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0/08/24 18:02:51
Name 알테마
Subject [일반] 조조와 원소를 가르는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이전의 성격 글에서 조금 더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삼국지를 조금씩 파기 시작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관도대전이 클라이막스' 라고요.

농경민족에게 있어서 힘(국력)이란 차지한 농토와 생산력에서 나옵니다. 중국의 곡창지대는 강남이지만 나중이야기죠. 이땐 똥땅이었습니다.

당시의 꿀땅은 인구와 농토가 뒷받침된 화북지방이었습니다. 결국 꿀땅을 다 차지한 놈이 최종승리자가 되는 구도입니다. 관도대전 미만잡 소리도 그래서 나오는거죠.

그런데 원소는 꿀땅을 더 많이 차지한 상태에서 왜 조조한테 급하게 승부를 걸었을까요?

전풍은 왜 지구전 제안을 했다가 뚝배기가 날아갈 뻔 했을까요? 원담-원상 교통정리는 왜 깔끔하지 못했을까요?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6년상 이후 원소는 청류의 아이돌이 되면서 탁류인 여남원씨 본가와는 척을 지게 됩니다. 원술과의 관계도 이때쯤 루비콘 강을 건넌 것으로 보이구요.

원소는 명성이 있었지만 실체적 권력이 부족했습니다. 원가의 지원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기에, 그는 내조 관직을 버리고 외조의 하진 밑으로 들어갑니다.

신세계의 정청-이자성처럼 원소는 하진의 러닝메이트가 되어 청류파의 중심을 세우죠. 그런데 중요한 부분에서 하진-원소는 맞질 않았습니다.

원소는 십상시 및 환관에 대한 강경파였습니다. 후한이 바로서기 위해 걔네들 뚝배기를 모조리 깨야 한다고 주장했죠.

하진은 언젠가 환관을 날려버려야 한다는 것엔 공감했지만 포지션상 미적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대뜸 암살당했죠.(이건은 십상시의 100% 무리수입니다)

하진 사후 원소는 휘하의 병력들을 본인이 수습하고자 했으나 그럴만한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나머지 하씨 일족들은 오히려 수도의 정예병력을 동탁에게 맡깁니다.

무능한 하씨 일족의 결말은 동탁에 의한 씨몰살 밖에 없었습니다. 원소는 조정에 남아 동탁과 대립각을 세우다 낙향합니다. 그리고 반동탁연합을 일으킵니다.

유우를 옹립하고자 한 진심을 알 길은 없으나, 적어도 동탁같은 마인드는 아니었을 거라 판단됩니다. 능력과 명성을 모두 가진 황족 유우가 헌제처럼 꼭두각시가 되는 상상은 하기 힘드니까요.

협천자의 기회가 왔을 때, 이에 반응한 것은 원소가 아니라 조조와 원술입니다. 그리고 원소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요?

생각건대 이들을 가르는 차이는 '군주가 무슨 짓거릴 해도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는 '친족기반의 보위집단' 유무입니다.

헌제가 동탁이 세운 꼭두각시 황제라고 해도 천자입니다. 천하의 가장 크고 올바른 명분이죠. 협천자는 어쨌거나 정당한 천자 밑에 신하로서 신종하는 형태입니다.

이는 가신들이 바치는 충성의 방향이 자신에서 천자로 바뀔 수 있는 리스크를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조는 알다시피 조씨-하후씨의 능력있는 친족집단이 있었습니다. 원술은 원씨 본가와 사돈인 홍농 양씨도 있구요.

원소에겐 혈족이라곤 아들 셋(그나마도 원상은 아직 잼민이), 그리고 누이의 아들 둘(고유, 고간) 정도 뿐입니다. 완벽주의자 원소의 성향상 협천자는 너무나 하이 리스크처럼 느껴졌을 겁니다.(공손찬 정리에 시간을 너무 쓴것도 한 몫)

힘들게 공손찬을 정리했는데, 조조가 천자를 모시고 '정규 중앙 정부'를 구성해 버렸습니다. 정규 정부가 성립된 시점에서 '충신을 자처하던 군벌'들의 선택지는 좁아집니다.

원술이 정말 현실감각이라곤 1도 없는 꿀물밖에 모르는 바보라서 칭제건원을 했을까요?

제 생각엔 아닙니다. 조조가 버젓이 천자를 모시고 정부를 구성했는데, 명분없이 조조와 싸울 순 없습니다. 천자를 빼내올 순 없으니 스스로 천자가 되어 명분을 확보한 것이죠.(물론 무리수였습니다)

원소와 전풍의 판단이 갈리는 것도 결국 이 지점입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조조를 제외한 군벌의 자립 명분은 약해집니다.

빅브라더 사회도 아니고 명분없는 군주에겐 끝없는 이반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정치괴물 원소도 이를 알았을 겁니다.

전풍의 워딩을 정확히 해석하면 '조조가 천자를 잘모시는지 천천히 확인해보고, 진짜 역적놈이면 그때 싸우자' 쯤 됩니다.

기주 호족 출신 전풍과 별다른 기반이 없는 원소는 그 이해관계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렇기에 원소는 전풍의 충심을 의심하게 됐겠죠.

전풍의 제안은 조조의 강동 정벌 때 장소가 손권에게 올린 주화론과 그 뜻이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원소와 손권 둘다 대응은 동일했습니다. 사실 조조가 나쁜놈이야라고 공표하고 전쟁에 돌입했죠.(손권은 모자란 명분을 채우고자 유황숙을 끌어들입니다)

관도대전에서 백도어 역전패를 당한 원소는 창정에서 다시 한타를 걸었지만 조조에게 패배합니다. 그리고 반란군들 잡으러 하북 순회공연하고 급사합니다.

이제 하북의 주인 자리를 놓고 원담과 원상이 싸웁니다. 원소는 아들사랑 때문에 교통정리를 제대로 안한 우유부단한 인간일까요?

원소의 생애를 볼때 그는 쏘시오패스 같은 인물에 가깝지 내 아들에겐 따뜻한 남자 같진 않습니다.

앞서도 적었다시피 원소는 자신을 보위할 친족집단이 없습니다. 그래서 군재가 있는 혈족 원담을 그냥 날려버릴 순 없었습니다.

대신에 호적에서 파버리고 원상이 후계자임을 진작에 공표했죠.(살아있을 땐 원소의 권위가 대단했다는 의미)

유표 역시 친족집단이 없었는데, 그는 현지 호족들과(채씨, 황씨, 괴씨) 손잡고 연립정권을 세우죠. 하지만 원소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번쓰고 숙청하고를 반복하는 일회용품 매니아였습니다.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호족에게 관대했던 조조와는 정반대죠.

유표는 말년에 채씨에게 먹혀 허수아비가 되어버렸고, 원소는 죽어서 그 제왕적 리더십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원소의 수명이 길었으면 별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신하들의 균형을 맞추고, 권력이 하나로 모이게 하는 정치의 달인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의 수명은, 얼자 태생이라는 한계를(이로 인한 친족집단 부재) 극복하기에 조금 부족했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시나브로
20/08/24 18:11
수정 아이콘
아래 글, 댓글들도 그렇고 행적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20/08/24 18:18
수정 아이콘
수명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역시 수명 이야기가 나오네요 크크크
체르마트
20/08/24 18:27
수정 아이콘
하기사
대 공손찬전 핵심 병기였던 국의도 실제로는 원소한테 개기다가 쫑났다고 그러고
전풍, 저수, 심배, 곽도, 봉기 등등도 한 가문의 대표이지
원소의 집안 사람은 아니었죠.

하후돈 대장군 필연설이 근 몇년간 회자 되었는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원소는 대장군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네요.

(잠시 고간을 생각해봤는데
고간도 조카라는 점에서 대장군으로 세우기에는 좀 급이 안 맞네요)
알테마
20/08/24 18:42
수정 아이콘
직책상으론 감군 저수가 대장군 비스무리하긴 했습니다. 한복 휘하의 명망있던 호족중에서 유일하게 숙청 안당하고 중용받았죠.

(전풍 등은 오히려 급이 애매해서 살아남았을 거로 추정됩니다)

그만큼 저수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도 되지만, 원소의 신뢰가 부족했기에 조조 진영의 하후돈 같은 역할은 못했죠.

원소는 아마도 원상이 장성하면 이런 역할을 맡기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마 원소의 믿을맨들은 기주 출신보단 하내, 영천계일텐데 그 중 허유가 배신했죠. 친구이자 파트너였던 조조도 독립(사실상 배신)했고요.
띵호와
20/08/24 19:04
수정 아이콘
조조는 맘에 드는 자기 사람들한테는 정말 다 퍼주었지만 대외적으로 확고한 나쁜놈 이미지가 있었고
원소는 대외적인 이미지는 좋지만 정작 자기 사람들한테는 마음을 주지 않고 늘 의심했다고 볼 수도 있을까요?
알테마
20/08/24 19:16
수정 아이콘
그런 느낌으로 보셔도 얼추 맞습니다. 조조는 자신의 친족들로 주변을 통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구요.

원소는 자의반타의반 유가적 철인군주의 삶을 살면서 아무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았죠. 리스크와 평판관리에 민감한 CEO 같은 모습이 보입니다.
VictoryFood
20/08/24 21:17
수정 아이콘
원소는 협천자를 안한게 아니라 못한 거 있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유우를 천자로 옹립하겠다고 한 순간 헌제를 천자로 인정하지 않은 거니까요.
고기반찬
20/08/25 07:11
수정 아이콘
역경 테마파크의 스노우볼...
20/08/25 19:33
수정 아이콘
그냥 수명이 길지 않았다고 느낀거 같네요.. 실제로도 전쟁 후 바로 죽었고요
승자의 기록이니 원소의 단점과 조조의 장점이 부각되지만 그냥 원소가 10년만 더 살았으면 그깟 조조 아닐까요?
꺄르르뭥미
20/08/25 22:18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다른 것도 많은 삽질이 있지만 원상을 세우면서 원담을 처리 안한건 100% 삽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친족호위집단이라고 생각하면 이해는 되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8787 [정치] 동양인의 열등감 [86] antidote17079 20/11/16 17079 0
88675 [일반] 개인적으로 문혁으로 중국 문화가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 [61] 성아연13120 20/11/06 13120 22
88447 [일반] [삼국지]촉한멸망전에 비해 오 멸망전의 인식이 떨어지는 이유 [26] 성아연11620 20/10/20 11620 24
88360 [일반] 중학생때 친구 누나의 xx를 봐버린 썰.ssul [30] 위버멘쉬25081 20/10/11 25081 34
88327 [일반] [삼국지]사마의는 삼국시대 인물 가운데 한국에 가장 도움이 된 인물입니다 [15] 서현1210253 20/10/08 10253 5
88249 [일반] 병원에서 지내는 추석명절 이야기 [10] 한국화약주식회사9548 20/09/29 9548 19
88233 [일반] 왜 나의 코미디는 웃기지 못하는 걸까(feat. 영화 '조커'의 아서 플렉) [8] 치열하게10535 20/09/27 10535 2
88189 [일반] 점점 병원의 지박령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58] 한국화약주식회사12461 20/09/23 12461 42
87858 [일반] 현대세계를 관통하는 2가지 : 세계체제 그리고 초양극화 [55] 아리쑤리랑58663 20/08/29 58663 72
87770 [일반] 조조와 원소를 가르는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10] 알테마7187 20/08/24 7187 11
87760 [일반] 실제로 조조와 원소는 어떤 성격이었을까? [57] 알테마11778 20/08/23 11778 4
87689 [일반] [삼국지 떡밥] 유비의 인사 배치로 관우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51] 꺄르르뭥미10335 20/08/18 10335 0
87365 [정치] 5명중 네명이 문재인 대통령을 찍었습니다. [385] 펠릭스30세(무직)23844 20/07/25 23844 0
87275 [일반] 펌) 당신의 원픽을 정하라! 독갤듀스 101 [26] 치열하게11983 20/07/17 11983 1
87241 [일반] 너무 뻔해서 실망한 젠2 XT 시리즈 성능 [30] 토니파커8646 20/07/14 8646 0
87207 [일반]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을 추억하며, 80 ~ 90년대 홍콩영화 노래 모음 [36] 라쇼14139 20/07/12 14139 8
87192 [일반] 이엄 자 정방, 하지 말아야 할 정도를 넘다 [7] 서현128150 20/07/11 8150 3
87078 [일반] 후경의난 완결. [8] Love&Hate12600 20/07/05 12600 24
87055 [일반] [삼국지] 제갈량의 5차 북벌 후반부 썰 풀기 [10] 서현128263 20/07/03 8263 12
87054 [일반] 을지문덕이 선비족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 부족 울지부. [7] Love&Hate13223 20/07/03 13223 24
87048 [일반] 우리 오빠 이야기 [39] 달달한고양이9209 20/07/03 9209 63
87041 [일반] [삼국지] 제갈량의 5차 북벌 초반부 정리 [7] 서현128181 20/07/03 8181 5
87028 [일반] [삼국지]제갈량이 굳이 마속을 가정에 보낸 이유 [24] 서현1211230 20/07/02 11230 1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