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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0/01 09:28:04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그 때 그 날 - 임오화변
1. 윤 5월 13일
영조는 숙종이 모셔져 있는 선원전으로 향합니다. 그가 무슨 일을 결심할 때마다 가서 절 한 후 행했죠. 좋은 날에는 만안문으로, 나쁜 날에는 경화문으로 갔습니다. 세자와 아내 혜경궁은 그의 행적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영조는 경화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자는 혜경궁에게 "내가 이제 죽겠다"고 했지만, 세손의 휘항, 방한모를 가져다 달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병이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죠. 하필 세손 걸로 한 것은, 의대증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기가 그만큼 병이 심하다는 걸 알리고 세손의 물건을 통해 영조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혜경궁은 작아서 맞지 않을 거라고 했고, 세자는 "자네 참 흉하고 무서운 사람일세"라고 화를 냈습니다. 그제야 혜경궁은 세손 걸 가져오려 하지만 그만두라고 합니다.
애석하게도 이게 아내가 남편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실록에서는 이 때 세자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으려고 해서 영조가 독촉했다고 합니다. 죽음을 예감했지만, 역시 죽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억지로 끌려간 세자, 영조가 데리고 간 곳은 휘령전, 정성왕후의 혼령이 모셔진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외칩니다.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세자는 물론 신하들도 어리둥절하는 사이, 영조는 다음 말을 잇습니다.
"정성 왕후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그의 입에서는 끔찍한 말이 화살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호위병력이 협력군에게 담을 4, 5겹으로 막게 했고, 칼을 바깥 쪽으로 뽑아 들게 했습니다. 이렇게 휘령전은 철저히 고립됩니다. 한편 그 말을 들은 영의정 신만 등이 그제야 들어오는데, 일은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세자는 관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려라!"
이어 그는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노라!"
영조는 급히 들어온 신하들을 모두 파직시키며 더 강하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 때 세손이 들어와 세자 뒤에 엎드려 아버지를 살려 달라 빌었지만, 영조는 그를 안아서 밖으로 데려가게 합니다.
그는 칼을 들고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렸다고 합니다. 야사에선 이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죠.
"네가 죽을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겠다"
"네가 자결하면 조선국 세자의 이름을 잃지는 않을 것이니 속히 자결하라"
"내가 죽으면 조선의 사백 년 종사가 다 망하겠지만, 네가 죽으면 종사는 보존할 수 있으니, 네가 죽는 것이 옳으니라."
이 때 세자가 한 말에 대해서는 말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는 대로 글도 잘 읽고 말씀도 들을 것이니, 살려주소서"
"제가 죄가 많습니다만 과연 죽을 죄까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올해에 칼 끝의 영혼이 되기를 면치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명령하시니, 사신(死臣)은 마땅히 죽을 따름입니다."
모두 다른 말, 아마 다들 자기 입장대로 썼을 겁니다. 실록에서는 이 때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 어느 정도 반항은 했던 모양이죠. 이어 세자는 자결하려고 했는데 주변의 관원들이 말렸고, 목을 메려 하자 역시 풀어 버렸다고 합니다. 쫓겨났던 신만, 홍봉한, 정휘량 등 정승들은 다시 반대 못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영조가 말리는 관원들을 내쫓으려 했는데 한림 임덕제만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조는 "세자를 폐하는데 어찌 사관이 있겠는가? 하고 붙잡아 나가게 했습니다. 세자는 그의 옷자락을 잡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너까지 가 버리면 나는 누구를 의지하하란 말이냐?"
옥신각신 끝에 세자는 다시 영조 앞에 가서 엎드립니다. 아마 무릎발로 기지 않았을까요. 영조는 거기서 선희궁, 영빈 이씨가 말한 것을 들려줬다고 합니다. 세자가 자기를 죽이겠다는 말을 했다는 거죠. 그제야 기회를 잡은 도승지 이이장은 이렇게 말 합니다.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 국본을 흔들려 하십니까?"
영조가 더 열 받아서 빨리 자결하라고 했다가, 결국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 명을 중지한 후 다른 명령을 내리죠.
실록에서는 [깊이 가두었다] 고만 하고 있습니다.
2. 뒤주
죽어라, 못 죽겠다, 죽어라, 알았다, 죽어라, 안 됩니다, 몇 시간이나 계속 되는 옥신각신 끝에 그 물건, 뒤주가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작아서 더 큰, 180x140 사이즈의 대형 뒤주가 들어왔습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쟁점이 되었던 물건이었죠.
옥신각신 끝에 결국 세자는 뒤주에 들어갔습니다.
+) 이 뒤주를 홍봉한이 가져왔다는 것으로 홍봉한은 공격 받았고, 혜경궁은 그 때 그 자리에 홍봉한이 없었다는 걸로 반박합니다. 하지만 실록에는 그 때 홍봉한이 있었습니다. 후에 홍봉한이 "자기가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했고 영조도 "그가 물건을 바쳤지만"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뒤주를 가져 온 게 그인 건 맞을 겁니다.
처음에 신하들은 그 상태로 죽일 거라고 차마 생각을 못 했을 겁니다. 세자도 마찬가지였을 거구요. 뒤주는... 이 생각을 파고 들기 위해 나온 물건입니다. 직접 죽이는 건 위험이 크지만, 그보다 완화된 왕명이 떨어진 상황에서 그걸 반박하는 건 처리하기 쉽습니다. 그는 그저 이것만 차단하면 되는 거였죠. 그리고... 세자가 죽기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습니다. 이 때 세자는 믿지 못 한 건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 영감이 나를 괴롭히려고 이러는 것이다."
뒤주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고 합니다. 궁인들은 이 구멍을 통해 물과 먹을 것, 부채까지 건네줬다고 하구요. 만화 식객에도 나오는 제호탕을 주니까 세자가 "시원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큰 뒤주였지만 뚱뚱한 세자에게는 좁았을 것이고, 날은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
밤이 되자 갑갑함을 이기지 못 한 세자는 윗판을 깨고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차마 벗어나지는 못 하고 휘령전을 서성이던 세자, 급히 다시 들어간 모양입니다. 혜경궁도 "뒤주에서 나오려고 했다가 그렇게 됐다"고 적고 있습니다. 정말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는 뒤주를 열기가 비교적 쉽긴 했던 것 같네요.
하지만... 그 사실이 영조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는 대노하여 더 끔찍한 명령을 내립니다.
다음 날, 뒤주의 구멍은 물론 윗부분이 더 단단하게 묶이고 덧대집니다. 거기에 더 덥게 하기 위해 위쪽에 풀을 깔았습니다. 대천록에는 이 일을 홍인한이 맡았다고 하는데 세자는 그에게 이런 저주를 내렸습니다.
"네 어찌 이런 일을... 반드시 재앙을 입으리라... 네 자손도..."
헌데 실록에는 세자가 죽을 때 홍인한이 뱃놀이를 갔다는 죄를 입습니다. 말이 약간 다르지만, 시간차가 약간 있긴 하네요. 임오일기에는 뒤주 위에 큰 돌을 올렸다고도 합니다.
영조는 매일 구선복을 시켜 뒤주 밑에 돌을 괴고 흔들어 보게 했다고 합니다. 세자는 누구냐고 했고, 그는 구선복이라고 했죠. 이에 세자는 "내 앞에서 직함도 대지 않느냐"면서 꾸짖었다고 하구요. 그는 세자 옆에서 밥을 먹기도 하면서 방자하게 굴었다고 합니다.
홍인한과 구선복은 후에 역모로 처형당하죠.
이 때 구선복의 병사들이 "떡이 먹고 싶으세요? 떡 드릴까요? 술 드릴까요?" 이렇게 세자를 놀렸다고 합니다. 정병설 교수는 이를 신뢰하기는 어렵다고 하죠.
3. 천둥이 치던 날
영조는 매일마다 세자가 살아 있는지 살폈습니다. 아니 세자가 죽기 전까지 환궁하지도 않고 근처에 머물러서 그가 죽기를 기다렸죠.
그가 갇힌 지 7일째 되던 날, 윤 5월 19일. 그 날도 뒤주를 흔들어 봤습니다. 아마 구선복이었겠죠. 이번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재차 흔들어 보자 안에서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 흔들지 마라... 어지러워 못 견디겠다..."
신음처럼 가는 소리... 그 날도 그는 그냥 돌아갔습니다.
20일은 천둥 번개가 쳤다고 합니다. 세자가 가장 무서워하던 것이 천둥이었습니다. 혜경궁은 아마 그 날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죠. 그 날은 비가 와서 세자의 상태를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다음 날,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영조가 구멍을 뚫어 직접 살을 만져봤고, 차가웠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정병설 교수는 이것까진 아닐 거라고 분석하더군요.
공식적으로 윤 5월 21일. 세자는 뒤주 안에서 숨을 거둡니다.
뒤주를 열자 안에서는 반으로 쪼개진 부채가 나왔습니다. 목마름을 참기 힘든 세자는 거기에 오줌을 받아 마신 겁니다.
4. 그 이후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를 사도 세자라 한다."
슬프게 생각한다. 이 말로 영조가 후회했다고 하지만... 그는 세자의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 했습니다.
그 날로 세자의 장례식이 진행됩니다. 하지만 그 형식은 지극히 간소했고, 도저히 세자의 예라 할 수 없었죠. 사관조차도 "세자 지위를 돌려줬으면 격식도 그것에 맞춰야 된다"고 하면서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하지만 왕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재난고, 대천록 등에는 영조가 환궁하면서 마치 적을 정벌하고 오듯 개선가를 연주하게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영조가 후회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걸 후회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단 한 가지 그가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정이 남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건 단 한 부분입니다.
"세자가 그 날에야 비로소 나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피를 나눈 부자지간이였지만 임금과 신하의 관계였을 뿐이었던 그 둘, 세자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 건 그 때 뿐이었습니다.
그것 뿐입니다. 영조는 세자의 발인 날, 대궐 밖으로 나가는 세자의 관에 세손이 따라 가지 못 하게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간의 사이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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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날, 어머니가 자식을 죽이라고 한 날, 장인이 사위 죽일 물건을 들고 온 날은 이렇게 짧고 허무하게 끝납니다. 이 짧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가설이 동원되었습니다. 그게 지금까지의 글들이죠. 이 사건의 여파도 컸습니다. 역시 지금까지의 글들에서 다뤘습니다. 하지만 이 날은 너무도 짧습니다. 너무나도 간단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후 이 날은 "모월 모일" "모년의 일"이라면서 직접 부르는 게 금지됐고, 뒤주 역시 "그 물건"으로 지칭되었습니다. 모두의 가슴 속에서 이 사건을 지우고 싶었던 영조, 하지만 그의 손자는 이 날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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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 정말 쓰기 어려웠습니다. 서로 말이 너무 다르고, 복잡했죠. 그래도 그 안에서 저 나름의 해답을 찾은 것 같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어려운만큼 더 빠져들게 됐고, 정말 자주 올렸네요.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얘기하면서 생각한 걸 나름 정리한 걸 올리겠습니다. 다음 시리즈에 대한 예고도 있을 겁니다.
그럼... 지금까지 "그 때 그 날", 영조부터 사도세자, 정조까지 이르는 이야기를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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