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18년 연합군
연합군은 총 6개 집단군으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맨 서쪽 영국해협 쪽 부터 앨버트 벨기에 국왕이 이끄는 벨기에군 혹은 프랑드르 집단군(영국군이 더 많다는게 함정)
중간의 헤이그가 이끄는 영국 대륙 파견군(BEF)
프랑스 서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
프랑스로 부터 베르덩 지역을 인계 받은 퍼싱의 미국 원정군
마지막으로 기존 독불 국경을 지키는 프랑스 동부 집단군
- 1차 대전 미군 군복, 영국군과 완전히 다른 복장이지만 저 헬멧과 카키색 때문에 헷갈리죠. 엄밀히 말해 프랑스 군복 변형에
영국군 헬멧이라는 게 맞겠지만요-
이중 주 공세를 이끄는 건 BEF 였습니다. 영국군의 경우 거의 8월 전체 공세를 이끌며 독일군 주력에 심대한 피해를
이끌고 입히고 있었죠.
하지만 영국의 국력적 한계 때문에 이 부대들이 공세를 주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미 1918년 겨울에 비축해 놓은
병력이 상당히 소진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연합군 총사령관 포슈의 생각에는 만약 영국군이 퍼지면 이를 대체할 공세주도 병력이 없었습니다. 일단 프랑스 군은
대부분 소극적이며 절망적으로 신중한 분위기가 군내에 만연해 있었고 미군은 공세를 주도할 숫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장비나 질적인 면에서 좋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타 전선 병력 중 일부를 영국군과 먼곳에서 공격시켜 독일군 병력을 분산시킴으로써 영국군의 부담을 줄
일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뜻을 미군이 주도적으로 작전하겠다고 언제나 주장하는 미군 사령관 퍼싱에게 알리죠.
둘의 합의 하에 상대의 주의들 돌리는 공세를 미군 주도로 하기로 하고 반대로 상당수의 미군 사단을 영국군에 배속
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이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공세가 생미엘 전투입니다.
(2) 생미엘
사실 이전투는 현재 미군의 위상을 생각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일단 다음 대전 때 모든 곳에 미군 무기가 쓰였던 것과 다르게 이 첫 야전군 수준의 공세에 동원된 포의 상당수가
프랑스제 였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의 상당수는 프랑스제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중화기인 직사포와
전차까지 다 프랑스 제 였습니다.
[이 시절의 흔적이 미터법을 쓰지 않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무기 장비에만 미터법을 쓰는 미 육군이라는 결과를 낳
았습니다.]
-2차 대전의 유명한 전차 셔먼에 달린 전차포 역시 1차 대전 때 받은 프랑스제 75mm 직사포 변형입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유럽군대에 비해 우세인 부분은 있었습니다. 일단 보급능력과 조직 편성 능력에서 미군은 유럽
군대를 압도할 정도로 선진적이었습니다.
미군은 이 강점을 활용하여 생미엘 공격에서 낙승합니다. 물론 이곳이 2선급 전선이라는 점도 작용했지만
30시간 만에 미군은 돌파구를 열었고 1주일 후 대부분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미군 사상자는 7천명 독일군은 5500 사상에 1만 5천을 포로로 잃었습니다.
이시기 공을 세운 대표적인 두 사람은
비록 독가스는 먹어 후송되긴 했지만 은성무공훈장 받으신 이 준장님과
공세를 주도할 두개 기갑 여단을 훈련시키신 이 대령님
이었습니다. 각각 다음 대전에서는 맥아더 원수랑 패튼 대장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죠.
한편 생미엘에서 미군의 무서움은 생미엘 후속 작전인 뫼즈-아르곤 공세를 위한 병력 이동과 보급이었습니다.
2주만에 미군은 무려 42만 대군을 이곳에 전개 시켜 버리는 말도 안되는 능력을 발휘해 버리는데 이 계획은
조지 C 마셜 대령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2차 대전 당시 미 육군 참모총장, 전후에 국무장관으로 마셜 플랜을 만든 조지 마셜 원수였습니다.
(3) 뫼즈-아르곤 전투.
한편 미군이 생미엘에서 승리하고 얼마 후 중동에서는 결정적인 전투가 있었습니다.
- 메기도 전투의 영국 포병-
9월 19일 시리아 메기도에서 앨런비 장군이 이끄는 영국-하산 왕조 군대가 폰 센더스의 독일-오스만 군대와 7만과 4만으로 붙어서
독일-오스만 군이 참패 해버린 메기도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 전투를 끝으로 독일군은 더 이상 오스만군을 도와줄
수 없었고 오스만군은 남은 병력이 없었습니다. 사실상 오스만 투르크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던 이전투를
끝으로 오스만 군은 사실상 붕괴했고 다스커스, 홈즈가 차례 대로 함락되고 오스만의 술탄은 친독세력인 청년
투르크 당을 몰아 냅니다. 한달 후인 10월 30일 술탄은 이라크에서 병사들만 남겨 놓고 항복하여 호위호식하고 있었던
영국군 타운센트 장군을 사절로 보내 항복하게 됩니다.
9월 26일 전개를 마친 미군은 후속 작전인 뫼즈-아르곤 공세를 시작합니다. 벨기에 아르덴(2차 세계 대전 당시 발지 전투의 무대)
으로 향해 가는 이 지역은 고지대 사이에 좁은 길 그리고 2차 대전 때 미군이 고생했던 그 숲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독일군은 마르비츠의 5군. 마르비츠는 이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마속(!)처럼 산에 방어진지를 세웁니다. 그리고 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히죠.(사실 마속은 마르비츠 같은걸
의도했는지도) 미군은 좁은 길에서 양 계곡에서 공격해 오는 독일군의 공격에 심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온니 돌격만 외치는 퍼싱의 무능한 지휘였습니다. 마르비츠의 방어선에 그는 딥다 병력을 밀어 넣었고
그 대가는 독일군보다 2배나 많은 20만의 사상자(미군 피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초창기 투입 병력의 거의 40%를 육박하는
피해)와 3국군 중 가장 짧은 진격 거리 였습니다.
- 뫼즈 아라곤 전투-
미군은 앞으로 두달간 이 지역에서 막혀 사실상 여기에서 전쟁을 끝내게 됩니다. 결국 이 돌파구가 열리는 건
독일 군의 전면 붕괴시기였습니다.
참고 가장 멀리간 사단이 맥아더가 부사단장으로 있던 42 보병 사단이더군요. 종전 하루 전에 맥아더는 이 사단
사단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