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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6/09/08 18:04:35
Name 퉤퉤우엑우엑
Subject [소설] 殲 - 9.반복


"......!...!"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다.
누구일까.

아아, 그래. 어머니의 목소리야.
보이지는 않지만, 비슷한 음색이니 아마 그렇겠지.

소리 지르고 있는 건 잘 들리지 않지만, 빗소리는 똑똑히 들린다.
밖에서 비가 오고 있겠지. 확신까지는 못하겠지만.

내 몸은 누워 있다.
당연히, 왜 누워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실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뭐, 지금 미치도록 아프고, 내가 그것을 싫어하고 고통스러워 한다는 건 맞겠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눈이 떠졌다. 시야는 아직 어둡다.
몸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다. '몸' 이란 게 있긴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시야가 밝아지니까 눈은 확실히 붙어 있기는 한가보군. 눈으로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더라도.

눈 앞에 보여지는 건, 단 두음절의 단어 그 자체.

녹색.

기분이 매우 나빠지는 저 검정빛의 녹색.
그리고 그 녹색이 그려내는...저것들.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괴물' 내지는 '유령' 이 되려나.

팔이 없는 놈도 있고 눈이나 다리가 잘린 놈도 있으니까. 기본 형체는 사람이지만.
사람이라는 표현이 저들에겐 과분할거야. 자신들도 분명 싫어-하려나.

내 눈 앞에 보여지는 단지 녹색인 것이 싫다.
녹색이어서가 아니라, 뭐라 말할까, 이유없이 기분이 나빠지는 녹색이어서 싫다.
거기에 더 싫은 건─

─내 몸도 저들과 같다는 것

부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난 저 집단 중 한명일 뿐이니까. 수십, 수백으로 겹쳐진 저 진한 검은 녹색 중 하나니까.
누가 보더라도 내가 특별하게 보일 이유 같은 건 없다.
내 몸도 그저 녹색이고, 공간을 차지한다는 개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손이 없는지, 배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둘을 닿게 해도 감촉없이 통과 된다.


하하, 그런건가.
내 눈에 보이고 있는 건 녹색이 아닌건가.
녹색이 아니라는 것보단, 정확한 정의는 아니겠지.
두 음절인 건 같지만 그게 녹색이라는 단어는 아냐.

────죽음, 정도면 되려나.

저들 자체가 그저 '죽음'.
아무런 부가 설명없이, '죽음' 일 뿐인 것이 바로 저것들.
즉, 나 자신이겠지.
그리 큰 충격이 아닌 이유는 뭘까.
항상 가까이 있던 것을 지금 자각했다, 라는 건가.
나쁘진 않은데. 죽는다는 거─







갑자기 눈이 떠졌다.
잠에서 깨기 전에 눈부터 떠버린 것 같이, 급하게 눈을 떴다.
몸은 아직 침대에 누워 있다. 침대에 누워서 눈만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으......"

그저 상체를 일으키려고만 했는데도 입이 무의식적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몸을 일으킨다는 게, 별로 힘들다거나 아프다거나 하진 않았는데.

몸 전체가 땀으로 젖어서 상당히 불쾌했다.
자세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방금 악몽을 꿔서 일어 났으니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무심코 시계를 보고, 지금이 6시라는 걸 보았다.

"뭐야..."

땀, 같은 건 닦으려고 하지 않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로 벌떡 일어났는데도(정신에만 한해서) 아직도 피곤하다.
사실 평소에도 이런 꿈을 꾸었다고 졸리지 않았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 어중간한 시간이어서 다시 잠들지 않았던 거고.
평일이라면 등교라는 것 때문에, 다시 자려고 하지 않았던 거니까.
오늘 같은 날은 편하게 늦잠 좀 자보자. 요즘엔 편하게 잤던 날이 며칠 되지도 않잖아.

뭐, 다시 악몽을 꾼다면 그떈 이 행동이 크게 후회가 될지도 모르겠네.










악몽은 꾸지 않았던 것 같다.
11시까지 푹 잤더니 몸이 나른하다. 세수를 하고 있긴 하지만.
'잠을 많이 잤으니까 키가 크겠지'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혼자 웃어버렸다.

대충 씻고 거실 겸 주방 겸 침실로 나왔다.
나름대로 위생을 살리기 위해 주방이 침대와 멀리 있긴 하지만 두 걸음 정도의 거리.
설거지를 하루라도 안 했다간 혹시 자다가 죽을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던 적이 몇번 있었다.
공상 같은 건 이쯤하고, 아침이나 먹어볼까.


아침식사라지만 '식사' 라는 표현이 부적절할 정도로 간소하다.
빵에 우유. 그걸로 끝이다.

빵을 한입 베어물고 우유 한잔을 마시며, '난 뉴요커야' 라고 위로했다. 그래봐야 더 비참해질 뿐인 건 어쩔 수 없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오늘 할 일이 뭐가 있었나 생각했다.
저녁에 태일이 공원으로 오라고 했고...그걸로 끝인가.

저녁이라는 게, 대체 뭔지 생각하다가 문득 어젯밤에 태일이 다시 오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당연히 다시 올 줄 알았는데 안왔었나. 어쩌면, 내가 너무 빨리 잠든 걸지도 모르겠지만.
뭐 어때. 공원에서 산책이라도 하면서 기다리지.

그릇과 컵은 싱크대에 대충 던져놓고,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무슨 신발을 신을지 잠깐 고민하다가 흰색으로 선택했다.
겨우 두개 있는 신발로 흰색과 회색 중에 고민한다는 게, 조금 바보 같은 짓이긴 하지만,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계속 인사하는 것도, 적지 않게 바보 같은 짓 같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서 아파트 현관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나가서 심호흡을 한번 했다.
그리고 갯수를 세면서 나머지 계단을 내려갔다. 5개.


그런데, 나 왜 지금 나온거지?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에?'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이다. 내가 지금 밖에 있을 필요라든가 이유는 없었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나갔던 건가. 음, 느끼지 못하는 새에 내 집이 싫어진 건지도 모르겠어.
아아, 이 이유는 내 방에서 하루만 생활한다면 누구나 느낄 수 있으니까 제외.

근데 뭔가 두번째 겪는 상황인 것 같다.
이른바 데자뷰 현상이라는 건가(속으로 흡족해했다).
글쎄, 이건 데자뷰라는 거 치고는 너무 정확하게 두번째라는 느낌이 들었다.


-찌릿

살짝, 두통이 느껴졌다.
두통이 느껴졌다는 건 그, 내가 쓰러졌다거나 하는 일이네.

맞아. 이제 기억이 났다. 공원에 갔던 일이지.

-찌릿

두통이 조금 더 심해졌다. 이 생각은 이만 하는 편이 낫겠어.

그런 생각보다, 일단 나왔으니 뭘 할지부터 생각하는 편이 좋겠지.
마땅히 할 일은 없다. 갈 곳도 딱히 있는 건 아니다.
보통 pc방이나 가겠지만, 나하고는 잘 맞지 않는 곳이니까.

지금은 학교에나 가보자. 운동장에 누가 있거나 할지도 몰라.

생각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옮기자마자 나타난 지렁이라는 불청객을 슬쩍 피하고 걸었다.
숨을 한번 더 깊게 쉬고 목을 뒤로 크게 젖혔다. 우두둑하고 소리가 들린다.

지금도 태일이가 '선배!' 하고 달려와 줬으면 하는데. 역시 무리겠지.
걸음속도를 조금 빨리 했다. 어쩌면, 가는 길에 마주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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