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2/02/09 03:16:51
Name 구텐베르크
Subject [일반] 글 잘 쓰는 사람 (수정됨)
저야 글을 잘 쓰는 것과는 거리가 있고요. 하지만 게임을 못 하더라도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게임을 누가 잘 하더라, 어떻게 해서 잘 하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기 마련이잖아요. 그 정도 느낌으로 써 보는 글입니다.

그리고 제 견해 또는 취향일 뿐이고, 절대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습니다.


글 잘 쓰게 되는 법이 하나 있습니다. 이 방법은 대부분의 경우 먹힙니다. 글의 목적이 무엇이 되더라도, 글의 장르가 무엇이 되더라도, 이 방법은 먹힙니다. 바로 '잘 쓴 글'을 자주 읽는 것입니다.

잘 쓴 글을 자주 접하는 좋은 방법은 '글 잘 쓰는 사람'을 알아낸 다음 그 사람의 글을 읽는 것입니다.

글을 쓰기 전에, 글을 고치기 전에, 글 잘 쓰는 사람의 글을 읽으면 그의 생각부터 그의 글투까지 내 글에 반영이 되는 것을 느낍니다. 내 글이 그의 글을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닮아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가급적 글을 잘 쓰는 사람의 글을 찾아 두었다가, 중요한 글을 쓰기 전에, 쓰는 중에, 쓰고 나서 읽어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되고 여력이 된다면요.

그러려면 글 잘 쓰는 사람이 누군지를 일단 알아야 합니다. 글을 두루 많이 읽으며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글 잘 쓰는 사람들 몇은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대사상가(great thinker)라고 할 만한 사람들의 글들은 대개 좋습니다. 사상 자체가 깊고 넓고 크고 분명하기 때문에 글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번역의 과정을 거치며 그 결과물은 아무래도 원문보다 나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사상 자체가 훌륭하기에 번역의 수모를 한 번 거치고 난 결과물도 여전히 훌륭하고 그래서 독자의 글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전(classic)의 저자들은 대부분 훌륭합니다. 고전은 '오래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살아 남았기' 때문에 고전입니다. 살아 남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개 고전은 당대에는 베스트셀러였고 현대에는 스테디 셀러입니다. 고전의 저자들은 거의가 다 글 잘 쓰는 사람입니다. 대사상가의 글을 읽고 고전의 저자들의 글을 읽는다고 해서 딱히 공부를 더 잘하게 되는지,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 부자가 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어떤 베스트셀러 작가는 그렇게 주장하지만요). 그러나 그들의 글을 읽고 나면 글은 잘 쓰게 된다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글 잘 쓰는 사람 몇 명이 있습니다. 

벽초 홍명희

과연 조선의 3대 천재입니다. 나머지 두 천재의 글은 안 읽어 봐서 모르는데 이 분은 천재 맞습니다. 한글을 쓰고 사는 사람이라면, '임꺽정'은 한 번 읽어 봐야 합니다. 저도 한 번 읽었는데, 기회가 오면 다시 읽을 겁니다.

벽초 선생이 임꺽정을 연재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일본 교도관이 임꺽정이 너무 재밌어서, 임꺽정을 계속 연재할 수 있도록 감옥에서 온갖 배려를 다 해줬다고 들었습니다. 실화든 아니든 그럴 법 합니다. 임꺽정에는 민족이 담겨 있으나, 민족을 초월해서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박식과 흡인력이 미덕입니다. 

대하소설은 박경리 선생과 조정래 선생을 꼽는데, 글 잘 쓰는 건 벽초 선생을 못 따르는 것 같습니다. 

김훈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만 읽었는데 특히 '남한산성'이 명문입니다. 남한산성은 주제 자체가 무력한 '말'과 '글'에 대한 고찰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김훈 선생은 말과 글의 무력함을 계속 성찰하는데, 정작 그의 단문들은 무력하지 않습니다. 단문과 리듬감이 미덕입니다. 남한산성은 거의 서너 달에 한 번 꼴로 생각 나서 펼쳐 봅니다.

이문열

이문열 선생도 진짜 글 잘 쓰십니다. '황제를 위하여'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이문열 삼국지와 이문열 수호지를 읽고 나서 '황제를 위하여'를 읽으면 페이지 마다 마다 포복절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수작인데 좀 과대 평가되었습니다. 

천명관

'고래'를 한 번 읽어봐야 합니다. 읽기 시작하면 죽 빨려 들어가 계속 읽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반대자들조차도 니체의 문장은 인정합니다. 신학자들도 니체로부터 영감을 얻습니다(큉). 생각 자체가 과감하고, 기발하고, 개성이 넘쳐서 글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번역이 실패하더라도, 원문이 천재적이니 반은 먹고 가는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는 그의 생각 중 가장 유명하지만 가장 식상한 생각입니다. 작품으로는 '비극의 탄생'과 '안티크리스트'가 훌륭합니다. '비극의 탄생'은 청년의 무모함이 톡톡 튀는 것이 인상적이고, '안티크리스트'는 사상이 무르익어 터진 것이 인상적입니다. 


관심 분야를 불문하고, 어떤 장르의 글, 어떤 목적의 글을 쓰려는 것인지 불문하고, 위 작가들의 글들은 읽어두면 글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 잘 쓰는 사람 하면 당장 생각 나는 사람들이 이렇습니다. 다른 생각나는 작가가 있으면 추가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도 부탁 드립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나혼자만레벨업
22/02/09 06:46
수정 아이콘
판타지 잘 쓰시는 분 : 과수원 주인...
Underwater
22/02/09 06:59
수정 아이콘
저는 건강해진 허지웅 추천합니다
특별한 것 없는 담백한 일상에 대한 글을 쓰는 것 같은데 문장 하나하나마다 빨려듭니다
22/02/09 07:02
수정 아이콘
고래가 재미난 소설이라는 것에는 저도 동의하지만 따라하기 쉬운 문체는 아니지 않나요? 크크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고래의 개성있는 문체를 생각하니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도 생각나네요
자가타이칸
22/02/09 07:03
수정 아이콘
글쟁이는 시인이 1타...
얼마전 pgr21에서 본 말
실제상황입니다
22/02/09 08:07
수정 아이콘
그런 의미에서 릴케 추천. 니체의 경우처럼 번역이 실패하더라도 원문이 천재적어서 반은 먹고 갑니다. 하긴 니체도 시인이네요
22/02/09 07:23
수정 아이콘
정비석 선생의 산정무한을 처음 읽고 '글빨의 극에 달한 사람'의 짬바를 느꼈더랬죠

김훈은 힙합에 비유하자면 리릭과 라임의 장인
이문열은 킹 오브 플로우
작고슬픈나무
22/02/09 07:56
수정 아이콘
이탈리아의 조반니노 과레스키, 한국의 성석제. 이 두 사람의 글이 참 닮고 싶은 글입니다. 한없이 유쾌하고, 가없이 따뜻합니다.
22/02/09 17:28
수정 아이콘
오.. 저도 동의합니다. 글 읽는 맛이 좋은 작가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야기도 재미있지요.
멋진신세계
22/02/09 07:58
수정 아이콘
이문열 선생님의 금시조라는 글이 개인적으로 참 좋더라구요. 언제 한 번 필사해볼까 했는데 말이죠. 좋은 글들 추천 감사드립니다!
송파사랑
22/02/09 08:46
수정 아이콘
홍명희는 동의하기 힘들구요.
김훈과 이문열이 최고입니다. 그래도 둘중에 한명이라면 이문열 꼽겠습니다.
RapidSilver
22/02/09 09:12
수정 아이콘
전 왜인지 모르겠지만 언뜻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동시대 러시아인이지만 상당히 상반된 스타일이고, 두 문호의 스타일 다 각자의 방법으로 매력적이지 않나 싶어요
원문 그대로의 느낌은 어떨까 상당히 궁금한 작가들이기도 하고요.
세인트루이스
22/02/09 10:42
수정 아이콘
이런게 참 아쉬우면서 궁금하죠 - 과연 러시아 원문으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AaronJudge99
22/02/09 11:13
수정 아이콘
진짜 궁금해요.....
22/02/09 21:38
수정 아이콘
몇주 전에 김지윤님의 지식play?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일리야님이 얘기했던게,
푸시킨이 위대한 이유가 러시아어로 읽으면 그 운율이 어마어마하다던데...
언어에 대한 아쉬움은 이런 데에서 오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진공묘유
22/02/09 09:44
수정 아이콘
저는 천명관은 좀...고래 원히트원더죠

그 고래도 자유로운 서사랑 기존에 한국문학에서 못본 차별성때문이지 김훈 이문열급은 아니라고 봅니다.

글 잘쓰는 사람보다는 글 낯설게 쓰는 사람이 더 어울릴거같군요
DavidVilla
22/02/09 10:31
수정 아이콘
언급해주신 작가들 중에선 김훈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번에 '자전거여행(1, 2권 합본이자 절판본)' 중고책도 구매해서 읽고 있는데, 역시 참 좋아요.
과거 '흑산'이 처음 나왔을 때는 문장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 권을 다 필사해버리기도 했었네요(무지하게 오래 걸렸지만..).
이쥴레이
22/02/09 10:37
수정 아이콘
저는 외국작가중 테드창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야기 전개나 짜임새등 단편선 글읽는 재미를 주는 작가중 가장 탑이라고 생각합니다.
조말론
22/02/09 10:40
수정 아이콘
이 분은 어떤 분을 보셨길래 볼 때마다 쉼표가 이리 많나 싶습니다 누가 레퍼런스신가요? 김훈 이문열 정도만 봤는데 글이 안이런데
부리뿌리
22/02/09 21:07
수정 아이콘
정말 그렇네요. 문장에 불필요한 쉼표가 많아서 거슬리네요.
대머리혐오자
22/02/11 13:14
수정 아이콘
두 분 참...... 그러다 대머리되세요...
이명준
22/02/09 12:10
수정 아이콘
저는 잘 쓴 글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잘쓴 글을 필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문학 작품 같은 것을 읽고 필사하는 것도 좋지만 간결한 컬럼같은 것을 필사하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길지 않은 글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문열 선생은 제게 글읽기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해 주신 분인데
저는 이 분의 작품 가운데 금시조가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생각이나 세계관(?)이 잘 정리 된 작품인 것 같고 내용도 좋아서요
김홍기
22/02/09 12:47
수정 아이콘
박경리는 어떤가요? 분명 김훈과 이문열 스타일과는 다른 것 같긴 하지만요.
-이상 토지 1권 읽다가 2번 포기한 사람-
아파테이아
22/02/09 13:22
수정 아이콘
유시민, 공지영. 둘다 정치와 관련이 없으면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22/02/09 14:17
수정 아이콘
유시민이 진짜 글 잘 쓰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그러므로 집필 활동만 열심히 해주셨으면...
노둣돌
22/02/10 10:52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은 좋은 사상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그 사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정치입니다.
성격미남
22/02/09 14:35
수정 아이콘
저는 피지알에 신불해님 역사이야기가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라흐마니
22/02/09 18:34
수정 아이콘
김훈 이문열 너무나 좋아합니다. 거기에 덧붙어 <무진기행> <서울1964년겨울>의 작가인 '김승옥'을 추가하고 싶군요
캡틴에이헙
22/02/10 21:19
수정 아이콘
황제를 위하여 저도 수작으로 꼽는데 의외로 여기에 공감하는 분이 안 계시군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7745 [일반] <정이> 안 가네 이 영화... [43] 마스터충달15210 23/01/21 15210 8
96673 [일반] 책 후기 - "흑뢰성" [27] v.Serum9165 22/09/25 9165 4
96668 [일반] 8년간의 추억을 쌓아왔던 그녀의 이야기. [10] 펠릭스10826 22/09/24 10826 3
96563 [일반] '내가 제국을 무너트려줄게': 아즈텍 멸망사 상편 [36] Farce13631 22/09/13 13631 104
95840 [일반] 웹툰화된 웹소설, 그 중에서 괜찮않던 것과 아닌 것! < 약간의 스포주의! > [80] 가브라멜렉9485 22/06/20 9485 3
95745 [일반] 요즘 본 애니 후기 [20] 그때가언제라도7853 22/06/04 7853 1
95670 [일반] 둥지를 폭파하라[Broken Nest] [14] singularian9163 22/05/21 9163 10
95640 [일반] 나른한 오후에는 드뷔시 음악을 들어봅시다 [18] Ellun8380 22/05/17 8380 19
95636 [일반] 다이어트 도합 200Kg이상 경력의 다이어트 썰 -1 - [7] Lord Be Goja6031 22/05/17 6031 3
95542 [일반] [15] 장좌 불와 [32] 일신6370 22/05/03 6370 33
95371 [일반] 망글로 써 보는 게임회사 경험담(8) [28] 공염불7711 22/04/06 7711 28
95226 [일반] 삼국(三國)을 봤습니다 - (3) 유비 [21] 라울리스타7175 22/03/10 7175 9
95058 [일반] 삼국(三國)을 봤습니다 - (2) 조조 [11] 라울리스타7983 22/02/17 7983 6
95003 [일반] 글 잘 쓰는 사람 [28] 구텐베르크9476 22/02/09 9476 11
94958 [일반] 삼국(三國)을 봤습니다 - (1) [13] 라울리스타7657 22/02/03 7657 4
94951 [일반] 고독 속의 평온, 쓸쓸하면서도 홀가분해지는 감성의 노래들 [8] 라쇼10628 22/02/02 10628 7
94947 [일반]  대체 왜 우회 안하고 구태여 공성전하는 건데? (feat.건들건들) [65] 아스라이13356 22/02/02 13356 16
94767 [일반] 피를 마시는 의식을 알아봅시다 [21] 식별10416 22/01/08 10416 11
94547 [일반] 마법소녀물의 역사 (1) 70년대의 마법소녀 [8] 라쇼15160 21/12/26 15160 15
94544 [일반] 국익관점에서 바라본 시사 평론 [10] singularian10904 21/12/26 10904 0
94442 [일반] pgr 삼촌의 제이팝 추천곡 제2탄 [17] 라쇼13623 21/12/19 13623 8
94251 [일반] 한국은 오래전부터 인재관리 선진국이었다. [17] singularian13130 21/12/03 13130 6
93941 [일반] 일본 중의원 선거에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들 [78] 이그나티우스12467 21/11/03 12467 9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