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에 빠져 의리에 밝지 못한 허물일 뿐만 아니라, 정도전·남은 등도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에 만약 조정에서 간했더라면, 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정도전 같은 무리는 다만 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세자로 세우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였다"
최종적으로 내려진 교지입니다. 이게 이성계의 이름으로 나왔다는 것은 이 조선의 건국자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말 해 주죠. 대체 그 사이에 어떤 말들이 오갔을까요? 이방원은 대체 어떻게 이성계를 이렇게 만들 수 있었을까요?
실록에서는 이것을 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당연하죠. -_-a 이 시기 이성계의 몸은 확실히 안 좋았던 게 분명합니다.그가 반격을 꾀한 게 몇 년 후라는 건, 그 때쯤 가서는 몸이 회복되었다고 생각하면 되겠죠. 물론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은 것 같지만요. 야사에서는 이 때의 일들을 여러 예를 들어 설명하고는 있습니다만.
혹은 그래도 나라를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벌어질대로 벌어진 일, 자기가 그걸 부정하려 하면 더욱 큰 혼란에 빠져 버리니까요. 그래도 자기가 세운 나라니까요.
그 전후의 일들을 보면 대체 어떻게 참은 건지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거든요.
1. 몰살
이방원의 숙청은 계속됐습니다. 그는 오지 않은 왕족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명분을 더 확실히 하려 했고, 동시에 방번과 방석을 내보내기를 요구했습니다.
폐세자 된 이방석. 열일곱의 나이로 슬슬 어른의 모습이 보이던 그는 울면서 하직합니다.
"세자도 이미 그만두었으니, 네가 나간들 무슨 해가 있겠느냐"
이성계는 그리 말하며 그를 내보냅니다. 설마 설마 했을 겁니다만... 그는 나가자마자 목숨을 잃습니다.
한편 방번 역시 인사하고 나가는데, 이성계는 그에게도 "너는 먼 지방에 보내는 정도일 거다"면서 안심시킵니다. 헌데 동각잡기에는 묘한 말이 있군요.
"너한테는 편하게 되었구나"
그런 그를 보내면서 이방원은 이렇게 말 합니다.
"내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잘 가거라, 잘 가거라"
형들과는 어머니가 달랐고, 자기 대신 동생이 세자가 되는 걸 봐야 했던 이방번. 쿠테타에 협조하지도 일러바치지도 않았던 그 역시 이렇게 목숨을 잃습니다. 죽는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 외에도 이방원의 손길은 계속 뻗어 갔습니다. 남은은 도망갔다가 자진 출두해서 목숨을 잃었고, 변중량은 정도전 편을 들며 사병 혁파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죽였고, 이성계의 사위 이제도 자객을 보내 죽입니다. 결국 경순공주는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죠. 이성계가 직접 머리를 깎아 주었다고 합니다.
"대지가 뜨거워서 일월이 이글거리니, 들리는 우레 다만 하늘 한 쪽뿐이구나"
최항이 과거에서 지었다는 이 시는 이성계의 울분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어찌됐건 일은 벌어졌고, 이방과를 세자로 올린 다음 달에 바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의 자리로 갑니다. 권력에 환멸을 느꼈다고 하지만... 주변의 압박 때문이라고 봐야겠죠.
2. 공정왕의 시대
정종은 숙종 때까지 묘호도 받지 못 하고 명에서 내려준 공정왕으로만 불렸습니다. 안 됐긴 하지만, 그래도 본인이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거 같으니 별 상관 없을지도요. 아버지 이성계와 전장을 누빈 무장이자 효자로 당시에도 이성계의 회복을 빌기 위해 나가 있었습니다. 이방원이 그를 내세운 것은 적장자인 것 이외에 이런 것도 있는 거죠. 그래서인지 이성계도 정종 시절에는 딱히 뭘 하지 않았구요.
하지만 -_-a 어차피 주변 사람은 모두 이방원 편. 가령 왕의 측근에서 모시는 도승지가 이숙번이었으니 그들이 뭘 원했는지는 알 만 하죠. 그래도 아직은 별 움직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저질러 놓은 뒷처리를 했죠. 명과의 관계는 너무나도 쉽게 해결됐습니다. 주원장이 죽었거든요. 그것도 6월에.
... 뭐?
조선에 그 사실이 알려진 건 9월 말이지만요. -_-a 그 후에도 갈등은 계속 이어졌습니다만, 주원장이 살아 있을 때처럼 죽니사니 하는 정도는 아니었죠.
이 때 딱히 뭘 했다는 게 보이진 않습니다. 정도전의 난을 진압한 공이 있다 하여 정사공신이 만들어지고, 정종 1년 말에는 이방원 등 왕족들이 개국공신에 포함되는 정도죠. 이방원은 아직 보는 눈도 있고 이성계도 있으니, 거기다 일단 자기가 왕도 뭣도 아니니 가만 있었을 것이고, 정종은 자기가 임시라는 걸 아니까 대충 대충 했겠죠. 정종이 늘 즐겼던 건 격구(에 대한 설명은 검색하세요~), 그냥 뭐 하고 격구하고, 하지 말라 해도 격구하고, 좀 뛰어야 된다고 격구하고, 몸 나아졌으니까 격구하고 (...);;; 뭐 사실 그에게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겁니다.
헌데 이상한 건 1년이 넘도록 세자를 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에게 적자가 없었다는 것이 (서자는 많았대요 - -a) 별 부담 없이 왕으로 앉힌 이유인데 아무 말이 없으니... 이러다 덜컥 애라도 생겨 버리면? 0_0 큰 일 나는 거죠.
이방원 측의 걱정이 나타난 케이스가 있으니, 바로 남재의 돌출행동이었습니다.
"지금 곧 마땅히 정안공을 세워 세자로 삼아야 한다. 이 일은 늦출 수가 없다"
이 말을 왕한테도 들리게 크게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이방원 바로 옆에서요. 이방원이야 바로 혼냈지만, 글쎄요~~ 이방원 쪽에서 분위기를 만들려고 한 거일 수도 있고, 남재가 눈에 들려고 일부러 한 것일 수도 있죠. 그는 남은의 형, 일단 살아나긴 했지만 확실한 충성 서약이 필요했으니까요.
뭐 그런 걱정 안 해도 세자 문제를 확실히 정해야 될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2차 왕자의 난이죠.
3. 이방간
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방간. 뭐 왕이 자식이 없으니 고려 때처럼 동생이 이어야 된다면 셋째 이방의가 그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첫째 이방우처럼 딱히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 잘 하면 자기가 될 수도 있었죠. 그렇다면 꼭 제거해야 될 사람이 있었죠. 이방원, 이 일의 본질을 그라고 모를 리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 어디 논리적으로 되겠어요.
그를 충동질 했다는 사람이 박포입니다. 1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 편으로 병력을 통솔했지만 대우가 좋지 않았고, 그 때문에 불만을 터뜨리자 귀양 보내 버렸죠. 그런데 정신을 못 차리고 이방간을 충동질합니다. 일단 몸 조심하라고 떠 본 다음에 어찌 할까 하니까 이렇게 말 했죠.
"‘정안공은 군사가 강하고 모든 사람이 쫓는데, 공의 군사는 약하여 위태하기가 아침이슬과 같으니, 먼저 쳐서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뭐 이래저래 맘을 다잡은 그는 주변에 편을 모으는데 일단 아내도 말리고, 이내라는 사람도 말리고 처의 양아버지(에 환관) 강인부도 말렸죠. 이내는 고려 말의 정몽주파였던 우현보의 문하생이었는데, 스승에게 그 사실을 알리니 우현보가 바로 이방원에게 말 합니다. -_-a 일 참 잘 돌아가는군요. 아무리 형이라 해도 이방원 앞에서는 부처님 손바닥일 뿐...
정종 2년 1월 28일, 그는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병력을 모은 후 일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참 재밌죠.
자. 간만에...
형제를 너무나도 사랑했으며 피를 보기 싫어했던 정안공께서는 차마 형제에게 칼을 들이댈 수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맞서 싸우기를 거절합니다. ㅠ_ㅠ) 이어 사람을 보내 싸우지 말자고 했는데 방간 이 놈이 주사위는 던져졌다면서 그냥 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해서 주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다고 자위권의 발동일 뿐이라고 싸우자고 했는데 끝내 안 되겠답니다 아아 이 얼마나 뜨거운 형제애입니까 ㅠ_ㅠ)
안 되겠다 싶은 신덕왕후께서 마치 왕건에게 신혜왕후가 했던 것처럼 갑옷을 꺼내 입혀줬고 정안공께서는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모았죠. 그리고 당연한 절차를 따라서 임금에게 먼저 고합니다. 이에 정종이 하는 말...
"네가 군사를 버리고 혼자 대궐에 나오면, 내가 장차 보전하겠다"
... 하아?
한편 방간은 가는 중에 상왕 이성계에게 먼저 들렀는데, 그 때의 말이 참 재밌습니다.
"이 소 같은 놈아! 네가 방원이랑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 -_-a 이미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던 거죠. 그래도 굳세게 달려가는 방간, 한편 정안공께서는...
"만일 우리 형을 보거든 화살을 쏘지 말라. 어기는 자는 베겠다"
-_-a 아 예.
싸움은 너무 쉽게 끝납니다. 민무구 등이 이미 병력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숙번도 급히 달려와서 도왔죠. 완벽한 포위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방간의 병력은 지리멸렬합니다. 정안공께서는 그 군사들의 목숨도 걱정하시어 함부로 죽이지 못 하게 하셨죠 ㅠ_ㅠ) 권희달 등에게 도망가는 방간을 쫓게 하는데, 방간은 자기를 죽이러 오는 줄 알고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거기다 남의 말을 들어서 그랬다면서 남 핑계만 댔죠. 그래도 정종의 교지가 도착해서 삽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죠.
"방간이 비록 광패하나, 그 본심이 아니다. 반드시 간인에게 매수된 것이다"
너무도 쉽게 끝난 2차 왕자의 난, 그래도 이방간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성계도 정종 이방과도 이방원도 그를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궁에 피가 흐른 지 오래 안 됐기도 했고, 방번, 방석과는 다르게 그는 친형이었거든요. 대신에 모든 죄를 박포가 뒤집어 씁니다. 그래서 명칭도 박포의 난이었죠. 이방간은 귀양간 후 그래도 나름 대접 받다가 죽죠. 다만 그의 후손들은 왕족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 하는, 자칭 왕족 수준이었다고 하네요.
너무 허무하게 끝난 2차 왕자의 난, 하지만 덕분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4. 세제가 아닌 세자로
이방원파는 두 차례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정안공 이방원을 세자로 앉히자는 건의를 하고, 정종은 바로 들어줍니다. 아 여기서 잠깐, 세제 아니구요. 세자 맞습니다.
원래라면 세제가 돼야 했겠지만, 뭔가 다른 계산이 숨어 있었던 거죠. 이성계-이방원으로 이어지는 정통성 확립이요. 정종도 그에 대해 딱히 딴지 걸지 않고 자기 동생을 아들로 삼아 버립니다. 또한 군권 등을 모두 맡기면서 물러날 준비를 했죠.
이 때부터 이방원은 세자로 자기의 정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사병혁파였죠.
... 뭐? (2)
+) 고 김흥기씨의 명복을 다시 빕니다. (__)
이 일 역시 큰 반발을 받습니다. 특히 이방원을 도와 왕자의 난을 이끈 공신들의 반발은 엄청났죠. 사병을 숨기기도 했고, 조영무의 경우 아예 그걸 알리러 온 자를 두드려 패서 보내버립니다. 하지만 정종은 그대로 밉니다. 혼자 생각이었겠어요. 그에 대한 세자의 말이었습니다.
"간관의 말을 좇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식상으로는 대간의 건의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반발했던 이거이, 조영무 등은 지방으로 쫓겨나는 등의 벌을 받고 사병 혁파는 무사히 끝납니다. 이게 정도전과 다른 점이죠. 정도전은 재상 중심을 주장하며 사대부들을 앞에 내세우려 했지만 정작 다른 사대부들의 미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_-; 위인으로서의 존경 받는 정도전이라면 몰라도 현실 정치에서 정도전파는 적었던 거죠. 반면 이방원은 그런 사대부들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다루었습니다. 그 자신부터가 조선의 왕들 중 유일하게 관리 생활을 해 봤던 것도 있겠지만 정치력에서 큰 차이가 난 거죠. 그리고... 정도전이 그런 주장을 하면서도 왕 이성계의 지지를 등에 업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방원은 왕이었습니다. 밀본? 훗.
뭐 어차피 이성계나 이방원이나 사병 혁파를 한 이유는 똑같았죠. 다시는 자기와 같은 불행한 군인 혹은 왕족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거. 물론 후에 한 번 더 벌이집니다만.
이외에도 동북면 개척이라든지 별 존재감 없던 대간들과 다투고 싸우면서도 대간의 권위를 확실히 잡아 준 모습 등을 보면 정도전의 정책과 이방원의 정책이 뭐가 다른지 분간하기 힘듭니다. 사실상 이방원은 정도전의 설계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봐야죠.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일을 자기가 왕이 돼서 하고 싶다는 거였구요.
그 외에 다른 점이 있다면 재상 중심의 정도전과 왕 중심의 이방원일 겁니다. 이 점에서 이방원은 물러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뒤를 이은 세종대왕은 의정부 서사제를 하면서 재상의 권위를 올려줬죠. 다만 이건 세종 후반기로 과로에 지쳐 세자에게 양위까지 할 생각을 하는 상황에서 부담을 줄이기 위한 임시방편 수준이긴 했습니다.
사실 문종이 죽고 김종서 등 의정부에서 정권을 잡은 것은 이런 정도전의 생각이 그대로 이었다고 봐도 될 겁니다. 하지만 그걸 곧바로 깨뜨린 이가 있으니... 뭐 말 안 해도 알죠? 그는 당연히 6조 직계제로 돌아갔죠. 뭐 그 후에도 이리저리 엎치락뒤치락 하지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아무튼 정기준이나 중기세종이 지적한, 정도전을 죽였으니 뭔가 다른 정치를 할 줄 알았더니만 정도전의 정치 그대로 가더라... 이게 꼭 틀린 말은 아닌 거죠. 그 후에도 정도전은 일단은 역적이지만 존경할만한 유학자로 대접 받습니다.
정종 2년, 1400년 11월 12일에 정종은 마침내 세자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됩니다. 그렇게 피가 흐르던 시대에 어찌 보면 가장 인간적인 왕이었을 겁니다. 잠시나마 왕도 해 보고 어쨌든 누릴 건 다 누렸으니 그나마 복 된 삶이었겠죠.
이방원이 세자가 된 직후,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정종은 잔치에서 술을 먹으면 언제나 춤을 췄는데, 그 때 이런 일이 있었죠.
임금이 일어나서 춤을 추니, 세자가 취한 것이 심하여 임금의 허리를 붙잡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너의 진정이로구나!”
이방원으로서는 남은 형, 그것도 권력 욕심 없이 자기가 한 대로 따라 준 형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거겠죠. 그리고... 형제들을 죽이면서 가슴 속에 계속 응어리졌던 것들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구요. 울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용의 눈물에 이 장면이 있었는지는 기억 안 납니다만... 그냥 "퇴임 후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퍼포먼스였을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어쨌든 정종의 말대로 그의 진심이 드러난 부분일 겁니다.
에 뭐 셋째 형 방의도 아직 남아 있긴 했지만요 - -a
이렇게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왕위에 오른 이방원. 조선 전기의 주인공 태종의 정치가 시작된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큰 걱정 거리가 하나 있었으니...
5. 태상왕
이런 일련의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이성계는 여전히 풀이 죽은 채로 있었습니다. 정종이 그래도 신경을 잘 써서 시간이 흐르면서 호위병, 에 그러니까 감시병도 없어지고 여기저기 놀러다니기도 했죠. 그래도 가장 신경 썼던 것은 불사였습니다. 이런저런 비판이 없진 않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뭐 주로 했던 것은...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비는 거였죠.
목소리를 내 보려고 한 적은 있습니다. 왕자의 난 당시에는 목소리를 좀 크게 내서 방간이 죽지 않게 다짐 받았죠. 그 외에도 조영무 등을 내쫓으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나를 배반하고 [너에게] 붙은 놈들이니 또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는 거였죠. 뭘 원하고 했다기보다는 자기 아직 안 죽었다는 것이었겠습니다만... 일단 말을 들어서 내쫓자마자 문무백관이 다 나서서 복귀시키라고 요구하니 바로 돌려버리죠. -_-a 이거 참...
그나마 중간에 있던 정종이 사라지자 이성계의 돌출행동은 더 커집니다. 특히 불교 탄압이 강화되면서 계속 절을 찾는 이성계에 대한 비판도 거세졌죠. 그에 대한 이성계의 답입니다.
"그대들의 뜻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
그러면서 공중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고 하죠.
"우리들도 이미 서방 정토로 향하여 있다"
울분은 누르려 해도 커지기만 하고, 아들놈은 결국 자기가 원하는 왕위에 오른 상황... 이성계는 마침내 특단의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전면전이 시작된 거죠.
------------------------------------
용의 눈물 이방원 vs 정도전 설전 부분을 구했네요. 진작에 봤으면 좋았을텐데 ( ..)
외전으로 왕자의 난 이후 바뀐 조명 관계를 한 번 다뤄보려 합니다. 역시 중요한 건 태종-세종 대의 조공 문제겠죠? +_+)a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15 13:34)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