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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2/02 19:25:33
Name Neandertal
Subject [일반]  24년 전의 인연을 다시 만나다...
24년 전인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그 해 저는 고1 이었습니다.
1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될 즘에 음악 선생님이 방학 숙제를 하나 내주시더군요.
숙제의 내용은 "클래식 음악 가운데 어떤 작품이라도 좋으니까 하나를 듣고 그 감상과 들었던 작품을 공 테이프에 녹음해서 제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냥 감상을 종이에 써서 내라고 하면 남의 것을 보고 그대로 베끼는 친구들이 있을까 봐 그런 식으로 복잡하게 과제 제출 방법을 정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음악 선생님 입장에서는 이선희, 변진섭 노래만 열심히 듣는 제자들이 이렇게라도 한번 클래식 음악을 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으셨겠지요.

여름 방학 동안 음악숙제는 까맣게 잊어 버리고 신나게 놀았던 저는 개학을 2~3일 앞둔 시점에서 갑자기 숙제 생각이 퍼뜩 났습니다.
당시 저희 집에는 클래식 음악을 들을 만한 매개체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집에 LP플레이어가 없었기에 LP판이라는 건 아예 없었고 그나마 몇 개 있던 카세트 테이프들도 다 가요 아니면 팝송들뿐이었지요.
마땅히 클래식 음악 카세트 테이프를 빌릴 만한 곳도 없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시내 음반가게에 들러서 뭐든 지 하나 구매를 해야만 했습니다.

“왜 음악 선생님은 이런 숙제를 내가지고 사람을 짜증나게 할까?”하고 음악 선생님을 원망하면서 시내 지하 상가에 있는 음반 가게를 갔습니다.
막상 클래식 테이프들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대 앞에 서긴 했는데 뭘 골라야 할 지 막막하더군요.
아는 작품은 당연히 전무하고 그나마 아는 이름이라고는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슈베르트밖에 없는데 그 양반들 작품 가운데 뭘 골라야 할 지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라고 하는 작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말로는 ‘진혼곡’이라고 하는 데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곡이라는 설명이 커버에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던 음악인지는 잊어버렸지만 지휘자가 칼 뵘(그 당시 표기로는 카를 뵘)이었던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한창 ‘죽음’같은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할 시기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왠지 모르게 남들이 안 할 것 같은 이 작품으로 숙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 그거 너무 어려운 작품인 것 같은데 그냥 비발디의 사계 같은 걸 고르지 그래”라는 주인 아저씨의 걱정 어린 충고도 무시한 채 저는 그렇게 모차르트의 레퀴엠 카세트 테이프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집어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습니다.
제가 당혹감을 느끼기 까지는 채 1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더군요.
애당초 클래식 음악이 이선희 누나의 ‘나 항상 그대를’같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건 뭐 도저히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고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두 번이나 연속해서 들어봤는데 역시 마찬가지더군요. (두 번째에서는 아마 중간에 그냥 스톱 버튼을 눌러 버린 것 같습니다.)
뭐 느낀 게 있어야 제 나름의 감상 평을 말할 텐데 그런 건 없으니 쓸 말은 생각이 안 나고 어쩔 수 없이 테이프에 같이 들어있던 속지의 내용을 대충 얼버무려서 공 테이프에 녹음을 하고 숙제를 끝냈습니다.
당연히 모차르트 레퀴엠 테이프도 다시는 제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에 삽입되지 못하고 어딘가에 처박혔다가 그렇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피지알에 클래식 관련 글을 두 번 정도 올린 뒤로 본격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들어보고 싶어서 클래식 음악 앨범을 두 장 구입했습니다.
드보르작 교향곡 8, 9번이 실린 음반 하나와 역시 드보르작 교향곡 7번과 모음곡 아메리카가 들어있는 다른 앨범 하나가 그것들인데 차에다 두고 왔다 갔다 하면서 듣고 있습니다.
정말 좋더군요. 진작에 클래식 음악에 좀 관심을 가지고 들어볼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세 번째 앨범으로는 뭘 들어볼까 하다가 브람스 교향곡 전집이 눈에 띄어서 그것으로 주문했습니다.
브람스 교향곡 전집을 선택한 것은 물론 브람스가 훌륭한 작곡가이기도 하고 그의 교향곡들이 다 훌륭한 작품들이라고 해서 이기도 하지만 주된 이유는 바로 이 전집의 지휘자가 칼뵘이어서였습니다.
24년 전 멋모르는 여드름투성이 고등학생에게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하고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서 잊혀져 버렸던 칼뵘 선생님을 이제 나이 40의 중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제대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칼 뵘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24년 전에 선생님 욕 많이 했었습니다.
뭐 이런 걸 다 듣나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선생님의 하셨던 그 음악은 우리 영혼의 안식이자 위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24년 만에 선생님의 지휘하셨던 브람스의 교향곡들을 들어볼 까 합니다.
시디가 도착하면 의관을 정제하고 오디오 앞에 정좌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칼 뵘 선생님 지휘는 아니지만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4악장 Allegro con fu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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쎌라비
12/12/02 19:29
수정 아이콘
첫장면에 교황인가요??? 깜짝 놀랐네요..
Tchaikovsky
12/12/02 20:19
수정 아이콘
좋아요! 음악을 들으니 헤이리마을에 있는 CAMERATA에서 음악 듣고프네요. 연말인데 공연도 가고싶고..
서린언니
12/12/02 20:29
수정 아이콘
전 볼레로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좋더군요..
12/12/02 20:33
수정 아이콘
클래식에는 문외한이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아마데우스덕에 모짜르트에 대해 조금 관심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레퀴엠이 모짜르트의 유작이던가요? 모짜르트답게 화려하지만 또 영웅의 죽음답게 비장한 것 같습니다. 참 좋아하는 곡이에요.
젤가디스
12/12/02 21:11
수정 아이콘
클래식음악 틀어주면서 그 관련된 이야기 해주는 그런 곳은 없을까요.
아시는 분 계시면 추천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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