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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8/03 19:40:55
Name 바람모리
Subject [일반]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알바들중 하나
몇년 전의 일이다.
전역 후 복학하기까지 날짜도 꽤나 남았고 등록금도 보태볼까 하는 생각에 알바를 찾았다.
파주에 있는 공장에서 박스를 날랐다.
점심때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 일이었는데 한달쯤 하고나니 몸이 축나는 것이 느껴졌다.
군대가기 전에는 밤샘알바도 쉽게 했었는데..
다른 일을 구하기로 했다.

마침 자주가던 집앞 피시방에 구인광고가 붙었다.
피시방이야 이전에 두어번 해본 일이고 주간알바였기 때문에 겜하러 가다가 면접을 봤고,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낮 12시에 출근해서 보통 밤 11시까지 일을 하는데,
카운터는 피시방 사모님이 내내 지키고,
난 손님에게 인사하고 피시방 청소하는 것이 일이었다.
알바생은 나혼자 피시방에 컴퓨터는 110대,
오.. 힘든데..

군인느낌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일까..
청소 정말 열심히 했다.
출근하면 일단 전 좌석의 마우스,키보드,의자를 닦았다.
본체를 들어서 그 아래까지 닦았다.
커피자판기도 닦고 라면국물 버리는 통은 수시로 비웠다.
여름이라 냄새가 많이 났기에..
다른 사람이 일하는 것을 유심히 본적은 없었지만 이정도까지 하는 알바생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런데 사모는 칭찬에 매우 인색했다.
카운터를 지키다 손님이 적어보이면 가게 안을 돌아다니다 추가적인 일을 시켰다.
어느날은 신나서 나를 부르더니 매직블럭을 쥐어주며 키보드 사이사이를 닦는 일을 시켰다.
날 생각해주는척 많이 하면 힘드니 하루에 10개씩만 깨끗하게 닦으라 하더군..

하루는 금연석과 흡연석을 나누는 유리창이 더러워 보였다.
딱 보기에도 피방 문을 연 후로 단 한번도 닦은 적이 없어 보였다.
내가 왜 그랬을까.. 여튼 30분정도를 투자해서 깨끗이 닦았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사모는 아무말 없이 카운터만 지켰다.
뭐 칭찬받으려고 한일도 아니고..
그런데 다음날 사모가 슬쩍 얘기하는데..
"오늘은 유리창 안닦니?"
카운터 한쪽을 보니 윈덱스였나.. 유리창에 뿌리는 그 파란..
새로 사온 모양이었다.
.
.
에에.. 글쓰다 실수로 엔터를 눌렀다.. 덜 썻는데 글쓰기 버튼이 눌러졌네.. 왜 이러지;;
.
.
피시방이 크다보니 손님도 많았다.
가끔 카운터도 보는데 심심해서 이것저것 눌러보다 알게 된 것은,
의외로 성인이하 손님들의 매상이 크다는 사실이었다.
1시간씩 2시간씩 하고가는 애들이 수십명단위가 되니까,
피시방 매출의 절반은 차지하는 것 같았다.

매일 오는 애들중에 초딩 여자애 3인방이 있었다.
항상 컴터는 하나만 키고 셋이 몰려서 메신저니 뭐니 하는 것 같았다.
여튼 공대까지 해서 남투성이 테크를 탄 내게 있어서 상대하기 곤란한 아이들이었는데,
이것들은 날 가지고 노는게 재미있는 듯 했다.

항상 밤 10시 전후로 해서 그때 매장에 있는 모든 손님들에게,
슬러쉬를 한컵씩 돌렸는데,
얘네들은 이것을 노리고 항상 9시 전후에 피시방에 오는 것 같았다.
사모는 고작 셋이 한시간 하고 가는 애들까지 주기는 좀 아까웠는지,
"쟤네들은 주지마"
라고 했고 난 항상 슬러쉬를 돌리다가 꼬마아이 셋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하지만 언제나 패배자는 나였다.

그날은 왜 그랬을까..
괜한 오기가 생긴 나는 오늘은 절대로 얘들한테 슬러쉬를 뺏기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표정에서 드러났을까.. 얘들도 오늘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나보다..
갑자기 그중 가장 키가컸던 아이가,
"오빠~~"
라고 하더라..

아아.. 오빠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마음한쪽에 존재하는지 미처 알지 못했던 어느 한 부분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 단어를 언제 들어보긴 했었는데.. 언제였더라..
대학교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고..
1학년때도 들을 수가 없었고.. 동아리로 풍물패에 들어간 후 난 과에서 흔히 말하는 아웃사이더였다..
2학년때 여자후배 둘이 들어와서 처음 들었구나.. 한명은 반년 후 한명은 일년 후 동아리를 나갔지..
3학년때 둘이 들어와서 들어봤고 이때 사귀던 애한테 들었었지.. 여튼 군대가서 100일휴가 때 차였고..
중간중간 휴가 나왔을 때 세명한테 더 들었고.. 복학 후 한 5달 사귄 애한테 들었고..

오오.. 니 덕분에 나한테 오빠라고 한 사람이 두자릿수가 되었구나!!

어.. 근데 좋아하는게 표정에 너무 드러난 모양이다..
얘가 한마디 한다.
"오빠라고 부르니까 좋아?"
난 그저 말없이 슬러쉬 컵 세개를 나눠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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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03 19:52
수정 아이콘
여운이 있는 수필이네요
맥주귀신
11/08/03 19:56
수정 아이콘
크크 재밌네요
짐 혼자 카페 테라스에 앉아서 아이스아메리카노 마심서 똥폼잡고있는데 흡연석 비흡연석 경계유리판보게 되네요
더럽습니다 크크 [m]
강동원
11/08/03 19:59
수정 아이콘
저도 일이 없으면 찾아서 하는 피곤한(...) 성격인데 칭찬이나 인정 그딴거 필요 없고 그냥 저를 호X로 보지만 않았으면 했었죠...
남의 돈 벌어 먹기 힘듭니다. 하하하
슈퍼컴비네이션
11/08/03 20:01
수정 아이콘
알바하면서 깨달은게

백번 잘하다 한번 못하면 욕먹고...

백번 시키는대로만 하면 욕은 안 먹는다는거...
바람모리
11/08/03 20:05
수정 아이콘
글쓰다가 글쓰는 창 바깥을 클릭한 후 엔터를 눌렀나..
글쓰기가 자동으로 한번 눌러지더군요..
알바는 여러가지 꽤나 해봤는데 이때 일은 상당히 기억에 남아서
언젠가 한번은 피쟐에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오늘 썻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셧다니 다행입니다
뜨거운눈물
11/08/03 20:11
수정 아이콘
조련당한 보통알바생의 글이네요 흐흐
디비시스
11/08/03 20:13
수정 아이콘
'남투성이'라는 단어에서 바라모리님의 어휘능력에 감탄하고..우리말의 위대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네요..
결론은 초딩에게 조련당한 흔한 알바...크크 재밌네요
11/08/03 20:14
수정 아이콘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애들은 정말 초딩이 아니죠;
남자애들은 아직 작고 학교안에 위도 없고 하여간 태도든 뭐든 애가 아닙니다;
정용현
11/08/03 20:19
수정 아이콘
지금 제가 컴퓨터앞에 앉아있다면 저도 재미있는 일화 및 알바에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근질근질하네요. [m]
11/08/03 20:26
수정 아이콘
글 재미 읽게 쓰시네요. 필력이 부럽습니다.
전 조금 길으면 그냥 안읽고 스크롤 내리는 편인데 순식간에 다 읽었네요. 재밌었습니다.
홍승식
11/08/03 20:49
수정 아이콘
무언가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글솜씨시네요.

다음편(?)도 기해하겠습니다.
씨밀레
11/08/03 20:50
수정 아이콘
재미있네요. 크크..
11/08/03 20:57
수정 아이콘
저는 술술 읽히는 글이 가장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정말 술술 읽힙니다...

장승욱씨 이후 이런 느낌 처음입니다...
11/08/03 21:09
수정 아이콘
재밋네요^^
리니시아
11/08/03 21:50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Idioteque
11/08/03 23:0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피시방에서 알바하던 생각이 나네요.
초딩들의 동전 러쉬와, 항상 단골로 오던 중딩 한 무리, 형제는 아닌데 매일 같이 다니던 고딩과 대학생(?) 무리.
생각해보면 처음 했던 알바라 기억나는 게 참 많네요.
Nowitzki
11/08/03 23:53
수정 아이콘
후속편 있는거 아닌가요? 흐흐
세인트
11/08/04 01:54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후후
데보라
11/08/04 12:16
수정 아이콘
즐겁게 읽고 갑니다.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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