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2006/03/28 19:04:30
Name Bar Sur
Subject [잡담] 시대의 우울.
조금씩 풀려나던 날씨가 플레쉬벡 현상처럼 겨울의 한 때로 돌아간듯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그런데도 무슨 깡으로 평소처럼 셔츠에다 얇은 점퍼 하나만 걸쳐입고 나왔으니 후회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통학길의 버스 안과 강의실을 캠프 삼아 고지를 점령해나가는 등산가의 마음으로 학교를 다녀와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산하는 길은 그저 주변에 눈돌릴 여유도 없이 태엽인형처럼 바쁘게 거리를 걸었다.

그렇게 바삐 걷던 내 시선이 갑자기 한 곳에 고정된 것은 순전히 뭐라 말 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간의 자력 같은 것이었나보다.

그는 적어도 40세는 넘어보이는 중년남성이었다. 단지 그것 뿐이라면 모르지만, 길을 걷는 그 짧은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그의 모습과 움직임은 가히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일단은 직장인처럼 차려입은 양복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모르게 후줄근하게 주름이 잡혀있고, 반백발이 된 머리카락은 산발처럼 흐트러져있었다. 뿔테 안경대는 그저 걸쳐져 있을 뿐, 시선은 비스듬히 땅바닥만을 향해있다. 그 남자는 비도 오지 않는 날, 펑퍼짐하게 부푼 우산을 지팡이 삼아서 비틀비틀 신촌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지나친 뒤에도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단순히 날씨가 아니라, 순간 단절된 공간만이 통째로 플레쉬벡 현상을 일으킨 듯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뒷모습과 걸음걸이가 무언가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메타포인 것마냥 묘한 징후를 품고 있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어딘가가 신체가 불편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육신을 일으켜올리고 올곧게 걷도록 하는 그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한, 몸에 연결된 실이 끊어져버린 마리오네트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어찌보면 에드가 앨런 포의 <군중 속의 사람>에서처럼 그는 그저 그곳을 걷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마치 사방으로부터 조명을 받은 조각상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조명을 비추느냐에 따라 달라보이는 조각상이 온사방에서 조명을 받으면 아예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도 같은 논리다. 마치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광장으로 끌려져나와 군중 앞에 던져진 개별자로서의 인간이 무참히 거기 까발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를 제대로 보고있지는 않은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는 듯이, 단지 무감각한 타자의 시선들이 그의 초라한 육체를 슬쩍 지나쳐갈 뿐이었다. 내 시선이라고 무엇이 달랐을까.

과연 그에 대해 내가 무엇을 추측할 수 있겠는가. 단지 그는 거기에 있었을 뿐이고, 우리는 눈빛 한 번 주고받지 않고 서로를 지나쳤다. 이것은 단지 나의 되먹지 않은 감상일 뿐, 나는 어느 것 하나 그에 대해 추측하거나 상상할 수 없었다. 비틀거리며 신촌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그 모습 이외에 달리 다른 삶이란, 보이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차가운 바람과 함께, 알 수 없는 우울함이 엄습해왔다. 마치 "시대의 우울"인양 바람결에 그것이 섞여있었나 보다. 마침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 재빨리 뛰어올라 자리를 잡은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감겨지는 눈꺼풀과 함께, 문득 "세상"이 덮쳐오는 듯 하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Crazy Woo
06/03/28 19:44
수정 아이콘
가끔 그런때가 있죠. 그런데... 봄 타시나요? ^^;
Juliett November
06/03/29 01:3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요즘은 심란하네요.
어서 부동심을 되찾아야 할텐데...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2077 가족과 노래방에 가보셨나요? [8] 설탕가루인형5195 06/03/29 5195 0
22076 MBC게임 차기 공식맵 수정사항 [40] 김연우5773 06/03/29 5773 0
22075 다르다고 잘난 것은 아닙니다. [32] OrBef4984 06/03/29 4984 0
22071 온겜 대진표 나왔네요. [84] 마녀메딕6137 06/03/29 6137 0
22069 하루에 글 2개 쓰는 건 처음입니다. [10] Dizzy4073 06/03/29 4073 0
22068 기대이상의 실력을 보여줬습니다. [11] SJYoung3788 06/03/28 3788 0
22066 PGR의 법칙 [27] toss3453 06/03/28 3453 0
22065 스타리그 진출전 예선 저녁조 최종결과 [635] 초보랜덤10711 06/03/28 10711 0
22064 [잡담] 시대의 우울. [2] Bar Sur3661 06/03/28 3661 0
22063 여러분은 스타크래프트 업계와 관련된 스폰서 제품을 얼마나 사용하십니까? [56] Dizzy4500 06/03/28 4500 0
22062 [이상윤의 플래시백 4탄] 하나로통신배 투니버스 스타리그 16강 B조 기욤:유병옥 [2] 이상윤3624 06/03/28 3624 0
22061 브이를 위하여..(스포일러유~) [13] 여자예비역3685 06/03/28 3685 0
22058 스타리그 진출전 예선 오전조 최종 결과입니다 [232] lotte_giants9324 06/03/28 9324 0
22057 대구구장, 대형사고의 기미가 조금 씩 보인다. [55] 산적5006 06/03/28 5006 0
22055 어느 악플러의 일기. [38] 3887 06/03/28 3887 0
22054 온겜예선 조편성에 대해서 [11] 한인4726 06/03/28 4726 0
22052 이번 양방송사 예선 맵에 대한 짧은 생각 [34] 세이시로3601 06/03/28 3601 0
22051 24강 경기방식의 제안 [12] 갈구하는자3385 06/03/28 3385 0
22048 [잡담]누군가에게 쓴 연애편지 [4] 별마을사람들3457 06/03/27 3457 0
22047 건강히 다녀오겠습니다! [10] 황제팽귄3574 06/03/27 3574 0
22046 우리 나라는 의사나 변호사를 많이 늘려야 합니다. [153] 토스희망봉사6076 06/03/27 6076 0
22043 hyun5280의 Weekly Soccer News 0320 ~ 0327 #1 [18] hyun52803533 06/03/27 3533 0
22042 의사·변호사 현금영수증 발급 의무화 [189] sin_pam4561 06/03/27 4561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