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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3/24 03:22:34
Name Poe
Subject [PC] PC 게임의 낭만 담당은 둠이라던데 (수정됨)
동생이 잠시 집에 같이 살게 됐다. 업무 특성상 이동할 필요가 없고, 공간이 넓지 않아도 된다기에 그리 크지 않은 안방을 내줬다. 어차피 아내와 막내가 병원 생활을 하고 있어서 주중에는 내내 닫혀 있는 방이었다.

이사 들어오는 날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90인치 대형 화면이었다. 동생이 가진 물건 중 가장 고가에 속하는 것으로, 동생 역시 애지중지 하는 게 눈에 띄었다. 화상 미팅이나 수업 등에 사용되는 물건으로, 엔터테인먼트와는 거리가 먼 용도를 가지고 있는 거라고 동생은 거듭 설명했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나는 머릿속에서 그 대형 화면으로 퀘이크를 돌리고 있었다.

PC 게임 중 ‘낭만’을 담당하는 건 단연 ‘둠’이다. 해외 게이머들을 보라. 지금까지도 희한한 기계만 나오면 죄다 루팅이니 크래킹을 통해 기필코 둠을 돌리고 만다. 라우터에 박힌 액정 화면이나 괴상한 폼팩터 PC의 세컨드 스크린, 심지어 스마트 냉장고 같은 가전 기기에서 둠 돌리는 영상이 심심찮게 SNS나 영상 플랫폼에 올라오기도 한다. 소형 컴퓨터를 단 기발한 장비들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한 둠은 영생을 얻은 것처럼 그렇게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둠과 그리 친하지 않다. 아직까지도 둠이 유발하는 그 특유의 멀미 현상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95년, 컴퓨터라는 걸 생전 처음 가져본 날 둠을 처음 만났다. 그날 잡지 부록처럼 집에 따라 와 온갖 해적판 게임을 설치해준 친구 놈은 마치 세상 모든 PC 게임은 둠에서 시작해 둠으로 끝나는 것마냥 둠을 찬양했다.

어떻게든 그 트렌디한 PC 게임 세계에 끼고 싶었던 나는 둠과 친해지려고 많은 시간을 들였다. 하지만 10분도 못해 지끈한 머리를 감싸고 자리에 눕기만 반복했다. 친구 놈은 본조비를 들으면서 하면 도움이 된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본조비와만 친구가 됐다.

친구와 내가 그 시끄러운 음악을 펑펑 틀어놓은 채 모니터에서 뭔가 쏴죽이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동생은 컴퓨터에 접근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동생과 같이 쓰라고 컴퓨터를 사주시긴 했지만, 장남인 내 방에 그 값비싼 물건을 놔두는 큰 실수를 저지르셨다. 동생은 내가 집에 없을 때에나 겨우 컴퓨터를 또각또각 만져볼 수 있었다.

동생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지 않았다. 성격이 너무 달랐다. 너무 달라서 나는 동생과 무슨 이야기든 길게 이어갈 수가 없었다. 동생과 이야기하는 게 둠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어디서부터 의견을 좁혀갈 지 감도 오지 않았는데, 그 멀미 같은 답답함이 어렸을 때는 ‘화’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우린 뭘 하든 욕과 다툼으로 끝을 맺었다. 나에게 동생은 참 성격 괴팍한 애였고, 아마 동생도 나를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사춘기 내내 우린 좁디 좁은 같은 집에 살고 있었지만 1년에 한 마디 섞을까 말까 했다. 그 한 마디도 대부분 서로에 대한 욕과 저주였다. 부모님도 개입을 포기할 정도였다.

난 지금도 그 시절 동생이 나 없는 방에서 어떻게 컴퓨터를 켜고 만졌을지 궁금하다. 윈도 95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점령하기 직전의 일이었고, 그래서 도스를 만질 줄 모르면 컴퓨터 전원을 켠다 해도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을 것이었다. 1년에 한두 마디 하는 걸로는 도스 사용법을 알려줄 수 없었고, 그 때 우리 관계 상 나는 가르쳐줄 의향도 없었다. 어쩌다 내 방에 동생이 있었다는 걸 알아채기라도 하면 동생에게 달려가 욕을 해주던 게 나였다.

아무튼, PC 게임에 눈을 뜬 난 친구와 매일 한 가게 앞을 서성였다. PC 게임들을 파는 곳이었다. 가게 안은 CD들이 담긴 박스들로 가득했고, 쇼윈도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최신 게임 데모가 돌아가고 있었다. 인터넷이란 게 일상에 녹아들기 전의 일이었다. 그 가게에서 틀어주는 게임이 곧 빌보드였고 최신 뉴스였다. 우리는 그 화면을 하염없이 지켜보며 수다를 떨었다.

어느 날은 둠과 비슷한, 그러나 결이 매우 다른 게임이 시연되고 있었다. 친구는 단박에 이름을 말했다. 퀘이크 1이었다. 둠을 만든 회사에서 곧 출시할 후속작이며, 세계 최초로 3D 그래픽을 적용한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이고, 올해를 비롯해 다가올 미래를 한 동안 달굴 대작이라는 게 녀석의 설명이었다. 앞으로 이 게임을 모르면 어디 가서 대접도 못 받을 거라고 했다. (참고로 이 놈은 우리 집에 처음 컴퓨터가 들어왔을 때 하드드라이브 1GB면 평생 써도 남을 거라고 했었다.)

그 순간 퀘이크 1은 나의 새 로망이 됐다. 그 가게에서도 대단히 긴 기간 동안 퀘이크 1만 데모로 틀어줬다. 학교에서도 PC 게임 잡지를 나눠 보던 무리들 사이에서는 퀘이크 1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일부 친구들 사이에서 퀘이크 1을 해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당시는 게임 개발사들이 데모 버전을 꽤나 넉넉하게 풀어줬기 때문에 돈 없는 학생들이라도 얼마든지 게임 맛을 볼 수 있었다.

나도 금방 데모 버전을 구했다. 최첨단 3D여서 그랬는지, 둠으로 훈련을 해서 그런 건지, 멀미가 나지 않았다. 자리에 드러눕지 않고도 수시간 동안 계속 할 수 있었다. 퀘이크 1을 시작하면 네 개의 에피소드 중 하나를 선택해 들어갈 수 있는데, 데모 버전은 1번 에피소드 전체를 플레이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었다. 그 첫 에피소드를 수십 번 깼다.

내 기억에 그 데모 버전의 총 용량이 약 20MB였는데(당시 1.4MB 스티피 디스크 20개로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1GB로 평생을 쓸 수 있다고 믿던 친구에게 있어 첫 번째 에피소드만 있는 게임이 20MB나 차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치 하나만 잘 풀면 20MB 안에 숨겨져 있는 나머지 에피소드들도 해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크래킹에 돌입했다.

그래봐야 그놈이나 그놈의 친구들이 할 수 있는 건 config.sys나 autoexec.bat 같은 파일 찾아 열고 나서 himem 같은 항목 좀 만져보는 거 뿐이었다. 그걸로 개발자가 숨겨놓은 나머지 에피소드들을 찾아낼 리 만무했다. 애초에 20MB 안에 그런 게 있었을 리가 없다. 어느 날 그 친구 놈 집에 갔었는데, 비슷한 놈들이 각자 PC들을 집에서 가져와 연결해놓고 뭔가 하는 척 하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다이렉트 케이블 연결로 듀크뉴컴3D 멀티 플레이어 하는 데 소비하고 있긴 했지만.

동생은 컴퓨터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는 듯 보였다. 내 방에 몰래 들어왔다 나간 흔적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어차피 나와 다르게 현실 친구들과 노는 걸 더 재미있어 하던 아이였다. 그리고 나와 다르게, 무너져 가는 우리 집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기도 했다. 내가 펑펑 노는 동안 동생은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고, 그 중 하나는 훗날 동생의 커리어가 됐다.

집 형편이 기울었을 때도 우리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나는 노느라 바빴고, 동생은 일하느라 바빴다.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군대 때문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바다까지도 끼게 됐다. 나는 후방에서 나라를 빈둥빈둥 섬기며, 동생은 해외에서 부모님을 아둥바둥 모시며,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내가 결혼이라는 걸 하는 바람에 미혼 동생에게는 자식이나 진배없는 조카들이 생겼고, 그러면서 둘은 10대의 싸우던 관계에서 40대의 서먹한 사이까지 오게 됐다.

그 세월 동안 나는 퀘이크 1을 틈틈이 했다. 물론 데모 버전이 아니라 풀 버전이었다. 다른 게임들에도 손을 댔지만, 곧 퀘이크 1으로 돌아갔다. 뭘 해도 퀘이크 1만한 게 없었다. 여전히 멀미는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이제는 퀘이크 1과 확장팩들의 모든 길목들이 우리 집 안방처럼 편안하다. 예전에는 스릴을 찾기 위해 게임을 했는데, 이제는 그럴 나이가 지났다. 산책 하듯 퀘이크 1을 한다.

그러니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화면을 우리 집 안방에서 처음 조우했을 때, 나의 친숙한 산책로가 먼저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온갖 화면들에 둠을 틀어재끼면서 PC 게임의 낭만을 퍼트리는 게이머들도 비슷한 심정 아닐까.

하지만 아직 산책길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대형 모니터가 있는 곳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의 안방이었는데, 주인이 잠시 바뀌고 나니 전혀 처음 접하는 스테이지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게임도 스릴 아닌 편안함 위주로 선택하는 마당에 30년 넘은 우리의 서먹함은 공포 게임 그 자체다. 공략집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이미 그 큰 화면으로 만화도 좀 본 모양인데, 나는 그 모니터에 관심도 없는 척하느라 애쓴다. 동생에 대한 무관심이 우리에게 익숙한 나의 오랜 게임이었으므로.

다행히 며칠 동안 틈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같은 지붕 아래 지내보니, 서로에게 10대의 혈기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 확인되고 있다. 성격 차이야 여전하겠지만, 어쩌면 그 부분을 자극하지 않고 대화하는 법을 알고 있을 것도 같다. 게다가 아이들이 우리 둘은 모르는 우리의 닮은 모습을 하나 둘 발굴하면서 이 공략을 완성시키고 있다. 의외의 도움이다.

퀘이크 1의 낭만은 어떤 모습으로 이뤄질까. 그 시절 동생이 그랬듯, 이번에는 내가 동생 방에 몰래 들어가면 되는 걸까. 그게 들켜서 동생에게 욕을 먹으면 차라리 시원할까. 그렇다면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해야 이 오랜 체증이 가라앉을까. 이번에도 내 친구 본조비는 침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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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ntum21
25/03/24 09:11
수정 아이콘
왠지 자게에 어울리는 글인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감상에 젖어 있다 갑니다.
25/03/25 08:21
수정 아이콘
겜돌이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공묘유
25/03/24 09:18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저도 형으로 좀 공감되는 부분이 많네요
25/03/25 08:22
수정 아이콘
(수정됨) 먼가 동생들한테 이상한... 채무감이 있어요. 후..착하게 살걸.
프즈히
25/03/24 10:4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5/03/25 08:22
수정 아이콘
(수정됨) 감사합니다.
及時雨
25/03/24 13:56
수정 아이콘
어쩜 글이 다 좋을까요.
욕심이지만 많이 글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5/03/25 08:23
수정 아이콘
자주 쓰면 밑천 드러나요 흐흐
특별수사대
25/03/24 18:27
수정 아이콘
글 너무 좋네요... 글 여럿 써주시길 바랍니다.

흐흐 그리고.. 브랜드 정글은 어느새 대회에서도 나오는 메이저 픽이 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문득 생각나서 말씀드립니다.
25/03/24 23:42
수정 아이콘
(수정됨) 으아... 대댓글을 안 달 수 없네요.
거의 10년 전 이야기인 거 같은데.. 심지어 저 탈퇴했다가 닉도 바꿔왔는데.. 기억력이 경이로우십니다.
특별 수사 아무나 하는 거 아니네요 정말
25/03/24 18:36
수정 아이콘
정말 좋은 글인데, 제가 겪지 못한 인생과 세월이 짙게 느껴져서 또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25/03/25 08:24
수정 아이콘
늙음이 물씬...ㅜㅜ 팩폭에 울다 갑니다.
+ 25/03/25 13:18
수정 아이콘
앗...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bladefist
25/03/24 19:54
수정 아이콘
"산책 하듯 퀘이크 1을 한다."
숨쉴때마다 악마를 하나씩 죽이는 고인물중에 고인물!
25/03/25 08:24
수정 아이콘
솔직히 고인물이긴 해요 크
人在江湖身不由己
+ 25/03/25 17:32
수정 아이콘
악마가 죽어 고인 물 위를 걸어가시는군요 크크. 농담이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세인트
+ 25/03/25 21:14
수정 아이콘
PGR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간만에 추게로 보냈으면 좋겠는 글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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