는 것의 모순을 시정하지 않았을까.... 분명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을 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시정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요.
카시우스.
15/07/03 13:11
수정 아이콘
실질적인 힘이 없어서 그랬던게 아닐까요.? 당시 조선지배층들도 겉으로는 원칙,명분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세력의 열세를 인정하고 어느정도 융통성을 발휘하는 속성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정치적 수사의 성격이 강했다던 북벌론처럼요. 사람사는 세상이 어찌보면 비슷하겠죠.
Shandris
15/07/03 05:43
수정 아이콘
전근대야 지금과는 아예 세계관 자체가 달랐을테니까요. 지금 우리야 장사해도 돈 버는걸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 당시는 그게 말업이었듯이...
swordfish-72만세
15/07/03 06:41
수정 아이콘
임금도 아예 몰랐을거 같지도 않습니다.
아예 일본을 가지도 않은 이익 선생도 아는 것이니
그냥 표면상 이때는 중요하지 않으니 덮이는 거죠
15/07/03 10:39
수정 아이콘
조선시대 사회상에 관한 책을 보다보면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이상하리만치 상공업이나 기술활용이 빈약하더라구요. 중국 중세시대 도시풍경 그림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지더라구요. 내가 알던 동양의 초라한 모습이 아니더군요. 중국은 송나라때 부터 물레방아부터해서 심지어 운하에 갑문까지 설치할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자랑했는데, 우리나라는 활자나 그런 분야 빼고 농업이나 건축기술은 왜 도입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맨날 교과서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가난했다는 걸 많이 강조했던 것 같아서 유난히 더 안타깝고 그러더라구요.
swordfish-72만세
15/07/03 11:54
수정 아이콘
수차의 도입만 봐도 한반도 국가들이 중국과 얼마나 괴리가 있었는지
알 수 있죠.
문제는 지배층이 아닙니다. 수차의 경우에도 수차례 도입시도를 했습니다.
단지 조선의 생산성이 이걸 필요로 할 정도로 높지 않았다는게 문제죠.
이게 성공한게 조선 후기.
결국 농업 생산성이 어느 정도 올라온 이후 입니다
15/07/03 18:44
수정 아이콘
조선에서 수차가 이용 안 된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한반도에 농경지 대비 물이 별로 없어서에요.
기본적으로 일본은 가뭄이 들어야, 조선은 홍수가 나듯 해야 농사가 잘 된다는 말이 들 정도로 한반도는 물이 부족합니다.
게다가 토지 자체가 물이 쉽게 빠지는 토양인지라 물을 끌어 올리는 것보다 가두는 기술이 훨씬 중요해요.
괜히 예전부터 보나 제언같은 것을이 조선에 많았던 게 아닙니다.

조선의 생산성이 수차를 필요로 할 정도로 높지 않아서 안 만든 게 아니라,
수차를 만드는 비용에 비해 그 활용으로 얻는 이득이 거의 없어 수익성이 안 맞아 안 만든 겁니다.
막말로 조금만 쓸만한 땅은 죄다 농경지로 활용했던 시대가 조선시대인데 생산성이 부족해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수차를 안 만든다는 게 말이 안 되죠.
swordfish-72만세
15/07/03 19:52
수정 아이콘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일단 조선 후기가 되면 갑자기 이 필요 없었던 게 필요해지는 것도 아니고
전기만 하더라도 수직으로 된 진보적인 수차는 사용안할지라도 횡으로 된 구식은 꾸준히 사용했거든요.
15/07/03 20:34
수정 아이콘
무슨 근거로 조선 후기에 갑자기 수차가 그렇게 필요해졌고 보급에 성공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후기 실학자들이 수차 예찬을 상당히 많이 하여 후기에 보급되어졌다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수차의 활용 용도에 대한 고민은 세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만,
결국 수차의 제대로 된 활용은 끝까지 실패합니다.

막말로 수차로 인해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말은 말이 되어도,
생산성이 부족하여 수차가 이용 안 된다는 말 자체가 굉장히 모순적이죠.
농업 생산량에 목숨을 걸었던 게 조선인데 생산성이 이걸 필요로 할 정도로 높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http://blog.naver.com/lord2345/220274264173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겨울삼각형
15/07/03 11:13
수정 아이콘
덴노 = 허수아비
쇼군 = 실권자

둘이 다르고(에도 막부와서는 아예 중심지가 간토의 에도로 옮기면서 정말 덴노는 뒷방 늙은이가 되어버렸죠..)
조선왕과 급을 맞추려면 덴노와 협상을 해야 한다는걸 알더라도,

실권자가 쇼군인데.. 조선이 무슨힘이 있어서 이걸 해결하겠습니까.
펠릭스
15/07/03 19:30
수정 아이콘
우리가 지금 여기 앉아서 "왜 당시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을까" 라는 하는건 사실 다 어른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지요.

당장 30년 전만해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헌법을 가진 국가가 왜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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