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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13 23:26:13
Name 눈시
Subject [일반] 불굴 - 6. 현리 전투의 시작
"중공군이 한국군을 집중적으로 겨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선 화력이 미군이나 영국군에 비해 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싸움을 이어갈 만한 튼튼한 조직력과 결집력에서 이미 미국과 영국의 군대에 뒤져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이 걸어오는 싸움에서 국군은 여러 차례 약점을 보이면서 무너졌다. 내가 쓰라린 6·25전쟁을 회고하는 이 마당에서도 국군이 허무하게 패배했던 장면에 관한 묘사를 피할 수 없다. 그만큼 국군은 허약했고, 중공군의 타격에 쉽게 무너지는 일이 잦았다.

그것은 사람이 약해서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을 묶어줄 조직력의 부재가 더 큰 문제였다. 체계적인 훈련이 부족했던 것도 함께 지적해야 한다. 우리는 강한 군대가 되기 위한 결정적인 몇 가지 조건을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봄과 함께 시작된 중공군의 공세에 노출된 국군의 크나큰 약점이었다." - 백선엽

창군 초 한국에서 제대로 된 현대전의 경험과 지식을 쌓은 이는 드물었습니다. 일본 육사 출신의 노장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소수였고 새로운 군대를 만드는데 역시 일본군 방식은 아니었죠. 거기다 수가 적어서 산파 정도의 역할밖에 못 했습니다. 미군은 오히려 일제의 차별정책으로 이런 인재가 적었다는 걸 문제삼았습니다. 광복군 출신의 경우 일본군보다 더 낮게 본 국부군 출신 정도였고, 수는 더 적었으며 대부분이 군보다는 정계에 들어갑니다. 예외는 김홍일 정도였죠. 이들은 미군에 의해 물러나게 됩니다.

남은 것은 소수의 광복군 출신과 대다수의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젊은이들, 미군은 여기에 집중합니다. 일본군 물은 덜 들었으면서 최소한의 군사 지식은 있어서였죠. 이들로 급한 불을 끈 후 아래부터는 정식으로 교육을 통해 미국식으로 길러낼 생각이었죠.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소련식으로 새로 키워집니다.

문제는 전쟁이 터져버렸고, 그나마 군사지식이 있던 이들의 피해가 컸으며, 이를 채우기 위해 또 단기속성 코스로 하급장교와 부사관들을 채워야 했다는 것입니다. 전투 때의 용맹이야 있을지 몰라도 현대전에 대한 지식이 극히 부족했죠. 그 전에 군인으로서의 기초적인 것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일단 위쪽도 문제였어요. 노장들은 물러나고 채병덕 등도 그 무능을 보여주며 역시 몰락, 남은 이들은 너무 젊었습니다. 이걸 뛰어넘을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경우(백선엽)는 있었지만 나머지는 미군이 우선 교육한 인물(정일권)부터 이들을 견제하기 위한(이형근 -_-;) 정치적인 능력은 있었던 이들도 있었죠. 이들 중에서 일선 사단장으로 잘 싸울 인물은 제법 있었을지 몰라도 전체적인 전황을 짚고 작전을 짤 만한 인물은 없다고 봐도 될 겁니다. 그래도 이 부분은 미군이 맡아줬죠.

하지만 위가 아무리 잘 돼도 아래가 이를 받아주지 못 하면 안 됐습니다. 특히 사병들을 직접 이끌어야 되는 하급 장교와 하사관들의 문제가 컸습니다. 이건 한두명의 천재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랜 기간동안 훈련과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죠. 이건 전후부터 천천히 진행됐고 베트남전 쯤 가면 국군이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세계도 어느정도 인정하게 됩니다.

역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전쟁은 한반도에서 전쟁 경험을 쌓는데는 큰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우선 양을 늘리고 우선 최전방의 방어에만 너무 치중하게 됐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때 국군의 문제는 그거였습니다. 낙동강까지 밀렸을 때 빛을 발했던 의지는 북진 과정에서 헤이해졌고, 중공군의 공포에 눌려버립니다. 그나마 남은 의지를 전투력으로 이어줄 정도의 조직력이 없었습니다. 무작정 수만 늘렸고, 양을 늘린만큼 질이 더 떨어졌죠. 여기서 필요했던 건, 미군이 원했던 건 몇 배나 되는 적과 맞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조직력이었습니다. 국군은 여기에 너무나도 미달됐습니다.

이승만은 미군이 그저 무기와 물자만 지원해주면 국군이 잘 나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뭐 이승만 정부는 전혀 다른 쪽으로 국군이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걸 증명해 버렸지만요 -_-;

중공군 6차 공세 이후 미군은 국군의 체질을 바꾸는 데 몰두합니다. 보다 현대화된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였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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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공세가 끝났으니 이제 뭘 해야 될까요. 반격해야죠. 리지웨이는 곧바로 위력수색을 실시하고 진격을 개시합니다. 이렇게 5월 초부터 4월 공세 때 잃었던 지역을 수복하는데는 성공했죠. 하지만 10일부터 적의 강력한 방어에 부딪히고 적의 대규모 병력의 이동이 발견되면서 바로 방어로 전환합니다.

5차 공세에서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여전히 공산군은 너무 많았습니다. 거기에 이들의 다음 목표가 어딜지가 문제였죠. 일단 UN군은 역시 서부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진강부터 많이 가 봐야 춘천 쪽이었죠.

우선 화력으로 상대하기 위해 거대한 철조망 작업이 개시됩니다. 철조망과 장벽을 통해 아군을 보호하고 다가오는 적을 화력으로 상대하려는 생각이었죠.

또한 공산군에 병력으로 밀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병력을 끌어모읍니다. 후방에서 빨치산을 맡고 있던 국군 8사단도 다시 예비대로 전선에 투입됐죠. 그러고도 병력은 적었고, 다른 쪽을 빼서 적의 주공으로 예상되는 쪽에 넣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서부전선의 미 1군단은 미 1 기병사단과 미 25사단, 영연방 29여단, 국군 1사단이 배치됩니다. 철원-동두천 방향에는 미 9군단으로 미 7사단과 24사단, 영연방 28여단(전 27여단), 187 공수연대, 국군 2, 6사단이 배치됐구요. 춘천-홍천 쪽은 미 10군단 예하 미 2사단과 해병사단, 국군 5사단이 배치됩니다. 여기서 알몬드는 자기 쪽이 더 급하다고 판단, 국군 3군단에서 7사단을 빼 옵니다.

태백산맥에는 서쪽에 국군 3군단이 3, 9군단을 배치했고 동쪽에는 여전히 국군 1군단의 수도, 11사단이 있었습니다.

5월 10일 전까지 리지웨이와 밴플리트는 태백산맥 일대 산악지대에는 별다른 공격이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실제 지금까지 이 곳은 북한군만이 공격해 왔고, 보급이 힘든 산악지대를 중공군이 주공으로 삼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팽덕회는 그 허를 찌릅니다.

10일이 돼서야 중공군의 주공이 동부 산악지대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증원군이 필요했지만, 보낼 병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미 24, 25사단 중 하나를 빼서 보낼까 했지만 공세 전까지 도착할 수 없었고, 뺀 곳에 중공군이 들이닥치면 또 문제가 될 것이었습니다. 아군의 방어선인 노네임선에 종심은 없었고, 그 선에 배치된 병력이 적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결국 유사시 예비인 미 3사단을 보낼 준비를 하고 국군이 버텨주기를 바랐죠. 지형이 험한만큼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구요.

적의 공세 직전에 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면 미 3사단이 좀 더 빨리 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필 14~15일에 날씨가 안 좋아서 공군이 정보 수집에 실패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공세가 시작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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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는 국군 3, 5, 7, 9사단을 모두 섬멸하기 위해 3중 양익 포위 작전을 계획합니다.

첫 번째 포위망은 중공군 20군(3개 사단)이 국군 7사단을 공격, 이를 돌파해 오마치 고개로 가고 북한군 5군단(4개 사단)이 국군 3사단을 돌파해 오마치에서 중공군과 연결, 현리 일대의 3, 7, 9사단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포위망은 중공군 27군이 5, 7사단 사이를 돌파하고 북한군 2군단(2개 사단)이 국군 1, 3군단 사이를 돌파, 남으로 철수하는 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포위망은 중공군 12군이 국군 5사단을 돌파, 동쪽에서는 북한군 2군단 1개 사단과 3군단 2개 사단이 2군단 주력의 뒤를 이어 남쪽으로 진격, 가장 큰 포위망을 만들어 남은 국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것이었죠.

4개 사단을 섬멸하기 위해 18개 사단이 동원된 것이었죠.

물론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중공군 15군은 미 2사단을 공격, 60군은 미 1 해병사단을 유인해 포위, 63군은 가평의 청평천 일대에 있는 국군 6사단을 섬멸하기로 합니다. 견제의 느낌이 강했지만 동부전선의 국군이 뚫리면 바로 이들 역시 포위섬멸할 예정이었죠.

한편 64군은 미 24사단을, 65군과 북한군 1군단은 국군 1사단을 상대하기로 합니다. 이 역시 견제의 의미가 (더) 강했지만, 공세가 잘 될 경우 어찌될지 몰랐죠.

이렇게 한국전쟁 최대의 패전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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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에서 하달된 작전 명령상의 전투지경선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군단 예하 2개 사단의 주보급로가 하진부리-상남리-오마치-용포-현리로 이어진 단차선인데, 왼쪽에 인접한 미 제10군단의 전투지경선은 오마치 동쪽으로 잘려 나가 그 군단 관할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부연하면 군단 보급소가 하진부리(일부는 강릉)에 있음을 고려할 때 주보급로의 상체와 하체는 우리 군단에 속하고 복부는 남의 군단에 속하는 기현상이었다." - 유재흥


시작부터 3군단은 미 10군단에 7사단을 뺏기게 됩니다. 예하부대를 뺏기는 것 자체도 좋지 않았지만 더 큰 문제는 3군단의 보급로가 미 10군단 쪽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군단사령부가 있던 하진부리에서 서쪽 7사단 지역으로 갔다가 현리로 들어가는 식이었거든요. 이 사이에는 고개가 다섯 개 있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오마치(오미재) 고개였습니다.

유재흥은 이 곳에 예비대인 29연대를 투입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나왔죠.


"누구 나와바리에서 영업하는 거임?"

10군단장 알몬드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병력을 빼라고 했죠. 유재흥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마치가 우리 군단에게는 매우 중요한 지형이므로 우리가 경계하는 것이며 이 조치가 귀 군단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귀 군단에 배속된 국군 7사단에서 이곳에 병력을 배치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경계부대를 철수시킬 용의가 있다."

하지만 알몬드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빼라고 요구합니다. 유재흥은 일단 주력은 빼면서도 한 개 대대는 남겨뒀지만 이마저도 빼라고 했고, 아예 밴플리트에게 이를 보고했죠. 밴플리트는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10군단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5월 11일 남은 병력이 철수하면서 오마치에는 단 한 명의 병사도 남지 않게 됩니다.

비극의 전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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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사단 지역은 방어하기가 비교적 수월한 곳이었다. 앞에 소양강이 있었고, 적이 강을 건너면 다시 경사각이 60도가 넘는 절벽 같은 지역을 올라야 했다. 게다가 중공군은 공격 직전 4일 동안 연합군의 공중폭격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7사단은 무너졌다. 중공군이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국군은 진지를 이탈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적군의 정밀한 공격준비사격에 놀랐고, 뒤이어 통신이 두절되면서 지휘통제 체계가 마비됐기 때문이었다." - 백선엽

시작은 16일 16:30부터 시작된 거대한 공격준비사격이었습니다. 중공군 참전 이후 가장 강력하고 정확했다고 합니다. 한 시간의 포격은 많은 것을 앗아갔습니다. 연대 지휘소와 대대 관측소가 피격됐고, 유선이 두절되면서 각 부대는 물론 미 10군단과의 연락도 끊겨버렸죠.

눈 앞의 강, 절벽에 가까운 전면이 있었지만 7사단은 이 포격만으로 공포에 빠졌고, 마비돼 버립니다. 굳건히 지키기는커녕 방어를 생각하지 않고 분산돼 버렸죠. 중공군은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20군과 27군 예하 6개 사단이었습니다. 돌파 시각은 16일 20:30이었다고 합니다.

5사단은 그나마 좀 더 버팁니다. 16일 17:30부터 시작된 적의 공세에 밤 동안 버텼지만, 17일 03:30에 철수를 하게 됩니다. 정면의 적도 적이었지만 우측의 7사단의 붕괴 때문이었죠.

바로 이 때, 미 2사단 23연대의 전차 12대가 중공군의 돌파구 확대를 막았고, 5사단 35연대가 가마봉에서 중공군을 막아내면서 약간의 시간을 벌게 됩니다. 중공군은 35연대의 방어를 뚫지 못 하고 우회해야 했죠. 한 시간 한 시간이 아군에게는 소중했습니다.

5사단은 이후에도 계속 축차 지연전을 벌이며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법니다. 그리고 미 2사단은 5, 7연대의 후퇴로 또 다시 포위되고 말았지만, 어떻게든 버티면서 돌파구 확대를 막아냈죠. 이렇게 2사단은 인디언 태형장에서부터 원주(3차 공세), 지평리(4차 공세), 당시의 벙커 고지까지 4번이나 중공군에 포위당하는 신기록을 만들어냅니다 (...)

어쨌든 문제는 완전 붕괴돼버린 7사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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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저녁, 적의 공격이 3군단 사령부에 전해집니다. 참모들은 군단의 좌측이 뚫리는 걸 걱정해 후퇴를 건의했고, 유재흥은 이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다만 확실한 상황을 모르니 미 10군단에 상황을 문의했죠. 돌아온 답은 "우리 군단 정면은 아무 이상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음모론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대의 전지전능함"입니다. 상대가 모든 걸 알지 않으면 음모론은 성립되지 않고, 그래야 그런 상황에도 음모를 알게 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되니까요. 남침유도론부터 시작되는 미국의 음모론 역시 "미국은 모든 걸 알고 있고 계획하고 있었다"는 걸 전제로 시작합니다.

+) 때문에 친미 쪽보다 반미 쪽이 미국, 미군의 능력을 더 과대평가하게 되죠.

현리 전투에서 나오는 음모론 역시 미 10군단 알몬드가 모든 걸 알고 있었고, 일부러 국군 3군단을 사지로 몰았다는 것입니다. 일부러 3군단을 뚫리게 해서 중공군을 유인, 섬멸하려 했다는 것이었죠.

그에 반박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미군도 그 정도는 몰랐다"입니다. 미군의 이상한 행동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그건 모든 걸 알고 계획한 것이 아닌 모르고 삽질한 것으로 봐야죠.

이 때 미 10군단은 국군 7사단과 연락이 끊겼고, 어떤 상황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별 일 없을 거다고 뻗댄 것이었죠.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7사단이 그렇게 빨리 붕괴됐다는 것과 중공군의 진출이 그렇게 빨랐다는 것을 예상할 정도는 못 됐습니다. 이는 유재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설령 7사단이 뚫려도 3군단의 야간 철수를 감행할 정도로 전황이 악화되진 않았을 거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간 철수를 감행하면 아군이 알아서 붕괴할 가능성이 있었고,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판단했죠.

하지만 7사단의 붕괴는 생각보다 컸고, 중공군의 진격 역시 생각보다 빨랐습니다.

16일 밤부터 17일까지, 중공군은 무려 30km를 전진합니다. 시간당 2.5km의 진격속도였습니다. 차량의 도움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전투 중의 진격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속도였죠.

하지만 중공군은 이를 성공시킵니다. 후퇴하는 7사단 병력보다 더 빠른 진격이었습니다. 이렇게 국군 3군단의 퇴로가 막혀버립니다.

결정적으로 7사단은 이를 미 10군단에도, 국군 3군단에도 이를 알리지 못 하고 철수, 아니 도주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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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9군단은 28연대와 30연대를 전방에 두고 29연대를 예비로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6일 20시경 국군 7사단의 패잔병이 들어오면서 7사단의 붕괴를 알게 되었고, 급히 군단에 오마치 고개에 대한 병력 투입을 건의합니다. 하지만 유재흥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 판단해서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죠. 5일 동안이나 알몬드와 맞섰던 그였습니다. 더 이상 고집부리기는 힘들었고, 고집부릴 상황까지는 아니라 판단했죠.

거기다 9사단은 이 때까지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9사단의 건재는 상황판단을 더 힘들게 했죠. 중공군이 온 것은 17일 01시경, 역시 중공군의 공격은 매서웠고, 03시에 철수를 결심하게 됩니다. 여기서도 유재흥은 조금 더 기다리라면서 철수를 허가하지 않았죠.

04시가 되면서 최석 사단장은 철수를 결심, 현리로 향합니다. 중공군은 소규모 기습을 해올 뿐 전면 공격은 하지 않아서 주력이 별 피해없이 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꽹가리 소리는 장병들을 위축시키이 충분했죠. 거기다 7사단의 패잔병들도 모이면서 7사단의 붕괴 소식이 장병들에게 퍼져 버립니다.

그 동안 동쪽의 3사단은 북한군 5군단의 공격을 받습니다. 22연대 지휘소가 습격당하는 상황에서도 방어를 해내긴 했지만, 17일부터 이웃한 9사단에 7사단의 철수 소식과 오마치고개 피탈 소식이 들려옵니다. 9사단장 최석은 이와 함께 3사단에 오마치고개 돌파를 요구했지만 제 코가 석자였죠. 애초에 오마치고개 근처에 있던 9사단이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에서 3사단이 뭘 하겠어요 - -;

사단장 김종오는 9사단에 맞춰 철수를 명령합니다. 철수는 17일 13시까지 완료됐죠.

양 사단의 철수지점은 현리였습니다. 이렇게 두 사단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채 현리에 집결합니다.

5, 7사단의 후퇴, 3, 9사단의 현리로의 철수, 이 모든 것은 단 하루만에 이루어집니다. 4차 공세 당시 횡성 전투와 비슷하죠.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때 목표가 된 국군은 4개 사단이나 됐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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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치 고개에 신경을 쓰면서도 실기(失機)하고 말았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만 해도 적이 하룻밤 사이에 군 전선을 뚫고 30km나 되는 원거리를 주파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으며, 적의 유격 전술을 좀 이해 못한 것을 자책하고 있다." - 유재흥

유재흥은 17일 낮까지 3, 9사단의 후퇴 소식과 적이 오마치 고개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때 오마치를 점령한 적이 얼마나 됐을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1개 중대 수준부터 1개 사단까지 다양하죠.

하지만 그 때까지도 유재흥은 상황을 그리 나쁘게 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전선이 단 하루만에 30km까지 밀릴 거라고 생각 못 한 것이었죠. 오마치 고개에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잘못된 보고일 것이다. 만약 적 부대가 오마치를 차단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수 침투부대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이는 미 10군단에서 아직도 제대로 상황판단을 못 한 것이 컸습니다. 오마치는 여전히 미 10군단 지역이었고, 그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말이 없었죠. 오히려 간단히 오마치로 철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꾸물거리고 있는 3, 9사단이 더 이상한 상황이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9사단장 최석은 현리 북쪽을 방어하면서 대대 병력을 뽑아 오마치를 돌파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중지됐죠. 오마치를 막은 적이 2개 연대로 추정됐고, 아군이 아직 현리에 계속 집결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3사단장 김종오는 13시에 회의를 열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고민합니다. 미 고문관들은 오마치를 돌파하거나 방태산에서 방어를 하자고 건의했지만, 그는 이 둘을 모두 거부합니다. 오마치를 돌파하기엔 아직 사단 병력이 계속 오고 있었고, 어떤 걸 결정하자니 아직 오마치의 상황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었죠.

이렇게 시간은 흘러만 갔고, 하진부리에 있던 유재흥은 직접 현리로 가게 됩니다. 시기는 꽤 빨랐습니다. 아군의 현지 집결이 끝났을 무렵인 14시에 연락기로 현리에 도착, 회의를 열었죠.

여기서 양 사단에서 각기 한 개 연대씩을 뽑아 오마치를 돌파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특히 미리 오마치 돌파를 생각했던 최석이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유재흥은 이를 믿고 하진부리의 군단 지휘소로 돌아갑니다. 이 때가 15:30, 사단장들이 건의한 보급품 투하 역시 17시에 공중 투하해주게 되었죠.

김종오, 최석 사단장은 각기 18, 30연대를 빼 현리 돌파를 준비합니다. 명령이 내려진 시각은 17시, 작전개시 시각은 21시였습니다. 특히 3사단의 18연대는 진백골부대로 그 용맹이 자자하던 부대였습니다. 두 사단 다 건재했고 유재흥은 돌파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들려온 소식은 유재흥 자신은 물론 UN군도, 적 중공군도 경악할만한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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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같았으면 여기서 김종오 장군님이 다 해주실거야 이렇게 갔을 거 같은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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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13 23:37
수정 아이콘
군복무 시절 도서관에서 봤던 전사 기록에..오마치 고개엔 최초 새벽에 중대 단위의 병력에 의해 점령당했다..라고 본적이 있는 것 같네요. 덜덜.. 최종적으로 얼마 규모였을지..
눈시BBbr
12/11/13 23:40
수정 아이콘
다 말이 다른 게 문제죠. 아예 중대단위가 끝이었는데 걔네가 총 좀 쏘니까 다 도망갔다는 말도 있습니다. -_-a 이게 시간 단위로 갈려서 제대로 밝혀지기가 힘들죠. 한중북의 참전자 및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다면 모를까...
다만 포위망 돌파 시도 당시는 2개 연대가 있다고 판단했고, 실제 중공군의 1차 포위망이 이 곳을 목표로 한 것까지는 맞는 것 같습니다
Je ne sais quoi
12/11/14 08:31
수정 아이콘
현리가 처가가 있는 현리인줄 알았더니 그곳은 아니군요 ^^;
눈시BBbr
12/11/14 15:11
수정 아이콘
^^; 좀 동쪽으로 옮겨왔죠. 네이버로 위치 찾다가 이름만 똑같고 전혀 다른 지역이 나와서 당황할 떄가 많아요;
그리메
12/11/14 08:56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6.25 전사는 사실 고지전으로 퉁쳐지는 경우가 많던데 상당히 치열한 전개가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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