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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9/20 18:16:33
Name aDayInTheLife
Link #1 https://blog.naver.com/supremee13/224015449639
Subject [일반] <모노노케 히메> - 그래서, (혹은 그래도) '살아라.' (스포)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은 저에겐 조금 낯섭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 정도가 제가 굉장히 어릴 때의 작품이고, 그 이후에는 솔직히 말해서 영향을 받은 작품은 많았지만 '지브리' 스스로의 작품이 메인스트림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고 생각하구요.
여튼, 요는 제가 지브리의 작품을 많이 알지 못한다는 점, 그래서 <모노노케 히메> 혹은 <원령공주>가 어떤 작품일지 조금은 궁금했다는 점입니다.

<모노노케 히메>는 깊으면서도 꽤나 의뭉스러운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선' 과 '악'으로 구분 짓기 힘든 인물들과 어떤 측면에서는 의뭉스러운, 그래서 때때로 '불명확하다'는 느낌까지 들게 하는 신들, 그리고, 그렇기에 완전한 해피엔딩도, 배드엔딩도 아닌 이야기의 마무리까지. 다층적이고 복잡한 인물들의 조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떤 측면에서, '사슴신'이 때때로 '절대적이나 무관심한' 절대자는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저 부여하고 거두어갈 뿐이며, 그 뿌림과 거둠의 대상도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골라지는 것이기도 하구요.
여튼, 그 무심함과 대립과 투쟁의 역사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에 영화는 철저하게 '생존'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떠한 복수를 위해서든, 혹은 이해하기 위해서든, 번영이든, 몰락이든 모든 기반은 살아남는 것에 기반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영화는 그 시각적 효과와 충격을 잘 활용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많은 측면에서 영화는 '압도합니다'. 그러니까, 웅장하게, 어떤 장면에서는 그림을 연상시키는 구도로 자연을 보여주면서, 이 의뭉스러운 영화의 뒤에 어떤 '자연의 섭리' 같은게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들거든요. 그렇기에, 영화가 더 깊게 보이는 느낌이기도 하구요.

저는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공존을 '역설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엔딩이 단순 해피엔딩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는 꽤나 명확하게 드러나거든요. '너는 믿지만, 다른 인간들을 믿진 않는다.' 어찌보면 이 영화의 이야기가 단순하게 마무리된다면, 그 입체적인 인물상과 자연관이 오히려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기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살아야 한다.'를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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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곰
25/09/20 18:25
수정 아이콘
살아라. 그대는... 그 뭐냐... 그거다.
aDayInTheLife
25/09/20 18:25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크크
동굴곰
25/09/20 18:27
수정 아이콘
처음 본 계기가 군대 훈련소 불교 종교행사 갔을때 법사님이 틀어주셨던...
훈련병때라 더 몰입하면서 봤네요.
aDayInTheLife
25/09/20 18:56
수정 아이콘
뭘 봐도 재미있을때일텐데 크크크
25/09/20 18:38
수정 아이콘
내일 4k 리마스터링 버전 보러 영화관 갑니다.
썸타고 있는 분께 이건 인류 문화유산급이니 반드시 보셔야 한다고 우겨놓았는데... 부디 만족하시면 좋겠네요 흐흐흐
aDayInTheLife
25/09/20 18:39
수정 아이콘
재밌게 보세요!
25/09/20 22:16
수정 아이콘
지브리의 아기자기 예쁜 그림체를 기대하는 분은 실망하기도 하더군요. 멧돼지 눈꼽 때문에 불호라는 평도 봤습니다. 지브리 작품 중에 제일 잔인한 점도 호불호 요소라 이런 장면이 조금 있는 건 미리 말씀해주셔도 괜찮을 거 같네요.
퍼블레인
25/09/20 18:53
수정 아이콘
요즘엔 여초쪽에서 초반에 정실 버리는 장면이 회자되더군요
aDayInTheLife
25/09/20 18:56
수정 아이콘
앗 크크크크
틀림과 다름
25/09/20 19:29
수정 아이콘
여자쪽에서 본인이 정실이라고
혼자 생각한거 아닌가요?
탑클라우드
25/09/20 20:04
수정 아이콘
어제 아내와 극장에서 다시 한번 봤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0번은 족히 본 듯 합니다...)
언제고 다시봐도 제게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중 단연 최고의 작품입니다.

결국 세상에 절대악이나 절대선이 존재한다기 보다는
펼쳐진 세상 내에서 각각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협력이 발생하기도 하고 갈등이 발생하기도 할 뿐,
무작정 인간의 자연 파괴를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대 신을 찬양하는 것도 아닌,
자연을 파괴하지만 막상 주어진 삶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나병 환자들을 거두어들여 함께 공존하는 마을의 묘사는 여전히 심오하며,
90년대 일본에서, 이상적인 여성 리더상을 보여주는 점이라던가,
사실 모노노케 히메는 이기적인 인간 부족들이 제물로 바친 아이였다는 점을 통해 비추는 인간의 이기심과 비겁함 등 생각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서
어제도 자기 전 누웠을 때 한참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25/09/20 20:38
수정 아이콘
저도 지브리 작품 중 Top은 원령공주라고 생각합니다.

원령공주를 보고 난 이후로 절대악 절대선은 너무 단순하고 진부해요. ㅠㅠ
aDayInTheLife
25/09/20 20:48
수정 아이콘
그게 참 사람이 당연하게도 이분법 적으로 좋고 나쁠 수 없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그렇게 묘사하는 게 참 힘든 일이죠. 흐흐
nekorean
25/09/20 22:41
수정 아이콘
저는 모노노케 히메랑 바람의 계속 나우시카를 투탑으로 봅니다.
완벽한 이야기와 주제의식이에요.
서린언니
25/09/20 23:00
수정 아이콘
군대에서 봤는데 지금도 그렇고 에보시가 좋습니다
aDayInTheLife
25/09/20 23:21
수정 아이콘
선/악이 단순한 인물들이 없죠. 그 대표격인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25/09/21 01:22
수정 아이콘
죽어라 너는 못생겼다 
마스터충달
+ 25/09/21 05:40
수정 아이콘
참 아이러니한게,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 놓은 것은 그 후속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평가가 깎이고 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그 다음이죠. 사실상 <모노노케 히메>를 끝으로 은퇴도 생각할 정도였는데, 참 인생 몰라요.

글쓴이님 말씀대로 사슴신은 도교의 '무위자연',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과 통하고, 사슴신 이외의 신들까지 포함하면 <모노노케 히메>는 범신론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여기서 자연은 어떤 이유를 가지고 행하거나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그러한 존재이며, 따라서 선도 악도 없죠. 여기까지만 봐도 <모노노케 히메>가 얼마나 철저한 철학적 고찰 끝에 탄생한 작품인지 알 수 있습니다. 캐릭터, 서사, 심지어 대사까지 이러한 근본 철학에서 벗어나는 게 하나도 없어요. 미친 수준이죠.

그런데 이러한 철학은 허무주의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신이라는 존재가 아무런 목적도 없고, 피조물에 무관심하다면, 이 세계와 우리는 뭐하러 존재하는 걸까요? <모노노케 히메>는 여기에 아주 원초적인 목적을 제시합니다. "살아라."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게 자연의 피조물인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인 셈이죠. 죽음을 찬미하는 성향을 보이는 일본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감독이 나왔다는 점도 참 아이러니합니다.

어쨌거나 "살아라."는 <모노노케 히메>가 지닌 철학의 결론이자 정수이며,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때부터 주구장창 풀어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생(生)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가치인 셈이죠.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미야자키가 극혐하는 것 중에 하나가 '카미카제'일 겁니다. 애국을 생보다 높이 둔다는 건 미야자키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야자키가 연출하진 않았지만 <반딧불의 묘>를 두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비판이 있다는 게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이 작품이 오히려 처절한 자기반성에 가깝다고 느껴지거든요. 일본은 진짜 중요한 것을 우선시하지 않았고, 그 결과는 비극이며, 그 비극은 일본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말이죠. 이는 세이타의 행적만 봐도 느껴집니다. 극 중 내용만 따진다면 세이타의 결말은 자업자득에 가깝거든요.

아무튼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사세요. 생육하고 번성하세요. 그게 살아있는 존재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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