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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7/11/04 01:43:44 |
Name |
.JunE. |
Subject |
높은 곳에서의 당신의 모습, 반갑습니다. |
2002년 여름방학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고등학교 공부라는 것이 조금은 익숙해져 가던, 무더워져가던 고등학교 2학년의
늦은 봄(혹은 이른 여름)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채널이 60번까지 올라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챌린지리그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티브이에서 스타크래프트를 본 것은 코카콜라배 스타리그였습니다. 그것도 보려고 본 게 아니라 그냥
돌리다보니 해서 보게 되었고, 이름도 모르는 선수들의 16강 전을 보고, '에이 뭐 이런 걸 방송하지'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저에게, 그 날 보게 된 챌린지리그 한 게임은 입시에 지쳐 있던 한 수험생의 일상에 '스타리그'라는 것을 끼워넣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서지훈 대 박상익' in Neo Bifrost.
처음부터 게임을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글바글한 마린 떼에 저그가 하나씩 하나씩 멀티를 잃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마린메딕 부대가 12시 성큰 밭으로의 돌파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고, 해설진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비프로스트의 퍼펙트 테란 서지훈이라고. 그러려니 하고, 어떻게 되나 구경이나 하자 싶어서 게임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마린메딕은 성큰 밭으로 달려들었고 성큰이 마린에게 촉수를 내뻗자, 촉수를 맞은 마린에게 디펜시브 매트릭스가 걸립니다.
'저런 플레이도 있구나...' 스타를 다시 시작하고, 스타리그란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 서지훈 선수를 보기 위해 스타리그 시청을 시작했습니다. 야간 자율 학습을 하던 고등학교라 생방송으로 스타리그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스타리그는 늘 12시 넘어서 재방송으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화요일과 금요일 밤은 스타리그를 보다가 1시가 넘어서야 잠들기가 일쑤였습니다. 스쿨버스를 타기 위해서 5시 30분에 일어났어야
했기 때문에 수요일과 토요일의 오전 수업은 잠으로 점철된 시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피지알에 출입하게 된 것도 그 때 쯤이었습니다. 회원가입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그때 회원 가입 버튼이 사라진 시기라
그냥 글들만 보고 가곤 했었습니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는 참 즐거웠습니다. 서지훈 선수가 참 잘 이기던 시기였습니다.
챌린지를 우승하고 올라간 파나소닉 스타리그에서는 친구 이윤열 선수가 비프로스트 퍼펙트의 명성을 깨고, 우승까지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지만, 바로 다음 시즌에서 아직도 최고의 5전제 승부 중 하나로 기억되는 올림푸스 대전을 이겨내며
절정의 시기를 맞습니다. 임요환 선수와의 4강이 있던 날은 야자 시간에 학교 컴퓨터로 피지알을 접속해서 문자 중계를
계속 보던 기억이 납니다. 3:0 승리라는 말에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결승전은 친구와 문자로 계속 싸우며 봤었습니다.
그 녀석은 당시에 이윤열 팬이었으니까..
2003년 11월 4일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바로 다음날이 저의 수험 생활의 종점인 수능 시험 날이었다는 것과, 서지훈
선수가 성학승 선수에게 패배하여 스타리그에 진출하지 못하게 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수능 전 날, 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7시가 되어 티브이 앞에 앉았습니다. 어차피 그 시간은 컨디션 조절의 시간이니까.. 라는 핑계로 티비 앞에 앉아서 5경기에서
서지훈 선수가 듀얼에서 2패 째를 기록하며 차기 스타리그에서 3달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우승 후 다음 시즌인
마이큐브 배에서 에어쇼를 보여주며 8강에서 탈락하고 그 다음 시즌인 한 게임 스타리그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논술 준비하라고 떨어져 준거야'라고 자위하며 잠자리에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행히 재수는 하지 않게 되어 서지훈
선수에게 정신적 피해보상을 청구할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저의 대학 생활과 함께 시작된 서지훈 선수의 2004년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친구 박성준에게 패배하며 온게임넷 스타리그
첫 번째 저그 우승의 기록에 8강 상대로 이름이 남았으며, 기복이 심한 플레이로 들쭉날쭉한 성적을 보여줍니다. 뭐 사실,
올림푸스배만 제외하고 나면 이렇다 할 성적을 보여준 적도 없었지만, 탈락 혹은 8강으로 계속 이어진 개인전 성적은 '기복이
있다'라고 말하기에 충분한 정도였습니다. 당시 팀리그에서 보여준 경이로운 성적을 생각해보면 개인전의 플레이는 정말
한숨이 나오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시즌 다시 챌린지 리그를 우승하며 스타리그에 복귀, 하지만 또 8강에서 탈락.
2005년에는 오영종 선수에게 패하며 가을의 전설의 희생양 명부에 이름을 올립니다. 이 때 유행하던 말이 '서지훈을 8강에서
잡으면 우승' 이라는 말이었으니 뭐.. 당골왕 배에서 패자 결승에 진출한 모습을 보며 이번에는 결승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3:0 패배. 2006년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개인전 성적. 프로리그에서의 부진.
언제부턴가 저는 서지훈 선수 팬에서 GO 팬으로, 마재윤 선수 팬으로, CJ 팬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꼭 챙겨보던 서지훈
선수의 게임도 안 보기 시작했고(하지만 이기는 게임은 다 VOD로 챙겨봤었...^^;;) 서지훈이 엔트리에 들어가 있으면 왠지
모를 불안함에 오늘 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이번 리그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32강 게임은 잘 기억도 나지 않고, 16강 첫 경기는 보지도 않았습니다. 경기
평가를 보고 나니 게임을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응원하는 선수의 패배를 보고 이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가
싫었기 때문에 2,3경기는 경기 평가를 먼저 보고 VOD를 봤습니다. 3경기에서의 서지훈 선수의 모습은 한창 어나더데이 벌쳐 싸움
전문 선수로 활약하던 전상욱 선수를 기요틴에서 벌쳐로 한 수 가르쳐주며 이기던 때의 모습과, 테테전 짐승이라 불리며
닥치는 대로 이기던 때의 모습, 러시아워에서 한동욱 선수를 상대로 다 진 게임을 역전하던 때의 모습이 생각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4강 전도 생방송으로 볼 자신은 없었습니다. 상대가 강민이니까 아마 이기긴 힘들꺼야. 밖에서 놀다가 경기 평가 보고 혹시나
이겼으면 봐야지.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지나가며, 강민에게 패한 여러 다전제와 김성제 선수에게 패한 다크 사우론 경기,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성제 선수에게 scv를 다 잡히며 패배한 이병민 선수의 알포인트 경기-_-;;;;가 생각이 났습니다.
뭐 그런데 세상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감기가 지독하게 걸려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서 쉴 수 밖에 없어서 마지못해 곰플레이어를
키게 되었습니다.
'형한테 혼 좀 나야지' 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16강 승리 후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 같습니다. 혼 좀 내주려는 강민 선수의
대놓고 전진 게이트와 함께 철의 장막이 팀플에서 쓰이던 시기 김동준 해설이 입버릇처럼 말했던 '무조건!! 무조건! 건너가서 게이트
지어야죠' 라는 말이 귓가에 울려퍼지면서, 이건 막아도 테란이 손해라는 생각만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비프로스트에서 박정석 선수가
서지훈 선수를 전진 게이트로 이긴 예전의 게임도 생각났습니다. 서지훈 선수는 이런 전략을 잘 못 막습니다. 사실이야 어쨌든 제가
생각하는 서지훈 선수는 이런 플레이에 약한 선수입니다. 하지만 튀어나온 질럿의 앞길과 프로토스의 앞길을 함께 막아버리며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투팩벌쳐로 게임을 끝냅니다.
2경기. 로키2에서의 테란의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탱크의 주춤주춤 때문에 다 된 밥에 코를 마구 빠뜨리더니, 3경기는 손쉽게
한 게임을 따옵니다.
그리고 4경기. 스타포트를 올립니다. 말씀을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서지훈 선수가 전략을 거는 것이 불안해 죽겠습니다.
별로 전략을 거는 선수가 아니지만 저는 서지훈 선수가 전략을 쓰면 왠지 질 것 같습니다. 대 저그전 8바락을 해서 이기는 게임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임성춘 해설과 했던 챌린지 리그 결승 in Neo Forbidden Zone에서도
2드랍십 8벌쳐라는 전략을 쓰다가 그냥 졌습니다. 스타포트 올리는 걸 보고 무척이나 불안해졌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벌쳐는 본진에
떨어져서 프로브 6기나 속아내 줬을까. 그 사이에 드라군 4기에 탱크 2기 잃고 scv는 줄줄이 드라군을 따라다닙니다. 멀티는 늦고
병력은 없고 벌쳐 견제는 안 통하고 프로토스는 확장이 늘어갑니다. 제가 요즘 많이 당하는 공방에서의 모습입니다. 결과는? 멀리멀리
다녀오는 겁니다. 벌쳐가 상황을 바꾸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녀봐도 드라군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레이스와 어우러져 한 번
멋드러진 수비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수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5경기는 블루스톰. 아직 4경기가 끝이 나지도 않았고 사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만큼 불리하지도 않았지만 팬心이란게 다 그런건지
제 마음 속은 벌써 강민 선수의 승자 인터뷰를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화면은 1시 멀티 앞쪽에서 왼쪽 드라군을 피해 멀티로 들어가지만
그곳에는 이미 캐논 두 개가 있는 상황. 그런데 어디선가 뭔가 내리는 소리가 납니다. 로스트 템플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한 번의
드랍으로 그는 MSL의 현 지배자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서지훈 선수의 게임을 지켜보면서, 참 닉네임이랑 안 맞는다 싶은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의 게임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이길 때는 시원시원하게 이기지만, 시원하게 이기는 모습보다 참 요상하게 지는 게임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별명을 얻은
비프로스트라는 전장에서조차도, 퍼펙트하게 이겨서 퍼펙트 테란이 아니라 어떻게 이기고 나니까 다 이겨서 '(승률이) 퍼펙트한'
테란입니다. 수비를 참 잘하는 테란이라고 불렸지만, 드랍류 공격에 참 많이도 휘둘립니다. 어디가 퍼펙트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별명이야 아무렴 어떻습니까. 퍼펙트면 어떻고 서즐이면 어떻습니까. 그는 소위 올드게이머라 불린 다른 선수들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시즌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이길 수 있다고 몸으로 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 시즌
서지훈 선수의 그런 모습을 보며 아직도 '퍼펙트'란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습니다.
부진한 모습을 보며 화면 앞에서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이제는 서지훈을 응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게임을 할 때가 되면 보고 싶어지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종횡무진 활약해서 저도 모르는 새에 지나간 게임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4게임은 기본으로 하던 팀리그의 스태미너王 서지훈 선수. 다시 한 번 비상하세요.
저의 지겨웠던 학창 시절의 탈출구였던 (비프로스트에서의) 퍼펙트 테란 서지훈 선수. 다시 한 번, 반갑습니다.
ps. 다 쓰고 보니 너무 긴 글이네요.. 오랜 만의 승리에 덩실덩실하며 글을 한번 써봤습니다; 국문과라는 게 왜 이리 글을 못 쓰는지..글 잘 쓰시는 분들 보면 부럽습니다-_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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