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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6/23 13:23:36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창군 - 폭풍 전야 1


남남북녀, 아니 남농북공의 산업 구조였던 한반도가 반으로 뚝 잘렸습니다. 남쪽은 일본, 만주, 중국에서는 물론 이북에서 월남한 이들로 인구가 갑자기 폭증하고 미군정의 삽질과 사회 혼란으로 식량난이 계속됐고, (그나마 6.25 무렵에는 먹고 살 만한 정도는 된 것 같습니다만....... -.-) 북한에서도 원래 식량자급률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소련군에 쌀까지 마구 줬으니 역시 식량난이 닥쳤죠.

뭐 이런저런 점들로 인해 분단이 고착화되는 상황에서도 남북 무역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습니다. 38선 전체에 걸쳐 56개의 남북교역 장소가 만들어졌고, 양 쪽 다 정보 수집을 위해 나름 관대하게 허용했죠. 여기서 한국은 육본에서 교역증을 발급했지만, 역시 보부상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근데, 이 무역의 실상을 보면 좀 화가 나실 겁니다.

"북한에서는 명란젓, 동태, 북어를 주민들이 이고 지고하여 38도선을 넘어 성동 2리 벌판에 갖다 놓으면 남한에서는 우마차에 군복기지(옷감), 군화(워커), 짚차 부품, 총기류가 올라왔다. 이때 나는 북한 측 사람이었지만 ‘저럴 수가 있을까’하고 남한이 크게 잘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 이정식, 개전 전에 월남

이걸 그냥 두고 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김석원이었죠. 그는 이걸 조사해서 이승만에게 직소, 49년 3월 31일부로 남북교역을 중단시킵니다. 하지만 정보 획득이라는 명목으로 한 교역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군고위층이 개입하고 있었죠.

1949년 4월, 그는 북한에서 넘어오는 북어 20여 트럭분과 비단 500여만원어차를 압수했고, 그걸 1사단 장병들을 위한 부식 및 음료수, 과일, 과자를 사는 데 쓰고 나머지는 1사단을 도와 준 주민들에게 지급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후폭풍이 뒤따랐죠. 어쨌든 자기 마음대로 처리한 것이었으니까요.


"누가 전하 아니 가카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랬슴까?"


"군수물자 팔고 명태 먹으니까 맛있든?"

김석원과 충돌한 이는 참모총장 채병덕, 그는 전봉덕 헌병사령관에게 그를 철저히 조사해 털어서 나오는 게 있다면 바로 구속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과정에서 김석원의 심복인 1사단 헌병대장 이풍우 소령도 잘렸고, 수사는 명륜동에 있는 김석원의 집과 그가 만든 성남중학교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털어서 나오는 게 없었고, 이를 알게 된 김석원은 더 노발대발했죠.

이승만은 그 사실을 알고 양 쪽을 어떻게 화해시켜 보려고 했는데, 김석원은 더 열만 내며 이 진상을 확실히 밝혀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다 잘립니다 -.-

이것이 이른바 북어 사건 내지 명태 사건으로 불리는 "남북교역 사건"입니다. 겉보기에는 김석원과 채병덕의 충돌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의외의 이면이 있습니다.

"얼마 후 안 일이지만 하주는 육본 고위 장성의 조카였다. 또 어떤 K국장은 하주가 자기 아버지라고 압력을 가해 오기도 했으나 나는 ‘내 아버지라도 못 풀어주겠다’고 버텼더니 마지막으로 진상조사라고 하면서 1개월이나 사단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부정은커녕 북어 대가리 하나 먹은 사실이 없음이 밝혀졌다." - 노병의 한

+) 그는 정작 자기 밥상에는 "북어 꼬리 하나 올려놓지 말라"고 했습니다 -.-a

분명 채병덕과 싸운 일임에도 그는 채병덕보다 다른 사람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죠. 저 K국장은 강문봉, 역시 이승만의 신임을 받고 있는 정치군인이었고, 그의 아버지 강윤철은 만주국에서 은행장을 지낸 이였습니다. 김석원은 이들을 비리의 주모자로 지목한 것이죠. 정작 그와 대립했던 채병덕 역시 무능이나 이승만의 딸랑이라는 면에서라면 모를까 부정축재라는 면에서 역시 털어서 나오는 게 없었습니다.

이승만이 이들을 보호했고, 일단 이승만 말을 들어야 되는데다 김석원의 독단 자체는 있었기에 채병덕이 앞에서 맞서긴 했지만, 정작 중요한 건 뒤에 숨어 있었다는 것이죠. 그 어려운 시기에도 군의 자산을 북한에 내다 팔고 술 안주거리나 사고 있던 자들이요. 이런 부정부패는 후에 국민방위군 사건이라는 끔찍한 일로 이어집니다. 뭐 지금도 군 기밀 내다 파는 장성들이 심심하면 나타나죠 -_-;

+) 이런 점에서 보면 일본군 출신들은 무능이라면 모를까 축재 등의 부분에선 스스로에 엄격했던 것 같습니다. 그 츠지 마사노부도 개인적인 면에서는 깨끗했던 걸 보면 일단 이런 건 제대로 가르친 것 같기도 해요. 아무튼 이 둘이 다 잘려서 만주군 출신이 일본군 출신을 몰아내는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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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성장은 50년이 되면 거의 끝납니다. 어차피 미국이 지원하지 않는 이상 더 늘릴 수도 없는 상태였죠. 거기다 이들은 북에서 계속 침투하는 빨치산들을 처리하느라 바빴죠. 이 과정에서 문경 양민학살 사건이 벌어집니다. 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 3소대 70여명이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었죠. 이것으로 86명이 희생됩니다.

개전 직전까지도 후방의 4개 사단은 물론 강원도 동쪽을 맡았던 8사단도 빨치산 토벌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북한군의 남침 준비는 마지막 단계까지 진행됩니다.

김일성은 인민해방군을 더 지원할까 하는 모택동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합니다. 이미 준비는 될만큼 됐다고 여긴 것이었죠.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공격 계획은 3단계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 38선 근처에 병력 집중
- 새로운 평화 통일 방법 제시, 남한은 반드시 거부할 것이므로 이에 맞서야 됨
- 옹진 반도 공격 동의. 전쟁은 속전속결로 해야 되며 남한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면 안 됨

그 때 북한에서는 소련군 고문단에 의한 훈련과 소련군 교범의 번역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공격 방식은 소련식의 기동전, 한국과 미국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작전을 완료한다는 것이었죠. 중요한 건 그 때가 언제냐는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이 원한 것은 6월이었습니다.

5월 29일, 스티코프는 소련에 보고서를 올립니다. 여기에는 6월 1일까지 신편 사단에 무기가 보급되며 전투 준비 완료는 6월 말로 예정돼 있다는 것, 주력부대는 5월 말에 이미 공격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개전 날짜를 6월 30일로 예정합니다. 그리고 더 늦출 수 없다고 주장했죠. 7월이면 장마가 시작될 것이고 그러면 작전을 9월로 연기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8월 15일이라는 아주 중요한 날짜가 들어 있었습니다. 소련이나 북한이나 (미군의 개입이 없다는 전제 하에) 남한 전역을 점령하는 것에 2주일에서 최대 2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고, 그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죠. 소련 고문단 측은 7월은 돼야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김일성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이 계획은 5월 말까지도 그를 위시로 한 최고 수뇌부만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꽤나 철저한 기밀 유지였죠. 구체적인 작전 계획이 완료된 것은 6월 15일, 병력의 38선 배치는 12일에 시작돼 23일에 끝납니다. 그의 머리속은 통일 조선 인민공화국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겁니다.

한편,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이런 북한군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상황을 낙관합니다. 설사 공격이 있다 해도 훈련이 완료되고 논밭이 얼어 전차의 기동에 유리한 겨울은 돼야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었죠. 여기에는 말이 갈립니다. 국군이 북한군 전차의 존재를 알렸지만 미국에게서 더 뜯어내려는 한국의 오버로 보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얘기로요. 일단 전차 자체는 있는 걸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군에게 준 무기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구요. 하지만 이게 먹히지 않으면서 개전 때 전차에 대한 충격만 더 커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_-;


대전차 논밭설의 본좌 마지논. 픽션입니다 ㅡ.ㅡ;

여기에 뻘이나 다름 없는 한국의 논 때문에 전차의 기동이 크게 제한될 것이라 여겨 국군에 전차를 주지 않았는데, 이게 어느 정도는 맞았습니다. 북한군의 전차는 맨 앞의 한 대가 격파되면 줄줄이 멈춰서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하지만 미국은 전차 그 자체의 위력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화전양면전술의 마지막 단계도 시작됩니다. 김일성은 6워 7일과 19일 두 차례에 걸쳐 대남 평화통일 제안을 합니다. 이들의 호소문에는 8월 15일 총선거로 최고입법기관회의를 서울에서 소집하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15~17일에 해주나 개성에서 평화 통일을 원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들의 대표자협의회 개최를 주장했고, "조국전선"의 기자들을 파견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물론 이 대상에는 이승만 등 한국 정부의 수뇌부들은 모두 빠져 있었습니다. 10일에 도착한 조국전선 기자 3명은 유헨한위를 만났고, 11일에는 38선을 넘어 내려옵니다.

그리고 한국 경찰은 이들에 총격을 가하고 체포합니다. 국제사회는 당연히 이를 냉소적으로 보았구요. 여기에 이어 19일에는 21일에 각각의 대표단의 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안했고, 이 역시 이승만 등 한국 지도자들을 배제하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북한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명분을 쥐려 했고, 평화 통일 선전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법 성공했다고 봐도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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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김일성은 전면 공격의 정보가 한국에 빠져나가지 않았을지 걱정합니다. 20~21일에 서부, 중부, 동부전선에서 하사관이 한 명씩 월남했고, 그 외에 작은 실종 사건이 여러 차례 벌어졌거든요. 이에 대한 김일성의 징징으로 개전일이 6월 25일로 앞당겨졌다는 것이 증언의 끝인데, 이것까지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15일에 이미 개전이 25일로 예정돼 있었죠. 하지만 여기서 큰 게 바뀌었으니, 옹진 반도의 국지전을 전면전으로 확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전 전선에 걸친 전면전으로 바뀌었죠. 스탈린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개전 4일 전이었습니다.

"작전을 위한 모든 예비적 조치들이 6월 24일에 완료되었습니다. (중략) 반공격에 대한 명령은 조선인민군 병사와 군관들로부터 대단한 열광을 자아냈습니다. 부대들은 6월 24일 24:00까지 각자의 출발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현지 시각으로 4시 40분에 군사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중략) 최초 3시간 안에 개별 부대들과 대형은 3~5km 진격했습니다. 인민군대의 공격은 적을 완전히 놀라게 하였습니다." - 6월 26일 스티코프의 비밀 보고

6월 21일 마지막 승인 이후, 스탈린은 암호 전문을 발송하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이후 50년 말까지 양국 사이에는 전보 교신이 중단되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북한이 독자적으로 치르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죠. 소련 붕괴까지 이것은 철저히 기밀로 붙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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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북한의 움직임 중 상당수는 이미 국군과 미군에 전달된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월남민들과 북에 투입됐던 KLO 부대에게서 참 다양한 정보를 얻습니다. 이 KLO 부대에서 활동한 한국인 대원들만 전쟁 전에 200명에 달했다고 하죠. 여기에는 중공군의 북한군 합류와 38선 인근 주민들의 소개, 북한군의 이동 등 개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계속 알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군과 미군은 이를 무시합니다.

전쟁 발발 가능성은 다들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한 네르프 아니 첩보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실행 가능성은 완전히 무시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죠. 북한은 소련의 괴뢰였으니까요.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면 소련에서 확실한 모습이 나타나야 할 것이고, 그런 징후를 찾지 못 했으며, 스탈린은 한국을 공격한다는 것 자체가 미국과 유엔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라는 거였습니다. 김일성은 소련 말만 듣는 꼭두각시일 뿐이니 북한 단독의 남침은 없을 것이었구요. 이렇게 미국은 완벽하게 속아 넘어갑니다. 스탈린은 마지막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남침 준비는 이미 완료돼 있었으니까요. 개전 후,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북한의 남침에 소련의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에 당황했고, 더 큰 혼란에 빠집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이런 모습을 보며 미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임을 더욱 확신하게 됐구요. 이런 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남침유도론이죠.

+) 사실 남침유도론이 맞다고 하더라도 거기 넘어가서 동족상잔을 저지른 놈이 더 나쁜 놈이죠. 여자가 야한 옷 입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강간범의 말이랑 뭐가 다른 겁니까.

자, 그럼 우리 쪽 상황을 보기 전에 양 쪽의 병력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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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당시 국군과 인민군의 차이는 거의 두 배, 주로 10만 VS 20만으로 대표됩니다. 하지만 여기엔 좀 통계의 장난이 끼어 있죠.

당시 국군의 병력이 해공군도 합쳐 10만 3천여명, 육군만으로는 9만 4천명 정도 됐던 것까지는 공통적인 사항입니다. 하지만 정병준 교수는 여기에 4만의 경찰과 3만 7천 가까이로 추정되는 예비군을 넣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예비군은 이범석, 지청천 등이 조직한 청년단을 합쳐서 만든 (광복군 출신 네임드 둘을 경쟁 붙여놓고 그걸 다 먹는 걸 보면 이승만의 용인술이 대단하긴 합니다 ㅡ.ㅡ) 대한청년단과 때를 같이해서 만든 예비군 조직 호국군, 그리고 호국군을 폐지한 후 이와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만든 청년방위대가 있습니다.

다만 이걸 확실한 전력으로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경찰이 국군보다 무장이 좋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봐야 경찰, 전면전에서 쓸 수 있을 정도는 못 되고 예비군 역시 계속 변화를 거치면서 제대로 된 전력이 됐다고 할 순 없으니까요. 국군이 패한 지역에서의 게릴라나 (주로 전라도 지역) 수복한 후의 적 게릴라 토벌 및 치안 유지 정도에나 쓸 수 있었죠. 이들이 국군에 입대한 수도 많겠지만, 국군도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판에 처음부터 다시 훈련시켜야 될 정도였죠. 아니 훈련이나 시키면 다행이었지만 - -;;

그리고 이 청년방위대를 이어 국가에서 대규모로 확대한 예비군 조직이....................


국민방위군입니다 ㅡ_ㅡ.........

아무튼 이들을 실 전력으로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미군이나 북한이나 이들의 전력을 한국의 군사력에 포함시킨 건 맞는 것 같구요. 그리고 중요한 건, 국군에서는 이런 것을 빼고 계산하면서 북한군에는 넣었다는 점입니다.

개전 직전 북한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참 많은 말이 있지만 -_-; 일단 소련에서 하루 단위로 작성한 "전투일보"에서는 육군 17만 5천에 해공군 합쳐 18만 8천여명입니다. 여기엔 10개 보병사단, 4개 경비여단 등이 있었죠. 문제는 개전 당시 10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편성 중이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경비여단부터 경찰여단 등 경찰이나 예비군에 가까운 병력 역시 급히 군대에 투입됐고, 훈련 및 무기 보급 등에서 부족했구요. 이 점에서 정병준 교수는 북한군의 병력과 전투력이 과장돼 있다고 평가합니다. 2:1 수준의 병력 자체가 경찰 등까지 인민군에 집어넣은 북한에서 과장한 것이고, 그것을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 근거로 쓰이는 것이 낙동강 전선에 도달한 북한군이 10만이 안 됐으며, 그마저도 남한 내에서의 징병으로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모든 면에서 동감하진 않습니다. 어쨌든 국군이 경찰 및 예비군과 연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반면 그게 맞다 하더라도 북한군은 그들을 확실히 전력에 포함하고 작전을 짠 상태였으니까요. 이 점에서 완전 2:1까지는 몰라도 1.6배 정도 되는 양쪽의 병력 수를 굳이 고쳐야 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10만의 국군 내에서도 훈련이 부족한 병력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북한이 2:1이라는 압도적인 수로 낙동강까지 계속 밀고 내려온 것까지는 아니며, 훈련 부족이나 기동, 보급 등의 부족과 곧바로 투입된 미 해공군의 방해로 그 전력이 약했다는 점은 맞는 것 같습니다. 북한군의 주력은 개전 초반 밀고 내려왔던 바로 그들이었고 국군의 지연전 및 미군의 작전으로 낙동강에 도달했을 때는 주력의 상당수가 상한 상태였고, 그건 낙동강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 큰 힘이 됐습니다.

저의 결론을 내리자면 북한군의 전력에도 허수가 많았긴 했지만 국군 역시 허수로 볼 게 많았으니 전체적으로 본다면 2:1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 틀렸다까지는 아니지 않을까입니다. -.-a 어쨌든 전차와 항공 전력에서의 차이도 컸구요. 넴, 계속 공부할게요.

아무튼 개전 당시 38선에서의 전력은 확실히 큰 차이가 났습니다.


가장 서쪽인 옹진 반도에 있는 국군은 17연대, 연대장은 백인엽으로 3600명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경찰 등의 전력을 합하면 더 늘어나겠지만요. (브루스 커밍스는 국군만으로 4000이 넘었다고 하며 이들이 북침을 시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군은 여기에 팔로군에서 활동했던 방호산의 6사단 14연대와 최현이 이끄는 38경비 3여단을 투입했고, 105 땅크(-_-)여단 일부도 여기에 투입합니다. 투입된 병력은 1만에서 1만 5천 정도로 추측합니다. 1만 쪽이 맞는 것 같아요.

백인엽은 백선엽의 동생으로 회고록에서 자기보다 동생을 더 기억한다고 할 정도로 맹장이었습니다. 고립된 옹진에 투입될 만한 이였지만, 성격은 개차반 아니 정말 미친 개였습니다. -_-; 전후에도 참 형의 명성을 많이 깎아먹었죠.

최광의 1사단과 방호산의 6사단 주력은 개성을 공격합니다. 여길 막고 있던 국군은 백선엽이 이끄는 1사단, 원래 병력은 9천 정도입니다만 추가 병력을 지원받아서 1만을 넘깁니다. 북한군의 병력은 2만 1천 정도. 이들에게는 개성을 점령하고 1사단을 격파한 후 서울과 김포로 병력을 나눠 진격하기로 했죠.

참고로 이 때 백선엽은 교육 차 서울로 가서 가족과 있는 상태였습니다. (...)

그리고 서울로 가기 가장 좋은 길인 의정부에는 국군 7사단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여기에 3, 4사단과 105 기갑여단 소속 107, 109 전차연대를 투입합니다. 그 병력만 3만 4천, 여기에 후방에 13사단 역시 대기 중이었습니다. 이들은 서울을 점령하는 적의 주력이었습니다. 아군 병력은 7500 정도였죠. 사단장은... 유재흥이었습니다 ( - -)a 근데 다음편에 말 하겠지만 이건 그가 억울한 편이예요.

북한군 1군단이 경기도로 향하는 동안, 2군단은 강원도로 향합니다.

춘천 방면을 맡은 아군은 6사단, 약 9천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2군단의 주력 2사단과 7사단을 상대하게 됩니다. 병력은 2만 4천, 그 배후에는 15사단이 대기 중이었구요. 이들의 목표는 춘천-포천을 돌파한 후 서울의 후방을 포위해 국군을 섬멸하는 것이었죠.

마지막으로 동해안에 5사단과 1경비여단을 투입해 양양에서 강릉-삼척으로 진출하고 동시에 766부대와 549부대를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 수륙 합공으로 국군의 8사단을 공격하려 했죠. 이후에는 포항-부산까지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병력은 약 2만 정도, 아군은 7천 정도였습니다. 사단장은 이성가.

이런 병력들은 각 자료마다 많은 차이가 납니다. 특히 북한 쪽은 과장된 쪽으로 쓸 거고 국군은 축소하려고 할 겁니다. 각 사단의 병력들이 이렇게 차이나는 이유는 1사단의 경우 다른 연대에서 병력을 배속 받아서, 7사단은 많은 수가 후방에서 교육 훈련을 받고 있어서, 8사단의 경우 연대가 하나 부족했습니다. 6사단의 병력이 아마 당시 사단의 편재에 가장 맞을 거구요. 어찌됐든 각 축선마다 북한의 병력이 압도적이었고, 특히 주공이었던 의정부 축선은 다수의 병력과 전차의 대부분이 투입됐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국군의 준비는...... 참 어이가 없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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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의 뒤를 이어 국방장관이 된 것은 신성모, 정말 일단 독립운동 했으면 인정할 수밖에 없음에도 "독립운동 한 것밖에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 임정에서 이승만을 탄핵하기도 했던 그는 해방 후에는 이승만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고, 이런 아부와 영어 실력으로 이승만의 신임을 받아 초고속 승진, 국방장관까지 오릅니다. 오죽했으면 이승만을 얘기할 때마다 눈물을 흘려서 별명이 낙루장관이었습니다. 임정에서 군사위원회를 맡기도 했지만 정작 군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이였죠.


그리고 짤렸던 채병덕은 이응준이 2개 대대의 월북 사건으로 짤리자 다시 돌아옵니다. 하지만... 역시 무능의 아이콘이었죠.

이들이 벌인 일은 무능을 넘어서 아예 간첩으로 의심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황상 참 근거가 많죠 -_-; 아래는 이형근이 주장한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입니다.

- 일선 부대의 적정 보고를 묵살
- 주요 지휘관의 인사이동이 6월 10일
-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13일부터 20일까지)
- 비상경계령이 24일 자정에 해제된 것
-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절반에게 휴가와 외출, 외박을 시킨 것
- 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가 6월 24일 밤에 열린 것
- 남침 이후 서울 북방의 축차 투입
- 방송으로는 국군이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한 것
- 한강교 조기폭파
- (이에 대한 책임으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 집행

생각해 보면 참 어이 없는 일입니다. 6월 25일 전에 각 지휘관들이 대거 교체됐고, 이들은 예하 병력 및 지형 등에 대한 숙지 없이 전쟁을 맞이해야 됐습니다.

그리고 24일 자정, 비상경계령이 풀리면서 전 장병의 휴가와 외출 외박이 풀립니다. 이 때문에 크게 절반의 병력이 빠집니다. 이걸 막은 것은 6사단 뿐, 그리고 북한군을 잘 막은 것 역시 이 6사단 뿐이었습니다.

+) 위의 국군의 병력이 이렇게 휴가 나간 후의 병력인이 원래 병력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후자인 것 같습니다. 7사단의 경우 남은 병력이 4500 정도였거든요. 북한군은 3만 넘게 오는데 말이죠 -_-;

국군에서 이걸 대비하는 움직임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어쨌든 남침에 대한 첩보는 계속 들어오고 있었고, 이 때문에 김홍일과 이응준은 후방의 3개 사단을 전방으로 끌어올려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거부되죠.

+) 이 때 김홍일은 육군사관학교부터 육군참모학교 등 교육에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24일 밤에 있었던 댄스파티까지... 그렇게 장병들은 집으로 가 모내기를 하고 장성들은 술에 취해 있는 동안 북한군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작전 개시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6월 25일이었구요. 북에서는 한창 준비를 하는 동안, 남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전쟁 대비가 안 돼 있었습니다. 마치 이 날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요. 북한에서 이에 맞춰 계획이 변경된 것은 없습니다. 단지 그 날에 맞춰 이렇게 됐을 뿐이죠.

제가 생각해도 낮은 확률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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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서는 이 상황의 허와 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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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레브
12/06/23 15:33
수정 아이콘
그러고보니 이 전쟁도 그렇고 관심갖았던 전쟁들중 2차대전만빼고 전전의 군력과 지휘관을 잘몰랐네요
좋은 글 고마와요 :)
가을독백
12/06/23 21:00
수정 아이콘
6.25 전쟁이 대규모 전면전이었던것도 있지만, 속절없이 낙동강까지 쭉 밀린 것에 대해서 우리 군대가 호구였나(..)라는 생각을 가졌던게 제가 군 복무하기 전의 전쟁사를 읽었을때의 생각이었습니다만, 북한이 정말 철저하고 치밀하게 준비를 잘 했던 것이었네요.
북한군은 주적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전술을 정말 잘 짯다는 생각은 듭니다. 적 고위 장성에게까지 줄을 닿아서 완전 무장해제(저정도면 무장해제나 다름이 없지요.)를 시켰으니 말입니다. 10대 미스테리중 마지막줄인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이라는 문구를 보니, 그 대령님이 북침을 미리 알았다고 생각이 드네요.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나오지 않습니까. 먼저 범죄와 관련된 사실을 혼자 알게 된 자는 어떻게든 먼저 죽는 것 말이죠.
wish burn
12/06/23 21:26
수정 아이콘
채병덕은.. 목숨으로 죄값을 치뤘으니...
잘못된 곳에 잘못된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뚫훓쀓꿿삟낅
12/06/23 23:18
수정 아이콘
채병덕이 정말 전형적인
적보다 더 무서운 무능한 지휘관이죠.....

예전에 군대에 있을때 국방일보에서 6.25참전한 장교출신중에 어느분이었는진 기억안나는데 옛날이야기하는 코너에서 채병덕에 관한 일화가 있었는데 참 가지가지한다는 생각이 들었던-_-;;;;;;
Je ne sais quoi
12/06/24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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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프로젝트에도 그렇지만 이런 나라의 전쟁을 준비할 때는 당연히 치밀해야 할텐데... 그래도 소련과 김일성의 준비가 굉장했군요.
12/06/2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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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에 나오겠지만
의정부 축차 투입은 이형근이 일 벌여놓고 잘린 다음에 유재흥이 패잔병 처리하느라 개고생한 걸로 밝혀졌죠.
부대 다 날려먹고 오죽하면 대노한 채병덕한테 말채찍-_- 으로 얻어맞았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래놓고 살아남은 자가 이긴거라는 격언답게 책임을 몽땅 채병덕에게 뒤집어 씌우고
10대 미스터리에 의정부 축차 투입을 넣기까지 했으니 이건 뭐 용자 중의 용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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