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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9/06 16:02:10
Name 리니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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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2025) _ 흐릿한 풍경 속, 선명해지는 삶의 질문


1.
오랜만에 2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으로 찾아온 홍상수 영화다. 이전 작인 <물안에서>처럼, 이번에도 의도적으로 초점을 흐린 화면을 들고 나왔다.
영화 외적으로는 감독의 연인인 김민희가 임신한 기간에 촬영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작가적 성향이 강한 감독이기에, 60대 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생각과 감정이 영화에 투영되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2.
최근 홍상수의 영화는 갈수록 단순해져 간다.
2021년 <인트로덕션>을 기점으로, 복잡한 구조와 차이와 반복이라는 특유의 연출 방식을 내려놓고 이제는 '소품집'에 가까운 짧고 명확한 이야기를 제시한다.
어려운 대화도, 꼬인 서사도 없기에 표면적으로는 매우 쉬워졌다.

하지만 그래서 더 어려워졌다.


3.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삼십대 시인 동화가 3년 사귄 연인 준희의 집에 우연히 방문해 하룻밤을 보낸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부모님과의 만남, 술김에 터져 나온 속내와 실수,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의 도망. 익숙한 홍상수식 하루의 기록이다.
한마디로, 우연히 여자친구 집에 갔다가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술에 취해 사고 친 뒤 다음 날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이야기다.


4.
삼십대 시인 동화. 그는 이름처럼 자신만의 동화 속에 살고 싶어 한다. 96년식 낡은 차를 몰고, 번듯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한다. 아버지의 도움 없이 살아가기에 재정적으로 궁핍하다. 말 그대로 '낭만'을 쫓아 사는 그에게 여자친구 부모님과의 만남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특히 준희의 언니가 "아버지가 뒤에 있잖아요"라며 그의 아버지를 언급하는 순간, 동화의 예민함은 극에 달한다. 동화는 돈을 중시하는 변호사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려 애쓴다. 하지만 세상은 자꾸만 그에게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찾아내려 한다.
그의 낭만과 무소유라는 정체성은, 사실 아버지라는 세속적 존재에 대한 반작용으로 쌓아 올린 위태로운 성채였기 때문이다. 그 근간을 건드리는 말은 그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5.
동화가 고집스럽게 타는 낡은 중고차는 그의 낭만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사물이다.
시를 사랑하지만 재능은 없어 보이고, 자신만의 생각을 절대적인 신념처럼 규정하고 바꾸려 들지 않는다. 이런 그의 태도에 연인 준희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삶의 태도야말로 성급한 재단"이라며 일침을 가한다.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살려는 동화. 하지만 그 역시 '준희'라는 타인의 세계, 더 나아가 그녀의 가족과 미래를 함께하기 위해서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6.
영화 속 공간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인물들의 관계와 심리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동화와 준희, 그리고 언니는 세종대왕릉과 신륵사를 방문한다. 할머니를 위해 만들어진 정원처럼, 이곳 또한 과거 조상들을 위해, 어떤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 공간이다. 이러한 '인위적 자연'의 반복은, 인물들을 둘러싼 관계의 반복과도 겹쳐 보인다.

동화는 유명한 '하 변호사'의 아들로 규정되고, 준희 자매는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여 있으며, 준희의 아버지는 이 공간의 실질적 주인인 할머니와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결국 동화가 영감의 원천이자 도피처로 삼으려 했던 자연마저, 그가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인위적인 관계의 질서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는 어디에서도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다.


7.
밤의 자연 속에서 핸드폰 불빛으로 무언가를 찾는 동화의 모습은 상징적이다. 그는 자신의 시에 '밤에 피는 꽃은 스스로 빛난다'고 썼지만, 정작 그 꽃을 보기 위해선 인공의 불빛이 필요하다. 낭만 속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만, 현실은 그를 넘어뜨리고 상처만 남길 뿐이다.
결국 마지막 장면. 지난밤의 실수가 민망해 도망치듯 떠나려 하지만, 그의 낭만을 상징하던 낡은 차가 고장 나 멈춰 선다.
아버지의 그늘과 인위적인 관계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깨달음은, 그의 차가 길 위에서 멈춰 서는 마지막 장면으로 구체화된다.

그가 애써 지켜오던 동화의 세계가 끝났음을 알리는 선언이다. 어쩌면 이는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며 자신의 단단했던 세계에도 변화가 필요함을 느낀 감독 자신의 이야기가 투영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8.
오랜만에 술자리에서 고성이 오갔다. 한때 초록색 병을 앞에 두고 벌어지는 지질한 언쟁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지만, 최근 몇 년간 그의 영화는 조용했다. 이번 작품에서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로 속내를 토해내는 동화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반가움이 느껴졌다.


9.
스스로 예술가이고 싶은 사람이 '가족'이라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자연에 편입되는 과정은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 동화에게 자연은 언제나 영감의 원천이자 도피처였다.

하지만 그가 지켜온 낭만과 고집의 세계는 이제 끝났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공존하기 위해, 그는 무엇을 내려놓고 또 무엇을 마주해야 할까. 영화는 흐릿한 화면 너머로, 우리 모두에게 그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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