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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 백강혁과 백승수, 그리고 나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와 스토브리그를 보며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어떤 해방감이었다. 두 드라마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중증외상센터에서, 한 사람은 프로야구 프런트에서, 각자의 무대에서 초인적인 능력과 의지를 발휘하며 불합리한 현실과 맞선다. 그리고 끝내 이겨낸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짜릿하고 감동적이었다.
왜일까. 단순히 그들이 똑똑하고 유능하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를 사로잡았던 건 그들이 직면하는 상황 자체였다. 병원의 비효율적인 시스템, 정치 싸움, 무능한 상사, 부당한 외압, 변화에 대한 저항.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회사에서, 조직에서, 현실에서 나 역시 마주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늘 무력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정면으로 맞선다. 때론 대립하고, 때론 전략적으로 움직이며 끝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쟁취해낸다.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불합리에 맞서 싸우다간 오히려 내가 잘려 나갈 수도 있고, 더 큰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참는다. 굴복한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엔 억울함과 좌절이 쌓여 간다.
나는 가끔 상상해본다. 만약 내가 드라마 속 주인공이었다면? 병원에서, 야구단에서 그들이 했던 것처럼 나도 내 자리에서 싸울 수 있을까?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고난을 겪더라도 결국에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변화를 이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내가 어떤 부당함을 지적한다고 해서 시스템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내가 혼자서 싸운다고 해서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조직에서 눈엣가시가 되고, '말 많고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드라마를 보면서 더욱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주인공이 힘겹게 싸우고, 여러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변화를 만들어낼 때, 나는 속으로 그를 응원하며 한편으로는 부러워한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그들의 모습이 나의 대리자가 되어준다. 마치 내 속에 응어리진 감정들이 그들의 행동과 대사 한 마디로 해소되는 느낌이다. 그 순간만큼은 현실에서 참아야 했던 억울함과 분노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씁쓸함도 남는다. 드라마가 끝난 뒤 현실로 돌아오면,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변화하지 않는 조직, 변명만 늘어놓는 상사, 제대로 된 시스템 없이 돌아가는 일들. 결국 나는 다시 참아야 하고, 다시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 한 편에는 계속 의문이 남는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걸까?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걸까?
드라마를 통해 얻은 카타르시스가 단순한 대리 만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작은 용기를 남겨주길 바란다. 물론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초인이 아니다. 하지만 아주 작은 것부터라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무리하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현명하게 내 의견을 표현하고, 적어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부터 말이다.
결국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작은 싸움이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조금씩 용기를 내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내가 바라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는 끝나도 현실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울림은 내 안에 남아 있다. 비록 나는 초인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현실을 살아간다.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극적인 변화를 만들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나만의 방식으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가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작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