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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8/14 23:22:14
Name 한니발
Subject [기타] [스타1] 프로토스 연대기Ⅲ : 위대한 삼각
 

프로토스 연대기 Ⅲ : 위대한 삼각




  오늘날 ‘프로토스’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 중에 박정석[Oops]Reach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프로토스 선수들 중 커리어로는 김택용과 허영무보다 떨어지고, 롱런으로는 송병구에게 뒤지며, 화려함과 기발함으로는 또 강민이 그보다 앞선다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단언할 수 있습니다. 프로토스에 만일 혼(魂)이라 부를 수 있는 선수가 있다면, 그것은 박정석 외에는 없다고 말입니다.

  이 바닥의 많은 위대한 선수들이 그랬듯, 박정석도 처음에는 그 장점과 단점이 너무나도 명확한 게이머였습니다. 그는 팀플레이 유저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 왔으며, 그래서 팀플레이에서 요구하는 자질들에 특화되어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량을 뽑는데 능했고, 질럿과 드라군을 운용하는데 특출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뒤집어 말하자면, 그게 전부였지요. 질럿과 드라군 이후의 테크트리에서 보이는 박정석의 모습은 서툴다 못해 조악했습니다. 물량 이외의 분야에서는 그것이 운영이든 전략이든 타이밍이든 도무지 기본적인 수준조차 보여주질 못했습니다. 물론 수준급의 배틀넷 팀플레이라 말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수준급의 프로게이머라고는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악랄한 황제의 시대를 끝낼 재목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황제를 저지한 장본인인 김동수가 이른 입대와 더불어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것은 바로 박정석이었습니다.

  “박정석에게는 자원을 그대로 병력으로 순환시킬 신의 왼손이 있고 소모적 전투에서 이득을 챙길 컨트롤의 자질이 있으며 이 둘을 결합해 지속적인 소모전을 끊임없이 감당할 수 있는 프로토스 최고의 손빠르기가 있다.”

  2001년, 박정석 19세.
  아직 김동수가 불러일으킨 황제의 역린이 채 식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적벽

  이듬해, 2002년.
  월드컵으로 인해 온 나라가 축구의 열기에 휩싸였던 무렵.

  2001 스카이 이래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 김동수의 빈 자리를 메우지 못한 프로토스 진영은 다시금 위기에 봉착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때는 스타판 전체가 어수선한 상태였다고 보는 편이 더 옳겠지요. 그 이유는 바로 월드컵이었습니다.
  월드컵과 동일한 시기에 진행된 NATE배 스타리그는 한국 축구 국대의 약진과 그에 따른 축구의 폭발적인 흥행, 그리고 임요환과 홍진호를 비롯한 스타급 플레이어들의 빠른 탈락으로 인하여 기록적인 흥행 참패를 기록했습니다. 그 우승자와 준우승자인 변길섭과 강도경은 거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고, 더욱이 이후 스타리그에서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함으로써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벤처기업의 거품이 빠르게 빠져나가는 가운데, 배틀탑을 비롯한 여러 리그사(社)들도 고사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가운데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스타판 전체의 코어였고, 스타리그에 가해지는 타격은 곧 판 전체에 대한 위협과 다름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 무렵은 스타판 전체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일반적으로, 특히 패키지 게임 시장에서 하나의 컴퓨터 게임이 갖는 수명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소위 마스터피스라 불리는 작품들조차도 그렇습니다. 그 게임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 게임을 계속해서 플레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요.
  스타크래프트는 분명 RTS의 마스터피스라 불릴만한 작품이었으나, 2002년 당시 이미 출시된 지 약 4 년. 물론 월드컵과 여타 리그사들의 몰락이라는 외적인 요인이 있긴 하였으나 어쩌면 그것은 단지 계기였을 뿐, 스타크래프트란 게임 자체의 수명이 다 되었다 말해도 그리 이상한 때는 아니었지요.
  그 가운데 온게임넷은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 여력까지 짜내어 최후의 승부수를 걸기로 합니다. 먹히면 살고, 먹히지 않으면 죽는. 그야말로 대마의 생사가 걸려있는 한 수. 그것이 Sky 2002였고, 약관의 박정석은 리그의 단 둘 뿐인 프로토스 중 하나로서 그 곳에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다시금 가을이었지요.

  박정석과 함께 Sky 2002의 나머지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프로토스는 다름 아닌 김동수였습니다. 지난 가을, 황제의 패악을 드라마틱하게 가로막은 것은 바로 그였습니다. 하지만 김동수는 허망하리만치 간단하게, 허탈하리만치 빠르게 3패라는 변명의 여지없는 성적으로 16강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그래서 미련조차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마치 무언가 따로 믿는 것이라도 있던 것처럼.
  어쩌면 최후의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될 무대에 그렇게 박정석은 혼자 남겨졌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김동수의 경우보다도 가혹했습니다. 16강, 그가 소속해있던 조에 버티고 선 것은 두 명의 저그. 저그 정점의 홍진호와, 지난 시즌 준우승자인 강도경. 강도경은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었지만, 홍진호는 여지없이 박정석을 다시 한 번 짓뭉개놓았습니다. 이 조에서는 결국 재경기가 치러지게 되었지요.
  하지만 박정석은 그 가운데 살아남았습니다. 아득바득 재경기에서 기어 올라와, 8강에서는 지난 시즌 우승자인 변길섭과 오랜 만에 리그에 등장한 외인 게이머인 베르뜨랑 그로펠리에를 쓰러뜨렸습니다. 그리하여 박정석은, 또다시 4강에서 홍진호를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박정석과 홍진호는 악연으로 맺어진 사이였습니다. 상대전적 0:4. 이 SKY 2002, 16강과 재경기 두 차례에 걸쳐 박정석을 짓뭉갠 것은 홍진호였습니다. 박정석의 첫 스타리그였던 코카콜라배, 거기서도 박정석을 추락시킨 것은 홍진호였습니다. 바로 그 코카콜라배에서 홍진호는 저그의 정점을 차지했고, 이후로도 변치 않는 저그의 정점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홍진호는 집요하고도 잔혹하게 박정석을 몰아붙였습니다. 예의 박정석이었다면, 투박하기 그지없는 원석으로서의 그였다면 틀림없이 삼켜지고 말았을 혹독한 폭풍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섯 경기에 걸친 혈투 끝에 폭풍을 견뎌낸 것은 박정석이었고, 사이오닉 폭풍에 집어삼켜진 것은 되려 홍진호였습니다. 마침내 저그의 정점을 무너뜨리고 박정석은 SKY 2002의 결승에 발을 내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끝에는 임요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잔혹한 황제. 그는 얼라이 마인으로 베르뜨랑 그로펠리에를 기만했고, 그 승리를 포함하여 장장 10연승을 거둔 채, 테란의 정점이자 이 스타판 전체의 정점으로서 위풍당당하게 박정석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이미 저그와 프로토스에게서 패권을 약탈했습니다. 수많은 저그와 프로토스들을 유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김동수가 한 번 가로막았던 그의 ‘정복’을 완성하기 위해 박정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승 우승. 최초의 스타리그 3회 우승. 지난 가을 마지막 순간 자신을 방해했던 그 김동수가 후계자로 점찍은 소년, 한빛의 직계 후배이자 ‘신의 왼손’이라고까지 극찬했던 바로 그 소년에게 앙갚음함으로써 완성될 정복이 그의 눈앞에 있었습니다. 때맞춰 돌아온 가을과 함께 그에게 안겨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을 목도하기 위하여 관중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올림픽 공원에서의 사상 최초의 야외 결승이라는 온게임넷의 승부수는 사상 최대의 관중수라는 결과로 보답 받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황제의 영광. 신화의 완성. 그에게 걸맞는 대단원.
  그리고, 박정석은.
  김동수의 후계자, ‘신의 왼손’, 한빛의 프로토스인 박정석은.

  그 박정석은 자신의 전력을 다하여,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황제의 꿈을 불살랐습니다.
  또다시 가을, 또다시 한빛의, 또다시 프로토스였습니다.



 


 


 



  두 번째 전설

  포비든 존, 타들어가는 사이오닉 스톰이 임요환의 마지막 병력까지 몰살시키고 그가 패배를 선언했을 때, 스타리그 역사 12년사 최대수를 기록한 그 관중들은 경악 혹은 환희의 상반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분명 경악하여 말을 잃은 이들의 수는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곳, 스타리그 기사회생의 무대, 사상 최대의 관중들이 모여 증언할 이 무대에서 황제의 신화가 완성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임요환은 전승이라는 초유의 기록으로 이 결승에 도달했고, 박정석은 사상 최저 승률이라는 기록으로 간신히 결승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박정석은 그들 앞에서 압도적이고도 깔끔하게 황제에게 적벽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할 말을 잃은 관중들 앞에서, 엄재경 해설은 두고두고 회자될 말을 남겼습니다.

  “왜 프로토스는 황제가 없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 많이 있는데. 프로토스라는 종족에는 원래 황제는 없습니다. 프로토스는 영웅이지요……프로토스에는 황제가 없고, 영웅이 있을 뿐이고. 박정석 선수가 영웅으로 -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많은 의미를 담은 말이었습니다.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저는 그 말이 저 황제조차도 주인공이 아닌 무대, 임요환 이후로도 수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무대, 그럼에도 살아남고 이어질 수 있는 무대로서의 가능성을 지닌 스타리그를 예고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스타리그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저는 포함하여 그 의미를 전부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엄재경 해설 본인조차 그러했을 것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바로 그곳에 박정석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임요환과 홍진호라는 위대한 두 스타를 깨뜨리고 김동수의 자리를 대체한 프로토스의 신성으로서, 그리고 SKY 2002의 명명백백한 우승자이자 가을의 전설의 후계자이며, 다른 그 무엇보다도, ‘영웅’으로서. 그는 관객들의 기대를 배반한 최초의 ‘리그 브레이커’였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는, 그 어떤 위대한 스타라도 그 시작은 ‘리그 브레이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리그 브레이커라는 단어의 의미를 부정한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에 온게임넷이 그에게 안긴 그 슬로건은, 어쩌면, 스타리그가 새로운 기회를 얻은 바로 그 2002년의 가을에 이미 그에게 바쳐져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영웅’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스타리그가 박정석에게 영광을 허락한 것은 그 2002년의 가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박정석의 싸움은 고독했습니다. 김동수가 그에게 뒤를 맡긴 이후로, 프로토스란 종족 내에서 박정석의 입지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웅은 정진전명, 유일한 프로토스의 정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테란과 저그를 상대로 한 전장을 박정석 혼자 이끌어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박정석의 일격이 임요환을 뒤흔들어놓은 사이 테란에는 이윤열이라는 왕좌(王座)의 재능이 움트고 있었고, 저그에는 홍진호의 뒤를 이어 조용호라는 거목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참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한 시대에 격변을 가져올 재목이었으며, 그들 종족에 대격변을 불러일으킬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박정석은 그 모든 적들에, 그 모든 변화 오로지 홀로 고고히 맞서야 했습니다.

  임요환의 ‘황제’나, 홍진호의 ‘폭풍’만큼이나, ‘영웅’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모든 면에서 박정석에게 걸맞은 이름입니다. 그는 그의 극적인 첫 우승의 일화가 있기에 그러하고, 이후 수년에 걸쳐 홀로 프로토스의 자존심을 지켜나간 그 행보가 있어 그러하고, 또한 고리타분하리만치 순수하고 고결한 그 플레이가 있어 그러합니다.
  그의 장점은 매크로 물량과 게이트 유닛들의 컨트롤. 다시 말하자면 물량과 전투이며, 이는 소모전의 반복과 빠른 물량 충원이라는 논법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그의 게임은 올곧기 그지없는 정면 전투, 그야말로 끊임없는 전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정당당한 전투가 그에게 이득을, 타이밍을, 승리를 선사하기에 그는 그 어떤 사술이라도 사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초반은 안정적으로, 그 뒤 적에게 선수를 내어준 뒤, 이후로는 정면에서 벌이는 전투. 이것이 박정석의, 영웅의 논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2002 SKY 이후로도 그가 보여주는 전투는 실로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용기병들은 박정석의 지휘 아래서만은 저들답지 않은 일사분란함을 보였고, 하드코어 질럿들은 테란과 저그의 초반을 위협했으며, 황제의 꿈을 불살랐던 사이오닉 스톰도 건재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모든 전투의 절정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결국 냉혹한 패배였다는 것.

  재기발랄한 이윤열은 극한의 효율을 자랑하는 병력 운용으로 박정석으로부터 전투의 주도권을 앗았습니다. 조용호의 수비식 저그는 전투를 갈망하는 박정석의 프로토스를 늪 속으로 끌어들여 질식시켰습니다. 한 때 임요환과 홍진호, 테란과 저그의 정점들을 무너뜨렸던 박정석의 논법은 급격한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습니다.
  더욱 프로토스를 절망시킨 것은, 박정석은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었으며, 그러한 박정석조차도 결국 이윤열과 조용호를 앞세운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박정석은 여전히 프로토스의 빛나는 영웅이었으나 그것은 서글프기 그지없는 희미한 풍전등화였습니다. 프로토스의 적들에게 있어 경계해야 할 유일한 프로토스는 박정석 뿐, 그리하여 박정석은 그 모든 십자포화를 견뎌내고서 홀로 전선을 달려야 했습니다. 박정석이 곧 프로토스였고, 박정석의 고난과 한계가 곧 프로토스의 고난과 한계였습니다.
  새로운 바람이 필요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박정석만의 프로토스로는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고독한 영웅의 논법과는 또 다른, 독창적이면서도 대담하게 자신의 길을 창조해나갈 그런 재능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프로토스는 다시 한 번 그것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몽상가, 꿈의 군주, 꿈꾸는 자들의 왕.
  강민Nal_rA,



 


 


 



  꿈꾸는 자들의 왕

  일찍이 극찬과 함께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박정석과는 달리, 김동수에게 있어 강민은 그렇게까지 눈에 띄는 재능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도 충분했습니다. 강민은 실로 괴상망측한 플레이를 일삼았으며, 플레이 완성도의 기복도 심했습니다. 유리 공장을 전전하며 시력 손상과 비염을 얻었고, 119 클랜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도움의 손길로 간신히 프로의 세계에 발 딛은 이 불운한 게이머는, 처음에는 그저 기묘한 기척을 풍기는 괴짜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김동수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분명 강민은 그의 두 번째 상속자입니다. 박정석이 김동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프로토스의 정점이자 기둥이라는 종족 내 역할이라면 강민이 김동수에게 물려받은 것은 그의 수라도였습니다. 황제를 저지하고 프로토스에게 최초의 전설을 안긴 그 수라도, 바로 전략가로서의 길이었지요.

  ‘괴짜 기질’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던 그의 분방한 발상과 넓은 시야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새로운 모습으로 다듬어져 갔습니다. 반복된 기본기의 연습,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는 그저 무모함과 넘겨짚기 수준 정도로 밖엔 보이지 않았던 그의 자질들을 뛰어난 기책과 가공할만한 통찰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결과물이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낸 것은, STOUT배 MSL. 그 적수는 임요환과 이윤열. 다시 위대한 테란의 군주들이었지요. 강민은 STOUT MSL 4강에서 임요환을, 결승에서는 이윤열을 연파하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강민의 이 우승은 임요환의 한빛, SKY 2002, 홍진호의 삼보, 정명훈의 Tiving과 함께 역대 양대리그 전승우승 기록에 가장 근접한 우승 가운데 하나입니다. 강민은 우승까지 이르는 동안 단 1패만을 허용했고, 그 적수는 4강의 임요환이었습니다. 결승에서는 이미 KPGA를 3연속으로 제패한 사상 유일의 그랜드 슬래머, 저 이윤열을 3:0으로 셧아웃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실보다 주목해야 했던 것은, 그만한 적들을 상대했고 그만한 위업을 달성했으면서도 강민은 그저 담담히 우승컵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강민의 올드보이’나 LOL 해설자로서의 강민, 그리고 평소의 유순하고 푸근한 인상을 보면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 무렵 강민은 칼끝같은 날카로움을 품고 있었습니다. 전승에 가까웠던 우승에도 일회일비하지 않는 야심을 지녔고, 인터뷰와 플레이에서 자신의 게임에 대한 불꽃같은 자긍심이 묻어났으며, 두둑한 배짱과 대담함을 두루 갖추고 있었지요. 그를 바탕으로 강민은 프로토스에게 수많은 전략적 아이디어와 운영의 갈래를 제시했습니다. 이윤열과 조용호가 각자의 종족에 불어넣었던 활기가, 프로토스는 강민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02년의 마법의 가을로부터 1년, 2003년의 가을, 마이큐브 스타리그의 4강에서 박정석과 강민이 만난 것은 하나의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역대 모든 프로토스 대 프로토스전을 통틀어 단연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이 놀라운 게임에서, 현란한 마법의 향연 끝에 강민은 박정석을 무너뜨렸습니다.
  물론 그 패배가 기꺼웠을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 박정석이 한편의 아쉬움과 더불어 조금이지만 기대감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천하의 박정석을, 지난 일 년 간 프로토스의 확고부동한 정점이었던 자신을 꺾어낸 새로운 기수의 등장. 고지식하리만치 정정당당한 전투의 미학을 추구하는 자신과는 또 다른, 분방하고도 다채로우면서 넓은 시야를 가진 프로토스의 등장. 박정석과 강민의 마이큐브 4강은 ‘영웅일도’의 종언을 알리는 자리인 동시에 박정석의 외로운 고군분투가 끝났음을, 프로토스가 비로소 낭만시대의 이름에 걸맞은 진용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리는 무대였습니다.



 


 



  셋이서 하나를 상대한…다.

  박정석과 강민이 프로토스를 이끌고, 조용호와 홍진호가 저그를 이끌며,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윤열이 그랜드슬래머로서 판의 중심을 틀어쥔 동안, 상대적으로 임요환은 핵심부에서 밀려나 있었습니다. 두 번의 가을, 두 번의 전설, 두 명의 프로토스가 두 번씩이나 그의 패도를 방해한 결과였습니다. 모든 영광을 손에 쥘 순간이 눈앞에 있다 믿어 의심치 않을 때, 두 명의 프로토스가 마지막 순간 그의 꿈을 불살랐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임요환은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습니다. 그 강렬했던 전성기에 비하여 모든 지표가 점차 쇠락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윤열을 대적하는 그 순간에만은 임요환은 자신의 이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판의 모든 프로게이머들이 이윤열의 패도에 차례로 굴복하는 동안, 오직 임요환만이 기묘하게도 이윤열과의 호각세를 유지했습니다. 황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요.
  하지만 결국 이윤열은 시대를 거머쥘 재능이었고, 언제까지나 임요환이 자신을 방해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최초의 ‘천하제일 스타대회’라 할만한 KT-KTF 프리미어 리그의 결승, 이윤열은 모든 도전자들에게 단 1패도 허락하지 않고 승리를 거머쥐었으며, 결승에서 임요환과 조우했습니다. 임요환은 이윤열에게 대회 유일의 1패를 안기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대관식, 사람들은 그 결승을 그렇게 불렀지요. ‘황제’란 고유명사이므로 오직 임요환의 것이라는 주장이 있긴 했으나, 설령 황제이건 아니건 간에 상관없이 이윤열은 새 시대의 통치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임요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01년, 수많은 저그와 프로토스들을 학살했던 그 잔혹한 역습처럼, 그는 다시 한 번 거대한 파도를 준비했습니다.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형태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판을 장악할 장절한 한 수를 준비했습니다.
  선수 개인에 의한 프로 팀의 창설.
  동양과, 포-유니온을 거쳐, 후일 SK TELECOM T1에 이르는, 후일 스타크래프트 12년사 가운데 가장 강대한 세력으로 이름을 떨칠 집단의 탄생.
  제국, 그것이 임요환이, 황제가 이 판에 들이민 칼날의 이름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이들이 그저 손 놓고 그의 전횡을 지켜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긴 싸움 동안 황제는 수많은 적들을 만들었고, 그들은 아직 미약했던 제국의 세력을 분쇄하기 위하여 단결했습니다. 저그에서는 굴지의 투톱인 홍진호와 조용호가 나서서 제국의 반대편에 섰습니다. 테란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황제의 반대편에 서 왔던 ‘귀족’ 김정민과, 네이트배의 변길섭이 제국의 반대편에 섰습니다. 이윤열은 독자 행보를 밟았으나, 그 또한 적어도 황제와 한편에 설 생각은 없었습니다.
  프로토스 역시 당연한 선택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황제를 저지하고, 또한 몰락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김동수와 박정석, 두 대에 걸쳐 황제의 시대를 막아낸 주인공이었으며, 이제 거기에 강민이라는 새로운 재능이 더해져 판의 패권을 노리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박정석과 강민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제국의 반대편을 선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그대로 되었더라면, 모든 프로토스가 그들의 필두인 박정석과 강민을 따라 제국의 반대편에 섰더라면, 제국은 결코 역사에 그 이름을 날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임요환의 두 번째 역습은 허망하게 흩어졌을 것이고, 그의 시대는 2003년에 이미 끝을 맺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명, 길을 달리한 프로토스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자리가 없었고, 대신에 불타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황제가 그에게 내민 손을 붙들었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셋이서 하나를 상대할 수 없게 된 그 순간. 후일 박정석과 강민과 더불어 ‘삼대’라 불리게 될 일원이 제국과 함께 할 것을 선택한, 바로 그 순간에, 모든 것은 바뀌었던 것입니다.



  - 4편에서 계속




 다음 글에서 매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Pain님의 「박정석, 강민, 박용욱에 관한 단상」 (http://judaspain.tistory.com/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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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ce The Veil
14/08/15 00:39
수정 아이콘
마치 눈 앞에서 설명해주시는 것 같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참 누가 시나리오를 썼는지 스타판의 스토리는 어떤 블록버스터 영화보다도 이야깃거리가 많아서 놀랍고 이걸 라이브로 즐겼다는 거에 무한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립네요 스타1.
여우비
14/08/15 01:03
수정 아이콘
정말 좋은 글이네요..
마일스데이비스
14/08/15 01:47
수정 아이콘
스타판을 소재로 영화가 한편 나오면 정말 재밌을텐데요
14/08/15 02:24
수정 아이콘
크아....강민 박용욱 박정석...딱이때가 프로토스의 전성기였던거같아요 더불어 프프전최약체엿으나 타종족은 기가막히게 잡던 전태규도 기억나네요 으아...
사상최악
14/08/15 17:40
수정 아이콘
박용욱 선수 이야기가 기다려지네요. 가장 저평가 받는 선수를 꼽을 때 못해도 다섯손가락 안에는 들어가지않나 싶은...

그리고 스타의 역사를 다루는 글을 볼 때마다 엄재경 해설이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했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를 우리가 즐길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 아닐런지...
에다드
14/08/16 00:19
수정 아이콘
잘 보고 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택빠로서 김택용이 어떻게 평가될지 궁금하네요
하쿠나마타타
14/08/16 01:28
수정 아이콘
캬 좋다~. 진짜 예전 생각 나네요.
제가 02년 가을에 이사하고 케이블이 나오길래 티비 돌리다가 우연히 본게 스카이 결승이었는데
딱 그때 부터 시작하는군요. 한참 재밌게 볼때라 그런지 다 기억 납니다 히히
타이밍승부
14/08/17 03:47
수정 아이콘
구3대 ㅠㅠ

프로토스 연대기 언제 올라오나 기다리다가,

이제 발견하고 늦게나마 리플을 답니다.
14/08/17 12:34
수정 아이콘
에게나 추게로 갈거같아 일단 탑승해봅니다.?!
껀후이
14/08/18 15:12
수정 아이콘
김동수, 임성춘, 송병석
박정석, 강민, 박용욱
오영종, 박지호
김택용, 송병구
육룡
허영무

가장 프로토스가 융성했던 시기는 단연코 육룡시대였겠지만(마이큐브-한게임 때는 맵빨이;)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는 박정석, 강민, 박용욱 시대였죠.
진짜 낭만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크...
王天君
14/08/25 23:18
수정 아이콘
아마 오영종, 박지호, 송병구로 불려도 될 것 같습니다. 송병구의 데뷔는 진짜 파격에 가까웠거든요.
王天君
14/08/25 23:23
수정 아이콘
http://youtu.be/Q5ZY8Fz9GGU

지금 스타워즈 메인 테마곡 dual of fates 들으면서 보는데 진짜 전율이 찌릿찌릿 몸을 때리네요. 박용욱의 등장과 티원으로서의 합류가 저런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다니. 정말 장난 아닙니다.

일주일을 어떻게 기다려~~~~~~~~~~~~~~~~~ㅠㅠ
와룹푸
14/09/16 20:34
수정 아이콘
이거 기다리고 있는데 언제쯤 글이 올라오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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