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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6/03 01:02:35
Name Bar Sur
Subject [잡담] 30, 그리고 04.


  스타와 관계없는(언제나 그랬지만.) 순수 개인 잡담입니다. 양해를 구하며, 언제나 쓸데없이 길기만한 제 글들을 소중한 시간 들여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이 자리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언제부턴가 조회수나 댓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어버려서 어떤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셨는지까지는 제가 잘 알지 못하겠군요. 그 분들께는,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길다면 꽤 긴 시간 pgr에 개인 본위적인 글들만을 쓰면서 느낀 것들이지만 아마추어로서 커뮤니티의 범주를 일부러 빗겨나가 이곳에 목적 불명의 글을 적는 것은 분명 개인적인 취미입니다만, 실제로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배우곤 한다는 점입니다. 분명 저와 비슷한 목적을 가진 분들이 많은 그런 성향의 커뮤니티를 일부러 찾아가면 격렬한 토론이나 색다른 의견교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분명 장단이 다를 것입니다. 아무튼 묘하게도 후자쪽은 싫더군요.

  이를테면 저는 언제나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사람이라, 어디까지 혼자서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마 글을 쓰는 데 있어서 타인이 지향하는 자세와 논리를 내 글에 적용할 일은 없을 듯 합니다. 만약 '좋은 소설'을 쓰는 데 정론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애초에 개인에게는 소설을 쓸 필요도 효용도 없는 겁니다. 머리 좋은 친구들을 모아서 교과서처럼 찍어내면 그만 일 것입니다.(이건 극단적인 예지만) 나 자신이 필요에 의해 남에게서 훔쳐갈 지언정, 남이 준 것을 고만고만하게 타협하고 받는 것은 딱 질색입니다. 굉장히 편협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최근 가장 납득하고 있는 것은, 세계는 언제나 개방되어있지만, 세상 누구나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건 말입니다, 예전에는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인정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지금은 고개를 끄덕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실상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데, 남들의 무신경함에 혼자서 좌절을 먹는다면 그것처럼 코미디가 없지 않겠습니까?

  조금은 어른이 된 건지도 모르고, 조금은 이전처럼 순수하게 열정적이지는 않은 걸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겨우 전진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것 같습니다. 물론 철저하게 개인본위의 기준에서.

  나만의 확고한 우주 속에서 헤메일 지언정, 준비가 되었는데 출발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해도 괜히 멋부리는 말이지만.

  장편, 이제는 숭고하게까지 들리는 군요. 지독하게 물린 경험이 있어서인지 반년 간 엄두가 안나던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실 그렇게 준비가 철저한 것도 아니고, 계기라고 할 만한 것도 우연찮은 것이었지만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영영 친해지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곧 시험 기간이라는 것도 망각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리고 소수의 '토막'과 에세이의 독자분들께는 양해를 구하면서, 그래도 가끔씩은 찾아뵐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토막은....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런 류의 짧은 글은 심심할 때마다 끄적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도 자주 올릴 수 있을 것도 같네요.(결코 잘난 척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그런 토막들이 모이고 모여서 큰 범주를 이루기도 하고, 그 범주 속에서 다시 새 토막들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말이죠. 이를테면 나무만 있으면 언제든지 잘라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아래는, 꽤 무거운 마음으로 적은 가제:<30, 04>의 서두와 짧은 스케치들. 실제로 어둠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지금의 심정입니다만, 이번에는 완벽하게 마무리를 짓고 다시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30, 04-



  2004년, 고양이와 비둘기는 내 곁을 떠났고, 그 날은 내 30세 생일이었다.  
  나는 빌리 홀리데이를 듣다가 거리로 뛰쳐나왔고, 그 거미줄 같은 밤의 통로 위에서부터 나와 검은 늑대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밤의 정적 속에서 문득 이명이 일어났다. 고개를 치켜든 내 앞에는 가로등 하나만이 빛을 밝히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거리 위에 멈추어 서서 무언가를 줄곧 망설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왜 멈추어 서있는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조각난 기억들이 나방의 분가루처럼 허공에서 점멸한다. 머리가 잘 회전하지 않는다. 감각이 이미지를 따라가지 못한다. 분명 나를 무겁게 억누르는 농밀한 어둠이 피부와 두개골을 잠식해 들어가 뇌세포 속 산소까지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내가 망설이고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이다.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내 망설임은 연기처럼 솟아올라 가로등 불빛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고, 그 아래로 잉크공장의 그을음처럼 물들은 내 그림자는 그 망설임을 응시하며 침묵하고 있다.

  치익――. 저절로 타버린 담배 끝이 비에 젖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작은 담뱃재가 땅에 닿는 순간 그 속성 자체가 변질되어 번져나가듯 주변의 그을음이 늘어났다. 그러나 내 그림자는 나와는 달라서 조금 더 과묵하고 조금 더 인자했다. 그는 늘어난 그을음에 노여워하지도 나를 책망하지도 않는다. 다만 천천히 담배를 끌어다가 물고 다시 한 번 길게 연기를 뿜어낼 뿐이다.

  가로등 불빛의 각도가 미묘하게 변한 것을 느낀다. 지금은 한쪽의 어둠이 아슬아슬하게 발끝에 걸려있다. 다음 순간, 손끝이 간지러워졌다. 관자놀이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허기가 날카롭게 위장을 난도질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간지럽던 오른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가볍게 주무르다 와이셔츠와 양복을 위로 위치를 옮겨 살짝 복부를 매만졌다. 감각의 전선 가운데 둘, 셋쯤이 날카로운 도구로 단선되어버린 듯한 서늘함이 감돈다. 이정도로 공복에 잠기면 위장이 한바탕 요동을 칠만도 한데 오히려 전연 기능하지 않는 것처럼 잠잠하다. 지금은 위장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조차 힘겹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던 일도, 가끔은 ‘그런 건 쓸데없는 짓이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다.

  콧수염에 살짝 묻은 물기에서 흙냄새가 났다. 담배를 끼고 있는 왼손 검지로 쓱쓱 문질렀더니 스킨로션, 니코틴 냄새 분자까지 혼탁하게 뒤섞이며 아련한 뒤끝만을 남기고 어둠의 입자 속으로 춤을 추듯 미동하면서 스며들었다. 아무런 의식도 개념도 담지 않고, 그저 능숙한 움직임으로 춤을 추며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리 어둠 속을 응시해도 그것들을 다시 찾아낼 수는 없다. 높다란 철벽을 향해 질주해간 젊음처럼 다시는 여기로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거리의 불빛이라고는 오로지 가로등의 그것뿐이다. 흔한 네온 광고판도, 심지어 모텔이나 24시간 편의점의 간판 불빛조차 보이질 않는다. 가로등은 1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띄엄띄엄 설치되어있었지만 불빛을 비추는 타원형의 범주가 지나치게 협소하고 주변의 어둠과의 경계가 한 치의 등질공간조차 없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그 안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 허공에 얇은 벽 같은 것이 있고 나 자신이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불빛 너머로 살짝 빠져나간 왼쪽 구두 만질만질한 끝부분의 가죽위로 희끗희끗 위태로움이 출몰했다 사라진다. 그러나 여인의 가늘고 새하얀 손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위태로움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 식의 위태로움이었다.



  나는 확인했다. 총알을 확인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녀는 사라졌다고.
  그녀는 사라졌다.
  그녀는 사라졌다.
  그녀는 사라졌고, 나는 남아서 이 어두운 골목 위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망설임을 거듭했다. 그래서 결론은 나왔나?



  나는 그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골목을 벗어나야한다. 아니면 골목을 먼저 벗어나고, 그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대체 어느 것부터 해야 하는가.

  나는 자신이 없었다. 이 골목을 벗어나고 나서 그녀에 대해서 올바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비틀즈를 통해 1960년대를 회상한다는 이들이 있다. 쓸데없는 짓이다. 아무리 비틀즈를 들어도 1960년대는 되살아나지도, 그들의 기억보다 아름다워지지도 않는다. 하긴 비틀즈는 괜찮은 편이다. 그들은 ‘1960년대의 비틀즈’가 아닌 현대의 비틀즈이니까. 정말 슬퍼해야 할 자들은 언제나 ‘1960년대의’와 함께 기억되고 훈장처럼 그것을 붙여야만 그 실존이 증명되는 누군가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었다. “당신은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 60년대의 자신을 애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는 그 자신의 바람대로 더 이상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지만, 나는 약간 후회하고 있다. 좀 더 심한 말을 해 줄걸 그랬어.

  그들에게 출구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수많은 출구를 통해 나갔다가 결국에는 이곳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런 이야기. 근본적으로 무언가가 변했지만, 무엇이 달라졌는지, 본인조차 알지 못하는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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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루시아
04/06/03 07:34
수정 아이콘
굉장합니다.
좋은 문장을 쓰시네요.

서두에 언급하신 "개방"을 타인에게 바라는 것과 편협한 자신과는 괴리가 있어 보입니다만...

아무튼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soundofsilence
04/06/03 09:11
수정 아이콘
왕가위의 영화를 보는 듯 합니다.
밀레이유부케
04/06/03 23:48
수정 아이콘
전에도 느낀 거지만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 ^^
Return Of The N.ex.T
04/06/04 00:17
수정 아이콘
뭔가.. 새로운 곳으로 가는듯한 기분..
전 작가에 관해서는 잘 몰라서.. 말씀드리기 미안하네요..^^
책좀 많이 읽어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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