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평소 프로 댓글러로서 살아왔지만 오늘은 약간의 의무감에 조금 생산적인 짓을 하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아는 지인 분께 책을 선물 받았어요. 어떻게 할까 하다가 뭔가 이런 일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것이 고개를 들어버리네요.
이 책 소개를 빌어 잠시 옛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책 이야기만 보고 싶으신 분은 아래로 스크롤 내리시면 됩니다.
제 첫 게임기는 세가마크3. 일명 겜보이라고 불렸던 게임기였습니다.
훗날 '알라딘 보이'라는 로 개명당하는 그 게임기죠.
많은 분들이 그렇듯, 저 또한 저의 선택이 아닌 타의에 의해 결정된 첫 게임기였고, 저는 늘 패밀리. 혹은 패미컴을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그 친구들끼리는 팩 교환도 할 수 있었으니 말이죠.
결국 패밀리도 사고, 고등학교 때는 슈퍼 패미컴도 사고 게임하려다 TV 부숴먹는 등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어쩌다 또! 또! 세가의 게임기를 사고 말았습니다.
네. 세가 새턴이요. 동생 친구가 중고로 내놓는다기에 잽싸게 물어버렸죠.
그리고 자포자기하듯? 세가맨을 자처하게 됩니다. ^^
사실 이 뽐뿌의 원인은 게임잡지였습니다. 일본 게임잡지를 거의 잘라 붙여 기사를 만들던 시절부터 쭉 봐왔죠. 잡지 두 박스를 카페에 나눔하고 나서도 지금 책장에 두 줄이 가득 차있는 걸 보면 참 저도 저다 싶어요. 실제로 게임을 한 것보다 잡지의 소개글이나 사진만 보고 상상 속에서 플레이 했던 게임이 훨씬 많았어요. 그래서 막상 하게되면 엄청 실망하는 경우도 많았구요.
예를 들면 '에너미 제로'라든가 '에너미 제로'라든가...
흠흠 뭐 그렇습니다.
여하튼 그런 정신나간 상태에서 군대를 갔고 그 사이 드림캐스트가 나왔습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꼭 사야겠다 했지만, 제대 직후 바뀐 현실을 직면하자 뭔가 콘솔 게임에 대한 열의가 식어버렸습니다. 그나마 있던 게임에 대한 관심마저 당시 한국 사회를 강타한 몇몇 PC 게임으로 정신이 팔려 버렸죠. 결국 드림캐스트의 몰락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냥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새턴은 과외하던 녀석에게 팔아버렸고, 학원 알바를 하면서 알게 된 학생에게 커마가 된 플스1을 가방 가득한 복사시디와 함께 단돈 10만원에 사버렸었더랬죠.
이어 플스2를 다시 나눔 장터에서 중고로 사고... 위닝 일레븐을 사고... 대학 후배들과 플스방을 다니고... 그러면서 세가의 기억이 희미해져 갔습니다.
응? 분명 제대 후 바뀐 현실 때문에 게임을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리해보니 게임 겁나 많이 했었네요? 그냥 세가에 대한 관심이 잠시 끊어졌던 게 맞는 것 같네요.
그래서 드캐에 대한 관심은 오로지 게임 잡지를 읽을 때만 이뤄졌어요.
게임비평 같은 마이너한 잡지를 사 읽으며 뭔가 스스로 '세가인'이라는 힙스터한 감성에 도취됐던 듯 합니다. 어쨌든 그 때는 저도 젊었다고요. 네.
시맨이라든지, 파워스톤이라든지, 쉔무2라든지, 그란디아2라든지, 사쿠라대전3라든지, 버파3라든지, 크레이지 택시라든지.
실험적인 작품이든, 프랜차이즈의 후속작이든, 아케이드의 컨버전이든, 머릿 속으로만 빙빙 돌렸을 뿐 결국 지금까지 해본 것은 없었군요. 아 저 중에 플스로 다시 나오거나 PC로 나온 게 있지 않느냐고요? 어...
저 중에 시맨과 크레이지 택시를 제외하면 결국 다 구매해서, 지금 스팀 게임목록에 있긴 있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옛날 하고 싶었던 게임을 사고 겪는 현상을 저 역시 겪고 있어서 말이죠. 허허 신작도 쌓여가는 마당에, 구작이.... 손이 안가네요. 이것 참.
이야기가 기승전결도 없이 마무리가 안되네요. 여하튼 제 세가 게임 라이프와 관련된 이야기는 사실 많이 있습니다만 막 자극적이고 재밌는 이야기는 없어서. 크크 이런 건 또 '깔쌈한' 포장이 없으면 자기만 재밌는 이야기가 되기 마련이니까요.
----------------------------------------------------------------------------------------------
여기서부터 본문 이야기입니다.
해당 책은 아케이드 시절부터 드림캐스트 몰락까지 세가의 역사에 대한 정리서입니다. 이전 정리서와 차이점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세가 측의 입장에서 씌여진 책이라는 것. 80년대에는 학생 게이머였던 때부터 90년대에는 개발자로 입사해 지금까지 쭉 세가에 몸담고 있는 저자의 시각이 반영되었습니다. 그 '주관적 시각'이 이 책의 포인트입니다.
흐름 자체는 일부 고전게임 관련 유튜브에 많이 올라온 익숙한 역사입니다. 세가의 아케이드 게임이 히트하고, 오락실 게임을 가정용으로 옮긴다는 발상으로 콘솔이 시작되고, 콘솔 오리지널 RPG의 히트에 어떻게든 RPG를 개발하고...
그런데 그 안에 세세한 주관성과 편파성이 보인다는게 이 책의 재미죠.
당시 저 처럼 게임 잡지를 의무감으로 매달 읽었던 사람들이면 기억을 떠올리기 좋고, 또 그 내용들과 차이점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매우 안으로 굽은 팔이니 감안해서 읽으셔야 할 겁니다. 물론 틀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아니고요.
예를 들어, 당시 세가마크3는 패미컴과의 차별성으로 자신들은 FM음원을 사용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어렸던 제가 판타시스타를 플레이 했을 때, NPC들 대사 중 뜬금없이 "FM음원이라 너무 좋다"게 있어서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 정도로 티를 내고 다녔는데
이 책에서조차 그 자부심이랄까, "세가의 기술은 세.... 일본 제일!"이라는 세가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네요.
그러고보니 이 책, 당연한 일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일본 시장을 중심으로 씌여졌습니다. 시장의 동향, 개발 배경 다 일본 기준이에요. 이게 게임 잡지 등을 통해 한 다리 건너서 들은 것과도 미묘하게 달라서 그 이질감도 흥미로운 점입니다. 이 부분은 읽어 보시고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당시 한국해협을 건너오면서 세가에 대한 여러 전설 아닌 전설들이 따라붙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읽다 보니 업계인의 입장에서 이해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중구난방으로 사업이 벌어졌고, 생각 이상으로 위기의 연속을 아슬아슬하게 돌파했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 쪽의 닌텐도 스토리를 보면 뚝심의 3인, 야마우치, 미야모토, 이와타 같은 거장, 리더들이 확고하게 중심을 잡고 여러 인력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해 나갔다는 느낌인데, 세가는... 우당탕탕 같은 느낌이 있어요. 그게 전해지긴 합니다.
아마 이 책의 구매 포인트인 '세가의 몰락'같은 부분도 그럴 거에요. 그 우당탕탕이 세가의 매력이었지만, 버블이 끝나가며 대자본이 투입되어 더 이상 과거처럼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시절이 되며 결국 한 번 한 번의 미스가 치명타로 다가옵니다. 이 부분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세가'의) 업계인 입장에서 꽤 자세하게 다뤄지기 때문에 흥미로운 편입니다. 드림캐스트 몰락 당시 여러 게임 매체에서 세가의 몰락 원인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내부인의 시각에서 다뤄지는 부분이라 확실히 다른 맛이 있어요.
조금 단점이라면, 아무래도 글을 전문적으로 쓰신 분이 아니다보니 뭔가 술자리에서 "아 옛날에 이거 하고 그 다음에 저걸 했지."하는 식으로 줄줄 듣는 것 같은 느낌도 있어요. 이것도 편하다면 편한데,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일화 같은 부분이 좀 부족한 느낌이라 애매한 느낌도 있네요.
고유명사가 줄줄 나열되는 것도 단점이라면 단점? 워낙 업계인의 입장에서 씌여지다보니, 뭔가 "이 글을 읽을 정도면.... 알지?"라는 식의 서술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게 콘솔계라면 구를 만큼 구른 저도 힘든게, 진짜 업계 용어들은 잘 모른단 말이지요. 게다가 테크 관련 용어들은... 그냥 좋은게 좋은 거로 넘어가는 걸로.
여하튼 결론적으로 따지면, 개인적으로는 기대 이상입니다.
아직 버리지 않고 있는 게임잡지 컬렉션 중 최후의 보루가 '게임 비평 특집, 부활하라 세가 혼!' 편인 저인지라 정말 흥미롭게 봤습니다.
-----------------------------
사진을 올려볼려고 했는데 간만에 임구르 들어가보니 뭐가 어지럽게 바뀌어서 포기했습니다.
사진은 링크로 대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